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부터 본격화된 조선인 여공들의 일본 이주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조선인 노동자 수가 너무 많아 ‘조선방적’이라고까지 불린 회사에는 3만 명의 10대 소녀들이 살인적인 노동현장에 노출된채 노예와 같은 차별적 삶을 살았다. 조선인 여공뿐 아니라 오키나와나 오도열도 오사카남부나 시코쿠 지역의 피차별 부락민 출신 여성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 조선인 여공들은 1930년의 키시와다 방적 노동쟁의에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항의 표시이기도 했다.
키시와다 방적은 1941년에 현재의 유니치카인 테이코쿠산업에 합병되었지만 하루키 지역에서는 가장 방대한 공장을 경영했다. 하루키 중학교의 담벼락으 당시의 공장 벽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감옥과 같이 삼엄하게 통제하기 위해 쌓은 높이2m로 세운 뒤 또 그 위에1m의 철선 가시를 설치해 놓았다.
수천 명의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 동원된 사노비행장도 그활주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노역과 하쿠라자키역 사이의 농민들을 강제 추방하여 건설한 이 비행장은 일제 말 악명 높은 특공기의 출격을 돕는 중계지였다. 근처 카미노쵸니시에 위치한 키시와다 공동묘지에는 이름도 없이 노동현장에서 죽어간 수많은 여공들의 무명 묘비가 모여 있다. 그곳에 포함돼 있을 수많은 기독교인 여공들의 신앙은 어떤 것이었을지 무거운 마음으로 묵상하게 되는 곳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경목사 정부경목사 히구치 요우이치목사가 협력하여 펴낸 “현해탄을 건넌 여성 신도들의 이야기“와 김찬정이 쓴 “조선인 여공의 노래”에 잘 소개되어 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누가복음24:3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