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직 金理直(1875 ~ 1920)】
연해주 한인학교를 설립,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1875년 7월 17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알메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정일이고, 이명은 김이직(金利稷)이다.
1907년 지방 군수와 관리들에 반항하여 민요를 일으킨 민란의 장두(狀頭)로써 관리들을 처단하고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망명하면서 이름을 김이직으로 고쳤고, 여동생인 김윤신(안나)이 동행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평양 사람으로서 애국지사인 김치보가 경영하는 덕창국(德昌局)이란 건재약국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덕창국은 표면적으로는 실업기관이었지만 반일 애국지사들의 연락처이자 비밀 모임 장소로 아스트라한스카야 거리 10번지(현재의 시비르체바 거리 10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우수리스크에 덕창국 지점이 설치되자 주임 직책을 맡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소왕령)로 이주하였다.
1912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동흥학교 설립에 참가하며 교육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13년에는 권업회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지회장을 맡았으며,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지역 이갑의 병치료비 모금 책임자, 안중근 의사 전기 간행을 위한 기념사진 판매 책임자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14년 한인 러시아 이주 50주년을 맞아 결성된 ‘한인이주50주년 기념회’에 기부금(3,40루블)을 냈다(3,40루블). 1917년 10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한인회 발기인 대표로서 한인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8년 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한인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대회에서 선출된 전로한족중앙총회의 상설의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9년 만세 운동 직전에 전로한족중앙총회가 확대 개편된 대한국민의회의 상설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처음 러시아에 망명해 기반을 닦았던 덕창국이 사회·교육·정치활동의 근거가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의 덕창국은 러시아와 중국에 활동하던 정치 망명자들이 서신 연락이나 유숙해 가는 장소였으며 경제적 원조를 받는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덕창국 안에는 조선글 서적을 판매하던 덕창서점이 있어서 한인농촌에 설립되어 있던 사립학교에서 사용되던 교과서를 배급하였다. 약을 지으러 오는 농민, 서적을 사려는 교사 중에는 혁명기관의 연락원도 섞여 있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무장투쟁이 활발해지면서 덕창국을 중심으로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엄주필 등과 함께 한인빨찌산부대에 식량, 의복, 신발, 기타 군수품을 공급하였다.
1919년 9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주변 한인 마을에서 호열자가 유행하자, 엄주필 등과 임시위생회를 발기하고 서울 세브란스 출신 의사 나성오(羅成五)를 초빙하였는데, 부근 한인 2백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임시위생회는 예방주사나 진료를 실시하였고, 이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의 청년회와 연락하며 빨찌산대원과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항일운동에 적극 나섰다. 임시위생회는 이후 ‘4월참변’ 당시 간부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되면서 해산되었다.
1919년 10월 16일 일본헌병대 2개 소대가 문창범 등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한인의 가옥을 수색하였다. 그 때 덕창국 사무원 5명과 함께 잡혀갔다가 풀려났다. 1920년 ‘4월참변’ 당시 일본군의 러시아혁명세력에 대한 군사공격 개시 전에 일본군에 연행되었다. ‘4월참변’ 후 일본육군성은 당시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76명의 한인을 체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최재형·엄주필·황경섭 등 한인지도자들과 함께 4월 7일 학살되었다.
피살된 후 누이동생 김마리야가 시신을 찾기 위해 일본헌병대를 찾아갔다. 김마리야는 시신을 내어달라고 강경하게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많은 한인 여성을 동원하여 헌병대를 매일 찾아가 시신을 내어놓으라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일본 헌병은 시신은 이미 불태워서 재 밖에 없다고 둘러댔고, 화장했다고 하는 장소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사실 일제는 네 사람의 애국지사를 우수리스크 감옥 근처 왕바산재라는 산기슭에서 학살한 후 매장하고, 흔적을 찾을 수 없도록 평지를 만들어 버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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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직의 약력 보도(『독립신문』 1920. 5. 15)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