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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제작 / 국내미개봉 / 124분 / 한글자막>
=== 프로덕션 노트 ===
라만챠의 영웅 돈 키호테와 산초의 모험 이야기를 그린 최고의 뮤지컬
세르반테스의 원작 <돈 키호테>에 바탕한 멋진 뮤지컬 작품
<아라비아 로렌스>, <머피의 전쟁> 피터 오툴과 <두 여인> 소피아 로렌의 열연
<러브 스토리>의 아서 힐러 감독의 최고의 뮤지컬 연출, 아름다운 열정이 묻어있는 배우들의 연기
세상아 내 앞을 막지 마라, 여기 정의를 위해 돈 키호테가 달려간다
제목 그대로 돈 키호테와 산초의 모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 키호테>를 데일 와서맨(Dale Wasserman)이 뮤지컬로 각색하였으며 이를 다시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라 만차'는 에스파냐 남부 고원지역의 지명이다. 이름 자체가 '고원'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사 돈 키호테와 하인 산초, 그리고 늙고 앙상한 말 로시난테의 모험을 그린 이 소설은 처음에는 단순히 그 당시 유행하던 기사도 이야기의 패러디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계급과 위선, 인간의 본질을 그리게 된 걸작 풍자소설이다.
1965년 뉴욕에서 초연을 한 <맨 오브 라만차>는 4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뮤지컬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된 형식과 오늘날에도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의식으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가장 잘 알려진 곡은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둘시네아', '내게 뭘 원하나', '알돈자' 등 빼놓을 곡이 없을 만큼 매력적인 뮤지컬 넘버들이 넘쳐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원작인 뮤지컬에 충실한 영화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피터 오툴과 소피아 로렌이 주연을 맡아 노래와 함께 열연을 펼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세르반테스와 돈 키호테로 나오는 피터 오툴의 연기는 소설 속의 돈 키호테를 실제로 보는 듯 인상 깊은 감동을 준다.
피터 오툴 Peter O'Toole
1932년 8월 2일 아일랜드 카운티 골웨이 콘네마라에서 태어난 피터 오툴은
남성적인 육체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육체적으로 완벽한 인간형에 가까운 인물이다. 곧 영국으로 가족이 옮겨가서 어린 시절을 리즈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인쇄 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한 그는 어렸을 적 꿈이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카톨릭 재단 학교를 다녔던
오툴은 왼손잡이인 그의 버릇을 고치려는 수녀에게 채벌을 당하고 열 네 살 때 학교를 그만둔다. 요크셔 이브닝 포스트지에서 배달 일을 하며,
수습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열 일곱 살에 연극무대에 섰으며, 영국 해군에 2년간 복무했었다. 왕립 연극 아카데미에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했고
앨버트 피니, 알란 베이츠, 리차드 해리스등이 그의 동창들이다. 1955년 브리스톨 올드 빅 컴퍼니에서 일하면서 출연한 <길고, 짧고
큰>(1959)으로 호평을 받았다.
<야생의 순수한 이>(1959)에 잠깐 얼굴을 비쳤으며,
<키드내피드>(1960)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면서 단번에 주목 받는 배우로 떠올랐다. <배킷>(1964), <로우드 짐>(1965), <겨울의
사자>(1968), <굿바이 미스터 칩스>(1969), <법의 교실>(1972)등으로 아카데미 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60년대 말, 70년대 초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알코올중독으로 더 이상 영화인생을 지탱시킬
수 없어 재활치료를 받게 된다. <스턴트맨>(1980), <내가 좋아하는 해>(1982)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면서
다시 헐리우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1987), <요정
이야기>(1997)에서도 품격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고, TV영화 <잔다르크>(1999)로는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아버지 다미엔>(1999)에서 데렉 자코비, 샘 닐등과 오랜만에 출연했다. 시안 필립스(Sian Phillips)와
1959년 결혼했고, 딸 캐서린과 패트리샤를 두었다. 20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지내다가 모델 카렌 브라운(Karen Brown)과 관계를
가져 아들 하나를 두었다.
소피아 로렌 Sophia Loren
1934년 9월 20일 이탈리아 출생. 어머니의 고향 나폴리로 돌아가 그곳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바다의 여왕 콘테스트에 합격해 어머니와 함께 로마로 진출했다. 50년 머빈 르로이 감독의 <쿼바디스>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는데 이것이 데뷔작이다. 이후 수많은 작품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며 훗날 남편이 된 카를로 폰티와 만나고 그의 제작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과 인연을 맺는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알려진 작품은 <하녀>로, 맘보 리듬을 타고 폭발한 야성적인 에로티시즘
영화. 이것이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눈에 들어 그의 <긍지와 정열>로 할리우드 영화에 데뷔하기도 했다. 50년대 말부터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해, 여자의 슬픔, 괴로움을 온몸으로 연기하는 국제적인 여배우가 되었다. 59년의 <검은 난초>으로 베니스 영화제 최우수
여우상을, 61년의 <두 여인>으로 아카데미상과 칸 영화제 여우상을 수상했다. 자서전적인 텔레비전 드라마 <소피아 로렌의
이야기>엔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작품 해설 === <2012년 12월 19일 네이버캐스트 / 월간 더 뮤지컬 편집장 김효진 글>
뮤지컬 무대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맨 오브 라만차
[맨 오브 라만차]는 196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뮤지컬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미구엘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뮤지컬로 각색했다. 이 작품을 생각하면 ‘고전(古典)’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작품이 50여 년에 가까울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지금의 관객들에게도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맨 오브 라만차]가 오랜 시간 동안 한결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고, 식상할 수도 있는 극중극의 방식을 세련되게 전개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음악을 통해 메시지를 놀라울 정도로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맨 오브 라만차]는 뮤지컬의 모범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뮤지컬이 원작 소설과 가장 다른 점은 세르반테스를 등장시켜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극중극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무대는 스페인의 지하 감옥. 세르반테스는 교회에 세금을 부과해서 ‘종교 모독’이란 혐의로 잡혀온다. 죄수들은 자신들이 집행하는 모의재판에서 세르반테스에게 현실을 모르고 날뛴 이상주의자라는 죄목으로 극형을 언도한다. 그러자 그는 ‘이상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며 변론 기회를 요구하고, 극작가이기도 한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 즉 연극을 통해 변론한다. 죄수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극을 선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소설 ‘돈키호테’의 이야기다. 소설 [돈키호테]는 알론조 기하나 노인의 기행을 통해 무모하지만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삶을 역설한다. 세르반테스의 생각은 무모한 꿈을 꾸었던 기사 돈키호테를 통해 드러나는데, 뮤지컬에서는 세르반테스가 직접 돈키호테를 연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몸소 보여준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는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중심 플롯으로 삼아 갈등을 극명하게 제시한다. 기사가 사라진 시대에 알론조 기하나 영감은 자신을 방랑기사 돈키호테라고 칭하고 풍차를 악당으로 여겨 한판 대결을 벌이는가 하면, 여관을 성으로, 여관 주인은 성주로 생각하고 기사 직을 내려주길 간청한다. 게다가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가끔은 몸을 팔기도 하는 천하디 천한 알돈자를 고귀한 레이디 ‘둘시네아’라고 부르며 충성과 사랑을 맹세한다. 이렇듯 미치광이 같은 망상가 돈키호테를 보여주며 세르반테스는 죄수들(관객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더럽고 혼탁한 세상에 이상을 부르짖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가? 그렇다면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헛된 망상일지라도 그 꿈을 간직해야 하는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 아닌가? 불의한 현실에 맞서는 일이 어쩌면 제정신을 가지고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포기하기보다는 헛된 망상일지라도 끝까지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세르반테스의 생각은 이 작품의 대표곡인 ‘이룰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에 집약된다.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 이게 나의 가는 길이오.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걸으리라.” 다소 길게 인용된 가사이긴 하지만 테마 곡인 ‘이룰 수 없는 꿈’은 작품의 메시지를 집약적으로 호소력 있는 멜로디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 다이애나 로스 등 유명 가수들에 의해 수차례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그것이 망상일지라도 지켜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돈키호테라고 해도 쉽지 않은 결단을 요구한다. [맨 오브 라만차]가 이상주의적인 판타지를 구가하는 일반 뮤지컬하고 구별되는 점은 이 작품은 정확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여 이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수많은 뮤지컬은 가난한 집안의 여인이 왕자와 결혼하는 신데렐라 스토리거나, 선한 사람이 성공하고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권선징악적인 해피엔딩을 추구한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뮤지컬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뮤지컬이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뮤지컬에서는 자신이 꿈꾸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맨 오브 라만차]의 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상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암울한 현실과 불가능한 이상의 갈등은 작품 속에서 극화되어 표현된다. 알론조 기하나 영감이 스스로 기사를 자처하고 방랑을 하자, 조카의 연인인 닥터 카라스코는 망상에 빠져 있는 알론조 영감을 현실로 돌아오게 한다. 카라스코가 택한 방법은 현실을 제대로 보게 하는 것(거울)이다. 무모하게 창을 휘둘렀던 돈키호테는 거울의 기사에게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진다. 결투에서 거울 속에 비친 알론조 기하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높은 벽은 알돈자가 먼저 만난다. 알돈자는 난생 처음 자신을 고귀한 존재로 대해주는 돈키호테의 호의에 도취한다. 돈키호테가 ‘둘시네아’라고 부를 때면 부끄럽지만 싫지 않다. 여관에서 노새끌이들과 한바탕 싸움에서 승리하고 한껏 의기양양했던 알돈자는 돈키호테의 충고대로 다친 노새끌이들에게 선의를 베풀고자 상처를 치료해준다. 그런데 알돈자의 선의에 대한 노새끌이의 보답은 집단 강간이라는 형태로 돌아온다. 뮤지컬뿐만 아니라 연극에서도 흔히 보여주지 않는 집단 강간 형태를 비교적 사실적인 행위 안무로 표현한 것은 이상에 젖어 있던 관객들에게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일지라도 주어진 길을 가야 한다’고 했던 세르반테스도 집단 강간을 당한 알돈자와, 주름살로 가득한 힘없는 늙은이인 자신을 알아보고 절망에 빠진 알론조 기하나 영감에 이르는 대목에서 극을 멈춘다.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이상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스스로 대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혼란에 빠진 세르반테스를 대신해서 그 길로 안내하는 것은 돈키호테가 보여준 무모한 도전을 바라본 사람들이다.
돈키호테가 벌인 무모한 도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이는 행위는 산초, 알돈자 그리고 죄수들에게 전염된다. 그리고 [맨 오브 라만차]를 쓴 데일 와써맨이나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는 이상을 향한 무모한 꿈의 행렬이 관객들과 독자들에게까지 이어지길 바란다. 뮤지컬에서 이러한 작가의 마음은 노래로 배치되어 있다. 현실로 돌아온 알론조 기하나 영감은 알돈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자 알돈자는 돈키호테가 자신을 부르는 방식 ‘둘시네아’를 힘겹게 (알돈자에게 자신을 둘시네아라고 부르는 일은 현실에서 이상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므로 힘겹게) 발음한다. 그리고는 알돈자에게 들려주었던 ‘이룰 수 없는 꿈’의 말들을 들려준다. 이런 응원에 힘입어 알론조 기하나는 다시 힘을 얻고 돈키호테가 되어 일어선다. ‘이룰 수 없는 꿈’을 벅찬 감동으로 부르던 돈키호테는 노래를 채 마치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불가능한 길을 걸었던 그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무모한 도전 ‘이룰 수 없는 꿈’은 살아남은 알돈자와 산초, 그리고 죄수들이 합창으로 부르며 막을 내린다. 이처럼 뮤지컬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을 통해 돈키호테의 이상이 알돈자와 산초, 죄수들 그리고 관객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노래로써 보여준다.
[맨 오브 라만차]가 고전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아마 미래도 현실은 녹록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아무리 험난할지라도 희망을 갖고 걸어야 하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영원한 숙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시대가 흘러도 탈색되지 않는 미치 리의 음악은 이 작품을 영원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공연 내역
1965년 11월 22일 워싱톤 스퀘어 시어터에서 초연
수상 내역
1966년 토니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연출상, 작곡상, 무대디자인상 등 5개 부문 수상
창작자
극작 : 데일 와써맨(Dale Wasserman)
극작가이자 방송작가. [링컨 살인 사건], TV 드라마 [나는 돈키호테]가 인기를 끔.
작곡 : 미치 리(Mitch Leigh)
재즈 음악과 TV,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 작곡가로 활동. 광고 음악 등 다양한 음악 활동을 했다. 1985년 [킹 앤 아이] 리바이벌 프로덕션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캐릭터 소개
돈키호테 / 세르반테스
시인이자 극작가, 자신을 방랑기사라고 생각하는 돈키호테를 창조함.
알돈자
여관 헤드렛일을 하는 여자. 돈키호테가 고귀한 레이디 둘시네아라고 부르자 혼란스러워한다.
산초
돈키호테를 따라 다니는 충성스럽고 유쾌한 하인
카라스코
돈키호테의 조카인 안토니아의 애인. 돈키호테가 현실을 직시하도록 거울의 기사로 나타난다.
여관 주인
마음씨 착한 주인.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잘 받아준다.
시놉시스
종교 모독으로 지하 감옥에 잡혀 온 세르반테스는 죄수들의 모의재판에서 이상주의자로 판결되자, 극중극 '돈키호테'를 선보여 자신을 변호한다. 돈키호테는 충직한 하인 산초를 데리고 다니며, 풍차에 뛰어들고 여관집 하녀를 고귀한 레이디라고 부르는 등 기행을 벌인다. 카라스코 박사는 돈키호테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기 위해 거울의 기사로 변장하고 그에게 시골의 노인일 뿐인 알론조 기하나의 모습을 직시하게 한다. 현실로 돌아온 알론조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알돈자가 찾아와 그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킨다. 환희에 젖어 다시 돈키호테로 돌아오지만 곧 죽게 된다. 알돈자는 돈키호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상을 향해 걷고 있을 돈키호테를 축복한다.
=== 인물 정보 === <2010년 3월 25일 네이버캐스트 / 번역가 박중서 글>
인물 세계사
최초의 근대 소설 <돈 키호테>를 지은 에스파냐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 ~ 1616
“세르반테스의 삶은 온갖 사건과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에스파냐어권의 뛰어난 작가가 쓴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 그의 명성은 서양 언어권에서 단테, 셰익스피어, 몽테뉴, 괴테와 톨스토이가 보여주었던 탁월함처럼 영원한 것이다. (...) 세르반테스는 글 쓰는 방법을 알았고, 돈 키호테는 행동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를 위해 태어난 하나다.”
해럴드 블룸
레판토의 외팔이, 에스파냐의 국민 작가로 거듭나다
[돈 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는 1547년 9월 29일,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 인근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이지만, 훗날 먼 친척의 이름인 ‘사아베드라’(Saavedra)를 덧붙여 사용한 관계로 오늘날에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 vedra)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 의사였지만 경제적으로는 무능해서 1551년에는 빚 때문에 전 재산을 차압당하고 투옥되기까지 했다. 이후 가족이 바야돌리드와 세비야 등 여러 지역을 전전하는 와중에도 가정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르반테스의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예수회 계열의 학교를 다니면서 인문 교육을 받았으리라 추정될 뿐이다. 그가 19세 때인 1566년에 쓴 소네트가 최초의 창작으로 여겨지며, 1568년에 사망한 여왕 이사벨 1세를 추모하는 공동 작품집에 시 몇 편을 썼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작가를 지망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이력은 오히려 군인이었다. 1569년에 세르반테스는 교황의 사절로 에스파냐를 방문한 추기경의 비서가 되어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베네치아에서 그곳에 주둔한 에스파냐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1571년 10월 7일, 베네치아와 제노바와 에스파냐의 연합군이 투르크 군과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 레판토 해전이 벌어졌다. 세르반테스는 전투 중에 가슴과 왼손에 총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왼손을 쓰지 못하고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5년이나 더 군인으로 복무하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28세 때인 1575년, 세르반테스는 드디어 퇴역을 결심하고 고향 에스파냐로 향한다. 그런데 출항 엿새 만에 그가 탄 배는 해적선의 습격을 받았고, 세르반테스는 졸지에 해적의 포로가 되어 알제리로 끌려간다.
해적이 요구한 몸값은 가난한 세르반테스의 가족이 결코 마련할 수 없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외부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게 되자 세르반테스는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네 번이나 감행되었던 탈출 시도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때마다 그는 혹독한 처벌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를 딱하게 생각한 알제리의 에스파냐 동포들이 몸값을 대신 지불해 준 덕분에, 세르반테스는 5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1580년에 마침내 에스파냐로 귀국한다. 1584년에는 37세의 나이로 19세의 카탈리나 데 살라사르와 결혼한다.
군인 시절의 인맥을 이용해 공직으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자, 생계가 막막해진 세르반테스는 소싯적의 글 솜씨를 발휘해 시와 희곡과 소설 등을 써서 팔았다. 1585년에 발표된 첫 번째 소설 [라 갈라테아]는 호평을 받았지만 큰 명성을 얻진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말단 관리가 된 세르반테스는 이후 10여 년간 무적함대의 물자 조달관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세금 징수관으로 일했다. 그는 여러 번 비리 혐의로 고발당해 징역형을 받았는데, 그중 한 번인 1597년 가을에 세비야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돈 키호테]를 구상했던 것으로 전한다.
세르반테스가 57세 때인 1605년에 출간된 [돈 키호테]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생활고로 인해 출판업자에게 판권을 넘겨버린 까닭에 경제적 이득을 얻지는 못했다. 말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해서 아예 수도회에 들어갔지만, 그런 와중에도 문필 생활을 병행하여 [모범소설집](1613), [돈 키호테] 제2부(1615) 등의 작품을 연이어 펴냈다. 마침내 수도사로 정식 서원을 했을 즈음, 그는 이미 수종증이 악화되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1616년 4월 23일, 세르반테스는 6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흥미롭게도 이 날짜는 당대의 또 다른 대작가 셰익스피어의 사망일과 똑같다.
이듬해에 간행된 유작 [사랑의 모험](1617)에는 저자가 사망하기 직전에 쓴 서문이 있는데, 그 마무리 대목은 마치 독자들에게 보내는 유언처럼 들린다. “모든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끊어진 실을 이으면서, 내가 여기서 쓰지 않은 것들, 그리고 잘 어울렸던 부분들을 언급할 시간이 올 겁니다. 안녕, 아름다움이여. 안녕, 재미있는 글들이여. 안녕, 기분 좋은 친구들이여. 만족스러워하는 그대들을 다른 세상에서 곧 만나길 바라면서 난 죽어가고 있다오!”(조구호 외 옮김)
최초의 근대 소설 [돈 키호테]
에스파냐의 국왕 필리프 3세는 어떤 사람이 길에서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는 꼴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건 미친 놈 아니면, [돈 키호테]를 읽는 놈이로군.” [돈 키호테]가 얼마나 탁월한 유머 소설인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지금은 최초의 근대 소설이며, 에스파냐의 국민문학이며, 호메로스와 단테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버금가는 세계 문학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지만, 이 작품의 전편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무엇보다도 ‘유머’임을 잊어서는 곤란하리라. 원제가 [재기발랄한 시골 향사, 라 만차의 돈 키호테]인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알론소 키하노라는 노인이다. 중세의 기사 모험담에 매료되어 정신이 나간 그는 낡고 녹슨 갑옷을 차려 입고, 늙고 말라빠진 말 로시난테에 올라타 기사로서의 편력에 나선다. 풍차를 거인으로 알고 덤볐다가 나가떨어지기도 하고, 여관을 성으로 착각하고 여관 주인에게 기사 작위를 받기도 하며, 죄 없는 시골 사람들을 적이며 마귀로 오인하고 덤벼들기도 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지만, 대개는 엉터리 기사 행각을 재미있어 하고 도리어 놀려먹기도 한다.
[돈 키호테]는 출간되자마자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심지어 그 인기에 편승한 가짜 속편이 유통되기도 했다. 세르반테스는 그로 인한 불이익을 막기 위해 서둘러 진짜 속편을 펴냈는데, 일각에서는 [돈 키호테]의 제1부보다 제2부가 더 탁월한 작품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제2부에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곳곳에서 환대를 받는데, 두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세상에 떠도는 가짜 속편을 비난하며 자신들이 ‘진짜’라고 주장한다. 돈 키호테는 속편에서도 여러 가지 모험을 즐긴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제정신을 되찾고 노환으로 사망한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지적처럼 [돈 키호테]는 오늘날 사람들이 “읽기보다는 인용하기를 더 많이 하고, 즐기기보다는 칭찬하기를 더 많이 하는 책”이다. 이것은 고전이라는 명성에 뒤따르는 불가피한 결과이기는 하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돈 키호테]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도 없다. 비록 완독한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지금까지도 돈 키호테는 ‘무모한 사람’의 대명사로, 산초 판자는 ‘우직한 부하’의 대명사로, 로시난테는 ‘볼품없는 탈것’의 대명사로 사용된다. 어느 정신 나간 노인에 관한 17세기의 소설이 얻게 된 이런 보편적인 인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소설의 제2부에서 돈 키호테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으려는 학사를 만류하던 한 인물의 반론은 이 소설의 매력을 한 마디로 설명해 준다. “돈 키호테가 그의 허튼짓으로 우리 모두를 재미있게 한 그 즐거움에 비하면, 그가 정신이 말짱해져서 얻는 이득은 그에 못 미칠 거라는 걸 모르세요? (...) 저는 돈 키호테가 절대 병이 나아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가 건강해지면 그의 재치와 매력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하인인 산초 판자의 재치까지도 잃게 될 테니까요. 그들의 재치 있는 말들은 어떤 것이든지 우울증 자체라도 즐거움으로 되돌려줄 능력이 있거든요.”(민용태 옮김)
하지만 오늘날 [돈 키호테]를 읽은 사람은 십중팔구 이게 과연 ‘유머 소설’인지 의구심을 품지 않을까? 왜냐하면 등장인물만 650여 명에 달하는 이 방대한 소설은 의외로 상당히 지루하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의 여정 곳곳에 무려 일곱 편이나 되는 ‘곁다리’ 에피소드를 늘어놓았는데, 아마도 원고의 분량을 맞추기 위해 기존의 습작 단편을 원고에 포함시킨 까닭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런 곁다리 에피소드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는 동안,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는 거의 하는 일 없이 옆에 서서 듣기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돈 키호테]를 걸작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조차도 완독보다는 오히려 선독을 권한다. 클리프턴 패디먼은 [돈 키호테]를 읽을 때 곁다리 에피소드나 ‘시’가 나오면 무조건 건너뛰라고 조언한다(세르반테스야말로 역사상 “최악의 시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서머셋 몸도 비슷한 견해를 밝히면서 역시 선독을 추천한 바 있다. 하지만 [돈 키호테]에는 이런 뚜렷한 단점을 능가하는 수많은 장점이 있다. 역대의 수많은 문학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최고의 소설로 격찬하며, 세르반테스를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작가로 인정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학사적으로 [돈 키호테]는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된다. 기사를 선망하는 주인공이 시대착오적인 행동으로 비웃음만 산다는 내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시대적으로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사조적으로는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나아가 이 소설은 독특하고 파격적인 서술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제1부에서는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저자가 개입하더니, 이 작품은 사실 자기가 어느 아랍인 작가의 책을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제2부에서는 아예 주인공들까지 합세하여 ‘[돈 키호테]라는 소설’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현대적인 ‘메타 픽션’의 선구적인 사례로도 설명한다.
실제로 돈 키호테의 광기는 오히려 과거보다 현대의 개념으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비유하자면 그는 이 세상을 상대로 일종의 ‘코스프레,’ 또는 ‘게임’을 하는 셈이다. 사람들은 그를 ‘광인’으로 여기지만, 종종 건전한 판단을 내리는가 하면 정말 위험한 상황에선 몸을 사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어쩌면 그는 이 세상을 무대로 자기만의 ‘놀이’를 하는 사람이며, 워낙 진지하게 몰입하기 때문에 도리어 ‘광인,’ 또는 요즘 식으로 ‘폐인’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놀이’를 통해 또 다른 자아상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돈 키호테는 현대인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처음에는 유머 소설로 간주되던 [돈 키호테]는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며 이상과 현실의 갈등, 인간의 실존적 고뇌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담은 작품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서머셋 몸의 지적은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세르반테스의 애초 의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돈 키호테의 (...) 갖가지 불행을 목격하고 (...) 웃음을 터트리지 않으면 안 되지만, (...) 우리는 그 사람과 같은 시대 사람들처럼 웃지 못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신경이 예민하고 섬세해졌기 때문에, 그를 바보처럼 비웃고 놀리는 농담이 때로는 잔인하게 느껴져서 즐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김정진 옮김)
세르반테스와 인간의 또 다른 '전형' 돈 키호테의 영향력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인간의 수많은 ‘전형’을 그려낸 것처럼,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역시 또 다른 ‘전형’을 만들어냈다. 에스파냐 사람의 기질을 집약한 인물로 평가되는 돈 키호테는 또한 16세기의 전성기 이후 강대국의 지위에서 격하된 에스파냐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상징하게 되었다. 특히 20세기 초에는 돈 키호테 같은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 새로이 도약하자고 역설하는 민족주의적 주장도 나왔다. 미겔 데 우나무노가 [생의 비극적 의미](1913)에서 돈 키호테를 가리켜 에스파냐의 구세주라고 격찬한 것이며,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돈 키호테의 성찰](1914)에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 키호테의 기개를 예찬한 것이 대표적이다. 러시아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는 [햄릿과 돈 키호테](1860)라는 유명한 강연에서 ‘햄릿형 인간’과 ‘돈 키호테형 인간’을 구분했다. “이 세상에는 햄릿형의 인간이 존재하며, 이런 유형의 인간은 뛰어난 지각력과 (...) 깊은 통찰력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 햄릿형의 인간은 이 세상과 민중에 대하여 기여하는 바가 하나도 없으며, 실천력의 결여로 인해 비난을 받습니다. 반면 절반쯤 광인이라고 할 수 있는 돈 키호테형의 인간은 하나의 목표만을 추구하며 (...) 그런 까닭에 이 유형의 인물만이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하여, 민중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이철 옮김)
[돈 키호테]는 문학 이외의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미술 작품으로는 무엇보다도 구스타브 도레의 유명한 삽화를 빼놓을 수 없다(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작품집, 그리고 성서 삽화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오노레 도미에,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같은 화가들도 이 유명한 소설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겼다. 음악 분야에서는 헨리 퍼셀,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 펠릭스 멘델스존, 쥘 마스네, 모리스 라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등 저명한 음악가들이 저마다 [돈 키호테]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을 남긴 바 있다. 현대에 나타난 [돈 키호테]의 각색 작품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 돈 키호테]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라 만차의 사나이](1964)가 있다. 데일 와서만의 희곡에 미치 리와 조 대리언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덧붙여 만든 뮤지컬로, 세르반테스의 감옥 생활과 [돈 키호테]의 줄거리를 교묘하게 접목시킨 액자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중에서 세르반테스 / 돈 키호테가 부르는 ‘불가능한 꿈’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특히 유명하며, 토니상 5개 부문을 석권하고 1972년에는 피터 오툴과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첫댓글 세르반테스 선생은 1616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6년, 서거 400주년을 대대적으로추모하고 있는 영국의 셰익스피어 선생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세르반테스 선생 서거 400주년을 추모한다고 난리라고 합니다...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서푼에서도 스을쩍...ㅎㅎㅎ
바뜨...1972년 제작, 그러니까 45년 전의 필름입니다...화질과 음질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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