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 1963년
5월 1일
사이타마현 사야마시 부농(아버지가 대지주)의 넷째딸인 나카타 요시에(中田善枝, 고1, 16세)는 반친구에게 「오늘은 내생일이니까」라며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평소보다 좀 더 일찍 하교했지만 그녀의 집에서는 특별히 생일축하를 하려는 계획은 없었다. (실제 생일은 맞음)
하교한 요시에는 학교 근처 우체국에서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기념우표를 예약.
오후 3시 20분경, 요시에를 잘 아는 N씨는 학교 통학로와는 전혀 다른 방향인 세이부 철도 가드레일쪽에서 요시에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을 본다. N씨 이외 2명의 목격자가 더 있었다.
오후 4시 20분,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지기 시작해 집에서 걱정을 했으나 요시에는 귀가하지 않았다.
오후 6시 50분, 걱정이 된 장남(25세)이 혼자서 차를 타고 학교와 친구집을 돌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오후 7시 30분, 장남은 귀가하였으나 요시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 7시 40분, 장남이 현관 유리창에 끼워진 하얀 봉투를 발견. 봉투와 내용물은 젖어있지 않았다.
거기에는 요시에의 학생수첩과 함께 협박장이 들어 있었다.
ㆍ아이의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5월 2일 밤 12시에 여자가 20만엔을 들고 사노야 술집 문앞에서 기다려라.
ㆍ경찰에 알리면 아이는 죽는다.
ㆍ반복해서 말하지만, 경찰이나 이웃에게 알리면 아이는 죽는다.
ㆍ친구와 함께 차로 가겠다.
요시에의 자전거도 집에 돌아와 있었는데 요시에가 늘 놓아두던 그 자리에 평소 모습대로 놓여져 있었다.
가족들은 다른 누군가가 집에 접근한 것을 보지도 못했고, 다른 기척도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오후 7시 50분, 장남은 호리가네 파출소에 신고, 파출소에서는 사야마 경찰서로 연락, 거기서 다시 사이타마현경 본부로 연락.
경찰은 유괴사건으로 판단하고 긴급수사체제를 편성했다.
5월 2일
밤 12시, 경찰관 40명이 사노야 술집 주변과 도로에 잠복하여 만전을 기했다.
차녀(23세)는 위조지폐 20만엔을 가지고 사노야 문앞에서 범인을 기다렸다.
범인은 사노야의 북쪽(농지)에서 걸어와 차녀와 접촉, 둘은 25m 떨어진 채로 약 10분간에 걸쳐 큰소리로 대화를 했다.
그러던중 범인이 갑자기 농지로 도주, 놀란 경찰이 곧바로 뒤쫓았지만 잡지 못했다.
경찰은 협박장의 '문앞, 차로 간다' 는 내용에 빠져 사노야의 정면과 도로에만 인력을 배치하는 바람에 범인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때 잠복했던 경찰들에 따르면 40~50대 남성의 목소리였다고 한다.
차녀는 「몇살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5월 3일
새벽, 범인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것이 사노야 동남쪽 밭에서 발견.
수사관들이 경찰견을 끌고 냄새를 쫓아갔으나 시내 근방에서 추적이 곤란하게 되었다.
사이타마현 경찰 본부장 「범인은 반드시 이곳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사건이 해결될지도 모르겠다.」
수사 본부장 「범인은 현지 토박이다. 지금까지의 수사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조간만 사건을 해결하고 싶다.」
신문과 TV에서 「경찰의 실태」가 크게 보도.
1963년 3월 31일에 일어난 '요시노부짱 유괴살인 사건'에서 범인에게 돈도 빼앗기고 아이도 죽어버린 전력이 있어서
이번 사건에서도 다시 범인을 놓쳐버린 경찰에 대핸 비난 여론 확산.
5월 4일
특별수사본부가 만들어져 경찰 병력 165명 투입.
5월 6일
범인의 발자국이 있던 위치, 냄새 추적이 중단된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시다 양돈장이 있었는데,
그 양돈장의 주인 일가족과 직원은 모두 사야마의 피차별부락 출신이었다. (양돈장에서 피해자의 집까지의 거리는 약 200m)
경찰은 이곳에 들러 이상한 일이 없었냐고 묻다가 삽이 하나 없어졌다는 말을 듣게 된다.
경찰은 이시다 양돈장에 관계된 피차별부락에 초점을 맞춰 특명 수사반을 편성하고 피차별부락민에 대한 수사를 시작
※ 참고 : 피차별부락 - 태생, 출신, 직업, 용모, 지능때문에 천민이나 비인(사람이 아닌데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것)으로 취급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
극심한 인간차별중 하나이며 현재에도 그 차별이 존재한다. 일본내의 한국인 차별이 연관되는 경우도 있다.
※ 그런데 피해자 집에서 예전에 허드렛일을 한 적이 있는 운송회사 직원 O씨(31세, 혈액형 B형)가 경찰의 조사를 받은 후 자신의 결혼식 전날(5월 6일)에
신축중이던 자신의 신혼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우물에 뛰어들어 유서도 없이 원인불명의 자살.
O씨는 사건 당일 피해자가 목격된 가드레일 근처의 일터에서 3시 40분경 집으로 갔다가 5~7시 사이에 혼자서 술을 마셨다고 증언했다.
5월 7일
국가공안위원장이 사이타마 신문에 발언「이런 악질적인 범인은 어떻게든 반드시 산채로 잡는다.」
가해자가 현지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부락민이라고 수사원에게서 들은 현지 주민들이 갑자기 수사에 적극 협조하기 시작.
(현지 주민들과 경찰은 부락민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5월 11일
오후 5시경, 사체가 발견된 근처의 밀밭에서 분실된 삽을 발견.
삽에 묻은 흙을 조사한 결과 사체를 묻은 곳의 흙과 동일한 것이라고 감정 결과가 나와서 범행에 사용한 삽으로 인정.
하지만 이시다 양돈장에서는 '우리가 쓰던 삽이 아니다'라고 증언.
나중에 재조사 결과 삽에 묻은 흙은 범행 현장의 흙과 다른 것으로 판명.
※ 사건 당일날 저녁 숲에서 수상한 3명과 차량을 봤다는 목격증언을 한 T씨가 심장을 칼에 찔린 채 변사체로 발견.
주위사람들에 의하면 「경찰에 제보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범인취급 받았다.」며 억울해 했다고 한다.
보통 칼에 의한 자살은 주저흔이 보이는데 이 경우엔 전혀 그런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의문의 죽음이었으나 일단 경찰은 자살로 취급.
5월 22일
교도통신사(共同通信社)는 경찰내에서 이시카와 카즈오(24세, 혈액형 B형)가 유력한 용의자라는 정보를 입수,
22일부터 23일까지 건축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던 이시카와를 촬영한다.
통칭 '카와단보' 라고 불리는 피차별부락에 살고 있던 이시카와는 토지가 없는 빈농의 아이로 태어났다.
최종학력은 초등학교5학년이고 재학중에도 다른 집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며 생계를 도왔다.
대기업의 과자공장에서도 근무했지만 곧 퇴사, 이시다 양돈장에서 1963년 2월까지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형의 건축일을 돕고 있었다.
5월 23일
경찰은 이시카와를 폭행(단순히 싸움)과 의류절도(윗옷을 빌려입었다가 안돌려줌)로 체포.
그 직후 「필체 등으로 이시카와가 범인임을 확신한다」며 사야마 사건의 범인으로 보도진에 공표.
기자가 「그가 범인이라는 확신이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사건 본부장(사야마 경찰서장)은 「지금 무죄로 풀려나면 나중에 다시 못잡아」라고 대답.
경찰은 계속 조사를 강행했지만 이시카와는 자백을 하지 않았고 별건(폭행과 절도)으로 기소.
14명이 투입되어 2시간 17분간 이시카와의 집을 1차 수색하였으나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음.
그리고 범인의 발자국과 이시카와의 발은 크기도 모양도 달랐다.
6월 17일
이시카와는 변호사의 보석신청으로 석방되었으나 경찰은 본건(강도, 강간, 살인, 사체유기 혐의)으로 다시 체포.
다시 이시카와의 집을 14명의 경찰관이 2시간 8분 동안 2차 수색하였으나 여전히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음.
나중의 경찰증언에 따르면 이날 수색은 명백히 목적이 있었으며 그것은 '가방, 만년필, 시계' 였다.
경찰은 「지금 자백하면 10년형으로 감형해준다.」「자백하지 않으면 살아서 못나간다.」등으로 이시가와를 협박.
6월 20일
이시카와는 「3명이서 피해자를 윤간, 살해했다」고 자백.
6월 21일
이시카와가 피해자의 가방을 버린 곳이라며 그려준 지도를 보고 가방을 발견.
하지만 요시에가 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았던 그 가방이 아니었다.
6월 24일
이시카와는 단독 범행이라고 자백.
6월 26일
이시카와의 자백에 근거하여 이시카와의 집 3차 수색에서 협박장 작성에 사용했던 만년필을 이시카와의 집 뒤쪽 창고 문위에서 발견.
이때 수색에 걸린 시간은 24분.
경찰은 장남이 그 만년필을 맨손으로 잡게 한 다음에 넘겨받았다.
발견된 핑크색 만년필 안에 들어있던 잉크는 블루블랙(협박장의 잉크도 블루블랙)이었지만 원래 피해자가 쓰던 잉크는 하늘색.
이시카와는 자신의 이름과 주소 이외에 다른 문자를 쓸 능력이 없었고 읽지도 못했다.
이시카와가 이름, 주소를 쓴 필체와 협박장의 필체는 동일하지 않았다.
만년필에서는 피해자의 지문도, 이시카와의 지문도 검출되지 않았으며 가족들은 피해자의 만년필이 아니라고 증언.
1차 수색에 참가했던 사야마 경찰서 형사가
「1차 수색때 내가 바로 그곳을 담당했는데 문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만년필이 발견되었다는데 어떻게 된건지 궁금하다」고 발언.
이 증언은 본인의 서명날인을 받고 진술조서로 제출되었으나 차후 재판에서는 무시되었다.
이시카와가 수감되어 있던 유치장 바닥에 「나가타 요시에씨 용서해주세요」라는 글이 쓰여 있어서 이것도 증거로 제출.
하지만 역시 이시카와는 이런 글을 쓸 줄 몰랐으며 필체도 달랐다.
7월 2일
이시카와가 요시에의 손목시계를 버렸다고 한 자백에 근거하여 농지에서 시계를 발견.
하지만 처음 찾으려던 시계의 품명은 '시티즌 코니' 였지만 실제로 발견된 것은 '시티즌 펜트'
그러나 가방, 만년필, 시계는 '범인밖에 알 수 없는 3대 물증'으로 판결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7월 9일
우라와 지방재판소(현 사이타마 지방법원)에서 '강도, 강간, 사체유기'로 기소된 이시카와는 범행을 인정.
1964년 3월 11일
우라와 지방재판소, 이시카와에게 사형 판결.
1964년 7월 14일
※ 곧 결혼할 예정이었던 차녀(범인과 만났던 요시에의 언니)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
유서가 있었지만 공개되지 않았다.
1965년 3월 12일
이시카와가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며 항소.
1965년 9월 10일
도쿄 고등법원 항소심 제1회 공판, 이시카와는 자백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하며 범행 부인.
지금까지 문맹이었던 이시카와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필사적으로 공부를 하여 편지와 일기, 시조(短歌:단가)를 쓰기 시작한다.
이시카와는 장남이 진범이라고 주장.
1966년 10월 24일
※ 이시다 양돈장 주인의 형 I 씨. 이루마 역에서 만취상태에서 열차충돌사고로 사망.
나중에 경찰조사 결과 이루마역의 10월 24일 사건사고 일지란이 사라졌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사건을 쫓고 있던 사립탐정도 변사체로 발견)
1969년 11월
피차별부락 출신 학생들에 의한 '사야마 차별 재판 규탄 대회' 발족.
1974년 10월 31일
도쿄 고등법원, 변호인단의 주장을 기각하고 이시카와에게 무기징역 판결.
1975년
제1회 부락 해방 문학상 시조(短歌)부문에서 이시카와가 특별상 수상.
1977년
※ 차남(요시에보다 3살 위) 자살.
1977년 8월 9일
변호인단이 새로운 증거를 들어 상고했으나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
이시카와는 무기징역 확정.
1994년 12월 21일
이시카와 31년 7개월만에 가석방.
2005년 2월 13일
아사히TV '더 스쿠프(특종) 스페셜'에서 '보이지 않는 수갑을 벗고! 사야마 사건 42년만의 진실' 이라는 제목으로
이시카와의 긴 인터뷰와 사건 정황등이 방송되었다.
2005년 3월 16일
대법원 제1소법정은 제2차 재심 청구 특별 항고를 기각.
2006년 5월 23일
변호인단과 이시카와가 도쿄 고등법원을 상대로 제3차 재심 청구.
2006년 12월
이시카와는 '제18회 타다요코 반권력 인권상' 수상.
2010년 5월 13일
도쿄 고등법원, 도쿄 고등 검찰청 및 이시카와 변호사측은 삼자 협의를 하여 검찰은 법원의 증거 공개 권고를 받고,
살해 현장의 인근 농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한 남성에 대한 수사 보고서, 이시카와의 자백 녹음 테이프 9개등 36점의 새로운 증거를 공개.
중요인물들에게 일어난 의문의 죽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 사건은 언론에서 오묘촌(다섯무덤)사건, 육묘촌사건 이라고도 불리웠다.
이것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 '팔묘촌(1949)'의 영향 때문. 소설에는 그 유명한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
하지만 원작의 팬들은 '만화 김전일'을 그의 손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사건내용을 담고 있는 극장용 영화 7편, 연극2편, TV용 영화 1편, 가곡 2편이 제작되었다.
서적과 뉴스, 특집 방송 프로그램도 역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