|
05
“ 겨우 이런걸로 밖에 못쓰나? ”
“ 전 잘썼다고 생각해요. ”
뭐가 어떠냐는 표정으로 에릭을 바라보던 이안은 이내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집무실에 도착하자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더니 보자마자 끌고가 식탁 앞에 앉힌 그녀였다. 그리고선 그녀가 자랑스럽게 뱉은 말에 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 매일 같이 식사하는게 어려운것도 아니잖아요? ”
“ 어려워. ”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하더니 그도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로 별 것 아닌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지키기 힘든 것이었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에 식사를 할 여유가 있을리 없었다.
“ 노력은 해보지. ”
아침식사가 끝나고 곧바로 집무실로 향한 에릭이 의자에 앉자마자 미티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요즘 북쪽숲에서 살인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는데 범인이 좀처럼 잡히질 않아 놓치기 일쑤였다. 정찰도 그 때문에 직접 나섰던 것이었는데 수확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고아 출신을 왕비로 인정할 수 없다며 귀족가의 반발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처음엔 초대장을 보내는척 하면서 불평불만을 내용을 보내더니 문을 열어주지 않자 능력을 써서 부수고서라도 들어오려고 해서 참다 못한 에릭이 '말로할때 조용히 있으라' 며 무서운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그나마 잠잠해진 상태였다. 이러니 끼니를 거르는건 기본이고 매일밤을 샐 수 밖에 없던 것이었다.
“ 목격자가 늘어나고 있으니 곧 잡힐겁니다. 그러니 좀 쉬세요. ”
미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에릭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의자에서 일어나 그나마 몸을 뉘일 수 있는 소파로 다가가 쓰러지듯 누웠다. 책상위를 대충 정리한 미티가 집무실을 나가려다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퀸 디에타님이 혼자 식사하기 싫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런 티나는 거짓말을 하시다니. ”
“ 거짓말이라니? ”
감고 있던 눈을 뜨며 그가 대답했다. 소파쪽으로 걸어온 미티는 정말 모르냐는듯 에릭을 쳐다보더니 이내 하하- 거리며 웃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진 에릭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 웃지말고 말해. 뭔데? ”
“ 이미 눈치채고 있으신 줄 알았는데, 둔해지셨어요. ”
“ 그러니까 뭐냐고. ”
“ 마스터가 걱정이 되어서 돌려 말한거 아니겠어요? ”
그렇게 말한 미티가 나가고 설마 하던 그가 하- 하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다시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건지. ”
피의 신데렐라
그에게 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후 일주일이 지나고 날짜가 예정보다 좀 늦춰지긴 했으나 짐사회담날이 돌아왔다. 1년에 세번, 10개국의 집사들이 모여 각 나라의 왕을 대신해 말을 전하고 나라간의 의견을 조율하며 협의하여 맞춰가는 일을 주로 하는 날이었다. 중요한 날이라 불참은 불가하기 때문에 미티 역시 갈 수 밖에 없었다.
“ 일주일이나 걸려요? ”
“ 회담은 이틀하는데, 왕복 5일이 걸리니까요. ”
“ 그럼 수업은 어떻게 해요? ”
“ 조금 있으면 제 대신 해주실 분이 도착할거에요. ”
이미 미티의 짐은 다 챙긴 상태였다. 짐이랄것도 없는게 고작 서류더미들이 전부였다. 광장 한 가운데에서 대화를 하고 있던 두사람은 한동안 열린 적이 드문 거대한 광장문이 열리자 고개를 돌렸다. 누가봐도 귀족가문의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겉모습은 물론이고 행동이나 시선이나 모든것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티가 빠른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 오셨습니까, 에나님. ”
“ 일주일동안 고생하겠어요. ”
“ 이젠 적응이 되어서요. 이 분이 퀸 디에타님 이십니다. ”
사뿐사뿐 이안의 앞으로 걸어온 에나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고 청순하며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활짝 미소지으며 정중히 인사를 하자 당황한 이안이 서둘러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 봽게 되어 영광입니다. 퀸 디에타님. ”
“ 저도 반가워요. ”
“ 퀸께서 존대어를 쓰시니 적응이 안되네요. ”
“ 노력은 하는데 입에 붙어버려서.. ”
“ 차차 고치면 되지요. 그럼 마스터를 뵈러 가볼까요? ”
이안을 향해 방긋 웃어보이는 에나를 보며 미티는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하지만 에릭이 한 결정에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걱정어린 한숨을 쉬었다.
“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에나님 잘 부탁드립니다. ”
“ 걱정말고 잘 다녀와요. ”
“ 조심히 다녀와요. ”
그렇게 광장 밖으로 나가는 미티를 바라보다 어느새 벌써 앞질러 걸어간 에나를 따라 집무실에 도착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그는 세이즈와 함께 있었다. 에나를 발견한 세이즈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 세이즈,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반갑네요. ”
두 사람을 지나치는 세이즈에게 에나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그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 별로. ”
그렇게 말한 그가 옆에 있던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나가버렸다. 두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걸 알게 된 이안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한 두번 있던 일이 아닌듯 에나는 태연하게 에릭을 향해 인사를 하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 자주 들러서 몰랐는데, 오랜만에 오니 새삼 새롭네요. ”
“ 새로울것도 없어. 변한게 없으니. ”
자주 들렀었다는 말이 이안은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의 반응은 무덤덤 그자체였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늦어진 수업을 하기 위해 이안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돌아보며 구경하던 에나는 침대에 살포시 걸터앉아 가만히 쳐다보더니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 앞으로 재미있는 수업이 될거에요. 퀸 디에타님이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는데 그녀가 가르친지 3일째가 되는 날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다른날에 비해 아침부터 기분이 영 좋아보이지 않았던 에나는 수업하기 싫은 티를 팍팍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안이 몇번 돌아가는걸 권했지만 그때마다 대답은 커녕 춤을 연습하고 있던 그녀에게 '다시' 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에나가 온 첫날에도 춤부터 연습을 시키더니 이게 그녀가 말한 '재미있는 수업' 인건지 툭하면 그녀의 입에선 '다시' 라는 말이 나왔다.
“ 아무래도 돌아가서 쉬는게.. ”
“ 괜찮다고 몇번을 말해! ”
어깨에 손을 올리자 에나가 신경질적으로 이안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당황한 이안이 바라보고만 있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자신이 내뱉고도 놀랐는지 에나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서며 다급히 문쪽으로 뛰어갔다.
“ 죄송해요. 조금.. 쉬었다가 하도록 해요. ”
부를 틈도 없이 에나가 방을 나가버리자 이안은 그제야 엉거주춤한 자세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높은 구두를 벗었다. 동선도 자꾸 엉키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기 일쑤이다보니 유독 아팠던곳만 계속 아파왔다. 그래서인지 금방이면 없어질 멍이 제자리인냥 버티고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세이즈에게 물어볼까. ”
어쩌면 낫게하는 방법을 그는 알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이안은 높은 구두를 다시 신고 종종걸음으로 지하실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자리를 잠깐 비운건지 세이즈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집무실에 있을까 싶어 다시 위로 올라간 이안은 문 앞에 서서 두드렸다.
“ 뭐야, 아무도 없는- 어? ”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 무심코 문고리를 잡고 밀었더니 그대로 문이 열려버렸다. 잠겨있지 않다는건 안에 누군가 있다는건데 어째서인지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하나 보이지 않았다. 헛걸음을 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아픈 발을 가지고 넓은 집무실을 돌아볼 자신이 없었기에 다시 나가려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 용건이 뭐야. ”
“ 어디에 있어요? ”
대답을 대신하듯 소파에서 에릭이 부스스 일어났다. 일을 하다 잠깐 눈을 붙힌 모양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목을 이리저리 휙휙 돌리더니 탁자 위에 놓인 잔을 하나 들어 물을 따라 마셨다.
“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닌가? ”
“ 아뇨 딱히.... ”
“ 춤 배우고 있다고 들었는데, 에나가 잘 가르치는지 모르겠군. ”
“ 상냥하게 잘 가르치니 걱정 안하셔도 돼요. ”
에릭은 갑자기 걸치고 있던 푸른색의 긴 외투를 벗어 소파에 걸쳐놓더니 이안에게로 다가갔다. 코 앞에선 그를 보며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 왜요? ”
“ 잡아봐. ”
“ 뭘 잡아요? ”
“ 잘 가르친다고 하니 확인해 봐야지. ”
그리곤 허리를 잡아당기더니 그녀의 한 손을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고 다른 손은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여태껏 혼자 연습했는데 상대가 생기고 나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너무 가까웠다. 당황함과 부끄러움에 이안이 눈을 피하자 그가 나지막히 말했다.
“ 어딜보는거야 지금. ”
“ 너무.. 가까워서... ”
“ 상대의 눈을 보는게 예의야. 이런건 안가르치던가? ”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한껏 부드러워진 표정의 그가 살짝 미소짓고 있었다. 단 한번도 피하지 않고 뚫어질듯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 도저히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몇번이고 피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그의 눈을 마주했다.
“ 어깨랑 목에 힘풀고. ”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은 그가 반바퀴를 휙 돌았다. 하도 반복을 해서인지 물 흐르듯 추던 그녀를 보고있던 그가 만족스러운듯 말했다.
“ 생각보다 잘하네. ”
무신경하거나 단호했던 그가 갑자기 칭찬하자 당황한 이안의 스텝이 바로 꼬여버리고 충격이 발에 고스란히 전해져 통증이 느껴졌다. 중심을 잃고 그대로 에릭에게 쓰러지는 바람에 두사람이 같이 넘어지고 말았다. 이안이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다리만 부여잡고 있자 그가 바로 그녀의 구두를 벗겼다.
“ 어쩐지 잘춘다 했더니. 일어날 수 있겠어? ”
대답하려는 찰나 그대로 이안을 안아 들고 소파로 향한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앉히고 발을 살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린 그가 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 구두 신자마자 춤도 같이 배웠나? ”
“ 금방 배운다고해서.... ”
“ 금방이야 배우겠지. 대신 발이 망가지겠지만. ”
“ 에나님이 실수 하셨나봐요. ”
“ 멍청한건지, 아님 멍청한 척 하는건지. ”
짧은 한숨을 쉰 그가 진열장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맨 위에 놓여있던 낮은 구두를 꺼내어 가져왔다. 그가 신겨주려하자 이안이 손을 뻗었다.
“ 제가 신을게요. ”
“ 가만히 있어. ”
높은 구두는 춤을 추거나 격식있는 자리에서 신는게 전부이며 보통은 편하고 낮은 구두를 신는데 춤을 배우기 위해 발이 높은 구두에 적응할 시간도 주지않고 갑자기 무리를 하게되니 아픈것이 당연했다.
“ 왜 감싸는거지? ”
이미 눈치채고 있던 그가 물었다. 춤을 배우는 단계를 알고 있던 그녀가 자신의 발까지 희생하며 에나를 감싸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은 헐렁한 구두를 보며 꼼지락 거리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 미티에게 들은적이 있어요. 원래 퀸이 될 유력한 사람이 있었다고... 에나님이죠? ”
무시하려고 했지만 내심 신경이 쓰이고 있던 이안이었다. 귀족가문의 여자에게 고아 출신인 그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퀸의 자리에 오르면 계획을 위해 사람을 죽여야하니 소중한 사람에게 그런일을 맡길 수 없어 자신을 택한것이 아니나며 따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고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그에게 에나가 못가르치는 것 같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 별걸 다 말하는 군. 그래서? ”
“ ........ 아니에요. 이만 수업들으러 가봐야겠어요. ”
내심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럤던건지 괜히 기대한 스스로가 바보같고 창피해서 도망치듯이 집무실을 빠져나온 이안은 방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방에 가까워지자 들어가지 않고 문앞에 서있는 에나를 발견했다. 뚫어질 듯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이안이 이상하다고 느끼며 조금 빠른걸음으로 다가간 순간 왼쪽 뺨이 아려왔다.
“ 네가... 뭔데... 감히!!! ”
“ 지금 누구한테 손을 올리는거야. ”
에나가 이안의 뺨을 내려치는것과 동시에 방 안에서 세이즈가 문을 열고 나왔다. 무섭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도 에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 통증을 여기서도 겪을 줄이야. 익숙하면서도 오랜만에 맞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아프다고 생각하며 이안은 뺨을 감싸며 에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분을 참지 못한 에나가 다시 손을 올리자 세이즈가 제지하며 말했다.
“ 미쳤군. ”
“ 이거 놔!!! ”
세이즈가 에나를 데리고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이안은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이 모든 상황을 본 시녀 3명과 소란을 듣고 모인 성 안의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 아무일도 아니니 다들 돌아가세요. ”
피의 신데렐라
아무도 볼 수 없는 구석진 곳으로 벽을 향해 그녀를 던지듯이 놓은 세이즈는 주변을 살피다 이내 에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녀는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분을 삭히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고고한척 하더니 꼴 좋군. ”
“ 닥쳐, 넌 그런말 할 자격없어. ”
“ 너야말로 그럴 자격없어. 내가 말했잖아? 그거 집착이라고. ”
“ 하- 지금 누가 누굴보고? ”
그녀의 말에 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어보이던 에나가 말을 이었다.
“ 너야말로 죽은사람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거보면 그거야말로 집착 아니야? ”
----------------------------------------------
앞으로 업뎃이 좀 더 늦어질것 같아요ㅠ
최대한 빨리 가져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첫댓글 재밌네요!!!!항상 잘보고 있습니당:)
항상 댓글 감사해요♡
잘 보고 갑니다~! ^^
다음 스토리가 궁금한데 안올라오네요 ㅠㅠ
제목부터 너무 끌렸어요 ㅎㅎ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