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7.21) 말씀/ 데살로니가 전서 5: 16∼18
항상 기뻐하는 호모 루덴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판사 문유석의 책 ‘판사 유감’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그 책의 뒤쪽에서 어떤 법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번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하는 분들이 모인 어떤 모임 뒷풀이 자리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한 법관은 10년 동안 tv도 한번 안보고, 하루도 빠짐없이 재판기록을 읽고, 짬이 나면 대법원 판례까지 꼼꼼히 읽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기본을 잊지 않기 위해서 민법을 비롯한 주요 법조문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실력을 인정하는 대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한 반응들이 영 시쿤둥 하더니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난 솔직히 그런 판사에게사 재판을 받고 싶지 않다” 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요? 학업 성적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법관들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일하고, 새벽까지 1천 페이지가 넘는 판결문을 쓰기도 하고, 과로로 쓰러지고,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정작 국민의 평가는 냉혹하기만 한 이유는 그것이 공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놀 줄도 모르고 모든 삶에 모범생이지만 세상에 이렇게 치이고 저렇게 치이며 살아가는 평범 혹은 평범도 못한 사람들과의 괴리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감하려면 소통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소통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동시대인들이 어떤 고통과 고민,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지 알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컴뮤니케이션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수석으로 일관하며 모범으로 살아온 하이칼러들의 약점인데 마지막 장에서 ‘나는 놀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글을 소개하였습니다. 아마도 공부만 하며 살아온 판사들이 놀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일반인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그런 취지에서 글으 슨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글 중에 홍은택씨가 지은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이란 책을 또 소개하였습니다. 홍은택 씨는 14년간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고, 유학까지 와서 2년간 학업과 일을 병행한 끝에 만 41세에 학위를 받고, 공식으로 백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여행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80일에 걸쳐 미 대륙 6,40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횡단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조국을 알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불우이웃 모금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아닌, 어떤 사명감 따위도 없이 오로지 재미 때문에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광대한 평원을 지나고, 하늘에 닿은 산맥을 넘으며 조리도구, 초를 켜는 랜턴, 여벌 싸이클복, 신발까지 하나씩 포기하고는 밤이면 0.6평짜리 텐트를 입고 대지에 자면서 선언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에 그 내용입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돈이나 권력, 지위보다도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근대화가 우리 머릿 속에 새긴 집단적 무의식인지 또는 자본주의의 의식화인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게 있다.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 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 나는 호모 루덴스 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루덴스는 '노는 인간' 또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라는 사람은 1938년에 출간한 『호모 루덴스』라는 책에서 에서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와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처음으로 시작)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저도 이글에 공감하면서 전에 카스에도 올려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많이 생각해보게 하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잘 안 되서 그렇지 다 그렇게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해 볼 것은 일과 놀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날마다 빈틈없이 일하며 수고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에게 '놀이' 이야기는 사치스런 것일지 모릅니다. “놀면 세상이 돌아갑니까? 놀면 누가 밥 먹여주나요?” 바로 이런 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종교주의 사람들의 눈에는 '어찌 그런 한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일이냐, 놀이니야 극단적이기보다 중간이 좋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과 놀이의 극단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소유냐 존재냐를 선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놀이냐 일이냐를 선택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한 어린 아이 예를 들자면 엄마가 일을 시켜서 벽돌을 날라 오라고 하면 억지로 순종할 때 일이 되는 것이고, 자기들끼리 집짓기 놀이를 위해서 벽돌을 나르면 놀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읽과 놀이의 근본 차이가 무엇입니까? 일은 여유가 없고 힘듭니다. 수동적입니다. 놀이는 여유가 있고 즐겁고 기쁘다는 것입니다. 능동적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도 일과 놀이를 이원론적으로만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일과 놀이도 혼돈이 옵니다. 이렇게 놀아도 되는가? 그만 놀고 공부해라, 조금만 놀고 일해라. 노는 것은 죄가 되고 일은 의무수행이 됩니다. 이처럼 생각이 고정되면 평생 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세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평생 일만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벌어놓은 돈 쓰지도 못합니다. 사람은 일만해도 힘들도, 일을 안 해도 힘듭니다.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놀면서 즐겁게 살 수 이다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고정된 근본 틀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먼저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힘들게 일을 시작했습니까?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3장까지 갑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수고하며 일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평생 수고하고 땀 흘려 일하는 운명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에덴 동산에는 일이 없었습니까? 놀기만 했나요? 무의 도식 아닙니다. 그들은 동산의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며 관리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에덴 동산에도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덴동산에서는 자유와 즐거움 행복 속에서 일을 했고, 추방당한 후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일을 하게되었습니다. 엔덴 동산에서 일은 즐거운 일 이었고, 저주받은 땅에서 일은 놀이가 사라진 의무 고통이 된 것입니다. 여유가 없는 일, 쉼이 없는 일이 저주와 불행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일의 반대는 노는 것, 노는 것의 반대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영어공부가 재미있나요 재미 없나요? 재미없는 것은 시험을 치루려고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언어공부를 하지 않고 이아들끼리 언어를 쓰며 그냥 놉니다. 그런데 어른보다 더 빨리 배웁니다. 발명의 왕 에디슨은 일류의 삶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하기 위해서 시계가 계란으로 착각하여 끓일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한 번도 일한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놀이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냐 노는 것이냐는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으로 살 수 있습니까? 성경적 근거를 한번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바울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라고 하였습니까? 살전 5: 16∼18 “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고 즐겁게 산다는 것이 호모루덴스 아닙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돈 많이 벌고, 사업 잘 되고, 건강하고, 자녀들이 잘 되고 그러면 기뻐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몸이 아프고, 사업은 잘 안 되고, 자녀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인간관게가 꼬인다면 기뻐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짜증나고, 힘들고, 부정적이고, 힘들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 세상은 기쁜 날들보다 힘든 날들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한 나폴레옹조차 행복한 날이 일주일밖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인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가문 좋은 학벌도 아닌데다 목사가 되었고, 무안 깡 실골에서 30년 넘게 지내고 있고, 사람들에게 나타낼만한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에게 물려줄 개인 주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살고 있으며, 교회는 아주 작은 소수의 개척 교회입니다. 혼자 산지는 벌써 20년... 겉으로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주 즐겁게 행복하게 살고있습니다. 재미있게 삽니다. 이런 기쁨이 어디서 왔을까요? 에리히 프롬은 이런 기쁨을 존재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외적인 소유나 조건이 아닌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세레요한 역시 자신이 누린 존재의 기쁨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3: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이러한 기쁨! 이런 기쁨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는 재산이 있어서 돈이 많아서 인기가 좋아서 명성이 있어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가가 떨어지고 자신은 쇠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마저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께로 떠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는 이기쁨을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소리를 듣는 친구의 기쁨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 여러분, 주님은 기쁨의 근원이십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안에 기쁨은 무궁무진 합니다. 주 안에 있으면 혼자 살아도 자유할 수 있고, 둘이 살아도 감사입니다. 주 안에서는 고독도 성숙의 시간이 되기에 기쁘고 즐겁습니다. 재물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감사가 됩니다. 나의 생명 되시고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니 없어도 부자입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어디나 천국입니다. 내가 혹 실수하고 잘못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니 주님 안에서는 항상 감사이고, 기쁨입니다. 설령 일을 못하고 놀아도 부담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주 안에서는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니 언제나 자유입니다. 그러니 모든 삶은 놀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날마다 바닷가에 가서 놉니다. 큐티하며 놀고 기도하며 놀고, 고동잡으며 놀고 책을 읽으며 놉니다. 맨발로 바닷가를 거닐면서 놉니다. 예수를 만나면 이렇게 모든 삶의 목적도 태도도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땀 흘려 수고하는 저주받은 인생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며 사는 호모루덴스가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살면 인생살이는 고난의 길이 아니라 소풍입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놀이를 택하여 기브게 살 수 있지만 , 믿음이 없으면 일과 놀이라는 이원론적 생각의 굴레에 못 벗어나 매이게 됩니다. 물론 알아도 당장에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놀면 당장 누가 경제를 책임져주는가? 다시 현실을 보면 이원론적인 문제가 치고 들어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노는 것이 일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평생 일하는 사람은 많아도 평생 잘 스스로 노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 따라서 무조건 놀다가는 낭패를 본 경험도 많습니다. 이런 경험과 생각도 극복해야 합니다. 노력이 피료합니다. 놀이는 일을 띄어 넘는 믿음이며 높은 철학입니다. 이 놀이 역시 존재냐 소유냐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놀이 속에 일이 있고, 일 속에 놀이가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일처럼 인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놀이처럼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놀이처럼 기뻐하며 살아야할까요? 놀이가 삶의 최고의 높은 단계입니다. 놀이는 유연하고 놀이 속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삶에 쉽표와 틈이 있습니다. 놀이처럼 살 때 비로소 인간은 여유 속에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존재를 인식학하고 자아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즐겁습니다. 유홍철 씨 글에 특히 눈에 들어오는 말은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노는게 알고보면 신적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놀이가 될 때 자립적이고, 창조성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일은 소유 차원이고 놀이는 존재차원입니다. 높은 차원이라 쉽지 않지만 가능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닮은 자녀들로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킹이 말했듯이 삶 속에서 작은 일, 하다못해 청소를 해도 베에토벤이 음악을하 듯이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이... 적어도 지구의 한 모퉁이를 깨끗이 닦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해보는 것입니다. 일과 놀이 따로 없습니다. 일이냐 놀이냐 무엇을 택하는가는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뻐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주님의 뜻이며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 살 수 있습니다. 소유적인 기쁨은 불가능하지만 속에서 솟아나는 존재적인 기쁨의 사람이 될 때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 모시고 주 사랑 안에 사는 존재가 되고, 주님의 말씀을 좋아 살며 자유와 생명을 누리며 사는 자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며 기뻐하며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한번뿐인 짧은 세상 이왕이면 주안에서 기쁘고 즐거운 삶을 택하여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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