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라고 말을 시작하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그 부류의 하나일 듯 싶습니다. 오늘 보니 팔백 여개의 글을 쓰고도 아직 더 써야 할 게 있는 거 보면 자아가 강한거 맞는 거 같아요. 대부분은 '나는' 이거나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이거나 '나라면' 이라는 전제로 소신을 피력할 때가 참 많거든요. 그렇게 시작하는 속내에는 때론 완강하게 세상과 타협을 거부하는 몸짓일 때도 많습니다.
살면서 경험한 개인적 통찰에서 우러난 것이기에 더욱 편협할 수 있슴을 인정합니다. 저는 대가족주의자입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시대착오적인 사람이 어딨냐? "고 비웃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 일을 강력히 주장하고 실천하고 싶어 합니다.
얼마전에 은퇴노인들 시설에서 잠시 봉사일을 하면서 결심한 일이기도 하고 나름의 세상 살고나서 제가 내린 결론이기도 합니다. 실버타운엔 나이가 각각인 노인들이 제 나름의 사연을 안고 들어와 노후를 보냅니다. 제가 가던 곳은 각자가 제법 생활에 여유가 있었고 자식들을 잘 키워 '士'자 돌림의 직업을 갖게 하신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노인요양시설이지요. 자주 시신이 들려져 나가는... 제가 보기엔 산 자의 무덤. 늙거나 젊거니 그곳에 가는 모든이는 노인이 되어야 합니다. 봉사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상대가 노인이니 천천히 걷고, 크게 말하고 .... 그곳은 대체로 움직임이 거의 없고 고요합니다. 어쩌다 누군가 한 분 세상을 떠나면 곧장 슬픈 영화를 상영한 후처럼 시설안이 말을 잃고 누군가에게 슬픔을 나누지도 못하고 문을 닫고 우울해하며 교육을 잘 받은 어른일수록 슬픔은 안으로만 파고 듭니다. 별로 웃을 일 없이 시설에서 짜 둔 프로그램을 정말 즐거운척 과장하며 시간을 때우고... 전 정말 그런 곳이 안갈 수만 있다면 어떤 자식의 구박도 견디기로 했습니다. 자극적인 표현이 허락 된다면 그곳은 이미 무덤입니다. 세상은 남녀노소가 어울려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아주 당당히 이리 말하지요. "자식들 아무것도 주지 말고, 내것 나 먹게 쥐고 있다가 실버타운에 가서 대접받고 살면 되지, 뭐. " 우리가 제법 잘난 탓입니다. 자식 눈치 보는 게 뭐 그리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때 애들도 시험보면 우리 눈치 보며 시험지 꺼냈습니다. 더불어 산다는 건 당연히 상대의 마음을 엿보고 배려하며 사는 건데 그게 싫어 요양시설로 가면 더 일찍 무덤에 들어 가는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곳은 세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은 곳입니다. 세상 살면서 배운 지식대로 젊은시절 자신들의 능력대로 돈을 쥐고 와 계시지만 돈 쓸 일이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제가 예비자 교리를 하면서 늘 초기에 묻는 질문엔 "지금 무엇이 있다면 행복하실까요?" 가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돈" 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가장 생기가 있고 당당한 어른의 조건은 자녀가 자주 방문하는 어른들입니다. 젊을 때 자녀로부터 사랑받고 존경하는 분위기가 노후이 평화와 기쁨을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가장 큰 효도는 함께 있어준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라는 게 제 소신이니까.
요즘 우리 세대는 마치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삶을 기꺼이 바쳐도 좋다는듯이 자신의 삶을 희생한 부모세대입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하는 게 마치 부모일을 대신해 주는 것처럼 여기고 부모도 아이들이 성적만 우수하면 행복을 거머쥘 것처럼 여기는 게 당연시 됩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정말 소중한 자녀를 잃어 버리는 愚를 범하기도 합니다. 멀리 유학을 보내고 외로운 노후를 보내는 것보다 가까이 농사지으며 더불어 사는 삶이 더 나아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 유치한 얘기지만 성적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도 않고 부모의 의무가 직업을 가지고 결혼 한다고 끝나지도 않는 것 같아요.
또 부모들은 나름 교육 받은 세대들이어서 '내가 왜 자식들과 함께 살며 눈치 보고 살아?" 하고는 교양인인 체 합니다. 모두 자녀를 적게 낳고, 교육받고, 또 능력있는 부모의 교만함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옛 어른들 여덟 아홉명의 자녀를 낳고 키우다 보면 다 늙고 병들어 자녀에게 기댈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요즘 저희 세대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자식에게 교육이라는 할 일 했으면 내 일 끝났다고 여겨 자유를 누리고 싶어합니다. 손자손녀 보기가 지겨워 온갖 우스갯소리가 난무합니다. 자식도 내게 잘하는 자식만 자식취급하는 부모논리도 등장했습니다.
저는 요즘 정작 자식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육을 시키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대체로 아들이든 딸이든 가정을 꾸리는 법을 가르치지 않은 겁니다. 집안에 머무를 시간조차 없는 게 요즘 아이들 공부니까요... 남자가 아빠가 되는 법 .. 가족과의 사랑, 이웃과의 유대관계를 위한 의사소통법.. 그리고 살림하기 따위를... 공부만 잘 하면 다 잘하리라고 여기는 게 우리 어른들의 착각입니다. 사실 과도기의 어른인 저 자신도 이제야 비로소 뭐가 빠졌는지를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전 그래서 대가족이 최고라는 홍보를 하고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자녀가 없으면 물론 어쩔 수 없겠지요. 그러나 자식이 있다면 "자녀의 구박을 받더라도 함께 살 수만 있다면 그게 낫다"는....
사실 며느리가 들어오면 우리는 다 철 든 숙녀를 며느리로 맞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말 그대로 새아기를 맞는 겁니다. 우린 아기을 처음 낳을때처럼 의사소통의 부재, 곧 사랑의 부재를 체험하고 시험받게 됩니다. 대학교육까지 받았는데 왜 서로 말을 못 알아 듣느냐고요? 언어학을 공부하다보면 언어는 사회적인 약속이고 가족은 작은 사회입니다. 각기 다른 가정이라는 사회에서 자랐으니 우린 같은 말을 하지만 외국어를 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시어머니가 "사랑한다"는 말과 며느리에게 들리는 "사랑한다"는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소통하는 건 외국인들끼리 의사소통할 때의 난감함이 분명합니다. 우는 방식이 다른 갓난 아이들과 의사소통을 하듯 며느리와의 의사소통이 익숙해지면 언젠가 며느리 시어머니가 편히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저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는 꿈도 꾸지 않는 작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엄청난 가치관의 역류를 주장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 인간인 셈입니다. 뭘 주장하든 어떻게 이루어지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겸손함만은 잊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