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풍노조 운동사 서평
이종구 (성공회대 교수, 사회학)
“원풍모방 노동운동사”와 원풍 노동자들이 살아 온 이야기를 모은 “못 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가 세상에 나왔다. 우선 “원풍모방 노동운동사”는 어두운 유신시대를 버티어 냈고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맞서 싸우다가 강제 해산된 뒤에도 끈질기게 운동을 계속했던 자랑스러운 민주 노조에 대한 기록이다. “못 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는 7명의 노동자가 구술한 개인의 생애사를 모은 책이다. 이 책은 노동자 개인의 삶 속에서 노동과 노동운동이 가지는 의미를 찾고 있다. 노동운동사가 조직의 부침이나 활동성과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폐단을 극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노동운동사부터 소개하면 이 책은 집필자가 있기는 하지만 당사자들이 스스로 작성한 기록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6부와 부록으로 구성된 운동사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한국의 노동운동과 원풍 노조의 운동 과정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출신과 생활환경, 노동조건, 군사정권의 노동통제 수단, 산업선교와 카톨릭노동청년회를 비롯한 종교인과 지식인의 노동운동 지원 상황, 대학가에서 복원된 탈춤과 민중운동의 접목, 등과 같은 1970~80년대의 사회상과 민주화 운동 과정을 실감할 수 있는 생생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원풍모방 노동운동사”의 가치는 기억을 기록으로 보존하는 수준을 넘어선 지점에 있다. 독자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둘러 싼 논쟁의 역사적 맥락을 어렵지 않게 짚어낼 수 있다.
원풍의 작업장과 기숙사에 대한 노동자들의 회상은 한국의 초기 산업화 과정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궁핍하고 답답한 농촌에서 올라 온 노동자들이 작업은 힘들었지만 기숙사는 멋있었다고 동료들과 재미있게 놀러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불쌍한 노동자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 노동운동을 논의해 온 일부 지식인들의 고정 관념을 부정하고 있다. 임금의 획득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친구를 사귀는 것도 노동자들에게는 소중한 일이었다. 즉, 노동자의 인격과 주체성을 존중하는 노동연구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원풍 노동자들이 기억하는 조그마한 즐거움도 당시에는 희귀한 것이었으며 사실상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던 소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틈새가 노동운동의 성과물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원풍 노동자들은 8시간 3교대제를 확보한 덕분에 다른 투쟁 현장을 지원하러 갈 수 있었으며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군사정권은 주체성을 가진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성장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으며 원풍 노조는 전두환 정권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어 강제 해산 당한다. 반면에 일부 노동자들은 국가와 자본이 제공하는 작은 행복을 포기할 수 없어 구사대가 되어 민주노조 파괴에 앞장서는 비극도 일어났다.
원풍노조의 경영참여와 노조 민주화 과정에 대한 기록도 귀중한 자료이다. 원풍노조가 한국에서는 지금도 생소한 산업민주주의, 조합민주주의를 구현하려 시도한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또한 산업선교, 카톨릭노동청년회, 크리스챤 아카데미와 원풍 노조의 관계에 대한 기록도 초기 노동운동의 발전 과정을 파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기초 자료이다. 그러나 광주 항쟁 이후 제도적 민주주의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원풍노조와 산업선교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으며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산업선교의 실천 범위라는 큰 신학적 논쟁거리를 남겼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영등포 산선의 조지송 목사가 남긴 진솔한 고백은 양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보인다.
원풍의 활동가들은 노조가 강제 해산당한 다음에도 법외 노조를 조직하고 민주노조 운동을 끈질기게 이어갔다. 이 운동은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한국민주노동자연합으로 이어져 갔다. 이 책은 1970년대에 민주노조를 경험한 기층 노동자 출신의 활동가들과 사회변혁 지향적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 세력 사이의 갈등을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순진하게 민주 회복의 가능성을 믿는 실리적 조합주의”와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붕괴와 민중 주도 사회변혁의 도래를 신봉하는 정치적 노동운동” 사이의 간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여기에서 원풍 노동자들이 지금도 많은 당사자들에게 돌이켜 보기도 싫은 상처로 남아 있는 노동운동 노선을 둘러 싼 대립을 공개적으로 지적한 것은 대국적으로 보아 좋은 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향에서 굶어죽기 직전에 도시에 와서 직업을 전전하다가 원풍에 들어와 행복했다고 증언하는 노동자를 어려운 정치경제학을 모른다고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식인 출신 노동운동가들은 노동운동의 역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하여 오고 있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제는 대국적인 측면에서 양자가 허심탄회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과정을 밟을 때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자가 만든 노동운동사의 가치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명예회복 투쟁도 지식인과 노동자가 점유하는 사회적 위상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다수의 지식인 출신 활동가들은 과거사 청산과 명예회복에 대해 현실적인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있지 않았으며 다소의 보상금이라도 받으면 오히려 부채의식마저 느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풍 노동자들에게는 국가 기관이 “빨갱이가 아니라 민주화 유공자”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증언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아직도 과거사 청산을 둘러싸고 싱갱이를 벌이고 있는 정치인과 여론 주도층들이 반드시 명심해야할 내용이다.
물론 옥의 티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대적 배경으로 경제개발과 산업화 과정을 서술한 부분에는 1960~70년대의 운동권에서 통용되던 정세분석 담론이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하나만 예를 들면 오일륙 쿠데타 이후 수출지향형 공업화를 서둘렀다는 서술이 나오고 이를 전제로 노사관계와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폭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의 공업화는 수입대체 산업의 육성이었으며 본격적인 수출드라이브는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최신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시대적 배경을 차분하게 서술하는 보완 작업을 기대한다. 또한 강제 해산 당시에 쓰러진 여성 조합원을 업고 병원으로 옮겼던 남성 동지들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은 것도 아쉽다.
“원풍모방 노동운동사”는 본문보다 별지와 부록이 재미있다. 공식적인 입장과 담론이 포함될 수밖에 없는 본문에는 아무래도 어디에서인가 한 두 번 들었던 것 같은 얘기가 많다. 이 포함된 부록 등장하는 자녀들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제 모두 중년을 넘어선 노동자들이 회상하는 고향과 가족 이야기는 모두 한국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여기에서 “못 다한 꿈도 아름답다”에 수록된 생애사의 진가를 재확인할 수 있다. 생애사를 구술한 7명의 사연은 서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하다. 전후 농촌의 빈곤과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교육 기회의 박탈, 상경과 나이를 속인 위장 취업, 원풍에서 정기적인 급료를 받고 더운 물이 나오는 기숙사가 있는 원풍에서 느낀 행복, 노조와 산선에서 쌓은 교양과 사회의식, 해고와 투옥을 거치며 새삼스럽게 깨달은 열악한 중소영세 사업장의 현실, 강인한 생활인과 활동가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노조운동의 체험, 끊임없이 학습과 자기 개발을 지속하려는 노력, 등이다. 이들의 인생 역정은 노동자, 여성, 시민으로서의 주체성 획득 과정이다. 또한 한국 사회 저변에서 진행된 기초적 사회관계의 민주화 과정이기도 하다.
“원풍모방 노동운동사”와 “못 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를 읽으며 이제부터라도 노동자가 쓰는 노동운동사가 많이 나올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가와 자본이 편의적으로 왜곡한 엉터리 역사가 정사로 기록되고 민중의 실제 이야기는 야담으로 남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원풍 노동자들의 기억을 담고 오늘 세상에 나온 2권의 책은 같은 시대를 살아 온 다른 많은 노동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정직하고 성실한 기록을 남긴 원풍 노동자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하며 서평을 마친다.
첫댓글 서평 을 통하여 많은것을 느끼고 실천 해야 될 과제도 찿게 하네요 이종구 교수님은 작년 용산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자주 오시고 아픈 대화도 나눈 교수님 이네요.
짚어주신 서평 에 감사 드립니다.
행사장에서의 서평을 듣고 다시한번 새겨야할것들을 정리하여주심에 몰랐던 부분도 알게하여주심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