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음양이라면
아주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또한 비과학적인 산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음양은 우리들의 약속이다.
물론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란 보편 타당성과
언제 어디서 누구나 봐도
동일한 설명이 가능해야한다.
그래야 진리이다
음양을 쉽게 보면
긴 것과 짧은 것,
굵은 것과 가는 것,
뜨거운 것과 찬 것,
센 것과 약한 것,
밝음과 어두움,
늙음과 젊음, 생과 사,
남과 여, 깊은 것과 얕음,
넓음과 좁음, 겉과 뒷면,
높고 낮음, 빠른 것과 느린 것,
뽀촉한 것과 뭉텅함,
단단함과 퍼석함, . . . .
이렇게 서로 대칭 대는 개념의 통칭이다.
이런 서로 대칭 대는
음양의 가운데가
중(中)이다.
이런 음양은 항상 서로
반대 개념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끌려(다가가)간다.
그래서 조화가 이루어지고
그 조화를 위해
사랑을 해야한다.
조화(사랑)가 최고의 중용이며
최상의 덕목이다.
이 지구의 모든 존재는 조화(사랑)의 산물이다.
그르므로 음양은
서로의 존재에 대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예를 들면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조화하면
애기(愛己)가 나온다.
그것이 중(中)이다.
그래서 아기를 기준으로
사랑이 확인되고
사랑이란 추상적 단어가
만져지는(애기) 물질적인
것으로 단어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식탁을 보자,
우린 숙취 후에 해장을 위해
물 고기류(동태, 대구, 조개.....)를 즐긴다.
왜 이런 고기가, 해물이 숙취에 좋은가?
먼저 고기는 물에 산다.
물은 차가운 성질(음)이 있다.
이 차가운 곳에 살기 위해서는
제 몸이 따뜻해야(양)한다.
그래야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중용, 조화의 산물이다.
물이 차가울수록 더욱 뜨겁다.
그래서 한류(寒流)에
사는 대구나 명태,
특히 황태(추운 산정에서 눈맞고 바람맞고
수십 번을 되 반복함)가 열이 많다.
그러면 왜 뜨거운 고기에
뜨거운 국물인가?
우리가 속을 푼다는 것은
속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것이고
속이 굳은 이유는 속이 차가워져 있기 때문이다.
당분에 의해 굳어진 것이다.
술은 모두 고 칼로리의
곡류에 의해 제조되며
당분은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반대로 소금은 뜨거운 성질)
차가운 것은 딱딱해진다.
얼음처럼,
술은 밥(탄수화물)+ 설탕이다. (감주. 막걸리....)
그러니 당에 의해 장기(臟器)가 차가워저
굳어있는 곳에 뜨거운 물고기 국으로
속을 푸는 것이다.
당이 차다는 것은
우리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도
머리가 개운해지고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두 설탕 기운 때문이다.
우린 인삼이 열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열이(양) 많은 체질은
인삼을 먹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인삼이
그늘(음)에서 6년을 자라기 때문이다.
차가운 땅에서 자라는 뿌리 식물은
대체로 뜨거운데
그늘에서 만 자라니 더욱 열이 많을 수밖에 없다.
산삼은 수 십 년 수 백년을
햇빛을 보지 않고 자라기 때문에
그 몸은 더 많은 열을 가지고 있다.
사막에 사는 선인장은
뜨거운 땅에서 자라기 때문에 제 몸이 차다.
우리가 알로에를 얼굴에 문지르면
시원함을 느끼는 것도 차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과 양은
서로 필요한 만큼 서로에게 다가가
자신의 존재를
조화와 사랑의 결정체로 만든다.
그런 면에서 모든 생명은
우주의 음양이 다 공존하는
사랑의 결정체다.
좀더 설명하면
쌀밥은 당뇨의 적인데
현미는 당뇨 치료의 기본 식품이다.
현미를 깍아 백미를 만드는것은 누구나 다 안다.
열 있는 인삼을 열로 가하면
홍삼이 나온다.
홍삼은 열 있는 사람이 먹어도 된다.
이렇게 모든 생명체는
음과 양의 조화의 산물이라
독과 약이 같이 있으며
돌고 도는 이치이다.
우리 인간이 건강을 위해서는
자기 몸을 먼저 알아야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음양의 이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한다
우리 인간 아니,
생명의 존엄함은
한 생명체가 이 지구상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수수 억 년
서로(음양)의
간절한 원함(사랑의 갈구)의 결정체,
즉 조화(사랑)의 산물임을 인식해야만
올 곳은 건강을 이룰 수 있다.
이 지구에는
오직
조화(調和)
즉
사랑만이 존재한다.
사랑하지 않고
조화(중용)하지 않으면
생존 할 수 없게 된다.
오행(五行)에서(음양 오행설) 말하는
상극(相剋)은 없다.
오직 상생(相生) 만이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