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38년 평양숭의여자중학교에 재학했으며, 1940년 평양서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이화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1952년 미국 웨슬리언대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미국 템플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2년 이화여자대학교 부교수를 시작으로 평생을 이화여자대학교와의 관련 속에 지냈다. 1961~79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1964년 기독교학교 연합회 이사장, 1965~79년 한국크리스찬 아카데미 이사, 1966~79년 한국 가정법률상담소 이사, 1970~80년 다락방전도협회 회장 및 재단법인 기독교방송 이사 등을 지냈다. 1970년 기독교복음화운동본부 부회장, 1972~83년 사회복지법인 한국어린이 재단 이사, 1974~82년 재단법인 산학협동재단 이사, 1976~79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 1978~79년 민족문화추진회 이사 등을 지낸 뒤, 1979년 문교부장과에 임명되어 국제연합한국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다. 1979~90년 이화여대 명예총장 및 이사장, 1987~90년 재단법인 김활란장학회 이사장, 1988~90년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과 1982년 인촌 문화상을 받았고, 1976년 필리핀에서 마리아 클라라상과 1983년 뉴욕의 유니온신학대학교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저서로 〈예수의 생애와 교훈〉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김옥길 이사장이 25일(토) 오전 2시 55분 대신동 자택에서 별세함에 따라, 김이사장의 영결예배가 27일(월) 오전 10시 대강당에서 있었다.
고인은 지난 40년 4월 본교 문과에 입학, 43년 졸업한 뒤 미국 템플대학원에서 수학했다.
그후 43년 본교 교수로 재임하였고, 61년부터 79년까지 18년간 총장을 역임, 87년부터 이사장직을 맡아 왔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직장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본교는 정의숙 전 총장으로 하는 「김옥길 선생 이화여대 학교장위원회」를 구성, 고 김이사장의 장례를 학교장으로 치루기로 했다.
또한, 고 김이사장의 빈소가 26일(화) 오전부터 자택에 마련되어 고인의 친지와 제자 등 많은 각계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27일(월) 있었던 영결예배는 서광선 교목의 집례로 기도와 정의숙 전총장의 「추모의 말씀」헌화증정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정의숙 전총장은 추모사를 통해 『평범하고 소박한 곳에서 반석같은 의지로 인간과 겨레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의 모습은 이화의 곳곳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영결예배후 고 김옥길 이사장을 안치한 영구차와 장례객들은 장지인 경기도 시흥시 광석동 선영으로 출발했다./이대학보 1990년 08월 27일(월)
[1977년] 금산 제2위성통신지구국 완공
충남 금산에 제2위성 통신지구국이 1977년 오늘 완공됐다. 제2위성 통신지구국은 그해 9월 인텔샛 인도양 위성용으로 개통돼 서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에 국제회선을 제공함으로써 금산의 제1위성 통신지구국의 서비스와 운용상 문제점을 해결해 균형을 갖춘 국제통신망 발전에 기여했다. 우리나라는 1967년 국제전기통신위성기구에 가입한 후 1969년 통신위성회선 임대계약을 체결해 1970년 금산의 제1위성 통신지구국 개국을 통해 국제위성통신시대를 열었다.
제1위성 통신지구국은 태평양 상공의 통신위성 인텔샛 3호에 접속해 미국, 홍콩, 캐나다 등 태평양 연안 7개 국가간 136회선의 국제통신망을 구성했다. 우리나라는 제1, 2위성 통신지구국을 통해 세계 30여 지구국에 걸쳐 1100회선을 갖게 됐고, TV 중계시설도 갖췄다. /충청투데이
[1972년] 경복궁 중앙국립박물관 개관
1945년 9월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인수 개편하여 덕수궁 안의 석조전 건물에서 처음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1953년 8월 서울환도 이후 잠시 남산 분관에서 머무르다 1954년 10월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고, 1972년 경복궁에 박물관을 신축하여 확장 이전하였으며, 1986년 옛 중앙청 건물로 이전하였으나 건물이 철거됨에 따라 1996년 경복궁 내의 사회교육관 건물을 증개축하여 개관했다. 2004년 10월까지 경복궁에서 운영되다가 2005년 10월 28일 용산가족공원 내의 새로운 건물에서 개관했다.
13만 5000여점의 소장유물 중 약 5000여점의 유물을 18개 전시실에 상설 전시하고 있는데, 지층에는 불교관련 미술품과 공예품 및 역사관련 미술품을, 1층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각종 도예품을, 2층에는 선사시대 및 삼국시대의 각종 유물 및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naver
[1964년]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제작 화제
← 오드리 헵번
'워너 브라더스,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 제작에 5백만 달러를 투자하다!'
1964년 오늘 미국 신문들에 실린 톱기사의 제목이다. 워너 브라더스사가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7년 동안 장기 공연된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를 신문기사대로 거금 5백만 달러를 들여 영화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영화는 큰 규모의 분장실과 수많은 가발, 완벽에 가까운 소품 등으로 숱한 화제를 뿌리며 만들어진다.
'My fair lady'는 1964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렉스 해리슨과 오드리 헵번이 남녀주연상을 받는 등 7개 부문을 휩쓴다. /YTN
[1960년] 로마올림픽 개막
← 1960년 9월 10일 런던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모로코의 라지(185번)를 제치고 맨발로 역주하고 있는 에티오피아의 아베베(11번).
1960년 8월 25일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84개국 5396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7회 올림픽이 개막됐다. 이 대회에서는 다른 어느 때보다 극적인 우승자들이 많이 탄생했다.
우선, 가장 빛나는 활약을 한 사람은 에티오피아의 무명 마라토너 아베베였다. 로마제국의 ‘정복의 길’로 대표되는 아피아 가도를 맨발로 완주, 2시간15분16초2분이라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이것은 올림픽신기록이자 아프리카 흑인 선수로서 얻은 올림픽 최초의 우승이었다. 2위 역시 아프리카 모로코의 라지가 획득, 이로써 1ㆍ2위 모두가 아프리카에 돌아갔다. 아베베는 4년 후 동경올림픽에서도 2연패를 달성,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는 쾌거를 이뤘다.
가장 극적인 우승자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에 걸렸던 미국의 여자 육상 선수 루돌프였다. 그녀는 여자육상100mㆍ200mㆍ400m 3종목에서 우승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한편, 복싱 라이트헤비급에서 케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가 우승함으로써 그는 이후 은퇴할 때까지 약 6천80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수입을 거둬들이며 가장 고가의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또한 헝가리출신의 50세 선수 게레비치는 선수로서 가장 장수한 우승자로 오늘날 기억되고 있다. 그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이후, 6번째로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6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비극적인 패자로는 사이클 100km 단체전 레이스 후 사망한 덴마크의 옌센이 꼽힌다. 그의 사망원인은 흥분제 과다복용이었다. 이로써 그는 올림픽사상 약물복용사망 제1호가 됐다. /조선
[1956년] ‘킨제이 보고서’를 낸 알프레드 킨제이(Kinsey, Alfred Charles) 사망
1894. 6. 24 미국 뉴저지 호보컨~1956. 8. 25 인디애나 블루밍턴.
인간의 성행위에 대해 연구했다(→ 성적 행동). 메인 주 브런즈윅의 보도인대학(1916 이학사 학위)과 하버드대학교(1920 이학박사 학위)를 졸업한 킨지는 하버드대학교에서 동물학과 식물학을 가르치다가 1920년 인디애나대학교의 동물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929년 정교수가 되었으며, 1942년 대학 부설 성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이 연구소는 록펠러 재단(~1954)과 국립연구평의회(National Research Council)의 지원을 받았다. 인간의 성생활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킨지는 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고, 〈남성의 성행위〉(1948)·〈여성의 성행위〉(1953)를 출판했다. 1만 8,500명과의 개인적인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이들 보고서는 성행위의 다양한 형태를 제시했다. 인터뷰가 신중하게 진행되었고 명확한 통계적 기준이 적용되었지만, 킨지의 연구는 불규칙적인 표본 추출과 보편적인 신뢰성 문제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44년] 프랑스군, 파리 해방시켜
← 1944년 8월 개선문을 지나 파리에 입성하는 연합군의 행진 모습
1944년 8월 25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의 기갑부대가 파리에 입성했다. 전운이 감돌던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 사이에 독·소불가침조약이 성립되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에 맞서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강화 제안이 거부당하자 곧 진격을 개시해 1940년 5월 스당 근처의 프랑스 방위선을 돌파했다. 6월 10일 독일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프랑스 정부는 투르로 떠나고 파리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6월 18일 샤를 드골 장군은 전투를 계속할 것을 호소했으나 페탱 내각은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6월 22일 휴전 조약을 맺었다. 또한 7월 9~10일 비시에서 열린 의회는 괴뢰정부인 비시 프랑스를 수립했다. 그러나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는 지하운동인 레지스탕스 운동의 불길이 일었으며, 드골은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자유 프랑스군은 비시 정부에 의해 반군으로 매도되면서도 국내외의 전투에 참가하는 등 독일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1944년 8월부터 프랑스 국내군(FFI)으로 조직화된 레지스탕스 단체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프랑스 본토로의 진입작전이 벌어졌고, 1944년 8월 25일 마침내 자유 프랑스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같은해 10월 드골의 임시정부는 미국·영국·소련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았다./브리태니커
[1936년] 동아일보,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제패 사진 일장기 말소게재
← 일장기 말소사건,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손기정 사진 (왼쪽)과, 원래의 사진(오른쪽)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가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소식을 보도하면서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해 조선총독부로부터 고초를 겪는 사건이 일어났다. 1936년 8월 10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한국의 손기정과 남승룡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하자 국내 신문들은 호외를 발행하는 등 연일 대서특필했다. <동아일보> 운동부 기자 이길용은 전속화가였던 이상범과 인쇄공들의 협조를 얻어 8월 25일자 신문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을 발행했다. 일제는 당시 광범위하게 행해지던 민족말살·탄압 정책의 일환으로 일장기말소사건에 대해 강력한 탄압조치를 가했다. <동아일보>는 279일의 최장기 무기정간을 당했으며, 함께 발행하던 잡지들도 모두 발행정지되었다. 또한 사건의 핵심이었던 이길용과 사회부장 현진건, <신동아> 편집부장 최승만,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부의 유영호 등 5명이 구속되었다. 이밖에도 동아일보사 사장 송진우와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 등 8명의 간부가 사직했다./브리태니커
[1918년] 미국의 지휘자, 작곡가 번스타인(Bernstein, Leonard, 1918~1990) 출생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하였다. 10세 때부터 피아노를 쳤으며 보스턴 라틴 학교를 거쳐 1939년에 하버드대학교에서 문학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1939~41년 필라델피아에 있는 커티스 음악원에서 수학했고 프리츠 라이너와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에게 지휘로 사사했다. 1943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었고, 그해 11월 14일 브루노 발터가 병이 나자 그 대신 지휘봉을 잡게 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이같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보여준 자신감과 탁월한 음악적 해석은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때부터 화려한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후 1945~47년에는 뉴욕 시티 센터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미국·유럽·이스라엘 등지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1958~69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겸 음악 감독으로 있으면서 때로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남아메리카와 유럽·소련·일본 등지로 여러 차례 순회연주를 했다. 텔레비전에 그가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해설자와 연예인으로서 등장함에 따라 그의 인기는 점차 확산되어갔다.
고전음악 작곡가로서 번스타인은 〈예레미아 교향곡 Jeremiah Symphony〉(1942)이나 오라토리오 〈카디시 Kaddish〉(1963)에서 들려주었던 유대교 전례 음악의 주제로부터,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근심의 시절 Age of Anxiety〉(W. H. 오든의 작품에 기초함)에 나타나는 재즈 리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치체스터 시편 Chichester Psalms〉(1965)은 그리스도교 예배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그의 〈미사곡 Mass〉은 1971년 9월 워싱턴 D. C.에 위치한, 공연 예술을 위한 케네디 센터 개관공연에서 연주되었다. 정치성을 띤 서곡인 〈슬라바 Slava!〉,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3곡의 〈명상 Meditations〉, 6명의 가수와 관현악을 위한 연곡 〈합창회 Songfest〉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는 내셔널 심포니의 연주로 1977년 케네디 센터에서 초연되었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온 더 타운 On the Town〉(1944)·〈원더풀 타운 Wonderful Town〉(1953)·〈캔디드 Candide〉(1956)·〈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1957) 등의 뮤지컬과 〈팬시 프리 Fancy Free〉(1944)·〈모사 Facsimile〉(1946)·〈딥벅 Dybbuk〉(1974) 등의 발레곡이 있으며, 영화음악 〈해변에서 On the Waterfront〉를 작곡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음악의 즐거움 The Joy of Music〉(1959)·〈읽기와 듣기를 위한 청소년 음악회 Young People's Concerts, for Reading and Listening〉(1962)·〈음악의 무한한 다양성 The Infinite Variety of Music〉(1966), 그리고 1973년 하버드대학교에서의 찰스 엘리엇 노튼 강의를 책으로 엮은 〈대답없는 질문 The Unanswered Question〉(1976)이 있다./브리태니커
[1908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베크렐(Becquerel, Henri, 1852~1908) 사망
파리 출생. 아버지 알렉산드르(1820∼1891)와 할아버지 앙투안(1788∼1878)도 물리학자이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하고, 토목국 기사장을 거쳐 1895년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수가 되었다.
초기에는 편광(偏光) 현상과 인광(燐光), 결정(結晶)에 의한 빛의 흡수 등을 연구하였으며, 지구자기(地球磁氣) 연구도 하였다.
1895년 뢴트겐의 X선 발견을 프랑스에 소개한 푸앵카레와 토론을 벌인 것을 계기로, 형광(螢光)과 방사선(복사선)의 관계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자연적으로 형광작용을 가지는 물질들을 조사한 결과 우라늄염(鹽)에서 모종의 방사선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1896). 이것이 베크렐선이며, 이 방사선이 기체를 이온화한다는 것, X선과는 달리 전기장이나 자기장에 의해 굽어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아들 장(1878∼1953)도 물리학자이다.
[1900년] 독일 철학자 니체 사망
← 프리드리히 니체
1900년 8월 25일 정오 독일 바이마르에서 한 철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신은 죽었다"라며 구시대의 종언을 확신에 찬 어조로 선언했던 그가 바로 새로운 세기의 개막 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어쩐지 드라마틱하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그는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함께 20세기를 만든 3대 사상가로 꼽힌다. 약관 25세의 나이에 바젤대학 교수가 된 그는 ‘비극의 탄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피안’ 등 문제작을 잇따라 발표하며 주목을 끌었다. 그의 저서는 당시 익숙했던 데카르트, 칸트 등 근대사상의 계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잦은 병치레로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인생이었다.
전임교수 10년 만인 35세 때는 건강이 악화돼 급기야 학교를 떠나야 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모두 개신교 목사였지만 니체는 기독교를 ‘노예의 종교’로 신랄히 비판했다. 그는 이미 인류가 ‘신’으로 표현되는 절대자에 의존하던 시기는 지났다고 선언했다. 또 신체보다 영혼, 감각보다 정신, 욕망보다 의무를 강조하는 금욕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적어도 200년은 니힐리즘(허무주의)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이를 넘어서는 ‘초인’을 강조했다.
몸은 19세기를 살았지만 정신은 20세기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20세기에 기여한 가장 큰 공로는 서양 근대 합리주의의 한계를 누구보다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었다./조선
[1845년] 바이에른의 괴짜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 출생
← 루트비히 2세
1845. 8. 25 ~ 1886. 6. 13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숭배자이며 후원자였다. 새로 수립된 독일제국(1871)에 바이에른을 가입시켰으나 간혹 나랏일에 관여할 뿐 병적인 은둔생활을 즐겼고 터무니없는 건축계획에 광적으로 열중했다.
그는 바이에른의 국왕 막시밀리안 2세와 프로이센 공주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었다. 정치적 입장은 낭만적 보수주의였으며 공부를 마치기 전인 186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물려받았다. 1866년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7주전쟁에 참여했으나 패배해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고(1867), 바이에른 총리인 호엔로에 실링스퓌르스트 후작 클로드비히를 통해 독일의 두 강대국을 화해시키려고 애썼다. 독일의 애국자인 그는 프랑스·오스트리아·바이에른 3국이 동맹을 맺자는 나폴레옹 3세의 제안을 거부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이 일어나자 당장 프로이센 편에 가담했다. 1870년 12월에 루트비히는 비스마르크의 제의를 받아들여 독일 제후들에게 새로운 제국 창설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편 독일제국의 수립으로 왕권의 독립성을 잃을까 두려워했지만 바이에른이 많은 특권을 갖게 됨에 따라 그의 두려움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영토확장 요구와 독일 황제의 칭호를 프로이센과 바이에른이 번갈아 갖자는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다. 독일제국에 실망하고 바이에른 국민의 열렬한 범(凡)게르만주의에 겁을 먹은 그는 교권을 강화하려는 조처를 둘러싸고 각료들과 불화를 일으키게 되자 점차 정치에서 멀어져 개인적인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루트비히는 즉위하자마자 리하르트 바그너를 뮌헨으로 불렀다. 그러나 1년 뒤에는 작곡가를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 각료와 국민들이 두 사람의 우정에 반대했고 바그너 자신도 무례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 동안 바그너를 후원했다. 루트비히는 연극과 오페라를 찬양했으며 그뒤로는 거의 자신의 예술적 노력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그가 좋아한 바이에른 산지(山地)에 건물을 짓는 데 광적으로 몰두했다. 1878~85년 동안 건축되었지만 미완성으로 남은 헤렌힘제(헤른인젤)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것이고, 린더호프 성(1869~78)은 트리아농 궁전을 본떴으며, 우뚝 솟은 험한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노이슈반슈타인은 바그너의 낭만적 오페라에 나오는 장면으로 꾸며져 있어서 동화에 나오는 성처럼 환상적이고 아름다웠다.
1880년대초에 루트비히는 거의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1886년 6월 10일 마침내 의료진은 그를 정신병자로 선언했고 그의 삼촌인 루이트폴트 공이 섭정이 되었다. 정신과 의사인 베른하르트 폰 구덴은 슈타른베르거 호수 근처에 있는 베르크 성으로 그를 데려갔다. 루트비히는 6월 13일 호수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구덴도 왕을 구하려다 함께 죽었다. 윌프리드 블런트가 쓴 루트비히의 전기 〈몽상가 왕,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 The Dream King:Ludwig Ⅱ of Bavaria〉(1970)를 보면 그의 생애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브리태니커
[1828년] 우루과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는 몬테비데오이다. 이 나라는 남북으로 약 500km, 동서로 약 470km 펼쳐져 있다. 북쪽과 북동쪽으로 브라질, 남쪽으로 라플라타 강 어귀, 남동쪽으로 대서양과 접하고 있다. 서쪽 경계선 전체는 우루과이 강이 아르헨티나와의 국경을 이루며 흐른다. 면적 177,879㎢, 인구 3,266,000(2006 추계).
프랑스혁명(1789)과 잇달은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왕조 전복(1808)을 도화선으로 하여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독립운동의 거센 바람이 불었다. 우루과이에서는 19세기 초 영국에 의한 몬테비데오 단기(短期) 점령이 있은 후 우루과이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J.아르티가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가우초(카우보이)의 지도자였던 아르티가스는 1811년 봉기하여 몬테비데오를 점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9년간의 영웅적인 독립운동 후 포르투갈군에 의해서 파라과이로 쫓겨나게 되고 1821년 우루과이는 포르투갈과 브라질 연방에 합병되고 다음해의 브라질 독립과 함께 브라질령이 되었다. 그 동안 우루과이 내에서는 독립을 원하는 소리가 날로 높아져서 1825년 J.A.라바예하와 33명(트레인타이트레스)의 우루과이인이 인솔하는 독립군은 아르헨티나의 지지를 얻어 재차 주도(主都)를 탈환하였다. 이투사잉고에서 브라질군을 격파한 후 1828년 독립을 선언하고 1830년 공화국 헌법을 발표하여 독립공화국이 되었다.
1949년 한국 정부를 승인하고 1964년 10월 7일 국교를 수립했다. 1966년 주한 상주대사관이 설치되었다. 북한과는 1963년 5월 무역대표부 설치에 합의했으나, 1966년 축출한 이후 교류가 거의 없다. 양국간에 문화협정(1971. 5), 어업협정(1972), 무역협정(1985. 11), 경제·과학·기술 협정(1985. 11. 6)이 체결되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친서방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74년 기술연수생을 초청하여 연수시킨 바 있다. 한국으로부터 주로 섬유류·전자제품을 수입하고 양모를 수출한다.
[1884년] 프랑스 제4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오리올(Auriol, Vincent) 출생
← 오리올
1884. 8. 25 ~ 1966. 1. 1
프랑스 남서부 루베르에서 출생하였다. 사회당 기관지의 편집원을 거쳐, 1914년에 사회당 소속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 1924년 하원 재정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재정통으로 L.블륌의 브레인이었다. 1936년 블륌의 인민전선 내각에 재무장관으로 입각, 1937년 법무장관이 되었고, 제2차 블륌내각의 조정(調整)장관을 역임하였다.
1940년 독일에 대한 항복에 반대하여 비시정부에 의하여 체포되어 자택에 연금당하였으나, 탈출하여 저항운동에 들어갔다. 1943년 런던으로 망명, 장군 드골의 자유프랑스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45년 드골과 함께 아프리카를 경유, 귀국하여 드골임시정부의 무임소장관을 거쳐, 드골내각의 국무장관이 되었다. 제1차 국제연합총회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하고, 1946년 제2헌법의회 의장 역임 후 1947년 1월~1954년 1월 제4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재직하였다. 1957년 사회당을 탈탕하였으며, 1959년 제5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이 되었다./브리태니커
[1767년] 생 쥐스트 Louis(-Antoine-Léon) de Saint-Just 출생
← 생 쥐스트, Christophe Guerin이 그린 드로잉을 보고 그린 초상화 (1793)
"혁명정부 그 자체가 혁명적으로 구성되지 않는 한, 혁명법이 시행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루이 드 생 쥐스트
1767년 8월 25일 태어남 / 1794년 7월 28일 죽음
생 쥐스트는 프랑스 혁명 이데올로기를 신봉한 프랑스의 혁명가이다. 혁명적 격변이 한창이던 당시 그는 프랑스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자 했지만 나이가 너무 젊다는 이유로 번번이 실패했다. 25세가 된 직후인 1792년 9월 국민공회 의원에 당선되면서 재정·경제·군사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방식 덕분에 곧 로베스피에르와 더불어 극좌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국민공회에서의 그의 지위는 점점 높아져 1793년 5월초 공안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력 제2년(1793~94)에 국민공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혁명적인 조치로 평가되는 방토즈 법령을 통과시켰다. 1794년 6월 26일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의 플뢰뤼스에서 프랑스군을 이끌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권력을 잡기는 했지만 공포정치를 주도하며 로베스피에르 못지않게 포악해지면서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이 시작된 테르미도르 9일(1794. 7. 27)에 체포되어, 그 이튿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브리태니커
[1530년] 러시아의 황제 이반 4세(Ivan IV) 출생
← 이반 4세
1530. 8. 25 ~ 1584. 3. 18
러시아의 황제(재위:1533∼1584). 극단적인 공포정치체제를 시행하여 이반뇌제(雷帝)라고도 한다. 모스크바 대공(大公) 바실리 3세의 아들이다. 1533년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대귀족들의 전횡으로 고초를 겪었다. 이것 때문에 1547년 차르라고 칭하며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나서는,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들로 선발회의를 구성하여 정치를 하였다. 또한 전국회의의 소집과 봉토(封土)의 하사 등으로 지방 귀족층의 지지를 굳혀, 1550년대에는 행정 ·사법 ·군제 ·교회제도 등의 면에서 중앙집권화를 위한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 이 시기에 카잔한국(汗國) ·아스트라한한국을 정복하고 볼가강의 전체 수로를 제압하여, 북빙양(北永洋)의 내해인 백해(白海)에도 개항장(開港場)을 설치함으로써, 러시아의 경제적 발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발트해로의 진출을 목적으로 선발회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리보니아전쟁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T.에르마크가 서시베리아를 정복함으로써 동방진출이 시작되었다. 귀족의 세력을 타파할 것을 기도하였던 그는 1565년 극단적인 공포정치체제를 시행하여 뇌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공포정치는 중앙집권에 반대하는 귀족 세력 타도에는 성과를 얻었지만, 이것의 피해는 농민과 시민에게도 파급되었다. 행정의 혼란과 경제의 쇠퇴를 초래하여, 농민이 새 농토를 찾아 이동하는 일이 계속되었으므로, 그의 만년에는 농민의 이동을 제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군주권의 신적(神的) 기원을 확신하였고, 크루프스키공(公)에게 보낸 유명한 서한 등에서 그 사상을 전개하였지만, 좀 광신적인 면도 있었으며, 나이가 들면서 의심하는 버릇이 강해졌다. 이런 까닭에 만년에 자기 장남을 말다툼 끝에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 /naver
그 밖에
2003년 인도 뭄바이서 연쇄 폭탄테러로 200여명 사상
2001년 단사천 한국제지 회장 별세
2001년 황용주 전 MBC 사장 타계
1999년 국내 이동전화 가입자 2000만명 이상, 국민 2.3명당 1대꼴
1999년 ‘황혼이혼’ 소송을 낸 70대 할머니 승소
1994년 국제우취연맹(FIP) 총회 개최
1992년 전 민중당 대표 김낙중씨 등 4명 보안법 위반 구속
1992년 노태우 대통령, 민자당총재직 사퇴
1991년 컴퓨터 운영체제 ‘리눅스’ 처음 공개
1989년 보이저2호 해왕성 접근
1986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1986년 영광 원자력발전소 원전 1호기 완공
1985년 첫 공인중계사 자격시험 실시
1981년 소말리아, 리비아와 단교
1981년 다케이리(竹入), 일본 공명당위장(公明黨委長) 방한
1979년 먼데일 미국 부통령 중국방문
1978년 중공 베트남 국경서 유혈분쟁
1972년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대구권 지정
1965년 무장군인 고려대학교에 난입
1958년 뇌염으로 전국 국민학교 휴교령
1956년 미국의 발명가 조지 워싱턴 피어스 사망
1954년 대한우표회가 주최한 제1회 우편전시회 개최
1950년 딘 소장, 인민군에 포로로 잡혀
1948년 북한, 총선거 실시
1945년 미국 인천에 상륙. 미국 소련 양군의 북의 38도선 분담점령을 방송
1933년 조선소방사업령 공포
1923년 경성전기, 안국동 선 전차 운전 개시
1921년 미국 독일 평화조약 성립
1919년 이승만, 워싱턴에서 임시정부한국위원회 결성
1912년 중국동맹회, 국민당으로 개편
1912년 독일의 정치가 에리히 호네커 출생
1885년 서울-인천간 전신업무 시작(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통신 실용화)
1841년 스위스의 외과의사 코허 출생 - 1909년 갑상선 연구로 노벨상 수상
1776년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 사망
1466년 과전법 혁파, 직전법 실시
1451년 고려사 139권(卷) 완성
1270년 카페 왕조에서 가장 인기있던 프랑스의 왕(1226-1270 재위) 루이 9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