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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약한 차르>
- 미하일 1세의 초상 -
로마노프가문은 본래 14세기 경 독일에서 흘러들어온 안드레이 코빌라라는 귀족에게서 유래한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살짝 한미한 편이었지만, 이 가문 출신인 아나스타샤가 이반 뇌제의 황후가 되면서 급부상하였고, 이는 미하일이 1613년에 차르가 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문제는 이렇게 차르가 된 미하일은 너무 어리고, 심약했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언제인지는 알수 없지만 낙마사고로 인하여 걷는 것도 불편하게 되어버리는 바람에, 몸도 약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의 어머니 크세니야가 사실상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그녀는 억압받았던 세월을 보상받고 싶었는지, 살티코프들이라고 불릴 자신의 조카들과 함께 러시아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 "어쭈 반항한단 말이지?" -
이런 사례 중 가장 대표적인 건 미하일의 결혼 취소 사건이었다. 1616년 크세니야는 미하일의 아내 겸 황후로 로마노프 가문에 우호적인 가문 출신인 홀로포바를 지명하고, 미하일과 약혼하게 하였다. 미하일은 홀로포바를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은 시기만 맞으면 자연스럽게 성사될 듯 했다. 하지만 홀로포바의 아버지가 어쩌다 살티코프의 일원과 말싸움을 하면서 관계가 좀 악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크세니야와 살티코프들은 홀로포바를 내쳐버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 홀로포바에게 병이 들었다. 병 자체는 사소한 것으로 별 문제가 없었지만, 이를 빌미로 이들은 홀로포바가 불임이라고 떠들어댔고, 결국 1619년에 약혼은 파혼되고, 그녀는 유배되었다. 미하일이 파혼을 막기 위해 어머니와 대판 싸우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 "이 병림픽을 끝내러 왔다!" -
그러나 같은 해 폴란드와의 휴전이 체결되며 지그문트의 궁정에 감금됬던 미하일의 아버지 필라레트가 귀환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되었고, 대군주란 칭호를 받았다. 사실상 러시아의 공동 통치자, 아니 통치자가 된 것이었다. 상당히 영리한 인물이었던 그는 돌아오자마자 살티코프들을 숙청해버렸다.(1) 그리고 1633년에 죽을 때까지 실권을 장악했다.
<돈을 마련하라!>
필라레트가 돌아와서 러시아의 실권을 장악한 이후,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미하일이 즉위한 직후부터 러시아 정부의 최대 관심사는 재정위기 극복이었다. 동란의 시대를 거치며 러시아의 재정은 바닥났고, 세금을 거두자니 사람들도 다 가난해져서, 경제 자체가 박살이 난 상태였다. 재정 부족때문에 러시아는 1614년 시베리아 지역의 한 지사가 일부 오이라트족의 청원(2)을 받아들여 몽골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준비하려고 하자, 이를 막았어야 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존재하는 스트로가노프 궁전. 18세기 중엽에 지어진 건물이다. -
일단 모스크바 정부는 부유한 상인 가문인 스트로가노프(3)가문에서 3천 루블을 빌리고, 전 재산에 대해 1/5 세금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했다. 결국 모스크바 정부는 농지 기준으로 공동체에 세금을 징수하는 한편, 스트로가노프 가문에서 4만 루블을 징수했다.(4) 그러나 이걸로도 재정 위기가 극복되지 않았다. 1613년에 소집한 젬스키 소보르를 1622년까지 유지하면서 대책을 찾아보았지만 뚜렷한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필라레트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는 각 지역 지방 장관들 및 군사령관들의 직권 남용을 허용하기로 했다. 이는 토지 조사를 원활하게 하고, 세금 회피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재정 상태가 어느정도 개선된 것이었다. 하지만 직권 남용이 허용되자마자 지방 장관들 및 군사령관들은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횡포를 부리고, 착취했다. 당연히 민심은 불만으로 가득찼고, 폭발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다행스럽게도 모스크바 정부는 이런 위기 상황을 감지해냈고, 뒤늦게 지방 장관들 및 군사령관들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모스크바 정부는 다른 문제를 하나 더 해결해야 했다. 바로 드보랴닌의 몰락이었다. 동란의 시대를 거치며 드보랴닌들의 농민들은 사라지고, 토지는 박살이 난 상태였다. 덕분에 토지를 많이 가진 상층 드보랴닌들의 삶도 상당히 궁핍해졌고, 중,하층 드보랴닌들은 아예 드보랴닌의 지위를 잃고 농민이나, 심하면 홀로프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 정부는 도망 농노를 잡는 기간을 기존의 5년에서 10년으로 대폭 늘렸다.
한편 재정위기 극복의 일환으로 이들은 외국과의 무역도 장려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상인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영국 상인들을 밀어내고 곧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외에도 상당한 숫자의 외국인이 밀려들어왔고, 이로 인해 러시아인 상인들이 불만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재정위기 자체는 개선되었을지언정 필라레트가 죽을때까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미하일이 죽을때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스몰렌스크 전쟁>
동란의 시대가 끝나자, 러시아는 속칭 '부드러운 금'이라 불린 모피를 찾기 위해 그동안 계속해왔던 시베리아 개척을 다시 추진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복속시키며 전진했고, 그 과정에서 오이라트족 및 몽골족들과 접촉했다. 동란의 시대로 인해 국력이 딸렸던 러시아는 이 두 민족들간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대신 중국과의 교역에 활용하려고 하였다. 오이라트나 몽골 역시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챙기려고 하였다. 그러는 한편 러시아는 계속 동진하여 미하일이 죽을 무렵엔 아무르강에 도달했다.
한편 1630년 지그문트가 죽었다. 곧 브와디스와프가 즉위하기는 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적들은 이 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침 구스타브 아돌프가 러시아에 사절을 보내 반 폴란드 동맹을 타전하기도 했다.
- 붉은 색이 러시아가 탈환하려던 목표지역이다. -
러시아는 이제 슬슬 동란의 시대 후유증도 극복했다고 판단했고, 폴란드의 군사력이 별 것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1632년 독자적으로 군사행동에 돌입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620년대에 벌어졌던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들이 자랑하던 윙드 후사르마저 무참히 구스타브 아돌프에게 박살이 나버렸던데다가, 스몰렌스크를 지키던 병력은 고작 500에 국왕 직속 상비군도 고작 3천명 규모였기에 러시아의 생각이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사전 징후를 파악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짐은 전쟁예산 지출을 재빠르게 승인했다. 덕분에 1632년 10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대는 상당히 늘어나있었다. 한편 폴란드를 침공하는 러시아군은 3만명 정도였고, 동란의 시대 때와 달리 나름 서구화된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러시아군의 지휘자는 동란의 시대 때 스몰렌스크를 영웅적으로 방어했던 셰인이었다.
- 스몰렌스크 포위전 당시를 묘사한 그림 -
러시아군대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 이들은 첫 공격에서 스몰렌스크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포위망을 굳건히 유지하며 압박했다. 성벽이 파괴되고, 보급물자가 떨어지며 사상자가 늘어나자 스몰렌스크 수비군은 항복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렵 폴란드의 구원이 시작되었다. 당시 폴란드 군은 3만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는데 그 중 만여명은 완벽하게 서구화된 보병대였다. 거기다 라지비우가 이끄는 연방 군대는 몇 차례 스몰렌스크의 포위망을 돌파해 스몰렌스크에 병력(5)과 보급물자를 지원해 스몰렌스크 수비대의 사기를 회복시켜주었다.
1633년 여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대규모 반격을 개시했다. 코사크족의 합류로 숫적으로도 우위에 서게 된 연방은 스몰렌스크 포위망과 러시아군의 보급망에 대한 공격을 병행했다. 러시아군은 스몰렌스크 포위를 위해 만든 참호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 사이 도로고부시를 비롯, 러시아군의 주요 보급기지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손에 떨어졌다. 결국 10월 초엽에 셰인은 포위를 포기하고 야영지로 철수하나, 곧 야영지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군대에게 포위당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러시아군에 속해있던 외국인 용병대들 중 상당수가 연방에 항복해버렸다. 거기에 크림 칸국이 러시아 남부를 습격하자, 일부 보야르들까지 탈영하고 말았다.
이들을 구원하려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폴란드 군대는 셰인의 군대를 압박하면서, 동시에 러시아의 여러 지역을 공격했고, 결정적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막 끝나자, 연방은 오스만 전선에 투입된 군대를 러시아 남부로 투입시켰다. 덕분에 셰인에 대한 구원은 고사하고, 여기저기서 날뛰는 폴란드 군대를 저지하는 것만으로도 러시아는 힘에 부쳤다.
- "으..... 분하다....." "그러게 어디서 덤비니." -
결국 셰인은 1634년 3월 항복했다. 그는 남아있던 자신의 병력들과 함께 귀환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대포 대부분을 폴란드군에 넘겨주어야 했다. 셰인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죄로 처형됬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러시아 자체도 전쟁을 벌일 의지를 잃었다. 마침 반폴란드파의 거두였던 필라레트도 죽었기에 미하일은 평화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마침 폴란드의 세짐도 평화협상을 요구하며 국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브와드수아프는 좀 애매모호한 입장이었는데 그는 아직까지 유지하던 러시아의 차르 칭호를 생각해서라도 러시아를 정복하고 싶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재개하기 위해 러시아와 동맹을 맺을 생각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1634년 5월 폴랴롭카 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에 따라 양쪽은 영구적인 평화를 약속하며, 국경선은 전쟁 이전의 선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러시아는 2만 루블을 보상금으로 지불하고, 폴란드는 러시아의 차르 칭호를 영구히 포기하기로 결정한다.(6)
한편 1637년 돈 코사크가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아조프를 독자적으로 기습,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스만제국은 4년 후인 1641년 탈환을 위한 공격에 돌입하지만 실패한다. 1642년 돈 코사크는 아조프를 러시아 정부에 바치기로 결정한다. 당시 소집된 젬스키 소보르에서 하층민들은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하일은 미온적이었다. 거기에 귀족들이 재정 문제를 이유로 반대하자 최종적으로 돈 코사크들의 요청은 거부되었고, 아조프는 오스만 제국에 반환된다.
- "개종 거부했다고 가두는게 어디있냐!!!" -
여기서 사소한 해프닝 하나. 1643년 미하일의 딸 이레네와 덴마크의 왕자 발데마르 크리스티안은 서로 혼인하기로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 도착한 발데마르 크리스티안은 결혼을 위해 동방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을 거부했고, 바로 투옥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추방된다. 이후 덴마크 왕실과 러시아 왕실이 혼인관계를 맺는 건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1) 홀로포바도 덕분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크세니야가 워낙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혼은 하지 못했다. 이에 상심한 미하일은 몇 년간 계속 독신을 고집하다가 1624년에야 결혼했다.
(2) 이 때 오이라트족은 기근과 몽골족의 압박으로 상당히 궁지에 몰려있었는데,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일부 부족들이 그 동안 거부해왔던 영원한 항복을 맹세할 정도였다.
(3) 시베리아 개척으로도 유명한 그 가문 맞다. 본래 상인 가문이지만 워낙 돈을 많이 벌어 나중엔 귀족이 된다.
(4) 문제는 원래 1만 6천 루블만 징수하기로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미안하지만 사정이 급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글을 징수할 때 보냈다고 한다.
(5) 약 천여명 정도가 지원되었다.
(6) 이 직후 브와디수아프는 마을 하나를 러시아에 돌려주는 대가로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을 공격할 계획을 품었지만 세짐의 반대로 무산됬다.
첫댓글 발데마르왕자 엄청난 미소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