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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
나병(한센병)의 병고(病苦)에서 오는 저주와 비통(悲痛)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다간 천형(天刑)의 시인 한 하운(본명 한 태영(泰永)은 1920년 3월 30일 함남 함주군(咸州郡) 동촌면(東村面) 쌍봉리(雙峰里)에서 한종규(韓鍾奎)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가계(家系)는 3대를 과거에 급제한 선비 집안으로 지방 지주로 함흥지방에서는 떵떵 거리며 사는 권세 좋은 집안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을 공부시키기 위해 그가 여섯 살 나던 25년 함흥으로 이사하여 나갔고 이듬해 그는 함흥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예능 계통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며 죽 우등생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5학년이 되던 31년 봄, 몸이 무겁게 부어서 아버지를 따라 한달 남짓 온천과 삼방(三防) 약수터를 다니며 요양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것이 나병의 시초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32년 봄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의 의사를 좇아 이른바「내선공학(內鮮共學)」이라는 이리(裡里)농림학교에 들어가 수의축산(獸醫畜産)을 공부하게 됩니다.
이리농림학교는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듯 함남도청 관내 19명의 응시자 중 유독 그만이 합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장거리 육상 선수로도 활약 합니다.
그러나 상급학교 수험 공부를 하라는 꾸지람 때문에 3학년 겨울부터 운동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발자크, 앙드레 지드, 헤르만 헤세 등의 번역 소설을 탐독하고 시의 습작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으며 그가 나중에 월남할 때까지 그의 병고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병 간호를 했다고 전해지는 영원한 사랑 R이라는 고향의 여학생을 만난 것도 그때였습니다.
열일곱살, 5학년 졸업반이던 36년 봄이었습니다.
갑자기 몸 전체의 말초부 양역(陽域)에 콩알 같은 결절(結節)이 생기고 궤양이 끝없이 퍼져 나가자 여기저기 진찰을 받다가 성대(城大)(현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가게 됩니다.
「기다무라(北村淸一) 박사는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피부를 찌르곤 하였다. 진찰이 끝난 뒤에 조용한 방에 나를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小鹿島)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뇌성벽력 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 - <나의 슬픈 반생기>에서 -
37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그의 병은 다소 낫는 듯하여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성계고등학교라는 곳에 입학하는데 2년 남짓 지나면서 다시 병세가 악화하여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불타는 향학렬은 중국 북경으로 가서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에 입학했고, <조선 축산사(朝鮮畜産史)>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졸업합니다.
그것이 43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환부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귀국하여 일단 고향으로 간 그에게 아버지는 기분 전환을 하라고 함남도청 축산과에 그를 취직시켰으나 집에서 다니기가 싫었던 그는 도내 장진군 개마고원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추위 때문인지 그는 다시 남쪽 지방을 지원하여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해 갑니다.
1945년 봄이었습니다.
「결절이 콩알 같이 스물스물 몸의 양역에 울뚝불뚝 나타나는 것이었다. 검은 눈썹은 자고 나면 자꾸만 없어진다. 코가 막혀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은 코먹은 소리다. 거울을 쳐다보니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문둥이 그 화상이었다」
드디어 직장의 상사마저 그가 나환자라는 것을 알아채게 되고 그는 다시 함흥 중앙동 고향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그때부터 두문불출,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낯익은 이목을 피해 밤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첫사랑이며 마지막 사랑인 R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하며 문학에 전념하게 됩니다.
전신에 고름이 흐르고 방안에는 악취가 풍기는 그 무렵부터 48년 그가 월남할 때까지 4년간이 가장 처절한 투병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 자유를 구가하려고 했으며 이름마저 본명을 버리고 하운(何雲)이라고 고쳤습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파랑새55> 전문 -
8.15 광복 후 곧 재산을 몰수당하게 되고 노점 책장수를 하게 되는 그는 1946년 3월 13일 함흥 학생 데모를 구경하다가 혐의를 받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나오는 곤욕을 치르기도 합니다.
1947년 4월 북괴를 전복하겠다는 의거를 꿈꾸던 아우가 체포되는 바람에 그도 연루되어 원산 형무소까지 끌려갔었으나 나병이 악화되자 겨우 병 보석이라는 명목으로 가석방되는데 그를 정성껏 간호해 왔던 R 여인도 아우와 함께 끌려갔고 그 전 해에 어머니는 세상을 따나고 없었습니다.
그때 몸도 성치 못한 그는 단신으로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오는데, 자신의 병력을 알고 자살하려는 자신을 붙잡아 주고 모든 것을 바쳐 자신의 삶을 이어주었던 R과의 생이별에 대한 괴로遲?어쩌지 못하고 또 자신의 약도 구해 보려는 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두 싫어하는 모습에다 아무것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남쪽에서의 생활은 가이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는 서울을 거쳐 나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대구의 애락원(愛樂園)을, 부산의 나요양소인 상애원(相愛園)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그는 결국 대구 동산병원(東山病院)에서 '다이아송' 60알과 서울의 천우당(天佑堂) 약방에서 '대풍자유(大楓子油)' 3병을 구해 6월 하순에 다시 월북, 고향으로 향하다가 불심 검문에 걸려 병 보석을 어기고 남한에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다시금 원산 송도원이 가까운 어느 건물에 갇히는 몸이 됩니다.
거기서 보초자를 속이고 탈주를 감행하여 도보로 동두천을 거쳐 재차 월남을 했으니 그것이 그 해 8월이었습니다.
자유를 찾았으나 나환자인 그에게는 몸을 쉴 단칸 초목도 없었습니다. 그는 유류표박의 집시처럼 남한 각지를 떠돌며 깡통을 들고 구걸을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서울로 와 동지까지는 헌 가마니 한 장으로 쓰레기통 가에서 밤을 지새며 보내게 됩니다.
밤사이 옆에서 자던 한 동료 거지가 죽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 후 그는 명동 거리에서 바, 다방, 음식점, 상점 같은 곳의 출입구를 막아서서 돈을 받아 내거나 시를 팔아 연명했습니다.
어느덧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진 한하운은 몇몇 문인들을 사귀게 됩니다.
1949년 시집 {한하운 시초}을 발간하고 1973년에 전남 고흥군 도양면 소록도에 그의 시비(詩碑)가 건립됩니다.
그리고 55세인 1975. 3월 2일 인천시 십정동 산 39번지에서 간경화증으로 한 많은 생애를 마치게 됩니다.
그의 유해는 지금 경기도 김포군 계양산 장릉 공원 묘지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시가 나에게는 제2의 생명이다. 아니 전 생명을 지배하고 있다.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나에게 스스로 백광(白光) 같은 빛을 마련해 주고, 용기와 의지의 청조(晴條)길로 나를 인도한다」라고 했는데 이루지 못한 R과의 사랑도 그의 생을 지키는 등불이었던 것만은 분명 할 것입니다.
그리움과 기다림, 하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애탐이 바로 시의 원천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원초적 고독과 가난 속에서 그가 추구하고 기다리며, 또 기대일수 있었던 위안은 바로 R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애절한 사랑은 이렇게 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수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죽자고 살아보자던 사람.
만나보자고 찾던 사람.
한번은
만나봤어야 할 사람이였지만
어쩐지
망설였던 사람.
세상과 문둥이는 너무나 담이 높아
얼마나 얼마나 많이 울어서 무너뜨려야 할 담이 높아
서로 길이 헛갈리누나
이제 그 사람을 찾아 온
천리땅 대구(大邱)길은
경(慶)
그 사람은 가고
허전한 여수(旅愁)는
그런대로 사랑했던 까닭인가.
驪歌(愛染歌)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
한식에 소복(素服)이 통곡할 때에
부평(富平) 성계원에 진달래 피면
이 세상 울고 온 문둥이는 목쉬어
진달래 피빛 몽오리는
그리움에 엉긴 앵혈
봄마다 피는
옛날의 진달래꽃은
무너질 수 없는
님이 쳐다보는 얼굴
앞날이 없는 문둥이는
돌아서 돌아서면서 무너지는 가슴에
다시는 뵈올 수 없는 것은
다신 뵈올 수 없는 것은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
그가 37세에 발간한 나의 슬픈 반생기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어둠을 타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서는 모두들 깜짝 놀란다. 어머님께서 밥상을 차려오셨다. 하루종일 굶었으나 밥이 먹고 싶지 않았다. 밥은 먹었노라고 이야기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도대체 오늘 내가 겪은 일을 누구한테 하소연 할 수 있을 건가. 하늘이 나 알고 땅이나 알 일이지! 나를 먹어가는 결절은 아마 나를 썩혀 버리자는 심술인지 분화산 같이 터지고 궤양이 고름이 되어 온몸에 흐르는 것이었다. 감당못할 고름과 악취는 지옥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사람의 육체 세포는 고름으로 조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허둥거리게 했다.
점점 악화되어 기거조차 할 수 없고 열은 사십도 가까이 올랐다. 의식조차 잃고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며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의식을 조금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의식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 찾아오는 그러한 의식이다.
최후를 알리는 마지막 순간 나는 고름투성이인 내 손을 잡고 있는 ꡐ이ꡑ를 볼 수가 있었다.
ꡒ하운씨, 저를 압니까? 저 ꡐ이ꡑ에요. 하운씨가 사랑하던 ꡐ이ꡑ 말이예요. 당신의 아내예요. 제발 정신을 차려주세요. 그리고 굳세게 살아갑시다.ꡓ
ꡐ이ꡑ의 흐느끼는 울음이 저 보이지 않는 영원의 나라에서 말하는 것 같이 내 귀를, 내 죽어가는 신경을 흔드는 것이었다.
ꡒ고맙소.ꡓ
나는 그녀에게 이 말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녀에게 말하였다기보다도 천지신명에게 나의 마음을 진심으로 말하였다.
이런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나에게 새롭게 살아가려는 용기를 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문학이었다. 나는 문학을 통해 이 땅을 아름답게 만들고, 인간의 꿈을 이 땅 위에 행복하게 구현시키고 싶었다. 이러한 나의 소망은 내 마음 속에 한 줄기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는 문학에 대한 열정은 한 줄기 피어나는 꽃과도 같았다. 이 꽃을 보고 내가 살아있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살아야 할 생명이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환희의 불꽃이었다. 구름이 떠가며 흩어지는 것, 한 마리의 새가 우짖는 것, 몇만 년을 유구히 흘러가는 것, 그리고 남녀가 빚어내는 희로애락이 모두 꽃같이 애절한 기쁨이었다.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문학에 대한 열애는 오히려 영원의 나라에서 사랑으로, 또한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나를 황홀하게 하였다.
비가 그친다. 몇 달이나 계속해서 내리던 장마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갠다. 얼마나 기쁜 일이냐! 무슨 중병을 치르고 난 경쾌한 기분이다.
문인은 누구에게나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있는데 세계한민족작가연합회장이신 고은(1933 -)선생은 한하운의 시집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회고록에 담긴 글입니다.
그런 저녁 무렵 나는 꺼므꺼므한 어슬녘을 걷고 있었다. 집을 1㎞쯤 남겨놓은 길 한복판에서 한 물체를 발견했다. 그 우연이야말로 필연이었다.
그 물체는 마치 오랜 발광체처럼 팍 저물어버린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책이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릴 겨를도 없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새 책이었다.
시집이었다! 한하운(韓何雲) 시집이었다!
온몸이 전류에 휘감겨졌다. 그 시집 속의 글자 하나하나를 어둠 속에서 뿌리째 뽑아내어 읽어갔다. 돌부리에 넘어졌다가 일어났다.
아마도 누군가가 사 가지고 가다가 그만 길에 잘못 떨어뜨린 것이리라. 그 시집의 임자를 찾아 나설 생각 따위가 전혀 없었다. 시집은 오직 나를 위해서만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밤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가도 가도 황톳길….
이 구절은 곧장 내 심장 속의 주술이 되어 주었다. 밤새 뜬눈이었다. 조영암과 최영해라는 사람의 발문도 몇 번이나 읽었다. 먼동이 텄다.
두 가지를 결심했다. 나도 한하운처럼 문둥병에 걸려야겠다는 것과 나도 시인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길을 걸어가며 떨어져나간 썩은 발가락을 노래하고 이 세상의 길을 노래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불운에 운 그대여.
그는 아무데고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파랑새가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첫댓글 소록도 한센씨병자수용소 좌측위로 한하운의 시비가 있죠 어린시절 교과서에서 <보리피리>詩를 외우며 눈물 많이 흘렸고 지금 이 순간도 북받쳐오르는 눈물은 아 아~ 불운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것 글 올리며 내 자신도 반성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