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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케 하시는 하나님(눅12:49-53)-2019.7.28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오,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황당하게 분쟁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니요? 얼핏 들으면 불편한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이 공의와 사랑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계시는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속성은 공의와 사랑입니다. 알다시피 공의는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사랑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용서하시고 용납해주시는 성품입니다. 마치 아버지 같은 성품의 공의와, 어머니 같은 성품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성품은 항상 조화를 이룹니다.
만일 누군가 하나님의 공의만 강조한다면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 이른바 인정사정없이 무자비한 폭군 같은 하나님으로 오해할 수 있고, 사랑만 강조한다면 일정한 기준이나 원칙이 없는 하나님, 매우 우유부단한 하나님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도 하나님의 공의만 강조하는 사람은 주눅이 들어 살고, 사랑만 강조하는 사람은 버릇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이라는 당신의 두 가지 성품을 적절하게 사용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양면성을 잘 보아야 합니다. 절대 하나님의 한 가지 성품만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51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분쟁하려고 오셨다는 말은 싸우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동일한 말씀을 마태복음에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는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마태복음에서는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불이나 검은 다 심판을 상징합니다. 화평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는 것일까요? 왜 화평과 상반된 분쟁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믿는 자는 누구나 주님이 평강의 왕이시오(사9:6), 화평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모순이 아닙니다. 진정한 화평을 이루려면 반드시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고, 분쟁을 통해서 정리되지 않으면 화평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강이나 화평은 주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요, 주님을 영접치 아니한 자는 분쟁과 갈등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를 보십시오. 자신을 영접하는 창기와 세리나 죄인들에게는 참된 평강을 주셨지만, 자신을 영접하지 않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심적인 갈등과 분열과, 분쟁과 불협화음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자에게는 축복의 말씀이 되나, 어떤 자에게는 저주의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슬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사슴이 먹으면 녹용이 됩니다.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음은 어둠이 있다는 증거요, 참이 있음은 거짓이 있다는 증거며, 낮이 있음은 밤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화평하기도 하고 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이 우리를 어느 편에 서게 하시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시고, 진리 가운데 서기를 원하시며, 낮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을 선택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분으로부터 택하심을 입으면 우리는 그분의 자리에 서게 되고, 그분의 편에 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안에 사는 삶이요, 복음을 이루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했다면 마땅히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거든 세상과도 화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화평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분쟁을 경험합니다.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을 때부터 우리는 여러 가지 분쟁을 경험합니다. 세상과의 분쟁과 내 자신과의 분쟁,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분쟁을 숱하게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사단의 속성이 분쟁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분쟁은 사단의 주특기입니다. 사단의 역사는 분쟁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분쟁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쟁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화평하기 원하십니다. 화평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화목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화평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숱한 분쟁도 마다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분이 사역하는 현장에는 화평을 경험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도리어 분쟁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예수님께 반감을 갖고 적대적이며 분쟁했던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화평을 주러 오셨지만, 또 다른 방면에서는 분쟁케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떤 분쟁을 하기 위해 오신 것일까요? 궁극적으로는 사단과의 분쟁이지만 크게 세 가지 방면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율법주의자와의 분쟁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항상 주님을 공격해왔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주로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가르쳐서 율법을 지킨다고 큰 소리를 치는 사람들입니다. 황당한 것은 자기들은 한 가지 계명도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래서 그들을 율법주의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한 계명입니다. 때문에 로마서 7장12절은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말씀합니다.
다만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이라는 의문에 붙잡혀 사는 자들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이었기에 우리는 유대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통칭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선하지만 율법주의자들은 악한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을 바르게 알면 율법주의자는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율법도 사랑이고, 복음도 사랑입니다. 복음에서 사랑이나 용서를 빼버리면 율법이 됩니다. 반대로 율법에 사랑을 더하면 복음이 됩니다. 때문에 율법이 없으면 복음을 만날 수 없지요. 율법도 복음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율법은 죄를 진단하는 법이요, 복음은 죄를 치료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이라는 의문에 갇혀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독하고 문자적으로만 적용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율법의 목적과 율법의 정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영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딴지를 걸며 싸움닭과 같았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분쟁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지요. 그들의 분쟁의 뇌관과 같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매사에 주님을 공격하고 대적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주의자들의 대표적인 두 그룹이 있었는데 사두개파 유대인들과 바리새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사두개파에 속한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에 속한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자체가 불편했습니다. 불편함을 넘어서 분쟁의 씨앗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유대사회의 주류층으로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었고, 존경받는 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그들의 위상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루도 평안치 않았고, 분쟁이 떠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면 백성들의 시선이 주님을 향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거짓된 종교적인 위상들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들을 향한 백성들의 시선이나 관심이 시듬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자리까지 위협을 받았던 것이지요.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그들의 하는 일을 주님께서 거절하셨고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자기들의 믿음에 대한 극도의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몽니를 부리고 딴지를 부렸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항상 불편했고 분쟁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분쟁의 연속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을 일으키는 불씨요, 씨앗과 같았던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는 표현을 쓰신 것입니다.
(2) 세상 나라와의 분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에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항상 대립각을 세우고 충돌하며 분쟁을 시도합니다. 세상은 육신에 속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나라는 육신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씀하십니다(롬8:6). 그리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도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롬8:7). 때문에 육신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세상에 속한 자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는 사상과 이념이 다르고, 방향과 목적지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때문에 성도는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을지라도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싸우지 않으려고 해도 그들이 먼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를 쉬지 않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영적인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분쟁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전도라는 방식을 통해서 말입니다. 전도는 세상나라에 침투하여 하나님 나라를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수가 채워지면 주님이 강림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이 땅에서 분쟁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화평과 분쟁의 전쟁입니다. 주님 때문에 화평하는 그룹과 분쟁하는 그룹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 속한 자는 화평이요, 주님께 속하지 않는 자는 분쟁입니다.
때문에 주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두 종류로 나뉜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는 주님의 평화를 누리며 화평할 수 있으나, 그러지 않는 자들은 평안이 없고 항상 갈등과 반목과 분쟁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이 분쟁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이 분쟁은 예수를 믿으면 끝이 납니다. 물론 예수를 믿어도 세상에서 다양한 분쟁을 경험하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우리가 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서 나를 대신하여 싸워주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분쟁하려고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려면 이 분쟁을 겪어야 합니다. 이런 분쟁을 치르지 않고는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화평 중에 거할지라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분쟁은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충분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 나라와의 어떤 분쟁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불신자와의 분쟁입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믿지 않는 자와 접촉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불신자들과 어떤 식으로든지 어우러져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뗄 수 없는 친근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도 불신자들과 담을 쌓고 살 수 없고, 불신자들이 없는 세상으로 떠나 살 수도 없습니다. 그들을 상종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갈 때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들과 심각한 종교적인 갈등을 겪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관계를 끊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족으로부터 배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겪어야하는 숙명적 원리입니다. 왜냐면 불신자들은 복음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기 않기 때문입니다. 평상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종교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분쟁이 일어납니다. 특별히 복음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복음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의 마음은 사단이 지배하고, 성도의 마음은 주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날 개연성은 항상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분쟁이 우리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비록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복음으로 하나되지 않으면 종교전쟁이 일어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천륜이 무너지고 혈연관계가 단절되며 가족이 해체되기도 합니다. 52절과 53절을 보십시오. 가정에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영적인 전쟁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 전쟁이 분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이 화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으로 통일돼야 합니다.
오죽하면 가까운 사람일수록 종교나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분쟁의 요소가 가장 많은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쟁의 아픔이 있을지라도 복음은 전해야 합니다. 잠간의 분쟁이 장차 그에게 주어질 화평과는 비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우리도 그런 과정을 겪은 후에 화평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곳에서든지 진리와 비진리가 충돌하므로 화평과 분쟁은 상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곳이 사랑하는 우리 가정일지라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일지라도 말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데 동의하면서 시간으로 분쟁합니다. 어떤 이는 복음을 영접할 명분을 찾기 위해 마음으로 분쟁합니다. 그냥 우리 생각으로는 교회를 나와서 복음을 영접하면 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사단의 영에 붙잡히면 분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자들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분쟁의 역사를 청산하고 예수를 믿어 화평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 분쟁은 당신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분쟁이 노골적으로 표면위로 드러난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 안에서 분쟁합니다. 분쟁의 수준을 지나 투쟁도 마다치 않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온유한 사람이라도 이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말을 안 할 뿐이지 불신자들의 심령 안에 분쟁의 바이러스가 항상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발화점이 생기면 폭발합니다. 이른바 예수 이야기가 나오면 거친 분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심령을 분쟁케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분쟁을 조장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쟁의 바이러스가 그들 안에 잠복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분쟁의 역사를 끝내려면 반드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분쟁의 역사는 끝이 납니다. 화평과 분쟁이라는 상반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작되었다면 당연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해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당신이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당신이 주안에서 화평하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분쟁하며 사시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잊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참된 평화를 누리며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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