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넌 미친놈이야… 】
# 00. 프롤로그
어둡고도 깊은 밤. 달이 구름에 가려 사람의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어두운 뒷골목에서
알게 모르게 희미한 붉은 빛이 서서히 번뜩인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구름에 가렸던 달이 조금씩 자신을 내보이면서 어두웠던 공간이 다시금 밝아지는 순간,
그 곳에서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작은 인영의 형체가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다.
입 주변을 까만 복면으로 가린 탓에 생김새는 알 수 없으나 허리에서 나부끼듯이 춤을 추고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붉은 눈빛을 가진 아이.
“ 어이, 아저씨들. 그동안 꽤 즐거웠어. ”
그 아이는 자신의 밑에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무리를
예의 차가운 눈빛으로 훑으며 말을 잇더니, 이내 피식- 이란 비웃음이 한가득 담긴 소리를
흘린 후 둔탁한 소리에 몰려든 인파들 속으로 유유히 자취를 감춰버린다.
***
‘ 내가... 이제부터 친구가 되어줄께. ’
‘ ......네...네가...? ’
‘ 어... 그니까 울지마..... ’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커진 두 눈과 함께 믿을 수 없어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을 때.....
내 귓가에 울리는 고운 미성과 환하게 웃는 그 애의 모습이 예뻐서... 너무 예뻐서.... 차마 내가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라 여겨졌기 때문에... 그 애가 내미는 손을 멍하게 바라보며......
순간.... 손을 뻗어 잡기가 망설여졌다. 선뜻 나같은 년의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하는 그 애는....
조금의 고통과 시련조차 겪어보지 못한... 그런 아이일 것만 같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춤거리는 차가운 내 손을 보던 그 애가 싱긋 웃으며 온기가 가득 느껴지는 자신의 두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줬다. 내 오른손을 꼭 붙들고는 이미 오래 전에 닫은.... 결코 그 누군가
에게도 열어준 적 없는.... 이젠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얼룩져진 내 마음을 한순간에
풀어주는.... 마치 아기를 다루는 것 같이 소중하게 어루만져 주는 아늑하고도 세심한 손길에....
맑은 눈동자로 한없이 날 보고 있는 따뜻한 그 애의 눈길과 입가에 지어진 미소 때문에.... 나도
모르게 시린 눈물 한방울이 볼을 타고 아래로 투욱 떨어졌다. 지금 맞잡고 있는 내 손이 이 아이의
깨끗하고 순수한 미소를 더럽힐까봐 덜컥 겁이났다. 하지만.... 오직 믿음을 가진 이유로 내 마음을
무참히 짓밟혀버린 그 일도... 믿음이란 이 두 글자만을 갈구했던 나를 간단히 저버린 망할 세상도
지금 이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순간 만큼은.... 애초에 없었던 일처럼.... 모두 다 잊고 싶었다.
.........난.... 평범한 일상만을 꿈꾼다....
【 Part 1. 내 일상 속에 뛰어든 미친놈 】
# 01.
‘ 주인님, 일어나세요! 주인님, 일어나세요! 주... ’
‘ 쿠당탕탕-! ’
귓가에 거슬리는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감겨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제길... 뭐야, 이거!? 졸라 뭐같던 쪽지 시험도 끝나서 간만에 맘 놓고 푸욱 잔 것 같았는데....
낡아빠진 고물시계 주제에 감히 내 단잠을 깨우다니!! 내 당장에 간이 배 밖으로 불쑥 튀어나온
아주 크나큰 죄를 지은 시계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줘야 겠구나!!! 이 자식, 넌 죽었어!!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평소에 극진히도 나를 모시며 ‘주인님!’ 을 외치던 시계의 공을 망각한 채
따끔하게 혼쭐을 내주려던 난 머리맡에 뒀던 안경을 재빨리 쓰곤 시계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나 테이블이 아닌 처참히 바닥에 쳐박혀서는 부품들과 사이좋게 나뒹굴고 있는 시계. 저런...
쯧, 불쌍한 것.... 도대체 누가 너한테 감히...!! 내가 할 일을 대신해서 이런 착한 일을 저질렀는
지는 잘 모르겠다만.... 부디 좋은 곳으로 가거라, 으하하핫!! 감히 겁도 없이 내 단잠을 깨운 것에
대해 합당한 최후를 맞이한 시계에게 여태껏 지내온 정을 봐서 약 1초간의 묵념을 예의상 살짝
해주고는 다시 온기가 서린 이불 안을 파고 들었다. 으.... 그래도 아직 분이 않풀린다. 꽤나 기분
좋은 꿈을 꿨던 것 같았는데.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포근했던 꿈.... 시계의 방해를
받기 전까지 꾸고 있던 꿈을 생각해내려 미간을 좁히며 골똘히 생각하다가
“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더 자자!!! ”
특유의 무신경함으로 단번에 지워주고는 다시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지려는데...
‘ 쿵쾅쿵쾅... ’
“ 새흰아!! 이게 무슨 소리니?! ”
무슨 뒷북을 치는 것도 아니고... 쿵쾅쿵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부숴질 것처럼 쿠당탕 열리면서 놀란 얼굴의 엄마가 뛰쳐 들어왔다.
적당히 웨이브가 진 긴 갈색머리를 풀어헤친 엄마의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을 보니.... 한숨이 절로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에효.. 저게 무슨 엄마냐? 차라리 유치원생을 데리고 사는게 더 편하겠다.
“ 아, 몰라!! 더 잘 거니까 이만 나가줘. ”
“ 꺄악!! 새흰아! 저저... 시,시계가 왜 저렇게 됐니!! 또 네 방에 도둑든 거야?!
이,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전화전화.... 경찰서가 119였나...? ”
나도 누가 어제까지만 해도 째각째각 잘만 가던 고물시계를 저딴식으로 폐기처분 했는진 알 수
없지만, 내가 조금이라고 형벌에 처하려고 하면 이미 저세상으로 가있는 시계를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에 이젠 담담하다. 아마 내 손에 죽기 싫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지. 흐음... 시계 주제에
꽤나 영리한 녀석들.... 방안을 왔다갔다 허둥대며, 전화번호를 생각해내려고 용을 쓰는 엄마에게
이제 됐다는 제스쳐를 취해줬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봐라. 어느 정신나간 미친 도둑이 아침
시간에 남의 방에 침입해서는 값비싼 물건은 놔두고 시끄럽게 울리는 시계만 없애는 살인극을
저지르겠냐고. 아? 잠깐.... 울리는 시계...? 시계가 울리다니.... 왜 울렸다냐? 내가 어제.... 악!!
“ 엄마! 지금 몇시야? 엉? 아씨...!!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왔다갔다해!!
시계가 지혼자 뒤진 거라니까!!! 것보다 지금 몇시냐고!!! ”
“ 아... 지,지금? 아까 보니까.... 7시... 조금 넘었던데...... ”
“ 뭐!? 왜 말 안해줬어!!! 나 오늘 주번이라서 학교에 빨리 가야된단 말야!!! ”
일주일이 새롭게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에 울고있는 엄마를 쳐다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나.
오늘부터 지긋지긋한 주번이 시작되기 때문에 평소보다 30분 정도는 더 빨리 학교에 가야하는데
이렇게 늦잠을 자버리다니!! 내게 보고도 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시계 덕에 만약을 대비해서 어제
수십번이 넘게 엄마한테 말을 해뒀었는데.... 내 눈에 비치는 엄마의 순진무구한 얼굴. 분명 또
까먹은게 분명했다. 아, 내가 진짜 제명에 못죽지! 고작 이거 하나 때문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지금 내 꼴이 무척이나 우습기 짝이 없었지만, 난 내 몸의 일부분인 두 귀의 안전을 위해 순식간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혼자서 투덜투덜 대며 빠른 손놀림으로 교복을 입기 시작했다.
“ 새흰아. 저기... 어,엄마는.... 엄마는...... ”
“ 아, 진짜!! 말 그만 시키고 내 방에서 당장 나가!!!!! ”
않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자꾸 말을 시키는 엄마에게 고함을 버럭 질러준 후 재빨리 화장실로
향했다. 물로 대충 세수를 해주고, 대충 로션을 덕지덕지 바른 후 거울을 봤을 때.... 그 속의 난
정말 단정한 교복 차림에 아빠가 정말정말 아끼는 영남씨의 특제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3년 전만 해도 우리 동네에 거주하던 변태 아저씨의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 콧구멍 안에 작은 털
까지 볼 수 있었던 내 시력이 지금은 어디로 가출해버렸는지 현재 착용하고 있는 이 뿔테 안경을
벗으면 생활이 전혀 안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엔 대책없이 크기만 한 안경이 불편하고,
게다가 젠장할 고소미의 끈질긴 닥달에 렌즈로 바꿀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 망할 놈의 엄마가
내가 안경을 벗으려는 행동만 취해도 하면 엉엉 울면서 바락바락 생떼를 써대니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다. 학교에서 가끔씩 내 겉모습만 보고 같잖지도 인간들이 시비를 걸어오는 건 절대로
용납이 안되지만... 이제는 꽤 익숙해졌을 뿐더러 척봐도 내가 의도한 대로 범생이 냄새가 폴폴
풍기니 꽤 쓸만한 것 같다. 아니, 근데... 지금 내 귀에 거슬리는 이 소리는 무엇이더냐....?
“ 흐흑.... 훌쩍... 으흑...... ”
“ 아악? 어,엄마.... 혹시... 우는...거야? ”
“ 엄마는... 흰이가.... 흐흑... 까,까먹었쪄... 미안해. 흑... ”
으아... 또 시작됐다. 엄마의 생전 처음보는 사람 뺨칠만한 특기 중의 하나인 무조건 울기.
결코 엄마라고 할 수 없는 우리 엄마는 늘 툭하면 저렇게 울거나, 아님 혼자서 이상한 상상을
하거나 (예로 아까 부숴진 시계를 보며 도둑을 떠올린 어이없는 상상), 혹시라도 내가 저녁 7시
이 후에 들어오는 일이 생기면 뭐가 그렇게도 불안한지 끈질기게 엉엉 울면서 전화를 해댄다.
내년이면 고3 임에 한창 공부하기 바쁜 내가 학교 야자는 커녕 학원에도 가지 않는 건 모조리
다 엄마가 도를 넘어선 생떼를 부린 결과의 산물이라.... 어쨌든! 이럴 땐 회유책이 최고다!!!
“ 아냐~ 엄마. 내가 늦게 일어난 건데 뭘~ 아하하... 악!! 나 늦었다!! 엄마 뚝 그치고....
새흰이가 엄마한테 진짜 미안해. 응? 대신 오는 길에 엄마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올께. ”
“ 훌쩍... 쮸쮸봉으로 사와야 돼.... ”
“ 알았어, 알았어. 아하하.... 그럼 나 학교 갔다올께. ”
“ 쮸쮸봉 잊지마.... ”
마지막까지 훌쩍이며 당부의 말을 잊지않는 엄마를 살짝 노려보며 집을 빠져나왔다. 짜증이
나지만 저렇게라도 달래주지 않으면 나중엔 동네가 떠내려갈 정도로 우악스럽게 통곡을 해대며,
‘ 여보!! 엉엉... 새흰이가..... 우리 새흰이가....!! 여보오~!! ’
이럴 게 뻔하다. 그럼 난 오늘 학교에 가는 걸 포기해야 하는 거지.... 전엔 늘 덤벙대는 엄마가
실수로 발을 삐끗해 2층에서 1층계단을 모조리 다 구르는 바람에 계단 밑에서 구른 모습 그대로
누워서 울고 있는 엄마를 달래느라 지각을 했었는데. 그래, 하긴... 3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우셨지, 쓰읍.... 이런저런 회상에 잠겨 한숨을 푹푹 내뱉는데....
문득 그 때 딱 한 번 지각한 일로 아직까지도 별 생색을 다 내는 땜빵 학주의 비열한 면상이
떠올랐다. 그 즉시 세계 육상계의 꽃 팀 몽고베리가 아까의 엄마처럼 엉엉 울고 갈 정도의 빠른
속도로 달려서 도착한 학교. 내가 1년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신한고교」라는 글씨가 박힌 교문
담벼락에 서서 다시 한 번 교복 상태를 점검했다. 염색 NO, 악세서리 NO, 명찰 OK, 그 밖에 것
모두 다 완벽!! 주머니 속에 자고 있는 담배가 조금 걸리긴 하지만 설마 주머니까지 뒤지겠냐고.
허리를 꼿꼿히 세우며 당당한 걸음을 보이는 나를 탐탁치 않은 눈빛으로 훑어보는 땜빵 학주와
눈이 마주친 동시에 굳어진 내 얼굴. 순간 파지직- 하며 스파크가 이는 착시현상이 보여졌다.
‘니가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건데?’ 란 무언의 눈빛을 읽었는지 재수없는 땜빵 학주가 새우만한
두 눈을 이글거리며 그새 작대기를 들어 나를 처억 가르킨다.
“ 거기, 이새흰!!! 넌 선생님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저 버르장머리 없는....
쯧. 여하튼, 오늘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지만 다음에 두고보자!! ”
나참... 그래도 한 고등학교의 학주라는 놈이 나같이 착한 범생이를 희롱해도 되는 건가?
내가 만약 지각이라도 했으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한 눈빛이군. 쳇! 속에서 살짝 울컥 했지만
그냥 ‘다음에 뭘 두고봐?’ 란 건방진 눈빛으로 위아래를 쓰윽 훑어주고는 현관으로 들어갔다.
몇개월 전, 정말 어쩔 수 없이 학생부실을 몇 번 들락날락 거린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나만
보면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 나는 그런 견원지간이 되버렸다. 딴 선생들은 조용히 공부만 하는
날 별 존재감 없이 봐줬고, 그렇게 큰 일이 아닌 이상은 늘 ‘모범생 이새흰’ 이란 타이틀 하나로
쉽게 넘어가졌지만, 저놈의 망할 학주는 시시콜콜 귀찮게 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내가 꿈꾸는
평탄한 학교 생활을 방해하는 또다른 인물이 있으니.... 방년 39세의 우리 반 담임 선생인 일명
노처녀라 불리우는 노봉숙. 솔직히 뒷통수에 땜빵을 하나 단 채로 되도 않는 작대기를 후리며
불쌍한 중생들을 괴롭혀대는 학주 보단 아예 주둥이에 모터를 달고 사는 천부적인 입놀림의
봉숙 여사가 훨씬 더 껄끄러운 존재였다. 착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나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는
노처녀. 도대체 무슨 억화심정이 있는지는 아는 바 없지만, 약 한 달 전부터 끊임없이 내 귀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설마... 조금 늦게온 일로 또 날 갈구는 건 아니겠지...!? 잠시도 쉬지않던
그 입을 생각하니 반사적으로 귀에 먼저 손이 갔다. 부디 오늘 하루만 귀가 고통받지 않게 해달
라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기도를 살짝 해주고 교실 뒷문을 확- 열어제쳤다. 분명 교탁 앞에서 날
노려볼 거라 생각했던 노처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순간 눈 앞이 어벙벙 했다. 아, 이런이런!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잊고 있었군.... 노처녀 담탱은 자습시간에 교실에 온 역사가 없잖아!!!
“ 아씨... 뭐야? 괜히 가슴 졸였네. 하하하하.... ”
혼자서 작게 중얼대며 허탈한 웃음을 살짝 흘렸다. 날 홀깃홀깃 쳐다보는 짝의 시선을 무시하며
자리에 앉아서 공부할 책을 막 펴는데, 시뻘건 고무장갑을 낀 손을 허리에 대고 나타난 외계 인간.
“ 야, 이새흰! 넌 지금 웃음이 나와? 니가 늦게 오는 바람에 나 혼자 걸레 빨고
칠판 정리 다 했잖아~! 어쩔 거야? 응? 어쩔 거냐구~! 빨리 나 책임져!!! ”
“ 뭐야, 고소미. 헛소리 말고 당장 네 자리로 돌아가. 공부하는데 방해 돼. ”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울상을 짓는 고소미와 제각각 모여 수군대는 반 녀석들. 하긴, 지금 대사는
내가 생각해도 엄청 재수 없었다. 하지만 이게 내 일상인 걸. 지금 구석에서 열심히 놀고 있는 아주
한심한 무리들아. 나중에 사회에 나갔을 때 쓰레기가 되어 폐기처분 당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한가
하게 남을 헐뜯으며 험담할 시간도 부족할텐데.... 참으로 미래가 암울한 녀석들을 동정어린 시선
으로 쳐다봐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때 들려오는 고소미의 아주 청천벽력 같은 개소리.
“ 아까 노처녀 왔다갔는데.... 히힛... 넌 이제 죽~었다! ”
뭐...뭐시라? 봉숙이 그게 아까 교실에 왔다갔다고??! 아니, 그게 오늘 주워먹은 게 잘못됐나!?
왜 평소 하지도 않던 짓거리를 하는 거냐?! 그것도 왜 하필 오늘 아침에!!! 이제는 학교도 착실히
다니고, 또 담배도 예전에 끊고, 함부로 폭력도 않휘두르고, 뺏은 돈으로 오락실에도 않가는데!
왜 뭐같은 신은 나의 소박한 소원조차 들어주지 않는 걸까.... 정말 울고 싶은 심정에 조금 있으면
노처녀로 인해 주말에 복구된 내 귀가 또다시 처참히 썩어들어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한순간에
의기소침해 졌다. 괜히 공부할 맛도 않나 책을 탁 소리나게 덮는 날 보며 내 불행이 자기 행복인
마냥 아주 얄밉게도 꺄르르르 웃는 괘씸한 고소미. 순간, ‘웃는 얼굴에 침뱉으랴?’ 라는 아주 무시
무시한 속담이 생각나 회심의 미소를 사악하게 씨익 지었지만, 갑자기 내 머릿속을 파바박 스치는
문제의 꿈. 그래, 오늘은 좋은 꿈도 꾼 것 같으니까 봐준다는 차원에서 차마 실행에는 못옮긴 채
욕만 살짝 읊조려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1교시 수업시간.
“ 이새흰. 너 혼자만 인사 새로 해라. ”
1교시 수업을 하러 우리 반에 등장한 땜빵 학주. 아까 교문 앞에서의 일을 떠올리는 듯이 인사를
하는 태도에 성의가 없다며 열 댓번이 넘는 횟수를 거듭하며 인사를 시켰고, 이에 더욱 더 기분이
하락한 내 몸에선 언제부턴가 검은색 오로라가 풍겨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까닭으로 늘 수업 때
마다 나를 지목하던 뽕박사 조차 건드릴 엄두를 못냈고, 불쌍한 표정을 일관하며 수업을 마쳤다.
“ 새흰아. 너 오늘 왜 그렇게 저기압이야?
너희 엄마가 또 네가 밤새 한 과제를 실수로 밖에 갖다버린 거야? ”
“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꺼. ”
“ 싫어싫어~ 흰이 니가 이렇게 축쳐져 있으니까 재미없잖아~ 나 심심하단 말야~! ”
“ 에휴...... ”
그러나, 오로지 겁대가리를 상실한 고소미 만이 쉬는 시간마다 내 옆에 앵겨 붙어서 애교 아닌
애교를 떨어댔다지... 하지만 난 평소와 같이 등짝을 내려치는 뼈아픈 응징을 해줄 수 없었다.
이제 곧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사형수 마냥 눈 밑에 다크서클을 그리고 있는 나. 아... 내가 언제
부터 이딴 우스운 꼴이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난 끝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을 갈망하고
또 갈망했다. ‘넌 반장이야...’ 로 시작되는 노처녀의 설교는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오지 않았으면 했던 종례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다행히 역사 수업이 없는 날
이라 볼 일이 없었다만, 아쉽게도 앞 문을 열고 당당히 교실에 등장하신 그 분. 얼굴의 자글자글한
주름을 커버하려는 마음에 화장을 덕지덕지 펴바른 노처녀는 안그래도 충분히 괴기스러운 면상에
눈 밑에 그려넣은 아이라인이 장난아니게 번지는 통에 더욱더 호러스틱해 보였다.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여유있는 미소를 유유히 띄고 있는 노처녀. 그 눈은 곧 내게 멈춰졌고, 입가에 슬쩍 지어
지는 비열한 미소에 난 끝내 억장이 무너지는 큰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 그럼 이제 출석을 부르겠어요. 오호홋~ 1번 강송구, 2번 강팔희, 3번 고소...... ”
복도 곳곳에서 기쁨에 찬 환호성이 들리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침울한 반 분위기. 이리저리
갈라지는 목소리로 하루빨리 종례가 끝나기 만을 기다리는 반 녀석들의 귀를 천천히 압박해오던
노처녀가 20분이란 시간이 지나서야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학기 초부터 생각을 했던 거지만
왜 하필 종례시간에 출석을 부르는 걸까? 도무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정신세계다.
“ 흠흠... 36번 김주동? 김주동. 오늘도 없나요? 김주동......!!!! ”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된 봉숙의 눈물어린 고함 소리.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됐는진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종례시간 마다 도망가는 ‘김주동’ 이란 이 미친놈은 아예 정신이 나간 인간
임이 확실했다. 어쨌든 나를 포함한 반 녀석들은 히스테리적 소음에 끝끝내 얼굴을 구겼고, 몇 번
이고 되풀이하다 제풀에 지친 노처녀는 손에 든 출석부를 감정이 실린 손놀림으로 타악 놓더니
“ 오늘은 특별히 야자가 없는 날이니, 그만 집에 가도 좋습니다.
그럼 반장은 정확히 10분 뒤에 교무실로 오세요. 오호호홋~! ”
라는 끔찍한 발언을 남긴 채 교실을 나갔다. 야자가 없다는 소식에 30분이나 뒤늦게 기쁨에
찬 환호성이 교실 안 가득 울려 퍼졌고, 후다닥 가방을 어깨에 둘려매며 뛰어나가는 반 녀석들.
이제 때가 왔음에 차분히 마음을 다잡고는 ‘그럼 새흰아! 오늘도 수고해~!!!’ 라는 말을 내뱉는
정말 얄미운 고소미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쳐준 후에 1층에 있는 교무실로 바삐 내려갔다.
정확히 10분 뒤에 오라는 건 빨리 도착한다거나 늦는 일 없이 말그대로 정확히 10분 뒤라는 말.
아. 삼삼오오 떼를 지어서 교문으로 향하는 중생들의 뒷모습에 살며시 가슴이 아려오는 구나...
[ 교무실 ]
“ 오호호홋, 이새흰. 네가 왜 내려온 건지 알겠니? ”
“ 예. ”
꽤나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벌써부터 거슬리는 노처녀의 얼굴과 목소리는 내 얼굴을 찌푸리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노처녀와 방과 후에 얼굴을 가까이 대면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몇 번을 봐도 여전히 적응 안되는 얼굴. 나를 훑어보는 번뜩이는 눈빛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드디어 노처녀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늘상 똑같은 내용의 설교가 오늘도 내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 넌 반장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내가 담임으로 있는 아주 자랑스러운
우리 2학년 9반을 대표하는... 그리고 선생님을 보필하며 반을 위해 봉사할 반장으로 뽑혔지.
게다가 새흰이가 시험 때마다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아서 이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의
시기어린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단다. 그래서 내가 늘 자랑스러워하는 거... 알고 있지? ”
“ 예. ”
“ 새흰이가 그저 우리 반을 이끄는 반장이면 별로 큰 문제가 될 게 없겠지만....
하지만 새흰이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우리 신한고의 부회장이란 직책도 맡고 있잖니.
그렇지? 그러면 그만큼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되지 않겠니...? 그런데!!! ”
단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 벌써 수십 번 듣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외워버린 봉숙 여사의 설교가
잠시 멈췄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노처녀의 설교. 나와 함께 길을 걸어가던 누군가가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홀연히 자취를 감춰도 전혀 관심없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신경함을
소유한 내가 노처녀를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끄럽고 귀찮은 걸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다.
“ 부회장이란 게 허구한 날 학생부실을 지 안방처럼 들락날락! 지각도 밥먹듯이 하고!!
오늘만 해도 그래!! 주번이면서 10분이 지나도 올 생각을 않 해? 불쌍한 소미가 다 했잖니!!!
내가 아침에 교실에 와보지 않았다면 늦게온 사실도 몰랐을 거 아냐? 눈속임이나 하려 들고.
그리고!! 반장이면 반장답게 종례시간에 반 친구를 다 출석시켜야 되는 게 아니니!? ”
저놈의 잔소리... 정말 듣기 싫다. 왜 지금 내가 설교를 듣고 있어야 되지? 지금 이딴 얼토당토 않는
짓만 하지 않는다고 하면 당장에 저 위선이 가득한 봉숙의 멱살을 잡아 가볍게 던져버리는 건데.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인 성격에 이렇게 꾹 참고 듣고있는 건 지금의 난 비록 겉모습에 지나지 않아도
어쨌든 공부 잘하고 행실 바르고 선생 말씀에 꿈뻑 죽는 그런 멍청한 집단에 속해 있단 이유에서다.
약 한 달 전부터 시작된 노처녀의 설교. 대본을 외운 듯 똑같은 설교를 방과 후 교무실에서 1시간
동안, 그것도 이유도 없이 듣는다면 그 누구가 미치지 않을 쏘냐. 아무리 선생이라도 지금 내게
하는 행동은 그저 화풀이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게 마치 귀가 썩어들어갈 것만 같은 고통에
난 조금씩 열받기 시작했다. 노처녀가 책으로 책상을 탁탁 두들길 때마다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금방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이 들썩였다. 그러나.... 인내로 딴청을 피우며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 참자, 참어.... 옳지, 그래. 이새흰 잘한다. 이제 10분만 더 무시하면 되니까..... ’
오늘은 집에 가서 무슨 공부를 할까, 쮸쮸봉은 과연 남아 있을까 란 딴 생각을 하며 드디어 10분
이란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제풀에 지친 봉숙 여사의 ‘그만 가 봐’ 란 말을 기다리는데...
이건 나만의 생각 아닌 착각이었을까? 평소 땐 1시간이면 끝났을 설교가 오늘은 무엇이 노처녀의
심기를 거스르게 했는지 도대체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어진 설교에 시간
역시 계속 흘러갔고.. 교무실 안에 걸렸있던 시계의 바늘이 어느새 6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내가 저번에 경고했었지? 학생부실에 가면...... ”
1시간 40분이란 시간 동안 쉴새없이 지껄이고도 아직도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는 봉숙 여사.
그닥 별로 달갑지도 않는 되풀이 학습을 받으며 앉지도 못한 두 다리는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했고
해가 기울어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창 밖을 보니 꽉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앞머리를
반듯하게 넘긴 이마에 솟아오른 힘줄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긴 지 오래였다. 오늘 아침에 내 잠을
망친 시계에게 예의상 묵념을 해준 일이 잘못한 일인가? 아니면... 경찰을 부르려고 날뛰다가 우는
엄마를 달랜 게 잘못된 건가... 오늘은 이상하게도 왠지 참을 수 없었다. 여태껏 그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도 않쓴 채 한 쪽 귀로 가볍게 흘렸었는데, 오늘따라 노처녀의 설교는 너무 거슬렸다.
“ 내가 몇 번을 말했니? 한 번만 더 학생부실에 갈 시엔 어머니.... ”
‘ 탁-! ’
“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
“ 뭐,뭐라구...?! ”
“ 결.론.이. 뭐.냐.구.요. ”
딱딱하게 굳어진 내 표정과 한없이 시린 말투. 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자기가 책으로 탁탁 대던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려친 내 행동에 노처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한동안 벙쪄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매서운 눈길로 날 노려봤다. 이거 참... 7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면 큰일나는데....
다른 생각에 잠겼던 난 순간 여태 보여왔던 이미지를 떠올렸고, 주위를 홱홱 돌아보니 다행히도
선생들은 모조리 다 퇴근을 하신지 오래셨다. 오... 이거 간만에 선생하고 말장난이나 해볼까?
늘 짓궂은 내 말 한마디에 울음을 터뜨리며 나가던 선생들... 간만에 입가에 밝은 미소가 돌았다.
이 생각 하나로 인해 입가에 생긴 미소가.... 후에 어떤 일을 가져올 지는 정말 상상도 채 못했다.
“ 너 이게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야!? 엉? 어디 선생님한테....!! ”
“ 노봉숙 여사. 혹시 오늘 점심 때 약주 드셨어요? ”
“ .......뭐,뭐...? ”
“ 아니, 아까부터 계속 술취한 사람처럼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 하시길래, 전 또 오늘 약주 한 잔
살짝 하신 줄 알았죠. 그게 아니라면... 점심 때 먹은 시금치 때문에 단단히 실성을 하셨거나..... ”
“ 너 징계받고 싶어?? 어디서 헛소리야!?!! ”
“ 징계라니 그거 참 좋겠네요. 사실, 잡초를 뽑아본 지도 너무 오래됐거든요.
다만 선생님께 부탁이 하나 있다면... 제발 관심 좀 꺼주실래요? 절 좋아해도 날마다 방과 후에
만나서 데이트를 하는 건 좀 심하잖아요. 같은 여자라도 저 역시 나이 많은 여자는 싫거든요.
마지막으로, 종례시간에 교실에 없는 인간은 제가 아닌 선생님이 직접 찾아와주셨음 하네요. ”
“ 뭐,뭐라고?? 이새흰, 너...!! 너너너!!!! ”
“ 너 뭐요? 간.단.히. 결.론.만. 말씀하시라구요. ”
어느새 앉아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뺨이라도 휘갈기려는 듯 위로 치켜든 노처녀의 손을
간단히 잡아 채고는 나에 대한 분노로 일그러져 얼굴에 두껍게 찍어 바른 파우더 가루가 바닥으로
추락중인 노처녀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어줬다. 내 손에 잡힌 팔목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아픔에
인상을 쓰던 노처녀는 끝내 세상에서 가장 추한 몰골을 만들어 내며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 기,기,김주동! 김주동 잡아와!!! 내,내일 종례시간까지 김주동 앉혀놓지 않으면...!!
이새흰 너...!! 너,너는......... 너는...너는...!! 강제 전학인 줄 알아!!!!!!!!!! ”
이젠 아주 어두워져버린 창 밖.
학생들이 하교해버린 텅텅빈 학교 안의 교무실엔 노처녀의 악받친 괴성만이 메아리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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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1.
[ 시작 ]
넌 미친놈이야… # 01
에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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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760
05.09.14 02:18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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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아!>_< 내용이 길어서 찐짜// 조았어용!ㅋㅋㅋ 재밌땅!!!!!!!!ㅋㅋㅋㅋㅋ
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대단...... 이 소설 박력있어요.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거든요. 오우...... 소름이....;;;;;;;
헉... [사랑했었다_。] 님. 정말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크하하 , 오타발견-_-!!!!!! ㅎ 뽕박사는 영어쌤이자나엽 , ㅋㅋㅋ;;;
아아!!! 그렇게 오타를 수정한다고 야단 법석을 떨었는데도 또 오타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리는 16편을 않올라오구......ㅋㅋ 1편부터 다시보러 왔어요ㅠㅁㅠ;;;;;; 이히히힛~
[당돌한렁쇠] 님ㅠㅠ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오늘 동생이 오는 바람에 수정을 해야할 부분을 수정 못했답니다. 그래서 내일 낮에 올릴 계획인데... 정말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