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영산의 여덟 봉우리가 - 유영봉, 성주봉, 생황봉, 사자봉, 오로봉, 두류봉, 칠성봉, 적취봉- 멀리 보인다. 옛날 중국의 위왕이 세수를 하다가 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에 감탄하여 신하들에게 찾게 하였으나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어 우리나라까지 오게 되었는데, 왕이 몸소 이 산을 찾아와 제를 올리고 팔영산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온다.
능가사(楞伽寺)는 신라 417년(눌지왕 원년)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그대로 믿고 따르기에는 의문이 많다. 팔영산 중턱에 보현암(普賢庵)이 언제부터인지 창건되어 뒤에 보현사(普賢寺)로 불리우게 되었다. 보현사가 뒤에 능가사로 되었다고 「능가사사적비(楞伽寺事蹟碑)」에서는 밝히고 있으나 地理志類에서는 서로 다른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능가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불확실하나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버려 폐사찰(廢寺刹)이 되었다고 한다.
호남의 평지 가람 처럼 천왕문에서 일직선으로 대웅전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문으로 어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양 협칸에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능가사 사적비에 의하면, '천왕문 화주 시한 별좌 회익 왕상화주 천일 중인 삼보화주 지웅(天王門化主是閑別座懷益王像化主天日仲印三輦化主智雄)'이라하여 천왕문을 지을 때 사천왕상도 함께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방 지국천. 남방 증장천
사적비의 기록대로라면 천왕문의 상량문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최초 초창연대가 1666년(현종 7)이므로 천왕상 역시 이때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능가사 목조 사천왕상의 배치는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사례여서 흥미롭다. 절에서 사천왕을 바라보아 비파를 든 동방 지국천왕 좌측 먼쪽 위치하며 반 시계방향으로 옆자리에 남방증장천을 모셨다. 아래자료는 고흥군청에서 가져왔다.
"외모를 보면 머리 뒤의 보관이 다른 예와는 달리 화려한 연화문이 그려진 원통형의 관을 쓰고 있다, 얼굴은 험상궂은 표정이며 왕방울 눈과 주먹처럼 생긴 멍석코 등이 괴량감을 주고 있다. 머리 뒤에는 화염문이 빈약하게 묘사되었으며 손에는 비파를 들고 있다. 자세는 반듯이 서 있는 입상이 아니고 의자에 걸터 앉은 자세이나 엉거주춤한 모습이다. 남방증장천 역시 앞의 지국천과 동일한 수법이다. 다만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이 다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천왕 발밑에 악귀(惡鬼)같은 괴물을 딛고 있는 것이 통례인데 여기서는 입구 우측에 있는 동방지국천만이 발 아래에 어린 동녀(童女) 기생이 지국천의 왼쪽 다리를 떠받치고 있다."
북방 다문천. 서방 광목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천왕의 위치가 배열되었다. 맨아래의 설명처럼 라마교의 영향인지 알 수 없지만 남도끝 고흥에서 만난 사천왕은 지금까지 머리속의 잘난(?) 지식을 일순간에 텅비도록 만들었다. 역시 사천왕 배열은 주지스님도 모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입구 좌측의 북방다문천(北方多問天)과 서방광목천(西方廣目天) 역시 머리에 쓴 보관이나 갑옷의 양식은 앞의 천왕상과 동일 기법이다. 손에 들고 있는 지물은 북방다문천은 긴창을 들고 있고 서방다문천은 오른손에 뱀을 움켜쥐고 있다. 자세는 완전하게 직립한 것이 아니고 뒤에 의자를 놓고 엉거주춤하게 걸터앉은 자세이다. 발 아래에는 악귀형의 괴물이 없다.
한편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계의 사천왕은 지국천이 비파, 중장천은 칼, 광목천이 새끼줄이나 뱀, 다문천은 족제비 또는 보탑을 들고 있다. 능가사의 사천왕상 중 동방지국천이 비파, 남방증장천이 칼을 쥐고 있고, 서방광목천이 뱀을 쥐고 있는 것을 보면 청나라를 통한 라마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결과물이 아닌가 한다. 이같은 추정은 보관에서 보여준 원통형이 외모에서도 가능케 해준다.
이상과 같은 능가사 사천왕상의 라마교 영향은 고흥군의 지리적 여건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남해안에 인접한 지역으로서 중국과의 무역을 생각할 수 있으며 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운대리 청자도요지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능가사 사천왕상은 이미 문화재로 지정된 보림사 사천왕상 및 불갑사 사천왕상의 외모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한 조성연대(1666년)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예로서 우리나라 사천왕상 연구에 귀중한 사례가 되고 있다."
산지중정 사찰의 그윽한 진입공간과 가볍운 상승효과와는 거리감 먼 천왕문에서 일직선상의 대웅전이다. 본디의 배치보다는 최근 불사와 가람정리로 인한 결과로 보고 싶다. 각종 나무와 가람내 정원같은 분위기로 인해 텅빈 공간이 많음에도 황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종신에「康熙三十七年戊寅三月日 興陽八影山楞伽寺…」의 주종명이 있어 1698년( 숙종24)에 만들어진 범종임을 알 수 있다. 용뉴는 쌍용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통은 없으며, 천판은 이중의 연화문을 표현하였다. 상단은 16엽 연화문이고 하단은 입상화문이다.
상대에 원형으로 자리를 마련해 12자의 범자문을 차례로 돌렸다. 인동문을 장식한 유곽(27×34㎝) 안에 9개의 유두를 표현하고 있다. 4곳의 유곽사이에는 천의를 걸친 보살입상과 문호형 장식을 보였는데 그 안에「主上展下壽萬歲」라는 문구가 양각되었다."
"종신의 중앙부에는 주역에서 나타나는 전양인 乾(≡)에서 전음인 坤(≡≡)에 이르기까지 팔괘를 양각으로 둘렀는 바 이는 조선 범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예는 같은 경내의 능가사 사적비 이수에서도 표현되고 있어 주목된다. 하대로 내려와서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그 안에 화판과 당초문대를 돌렸다. 특히 화판은 각각 그 문양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여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종신 중앙의 주종명은 음각인데 이에 따르면 시주자는 통정상운(通政尙云)등 68人이며 工匠․助役․緣化秩․別座․都監․三綱 등을 밝히고 있다. 당시 주지는 도학(道學)이다. 한편 경내의 능가사사적비 음기에는 「金鐘化主雙海 重鑄別座順侃 都監前僧統義軒」으로 적고 있어 비가 세워질 무렵(1690년) 이미 주종을 한 뒤 10여년 뒤(1698년)에 다시 주종기를 음각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