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조선은 지금의 미국 연방체제처럼 마.번.진한국 3개로 구성된 연방국가였다.
22대 색불루 대통령이전까지 단군조선의 군사권과 인사권과 제천권을 가진 중앙국의 대통령이 되는 진한(단제=대칸=대한=대통령)이 직할영토인 만주를 다스렸고,
부단제로 지금의 부통령이 되는 번한은 황하이북까지 직할영토로 다스렸고 치우족=구려족이 사는 황하이남지역은 순임금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부통령인 번한의 관리감독을 받으면서 순임금에게 다스리게 하였으며, 역시 단군조선의 부통령이 되는 마한은 한반도와 열도를 다스렸다.
그러나, 군사쿠테타로 단군조선 중앙국의 왕권을 장악한 22대 색불루 대통령때부터 단군조선의 분열되어 번한과 마한도 군사권을 갖게 되었다.
단군조선의 국호는 조선.진국.한국.부여로 부르거나 기록되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의 의미도 단군3조선의 대통령을 의미하는 대칸을 의미하는 '대한'과 백성의 나라라는 의미의 '민국'이 결합되어 단군왕검 백성들의 나라라는 의미가 된다.
국제적 국호인 코리아는 국제해상무역국가였던 왕건의 고려가 아라비아와 서방에 알려져서 불리우게 된 국호로 왕건이 고구려회복을 지향한 국가였으니 대칸국이였던 단군조선의 영토와 정신을 회복하고자했던 나라가 고구려였다.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제4(第四)]
태백산(太白山)은 북으로 달려 홀연히 비서갑(斐西岬)의 땅의 경계에 서 있다. 물을 지고 산을 안고 있고 또 돌아서 가는 곳에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하는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환웅천왕이 순행하며 이 곳에 머무르면서 경작하고 사냥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풍백은 천부를 청동경에 새겨서 나가고, 우사는 북을 치고 환무하며 마중하고, 운사는 백검(伯劍)을 섬돌에서 지켰다.
대저 천제(환웅임금)가 산에 나가는 의장행렬은 이처럼 성대하고 엄하였다. 산의 이름은 불함(不咸)이라고 하는데 지금 또한 완달(完達)과 그 음이 비슷하다. 뒤에 웅족의 임금(君)이 천왕의 신임을 받아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王儉)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대감(大監)이다. 토경을 관리하고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왕(天王환웅 임금)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모는 공경해야 하고, 처자는 보호해야 하고, 형제는 사랑해야 하고, 노인과 어른은 높이 모셔야 하고, 어린이와 약한 자에게는 베풀어야 하고 서민 대중들은 믿어야 한다.” 하셨다.
또 의약과 공장(工匠)을 제작하고 짐승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측후(測候), 예절(禮節), 문자(文字)의 법을 제정하니 온 나라가 감화하고 원근의 백성들 모두가서로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웅(熊氏)족이 사는 땅에서 나온 무리를 소전(少典)이라고 하는데 안부련 환웅의 말기에 소전이 명을 받들어 강수(姜水)에서 병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신농(神農)은 수많은 약초들로 맛보고 약을 만들고 이후에 열산(烈山)으로 이주하여 낮에는 교역하게 하니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였다. 소전의 다른 파(派)를 공손(公孫)이라고 하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軒丘)에 유배하였다. 헌원(軒轅)의 무리들은 모두 그의 후예들이다.
사와라 환웅천왕의 초기에 웅족 왕의 후손를 여(黎)라고 하였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봉함을얻어 왕검이 되었다. 덕을 심고 백성을 사랑하니 토경이 점차 커져서 여러 토경의 왕검들이 와서 방물을 바쳤는데 이로서 귀화한 자가 천여수를 헤아렸다. 이후 460년 뒤에 신인(神人) 왕검이란 자가 있어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어 승격하여 비왕(裨王)이 되었다.
신인 왕검이 섭정을 한지 24년만에 웅씨(熊氏)의 왕이 전쟁에서 죽자 신인 왕검이 마침내 그 자리를 대신하고 9환을 통일하니 이 분이 바로 단군왕검이시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소집하여 약속하여 말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법을 공정히 하라. 이것을 천부(天符)라고 한다. 무릇 천부란 만세의 법전이요, 지극한 존엄함이 소재하는 곳이니 가히 범할 수 없는 것이다.” 하셨다.
마침내 삼한과 더불어 땅을 구분하여 다스렸는데 진한(辰韓)은 천왕이 스스로 다스렸다.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개국하여 조선(朝鮮)이라고 이름하니 이 분이 1세 단군이 되었다. 아사달은 삼신께 제사를 지내는 곳의 땅이다. 신인 단군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하였다.
마한세가(馬韓世家) 상(上)
곰부족(熊)과 호랑이부족(虎)이 서로 다투는 시대에 환웅천왕께서는 아직 임금에 즉위하지 않았는데 묘족(苗)과 환족(桓)은 곧 9황(九皇)의 하나였다.
옛날에 이미 우리 환족(桓族)은 유목과 농경을 하던 곳에 살았고 신시(神市)에 개천함으로써 토경이 다스려지니 하나가 쌓여서 음(陰)이 세워져 열(十)로 커지고 양(陽)이 작용하여 궤없이 충(衷)이 생겨났다.
봉황새가 백아강(白牙剛)에 무리지어 모여들고 선인(仙人)이 법수교(法首橋)에 내왕하였는데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인문(人文)이 일찍부터 이미 발달하고 오곡이 풍성하게 잘 익으니 이 때 자부(紫府)선생께서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역법을 만들었다.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왕폐하(天陛)께 비치니 천왕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고 삼청궁(三淸宮)을 짓게 하시고 그 곳에 살게 하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효의 무리가 모두와서 배웠다.
이 때 윷놀이를 만들어서 환역(桓易)을 강연하였는데 대개 신지 혁덕이 기록한바 천부의 전해진 뜻이었다. 옛적에 환웅천왕께서 천하가 커서 한사람이 그것을 능히 이치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시고 곡식(穀)을 주관하시고 명령(命)을 주관하시고 형벌(刑)을 주관하시고 병(病)을 주관하시고 선악(善惡)을 주관하시고 무릇 인간의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시었다.
역법을 만들어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상존(上尊)의 전해진 법이다. 고로 삼신으로서 종교 가르침을 세우고 곧 염표문(念標)을 지어 반포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일신이 충(衷)에 내려와 성(性)은 광명에 통하고 이치대로 되어가는 세상을 만들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소도(蘇塗)의 건립이 이르는 곳마다 가히 볼 수 있었고, 산상(山像)과 웅상(雄常)이 산 정상에 모두 있었다.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빙둘러 모여서 촌락(墟落)을 이루고 4가구(家)가 같은 우물을 쓰고 20분의 1세를 내었다. 때마다 평화롭고 해마다 풍요로워 노적(露積)이 언덕과 산을 이루고 만백성들이 즐겁고 편안하여 태백환무(太白還舞)의 노래를 지어 전하였다.
이어서 치우씨가 있어 구치(九治)를 제작, 조성하여 채광하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제작하니 천하에 감히 그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가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치우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에 나아가 탁록(涿鹿)에서 크게 싸웠는데 탁록은 지금 산서(山西)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장차 싸우려 할 때에 탁록격(涿鹿檄)을 지어 곧 81명의 종가(宗黨)의 대인(大人)을 소집하고 먼저 치우의 형상을 반포하여 보이고 명령의 서약을 갖추어 그것을 알렸다.
치우천왕이 말하기를, “너 헌구(軒丘)는 짐이 고하는 말을 분명히 들어라. 태양의 아들이 있어 오로지 짐 한 사람이 만세를 위하고 공공의 의로움을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씻는 맹세를 지었다. 너 헌구는 우리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를 업신여기고 삼륜구서(三輪九誓)의 행함을 태만히 하고 버리니 삼신이 오래토록 그 더러움을 싫어하여 짐 한 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의 토벌을 행하게 하였다. 너는 진작에 마음을 씻어 행실을 고쳐 성(性)으로부터 종자(子)를 구하면 너의 뇌 속에 내리어 존재할 것이다. 만약에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천인(天人)이 모두 분노하여 그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가히 두렵지 않은가.” 하셨다. 이에 헌구가 곧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가 우리를 종가(宗)로 삼았다.
이 때에 유위자(有爲子)가 묘향산에 은둔하였는데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통과하다가 웅씨의 왕(君)을 뵙자 왕이 청하기를, “나를 위해 도를 설명해 주십시오.” 라고 하니 유위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도(道)의 큰 근원은 삼신(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도는 이미 대가(對)가 없고 칭함(稱)이 없으니 대가가 있는 것은 도가 아니요 칭함이 있는 것 또한 도가 아닌 것입니다.
도는 항상의 도(常道)가 없으며 시기를 따르니 곧 도의 귀한 바요 칭함은 항상의 칭함(常稱)이 없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니 곧 칭함의 실(實)한 바입니다. 그것은 밖에는 큰 것이 없고 안에는 작은 것이 없으니 도는 곧 포함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틀(機) 있음을 내 마음의 기틀에서 보고 땅의 모양(象) 있음을 내 몸의 모양에서 보며 사물의 주재(宰) 있음을 내 기(氣)의 주재에서 보니 이에 하나를 집어서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을 모아서 하나로 되돌아 가는 것(會三歸一)입니다.
일신(一神)이 내려 오는 것이란 이것이 만물의 이치(物理)이니 곧 천일(天一)은 물(水)을 낳는 도이요 성(性)이 광명에 통하는 것이란 이것이 생물의 이치(生理)이니 곧 지이(地二)는 화(火)를 낳는 도요 재세이화(在世理化)란이 것이 마음의 이치(心理)이니 곧 인삼(人三)은 나무(木)를 낳는 도이다.
대저 대시에 삼신이 삼계(三界)를 만들어 물로서 하늘을 형상화하고 불로서 땅을 형상화하고 나무로서 사람을 형상화하니 무릇 나무라는 것은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로 나왔고 또한 이와 같이 사람은 땅에 서서 나와 능히 하늘을 대신합니다.” 라고하였다.
웅씨족의 왕이 말하기를, “그 말씀이 참으로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신인 단군왕검은 이미 천하를 평정하여 삼한(三韓)으로 구분하고 토경을 관장하였다. 이에 웅백다(熊伯多)를 봉하여 마한(馬韓)으로 삼아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니 또한 백아강(白阿岡)이라고 한다.
마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올리니 천왕 단군왕검께서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사람이 거울을 본즉 그 고움(姸)과 추함(醜)이 스스로 드러나듯이 백성이 왕을 보면 그 다스림(治)과 혼란함(亂)의 정사를 볼 수 있듯이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자신의 형상을 보고, 왕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사를 보라." 하였다.
이에 마한 웅백다가 전갈(上箚)하여 신인 단군왕검께 말하기를, "성스러운 말씀입니다. 성스러운 왕(聖主)은 능히 중의(衆議의로운 민심)를 따르기때문에 도가 크고 어리석은 왕(暗君)은 독선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기때문에 도가 작습니다. 가히 안을 살피는데 게으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신인 단군왕검 51년에 천왕이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穴口강화도)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마리산(摩璃山)에 제천단을 설치하여 제사올렸는데,이 건축공사는 강남의 백성 8,000인을 징발하여 돕게 하였다.
신유년 3월에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마한 웅백다가 죽으니 재위는 55년이었다. 아들 노덕리(盧德利)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고 아들 불여래(弗如來)가 즉위하였다. 이 때는 단군 부루(扶婁) 12년 임자년 가을 10월이었다. 백성들에게 칠회력(七回曆)을 반포하도록 명하고 이듬해 봄 3월에 백성들에게 백아강에서 버드나무 심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도정(都亭)을 만들었다.
병진년에 남산에 삼일신고비(三一神誥碑)를 새겨서 세웠다. 경신년에 벼논(稻田)을 경작하였다. 기해년에 소도를 세워 삼윤구서의 교훈(訓)을 베푸니 치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단군 가륵 3년에 불여래가 죽으니 아들 두라문(杜羅門)이 즉위하였다.
을사년(乙巳) 9월에 천왕 가륵께서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천하의 큰 근본이 내 마음의 중일(中一 하나되는 마음)에 있다.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사물이 중일을 잃으면 형체가 곧 기울어 무너지니 통치자의 마음은 오로지 위태롭게 되고 백성들의 마음은 오로지 미약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통합하고 균등하게 중심을 세워서 잃지 않은 연후에 곧 하나에 정하여지는 것이다.
유중유일(惟中惟一)의 도는 아버지는 마땅히 자애로워야 하고, 아들은 마땅히 효도해야 하고, 임금은 마땅히 의로워야 하고, 신하는 마땅히 충성해야 하고, 부부는 마땅히 서로 공경해야 하고, 형제는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하고, 노인과 젊은이는 마땅히 차례가 있어야 하고, 친구는 마땅히 신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몸가짐을 절제하고, 검소함을 좋아하고, 학문을 닦고, 직업을 연마하고, 지능을 계발하고, 능력을 발휘하여 널리 서로를 이롭게 하고 자기를 완성하는데 힘쓰고 자유(自由)롭고 평등(平等)하게 만물을 열어 하늘 아래에 스스로 임하되 국통을 존중하고 헌법(憲法)을 엄수하여 각각 그 직을 다하고 근면을 장려하고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
국가에 사건이 있을 때에는 몸을 바쳐 의로움을 보전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나아가 만대(萬世) 무량(無疆)의 운자리(運祚)를 부양해야 한다. 이는 짐이 너희 국인(國人)들과 더불어 단단히 가슴에 새겨(佩服)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일체가 결실을 완성하는 의지를 지극히 하기를 바란다. 이는 임금의 말이다." 하셨다.
마한 두라문이 죽고 아들 을불리(乙弗利)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홍서하시고 아들 근우지(近于支)가 즉위하였다. 곧 단군 오사구 을유년이다. 경인년에 민정30인을 보내어 살수에서 배를 건조하니 곧 진한의 남해안이다.
임자년에 마한(韓)이 명을 받들어 상춘(常春장춘)에 가서 구월산에서 삼신 하느님께 제사하는 것을 돕고 10월에 목단봉 중록(中麓)에 이궁을 세워 단군천왕이 마한을 순행할 때 거주할 곳으로 삼았다. 매년3월에 마한에 명하여 군을 열병하고 밭을 갈고 사냥하여 16일에 기린굴(麒麟窟)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조의(皂衣)들에게 가관(加冠)의 예를 베풀고 이에 노래하고 춤추고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파하였다.
갑인년에 근우지가 죽고 아들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을우지가 죽고 동생 궁호(弓戶)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죽었는데 후사(嗣)가 없으므로 두라문의 동생 두라시(杜羅時)의 증손 막연(莫延)이 명을 받들어 마한을 계승하였다.
무신년에 천왕 단군 우서한(于西翰)이 백아강에 순행하며 명하여 밭을 구획하고 땅을 주어 4가(家)가 구(區)를 만들고 구에서 1승(乘)을 내어 분담하여 고향 주위(鄕衛)를 지키게 하였다.
천왕이신 단군 노을(魯乙) 임인년에 막연이 죽고 동생 아화(阿火)가 마한에 즉위하였다. 이 때에 단군 도해는 단호한 의지로 개화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는데 마한에게 명하여 대성산(大聖山)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고 대동강(大同江)에 대교를 만들었다. 세 올(三忽)로 전인(佺)을 삼아 경당을 설치하고 칠회제신의 의례를 정하고 삼윤구서의 교훈을 강론하시니 환도(桓道) 문명의 성대함이 나라 밖까지 들렸다.
하나라 왕(主) 근(厪)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정사년에 아화가 죽고 아들 사리(沙里)가 즉위하였다. 단군 아한 을묘년에 사리가 홍서하시고 동생 아리(阿里)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 을유년에 아리가 죽고 아들 갈지(曷智)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홍서하시고단군 대음 무신년에 아들 을아(乙阿)가 즉위하였다. 을유년에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필을 바쳤다.
을아가 홍서하시고 단군 여을 신미년에 아들 두막해(豆莫奚)가 즉위하였다. 임신년 3월 16일에 마리산에 친행하여 참성단(塹城壇)에서 삼신께 제사를 올렸다. 은(殷)나라 왕 외임(外壬)이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홍서하시고 무인년에 아들 자오소(慈烏漱)가 즉위하였다.자오소가 홍서하시고 기축년에 아들 독로(瀆盧)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홍서하시고 단군 고홀 경오년에 아들 아루(阿婁)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홍서하시고 무오년에 동생 아라사(阿羅斯)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高登)이 반란을 일으켜 개성(開城)에 의거하면서 천왕께 항명하므로 마한이 사방에서 거병하여 토벌하려고 홍석령(紅石嶺)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천왕이 고등이 좌현왕(左賢王)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것을 듣고 곧 중지하였다.
을미년에 천왕이 해성(海城) 욕살(褥薩) 서우여(徐于餘)에게 자리를 양위하고자 하므로 마한이 불가함을 간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색불루가 즉위하므로 마한이 군사를 정비하고 몸소 해성의 전장에 나가 싸웠으나 패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마한세가(馬韓世家) 하(下)
단군 색불루가 할아버지 고등의 공을 이어 중병(重兵)을 손에 넣으니 진한이 스스로 무너지고 마한과 번한의 두 한(韓) 역시 한번도 이겨보지 못하고 패하여 멸망하였다.
앞의 단군(帝)께서 사람을 시켜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색불루에게 전함으로써 양위하였다. 색불루 단군께서 백악산(白岳山)에 도읍할 것을 상의하니 여러 욕살이 불가함을 고집하므로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 등이 조서를 받들어 명하니 이에 여러 욕살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병신년 원년 정월에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시니 이 곳이 백악산 아사달이다. 3월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근자에 아사달이 사람을 시켜서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서 양위하였다. 앞의 제왕은 지금 비록 그 호칭을 답습하여 존중되고 있으나 그 바다 안의 산천은 이미 이름을 되돌려 장적에 실렸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는 마땅히 국전(國典)에 있으니 남용할 수가 없다. 반드시 전거할만한 옛일을 살피고 고증하여 정성껏 공경하는데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지금 마땅히 제사를 맞이함에 있어 먼저 가서 날을 잡고 재계(齋戒)하고 살피어 신역(神域)을 청소하고 정결한 희생을 준비하여 폐백(幣)으로 사용하여 삼신께 보답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제왕께서 택일하여 7일 동안 재계하고 향(香)과 축(祝)을 여원흥에게 내려 16일에 이르러 이른 아침에 삼한 대백두산(大白頭山) 천단에서 제사의 일을 공경히 행하게 하고 제왕께서는 친히 백악산 아사달에서 제사하였다.
마한 여원흥이 색불루 단군을 대신하여 읽은 그 백두산 서고문에서 말하기를,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옵니다. 스스로 천제의 아들로서 수양하여 나로부터 백성에게 미치면 반드시 스스로 하늘에 제사함으로써 공경할 것입니다.
황상(皇上)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아 넓은 은혜와 큰 덕으로 이미 삼한 5만리의 토경과 더불어 함께 누리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였습니다.
고로 마한 여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상제의 단(壇)에 극진히 제사를 올리오니 신께서는 그 밝음을 사람과 만물에게남김없이 비추어 주옵소서. 청결히 재계하고 정성으로 공양하오니 강림하시어흠향하시고 묵묵히 도와 주옵소서.
반드시 새로운 제왕의 건극(建極)을 아름답게 꾸미시어 세세토록 삼한 천만년의 무량(無疆)한 다스림(祚業)을 보전하게 하시고 해마다 곡식은 풍요롭게 여물고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은성하게 하옵소서. 우리 성제의 나를 비우고 만물을 있게 하는 지극한 염원을 흠뻑 비춰 주옵소서.”하였다.
5월에 제도를 개혁하여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이란 관경을 이름이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스스로 다스리는 땅인데 곧 옛날의 진한이다. 정치는 천왕에서 연유하여 삼한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명령을 따랐다.
명하여 여원흥을 마한으로 삼고 막조선(莫朝鮮)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고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기를 단군관경(檀君管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곧 진한사(眞韓史)가 단군조선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여원흥(元興)이 이미 대명(大命)을 받들어 대동강을 든든히 지켰는데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고 칭하였다. 천왕도 또한 매년 중춘(仲春)에 반드시 마한을 순행하면서 머물러서 백성과 정사에 힘쓰니 이 때에 문서를 보내어 많이 거둬들이는 폐단이 마침내 없어졌다. 이보다 먼저 조서를 내려 단군 색불루가 말하기를, "오직 짐 한 사람의 공양을 위하여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며 거두어 들이는 것은 곧 정치가 없는 것과 같다. 정치가 없고서야 임금이 어찌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엄명으로 이를 폐지하였다.
무자년에 마한 여원흥이 색불루 단군의 명을 받들어 단군조선의 도읍에 와서 영고탑으로 천도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간청하니 색불루 단군이 따랐다. 여원흥이 홍서하시고 기축년에 아들 아실(阿實)이 즉위하였다. 아실이 홍서하시고 동생 아도가 즉위하였다. 기묘년에 은나라가 멸망하였다. 3년 후인 신사년에 아들 서여(胥餘)가 태행산(太行山) 서북의 땅에 피신하여 살므로 막조선이 그것을 듣고 여러 주군(州郡)을 순행하며 살펴 병사들을 사열하고 돌아 왔다.
아도가 홍서하시고 경술년에 아들 아화지(阿火只)가 즉위하였다. 아화지가 홍서하시고 병술년에 동생 아사지(阿斯智)가 즉위하였다. 아사지가 홍서하시고 단군 마휴 정해년에 형의 아들 아리손(阿里遜)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홍서하시고 아들 소이(所伊)가 즉위하였다. 소이가 홍하고 정해년에 아들 사우(斯虞)가 즉위하였다. 무자년에 주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어 정월을 축하하였다.사우가 홍서하시고 갑진년에 아들 궁홀(弓忽)이 즉위하였다.
갑인년에 마한 궁휼이 명하여 협야 제후(陜野侯)가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토벌하여 왜인(倭人)의 반란을 평정하게 하였다. 궁홀이 홍서하시고 아들 동기가 즉위하였다. 동기가 홍서하시고 단군 다물 계유년에 아들 다도(多都)가 즉위하였다. 다도가 홍서하시고 임진년에 아들 사라(斯羅)가 즉위하였다.
사라가 홍서하시고 아들 가섭라(迦葉羅)가 즉위하였다. 가섭라가 홍서하시고 갑인년에 아들 가리(加利)가 즉위하였다. 을묘년에 융안(隆安)의 엽호(獵戶) 수만 명이 반란하였다. 관병이 싸울 때 마다 불리하여 적이 마침내 도성을 압박하여 심히 위급하므로 가리도 출전하여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홍서하셨다.
병진년에 상장군(上將) 구물(丘勿)이 마침내 엽호 두목 우화충(宇和沖)을 참하고 장당경(藏唐京)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보다 앞서 가리의 손자 전내(典奈)가 마한에 즉위하니 이로부터 마한의 국정이 더욱 쇠퇴하였다.
전내가 홍서하시고 아들 진을례(進乙禮)가 즉위하였다. 진을례가 홍서하시고 을묘년에 아들 맹남(孟男)이 즉위하였다. 무술년에 수유인(須臾人) 기후(箕詡)의 군사가 번한에 들어와서 점거하고 스스로 번조선(番朝鮮) 왕이라고 칭하였다. 연(燕)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우리와 더불어 정벌하자고 하였으나 막조선은 따르지않았다.
계해년에 단군 고열가가 마침내 제위(位)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니 진조선(眞朝鮮)이 오가(五加)와 더불어 정사를 쫒았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끝이 났다.
번한세가(番韓世家) 상(上)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涿芮)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의 땅를 평정하고 산을 헤치고 길을 내니 땅의 넓이가 만리에 이르렀다.
단군왕검은 당요(唐堯)와 더불어 나란히 세습하였는데 요(堯)의 덕망이 갈수록 쇠하여지자 너도 나도 몰려들어 땅을 다투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천왕 단군왕검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군사를 보내어 주둔하게 하고 당요를 함께 정벌할 것을 약속하니 요가 곧 힘이 꺽여 우순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나라를 물려 주었다. 이에 순의 부자, 형제가 다시 한집으로 돌아 오니 대저 나라를 위하는도는 효도와 우애를 우선으로 삼는다.
9년 동안의 홍수피해가 많은 백성들에게 미치는 고로 단군왕검이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우순과 더불어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塗山)에서 회맹하였다. 순은 사공(司空)인 우(禹)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의 법을 전수받아 공을 이루었다.
이 때에 감우(虞)를 낭야성(琅耶城)에 설치하여 구려(九黎) 분정(分政)의 회의를 결정하니 즉 그 글에 이르기를, "동쪽으로 순행하며 차례대로 바라 보고 동쪽 임금(東后)을 외궁에서 뵙는다." 라고한 것이 이것이다.
진국(辰國단군조선)은 천제(거불단 환웅임금)의 아들(단군왕검)이 다스리는 곳이므로 5년(五歲)에 순행하여 낭야에 이르는 것이 한번이요 순(舜)은 제후(諸侯)이므로 진한에 입조하여 뵙는 것(朝覲)이 네 번이다. 이에 단군왕검이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와 용력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번한으로 삼고 험독(險瀆)에 정부를 세우니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칭한다.
1대 번한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용기와 지혜로 세상에 그 이름이 소문이 났다. 단군이 곧 불러 보시고 범상치 않게 여기시고 배수하여 바로 번한(番韓)으로 삼고 겸하여 감우의 정사를 맡겼다. 경자년에 요중(遼中)에 12개의 성을 쌓았는데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통도(桶道), 거용(渠鄘),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 이것이다.
치두남이 죽고 아들 낭야(琅邪)가 즉위하였다. 이 해 경인년 3월에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하여 뜻하지 않는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그 이름이 낭야성으로 번한이 쌓았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가 명을 받들어 도산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낭야에서 보름동안 머물면서 민정을 살폈다. 우순 또한 4악(岳)을 이끌고 와서 치수의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이 부루태자의 명령을 받들어 경내에 경당(扃堂)을 크게 일으키고 겸하여 태산(泰山)에서 삼신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니 이로부터 삼신의 옛풍속이 회사(淮泗) 사이에서 크게 행하여졌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이치를 주관하고 곧 회맹하여 번한으로 하여금 우사공에게 말하기를, “나는 북극 수정(水精단군왕검)의 아들이다. 그대의 임금(后)이 나를 청하여 물과 토지를 다스리는 것을 배워 백성을 건져 구제하고자 하므로 삼신 하느님께서 가서 돕는 것을 기뻐하므로 온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천왕 땅의 전문(篆文)으로 된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능히 험한 곳을 지나도 위태롭지 아니하고 흉한 일을 만나도 해를 입지 아니할 것이다. 또 신침(神針) 한 다발이 있으니 능히 물의 깊고 낮음을 잴 수가 있어 쓰면 변화가 무궁할 것이다. 또 황구종보(皇矩倧寶)가 있으니 무릇 험한 곳의 물을 진압하여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
이 3보(寶)를 너에게 주니 천제(거불단 환웅천왕)의 아들(단군왕검)의 큰 가르침을 어기지 아니하면 가히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우사공이 삼육구배를 하고 나아가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의 명령을 힘써 행하고 우리 우순의 크게 여는 정치를 보좌함으로서 삼신께서 지극한 기쁨에 이르도록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 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으니 대개 오행치수의 요결이다. 부루태자가 구려(九黎)를 도산에서 회맹하시고 우순에게 명하여 곧 우가 바친 사례(事例)에 보답하였는데 지금의 소위 말하는 우공(禹貢)이 이것이다.
낭야가 홍서하시고 계묘년에 아들 물길(勿吉)이 홍서하시고 갑오년에 아들 애친(愛親)이 즉위하였다. 애친이 홍서하시고 아들 도무(道茂)가 즉위하였다. 도무가 홍서하시고 계해년에 아들 호갑(虎甲)이 즉위하였다. 정축년에 천왕이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서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파견하여 상(喪)을 치르고 병사를 나누어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호갑이 홍서하시고 단군 달문 기축년에 아들 오라(烏羅)가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하나라 왕 소강(少康)이 사신을 파견하여 새해를 축하하였다.
오라가 홍서하시고 병술년에 아들 이조(伊朝)가 즉위하였다. 이조가 홍서하시고 단군 아술 병인년에 동생 거세(居世)가 즉위하였다. 거세가 홍서하시고 신사년에 아들 자오사(慈烏斯)가 즉위하였다. 자오사가 홍서하시고 을미년에 아들 산신(散新)이 즉위하였다. 산신이 홍서하시고 무자년에 아들 계전(季佺)이 즉위하였다.
경신년에 명을 받들어 탕지산(湯池山)에 삼신단(三神壇)을 설치하고 관가(官家)를 옮겼는데 탕지는 옛 안덕향(安德鄕)이다. 홍서하시고 정사년에 아들 백전(伯佺)이 즉위하였다. 백전이 홍서하시고 을미년에 중제(仲弟) 중전(仲佺)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신묘년에 아들 소전(少佺)이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장군 치운출(蚩雲出)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정벌하였다. 을미년에 묵태(墨胎)를 파견하여 탕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소전이 홍서하시고 갑술년에 아들 사엄(沙奄)이 즉위하였다. 사엄이 홍서하시고 아우 서한(棲韓)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축년에 아들 물가(勿駕)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신사년에 아들 막진(莫眞)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묘년에 아들 진단(震丹)이 즉위하였다. 이 해에 은나라 왕(主) 태무(太戊)가 와서 방물을 바쳤다.진단이 죽고고 계유년에 아들 감정(甘丁)이 즉위하였다. 감정이 홍서하시고 아들 소밀(蘇密)이 즉위하였다. 계사년 3년에 은나라가 조공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北亳)을 토벌하니 은나라 왕 하단갑(河亶甲)이 곧 사죄하였다.
소밀이 홍서하시고 아들 사두막(沙豆莫)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계부(季父)갑비(甲飛)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경신년에 아들 오립루(烏立婁)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아들 서시(徐市)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무신년에 아들 안시(安市)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기축년에 아들 해모라(奚牟羅)가 즉위하였다.홍서하시고 단군 소태 5년에 우사(雨師) 소정(小丁)을 보내어 번한에 보하였다.
대개 고등은 매번 소정의 지모가 출중함을 탄핵하여 제왕께서 권하여 보내어 파견하였다. 이 때에 은나라 주인 무정(武丁)이 사방에서 병사를 일으키려고 하자 고등이 그것을 듣고 마침내 상장군 서여(西余)와 더불어 그 곳을 함께 파괴하고 색도(索度)에 까지 추격하여 쫒아가 군사들이 불태우고 약탈하고 돌아 왔다.
서여는 북막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탕지산(湯池山)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자객을 보내어 소정(小丁)을 살해하고 아울러 병갑(兵甲)을 싣고 갔다.
번한세가(番韓世家) 하(下)
단군 색불루(索弗婁) 초기에 삼한이 아우러고 국가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니 은나라의 왕 무정(武丁)은 사신을 파견하여와서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먼저 색불루 단군이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하니 서우여가 좌원(坐原)으로 몰래 돌아가 엽호 수천 명과 모의하여 병사를 일으켰다.
개천령(蓋天령)이 듣고 즉시 가서 토벌하다가 진영(陣)에서 패하여 몰사하니 색불루 단제께서 친히 삼군(三軍)을 이끌고 가서 그를 토벌하였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하고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하고 다시 깨우치니 들음으로 이에 이르러 명하여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았다.
색불루 단군재위 4년 기해년에 진조선(眞朝鮮)이 천왕의 칙문(敕文)을 전하여 말하기를, "너희 삼한은 위로는 천신을 받들고 많은 이들이 가까이 하라."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예와 의리, 농사짓기와 누에치기, 베짜기, 활과 화살 만들기, 글 읽기와 쓰기로 백성을 교화하고 백성을 위하여 금팔조(禁八條)를 제정하였다.
남을 죽인 자는 즉시 죽여서 갚고 남을 상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고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몰수하여 그 집의 사내종(奴)으로 삼고 여자는 그 집의 계집종(婢)으로 삼고 소도를 훼손한 자는 금고(禁錮)하고 예와 의리를 잃은 자는 군에서 복역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는 공역에 징발하고 사음(邪淫)을 한 자는 태형을 하고 사기를 행한 자는 훈방하나 스스로 속죄하고자 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하여 공민이 되어도 풍속이 오히려 그것을 수치로 여겨 가족을 이루려고 하여도 짝을 찾을 곳이 없었다. 이로서 백성들은 마침내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으니 문호(門戶)를 잠그는 일이 없었고 부인은 정신(貞信)하여 음란하지 않았다.그 논밭과 들판과 도읍(都邑)을 열고 변두(籩豆)로 마시고 먹으니 어짐과 양보의 이루어짐이 있었다.
신축년에 은나라의 왕 무정이 번한에 부탁하여 글을 올리고 천왕께 방물을 바쳤다.
병신년에 서우여가 홍서하시고 정유년에 아락(阿洛)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축년에 솔귀(率歸)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갑자년에 임나(任那)가 즉위하였다. 신미년에 천왕의 조서(詔)를 받들어 동쪽 교외에 천단(天壇)을 축조하고 삼신께 제사하니 무리들이 둘러서서 춤을 추고 북을 치고 노래하며 말하기를, “정성으로 천단을 축조하고 삼신 하느님(三神主)의 영원함을 축하하세. 제왕의 운수의 영원함을 축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민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라고 하였다.
임나가 홍서하시고 병신년에 동생 노단(魯丹)이 즉위하였다. 북막(北莫)이 침입하므로 노일소(路日邵)를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고 평정하였다. 홍서하시고 기유년에 아들 마밀(馬密)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묘년에 아들 모불(牟弗)이 즉위하였다. 을해년에 감성(監星)을 설치하였다.
모불이 홍서하시고 정해년에 아들 을나(乙那)가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주나라의 왕 하(瑕)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을나가 홍서하시고 정묘년에 아들 마유휴(摩維庥)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기사년에 동생 등나(登那)가 즉위하였다.
이극회(李克會)가 소련(少蓮)과 대련(大蓮)의 묘(廟)를 세우고 3년상을 정하여 행할 것을 계청하니 이를 따랐다. 홍서하시고 무술년에 아들 해수(奚壽)가 즉위하였다.
임인년에 아들 물한(勿韓)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三聖廟환웅, 치우, 단군왕검)에 제사하는 것을 도왔다. 묘(廟)는 상춘(常春장춘) 주가성자(朱家城子)에 있다.
해수가 홍서하시고 기미년에 아들 물한(勿韓)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을묘년에 아들 오문루(奧門婁)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묘년에 아들 누사(婁沙)가 즉위하였다.
무인년에 천조(天朝)에 들어가 알현하고 태자 등올(登屼), 소자 등리(登里)와 더불어 한가로이 별궁에 거주하다가 태자 형제에게 노래를 지어 바쳤는데 말하기를,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가는 털같은 일로써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마소서. 말도 오히려 같은 구유에서 먹고 기러기도 또한 한 줄을 짓나니 내실에서 비록 기쁘고 즐거우나 사소한 말일랑 삼가서 듣지를 마소서.” 라고 하였다.
누사가 홍서하시고 을미년에 아들 이벌(伊伐)이 즉위하였다. 병신년에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천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삼한에 명하여 다같이 칙서를 시행하게 하였다. 기미년에 상장군 고력(高力)을파견하여 회군(淮軍)과 더불어 주나라를 패퇴시켰다. 이벌이 홍서하시고 신유년에 아들 아륵(阿勒)이 즉위하였다.
병인년에 주나라 이공(二公)이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아륵이 홍서하시고 을축년에 아들 마휴(麻休) 혹은 마목(麻沐)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병진년에 아들 다두(多斗)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기축년에 아들 내이(奈伊)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기미년에 아들 차음(次音)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을사년에 아들 불리(不理)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을사년에 아들 여을(餘乙)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갑술년에 엄루(奄婁)가 즉위하였다.
무인년에 흉노(匈奴)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뵙기를 구하고 신하라고 칭하며 공물을 바치고 돌아 갔다.엄루가 홍서하시고 아들감위(甘尉)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무신년에 아들 술리(述理)가 즉위하였다.홍서하시고 무오년에 아들 아갑(阿甲)이 즉위하였다. 경오년에 천왕이 사신 고유(高維)를 파견하여 먼저 환웅, 치우, 단군왕검 삼조상(三祖)의 상(像)을 반포(頒)하고 관가에 봉하도록 하였다.
아갑이 홍서하시고 계유년에 고태(固台)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해년에 아들 소태이(蘇台爾)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을사년에 아들 마건(馬乾)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병진년에 천한(天韓)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병인년에 아들 노물(老勿)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신사년에 아들 도을(道乙)이 즉위하였다.
계미년에 노(魯)나라 사람 공구(孔丘 공자)가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는데 이(耳)의 아버지의 성은 한(韓)이요 이름은 건(乾)이며 그 선조는 풍(風)나라 사람인데 후에 서쪽으로 관문을 나가 내몽고를 경유하고 옮기어 아유타(阿踰佗인도)에 이르러 그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도을이 홍서하시고 병신년에 아들 술휴(述休)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경오년에 아들 사량(沙良)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무자년에 아들 지한(地韓)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계묘년에 아들 인한(人韓)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신사년에 아들 서울(西蔚)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병오년에 아들 가색(哥索)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경진년에 아들 해인이 즉위하였는데 일명 산한(山韓)이다. 이 해에 자객의 해를 입었다. 신사년에 아들 수한(水韓)이 즉위하였다.
임오년에 연나라가 배도(倍道)하여 쳐들어와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하고 또 험독에 들어오므로 수유인(須臾人) 기후(箕詡)가 자제 오천명을 이끌고 와서 싸움을 도우므로 이에 군세가 점차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한, 번한 두 한(韓)의 병사와 더불어 협공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일부의 군대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薊城)의 남쪽에서 장차 싸우려고 하였더니 연나라가 두려워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곧 공자(公子)로 인질을 삼았다.
무술년에 수한이 홍서하시고 자손(嗣)이 없으므로 이에 기후가 단군의 명을 받들어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에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장차 침입해 오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기후 또한 단군의 명을 받들어 정식으로 이름하여 조선왕(朝鮮王)이 되고 번한성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뜻하지 않는 일에 대비하였다.
기후가 홍서하시고 병오년에 아들 기욱(箕煜)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신미년에 아들 기석(箕釋)이 즉위하였다. 이 해에 명하여 주군(州郡)이 현량(賢良)을 천거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에 번한이 친히 교외에서 경작하고 을유년에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기석이 홍서하시고 경술년에 아들 기윤(箕潤)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기사년에 아들 기비(箕丕)가 즉위하였다. 처음에 기비는 종실(宗室단군 황족)의 해모수와 더불어 은밀히 단군를 교체하기로 약속하고 힘써 돕고 명을 보좌하니 해모수로 하여금 능히 대권을 쥐게 한 자는 오로지 기비 바로 그 사람이다.
기비가 홍서하시고 경진년에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하였다. 정미년에 떠돌이 도적(流賊) 위만(衛滿)에게 유인되어 패배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 가서 돌아 오지 아니하였다.[끝]
----------------------------------------------------
"기비가 홍서하시고 경진년에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하였다. 정미년에 떠돌이 도적(流賊) 위만(衛滿)에게 유인되어 패배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 가서 돌아 오지 아니하였다. "는 [환단고기/번한세가]의 기록내용은 차이나 사료들이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내용으로 환단고기 기록내용의 역사적 사실성을 거의 100%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매도하는 일제 식민사관에 찌들어 있는 강단사학은 아직도 연나라 장수출신의 떠돌이 도적 위만이 단군조선의 부통령이 되는 기준 번한을 군사쿠테타로 몰아 내고 왕권을 차지한 위만조선을 마치 단군조선의 중앙국인양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르치고 세뇌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당시 단군조선의 중앙국은 만주에 건재하고 있던 부여다. 단군조선의 국호가 부여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나라로부터 죽음을 피하여 흉노로 망명한 연나라왕 노관의 부하장수 위만이 어떻게 단군조선의 중앙국을 무너뜨리고 단군조선의 임금이 될 수 있겠는가? 단군조선의 부통령 기준왕이 다스리는 번한 땅에서 벌어진 군사쿠테타 사건을 마치 단군조선의 중앙국(부여)을 무너뜨리고 단군조선의 대통령이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중공이 얼마나 대한민국 강단사학자들을 좋아라하겠는가?
국민정신과 국가정체성이 전제되는 대한민국이 바로 서려면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중국 위나라 영토를 대한민국 충청도지역까지 그려 주며 동북공정을 돕는 매국노 사학자들을 대한민국 사학계에서 완전히 퇴출시키고 문헌과 고고학을 결합한 공정한 역사연구을 통하여 우리 고대사부터 바로 세워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