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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들
제 1장. 지식인들의 스승
1. 대부분의 기독교인 치료사들이 아직도 향료를 끓이고 주문을 외우던 시기에, 이슬람과 유대교 의사들은 이미 일종의 과학적인 치료를 실행하고 있었다. -31p
▪ 이것은 중세 기독교 문화권의 문명과, 중세 이슬람 문화권의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중세 기독교가 억압했던 실질적 학문을 이슬람은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2. 지난 300여년 동안 신자들과 함께 깊이 성찰하고 정교하게 만들었던 철학적인 문제와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기독교의 성직자들이 이슬람교나 유대교 학자들과 더불어 논의하는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32p
▪ 유럽인 침략자들이 이슬람을 보고 가장 놀라워했던 이유는 고대의 아테네 또는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의 학문이 번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슬림들은 분명히 창조적인 사상가들이다. 그들은 넓은 세계를 받아들이고 수용함으로써 스스로의 자랑이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3. 아마도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신앙을 가졌던 대주교는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또는 다른 종교의 탁월한 철학자들이 주장한 진리들이 예수의 사도들과 교부들이 주장한 진리들과 약립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37p
▪ 철학자들의 사고가 항상 그리스도교적 교리와 일치하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톨레도에 이슬람이 발견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의 책을 번역하는 중심지로 만들고 기독교인이든, 유대인이든, 무슬림이든, 라틴계이든, 그리스계이든 슬라브계이든 가장 훌륭한 학자들을 모집해서 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하나라는데 동의한 그들의 종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4. 유럽은 학문에 국경이 없으며, 또한 학문은 보편적이고, 전지구적이고, 또한 ‘인간적’이며, 인종이나 종교와 관계없이 인류 전체에 관한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톨레도의 사례에서 처음 배우게 되었다. -39p
▪ 이슬람 문화에 충격을 받은 유럽인들의 학문적 흡수력은 가히 대단한 것이었다. 아마 그들이 이토록 강한 흡수력으로 이들 학문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이전부터 아랍의 해석자들이 답변했던 문제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봇물처럼 쏟아지는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음은 확실했다.
5. 로마 교황청이 그에게 성지로 십자군 전쟁을 수행하도록 명령을 내렸을 때, 그는 전쟁을 수행하는 대신 자신의 인맥과 정치적 기교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이(잠정적으로나마) 기독교의 지배 하로 반환되도록 협상을 했다. -42p
▪ 프리드리히는 이탈리아와 독일 전체를 통합하여 자신의 지배 아래 놓음으로써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굼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구세주와 같은 인물로 높였고, 주위 적대자들로부터 적 그리스도로 비유될 만큼 간교했다. 그의 존재가 어떻게 중세 유럽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그의 재능을 바리지 못한 곳에 사용하였다.
6. 자신들의 외부에 있는 거대한 우주와 내부에 있는 작은 우주를 이해하고자 하는 꿈을 처음으로 지녔던 사람들이 살던 아테네는 어쩔 수 없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궤도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43p
▪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세유럽의 철학의 수준을 얼마나 끌어올렸는지 그의 영향력을 다시금 알아차리게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어쩔 수 없이 끌어들였다고 했는데, 이를 유심히 보면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였던 것이 결코 긍정적인 영향만을 미쳤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7. 철학자들이란 권력의 중심부와 멀리 떨어져 모호한 개념의 거미줄을 치고 있는 비현실적이고 비세속적인 사람등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에 불과하다. -43p
▪ 중세유럽에서, 수세기 동안 철학자들의 임무에는 통치자들에게 현명하게 통치하는 방법과 신하들에게 언제 복종해야 하는지를 조언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분명히 그것은 위험한 직업이었다. 소크라테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런 일을 연유로 사형및, 정치적인 소송의 대상이 되었다.
8.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는 특권층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리스에서 접할 수 있는 최고의 대화를 접하게 함으로서 올바르게 생각하도록(그리고 결과적으로 올바르게 통치하도록) 훈련시키려는 목적을 지닌 일종의 클럽이었다. -43p
▪ 이것은 아카데미아의 성격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곳은 시험, 성적, 학위, 그리고 전문성의 등급이 있는 현대의 대학교와는 성격이 달랐음을 이야기한다. 초창기의 플라톤이 학식으로 인한 권위보다 창의적인 학문을 궁구하는 젊은 학자들을 더욱 귀하게 생각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9. 과거에 의사의 역할은 숭배되던 존재에게 도움을 호소함으로써 고통받는 환자를 치료하는 성직자나 주술사의 역할과 다르지 않았다. -46p
▪ 중세시대의 의사야말로 거의 마녀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의 생리에 대해서 무지한 채 오로지 피를 빼거나 머리에 십자가 흉터를 내는 등의 행위는 사람들의 치사율만 높일 뿐이었다.
10.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릴 적에 공식적인 의학적 가르침을 받았든 또는 그렇지 않았든, 그가 노년기에 보여 주었던 노리적이고 초자연적이지 않은 설명에 대한 열정, 세심한 관찰을 강조하는 성향, 그리고 (의학의 특징인) 손을 더럽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장인기질은 그의 아버지와 동일했다. -48p
▪ 이것은 곧 물리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에 적절한 답변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삶의 과정 속에서 아버지 니코마코스의 지식을 어느 정도 가졌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논리적 비약을 하자면 정신과 신체를 갈라놓는 성향, 즉 물질과 정령의 영역을 갈라놓는 성향은 아리슽텔레스에게는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11. 중세 시대에 플라톤의 ‘관념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이 충돌했고, 그 결과 많은 학자들이 직업을 잃고, 또한 몇몇 이론가들은 목숨조차 잃었다. -50p
▪ 이 시절만 하더라도 인간이 가지는 신념의 다양성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타인의 생명을 끊는 행위들이 일삼아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 학파의 경우 그들의 신념이 신앙이 되었고, 자신의 신앙을 발설하는 이들에게는 사형이라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12.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재는 예를 들어 플라톤처럼 개별적인 실체들로 이루어졌고, 각각의 실체는 물질과 형상이 분리되지 않는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된 것이며, 또한 각각의 실체는 그것이 지닌 자연적인 잠재력을 실현하는 과정에 있다. -50p
▪ 이 논제는 곧 물질과 형상이 온전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함으로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이데아설과는 다른 방향을 주장하고 있는 듯 하다. 플라톤은 물질에 대한 형상은 늘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복사되는 것이며, 따라서 형상은 물질과 분리되어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실체에 대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줌으로써 좀 더 넓은 가치관을 만들어놓았다.
13. 수학과 예술은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감각이나 쇠약해지는 성장 과정이 아니라 선, 원, 그리고 제곱근 등의 추상적이고 불변하는 개념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50p
▪ 12번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대해 플라톤은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수학과 예술이었다. 그에게 수학과 예술은 추상적이고 불변한다는 개념에 초점을 맞춤으로 미, 선, 그리고 정의와 같은 비수학적인 개념들에게 동일한 실재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14. 완전한 구체의 관념을 어디선가 획득하지 않았다면 오렌지가 구형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51p
▪ 플라톤이 제기한 문제이다. 그는 우리가 애시당초 이데아를 통해 형상에 대한 생득적 관념을 흡수함으로 인해 오렌지를 보았을 때 감각적으로 그것이 구형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데아가 필요하며,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15. 우리의 정신들 전체 또는 그 일부가 예전에 관념들과 동일한 영역에 거주했던 것이 아니라면 그런 관념들이 어떻게 우리의 정신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51p
▪ 플라톤은 우리의 정신이 예전부터 있었던 관념(이데아의 관념)과 동일한 곳에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의 관념은 외부 어딘가로부터 들어올 수 밖에 없고 따라서 모든 관념들의 집합체, 그 근원을 ‘이데아’ 라고 그는 규정지었던 것이다.
16.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즐겁고도 흥겹게 했던 것은 감각에 의해 지각된 (유일한 우리의 고향인) ‘실제 세계’가 그 내부에 지성성과 가치의 근거를 포함하고 있다는 신념이다. -52p
▪ 그의 말에 따르면 감각에 의해 지각된 실제는 그 내부에 가치의 근거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실제 세계는 다른 곳 -이데아라는- 의 능력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피상적인 모습들에는 오류의 여지가 있고, 사물들의 진정한 본성 또는 그 구조가 감추어져 있으며, 또한 지혜가 바탕에 깔린 이러한 실재들을 드러냄을 의미한다는 데 대해서는 틀라톤에 대해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플라톤의 모든 생각과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지성 세계의 존재는 자연세계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긴밀한 결합을 이루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플라톤과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17.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훌륭한 삶이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위해 한시적인 쾌락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의미했다. -57p
▪ 그에게 있어서 우정, 가족 생활, 정치 참여, 그리고 삶의 성찰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열쇠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내세의 삶 만을 가치있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수세기 뒤에 그의 윤리적 저술들이 재발견 되었던 당시에는 엄청난 파급을 가져올 만큼 놀라운 견해였다는 데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18. 아테네의 정치인들이 8년전에 그에게 부여했던 명예를 철회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 그가 보인 반응에서 그의 심적 상태를 잘 알 수 있다. “델포이에서 내게 부여했고 이제 철회된 명예에 관해, 나는 많은 관심을 갖지도 않으며, 또한 많은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아니다.” -64p
▪ 이런 종류의 균형은 덕이 중용이고, 또한 세상의 덧없는 즐거움들이 결코 죄스러운 것은 아닐지라도 학문이 주는 지속적인 만적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던 철학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바로 그런 평정심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19.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이 지닌 가장 탁월한 점은 합리성이다. -67p
▪ 그의 일반적인 방법은 주요 용어들을 정의함으로써 문제를 구성하고, 다른 견해들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것들을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그것이 발견된 증거와 논리적으로 정합적이고 일관적임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는 어떤 점도 보여주지 않는다.
20.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의하면 참된 지식은 우리의 정신 내부에서는 물론이고 객관적으로도 존재하는 실재와 우리를 연결한다. -70p
▪ 아리스토텔레스는 “안다는 것은 사물들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정신과 실재의 긴밀한 연합을 통해서만이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우리들에게 역설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현실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 2장. ‘철학의 여신’의 살해
21.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할 일은 세상이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세상에서 살아가고, 악마의 유혹에 저항하는 데 필요한 은총을 받기를 기원하며, 교회가 제공하는 고행과 위로를 받아들이고, 또한 불멸하는 성인들의 사회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결론을 맺는다. -79p
▪ 그의 말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초라한 실존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내세의 삶을 희구(希求)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왠지 모르지만, 조금은 씁쓸한 답변이다. 하지만 곰곰이 되씹어볼만한 문장.
22. 아우구수티누스의 글은 아주 열정적이면서도 통찰력이 있었고, 또한 그의 플라톤주의적인 기독교가 후기 로마사회의 맥락과 잘 통했다. -79p
▪ 그렇게 때문에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그의 글이 참된 신앙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설이 바로 기독교 신앙 그 자체라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23.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상가들은 모든 자연의 존재들이 그렇듯이 자신들도 결국 죽게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을 양육하고 있는 환경은 불멸하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것이 그들의 삶에 의미를 준다고 생각했다. -80p
▪ 그들에게 자연 세계는 광대하고도 조화로운 곳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자연의 광대하심을 마치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사물들이 어덯게 작용하는가를 이해하고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24. 사탄을 정복하지 못할 정도로 약한 마니교의 신을 어떻게 신봉할 수 있는가? 그러나 만약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이 전능하다면, 신은 악과 죽음으로 파멸하게 될 우주를 왜 창조했는가? -84p
▪ 그는 마니교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괴롭히던 질문들에 대한 좀 더 만족스러운 답변을 찾지 못한듯 싶었다. 마니교는 각각 그 자체의 신성을 대표하는 선과 악의 힘들이 영원히 투쟁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마니교의 사상은 무력하고 편협하다고 생각된다. 마니교에서의 신은 끊임없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은 전능을 버린 대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중성을 가진 신이라는 더욱 처참한 이념을 받아들이게 된 꼴이다.
25.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현상들의 세계, 즉 감각 인상들을 통해 파악되는 ‘사실들’의 세계가 약화되었거나 또는 왜곡된 일종의 실재, 즉 원판이 아니라 불완전하게 복사된 우주라고 주장했다는 데 있다. -86p
▪ 플라톤은 실재가 원판이 아닌 복사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그 관점을 일종의 공헌이라 일컫는다. 물론 원폰은 플라톤이 관념의 영역이라고 부르는 곳, 또는 기독교인들이 천상의 왕국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
26. 악은 신에 의해 창조된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의 결핍’,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우주에 야기된 일종의 윤리적 블랙홀이다. -87p
▪ 그는 창조된 우주가 사악하다는 낙인을 찍지 않고도 천체와 지구를 근본적으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선의 부재로 보는 플라톤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악은 실재가 아닌 하나의 행동양상, 즉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27. 인간의 지식은 신의 조명의 결과이며, 조력을 받지 않은 인간 이성의 산물이 아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적인 사고만을 통해 우주의 비밀들을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잘못된 것이다. -88p
▪ 분명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사고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신이 우리에게 직접 밝혀주지 않으면 진리는 영원히 감춰진 채로 있게 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에 대해 깊은 신뢰 또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성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는 상당히 복합적이었다.
28. 만약 다음에 이어질 영원한 저주를 피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해서 좋은 점이 무엇이 있겠는가? -89p
▪·기하학적 공리들을 구성하고, 일식을 예견하는 능력을 자만하고, 정돈된 도시와 문명화된 사회적 삶에 자만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부패와 신의 영광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성을 무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행태에 대해 이러한 일침을 가한 것이다.
29.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에 의해 주장된 진리들이 명백하며, 이성만을 통해 그 모든 진리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98p
▪ 예를 들어 그는 ‘인간의 정신은 아버지의 실체를 통해 아들의 탄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물론 인간 이성의 통찰력이 하늘만큼 높은 지식의 단계까지 오를 수 있는 한에서만 우리의 탐색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성이 삼위일체와 부활과 같이 어려운 종교적 개념들을 명료화 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30.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켜라.’는 구절을 실천하는 것은 보기보다 어려운 문제이다. -98p
▪ 이것은 신앙의 진리를 다른 사고 영역들에 적용될 수 있는 말로 설명하라는 것과 같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의 사용은 신앙의 진리가 지닌 신비로움의 제거가 아니라 세속적인 지식과 종교적인 지식의 세계들을 연결하는 개념적인 교량을 건설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31. 그녀는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사상을 결합시킴으로써 불행함, 사악함, 그리고 부당함 등과 같은 세상의 현실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녀는 신의 선견지명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103p
▪ 이것은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에서 철학의 여신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그녀의 입장에 따르면 사람들이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인 신적인 이성의 작용을 대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신의 선견지명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일치한다는 말을 통해 결론을 맺고 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넓은 의미로 신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말이다.
32. 끝없이 지속되는 겨울처럼 보이는 시기에, 안락함과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난해한 철학보다는 확신을 주는 신앙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했다. -104p
▪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이후 서유럽은 폭력과 빈곤, 그리고 무질서를 겪는 500년동안 휴면기에 있게 되었다. 이처럼 철학의 공백기간동안 그들은 골머리를 앓으며 진리를 알아가는 수고보다는 교회 성직자들의 설교를 따름으로써 얻게되는 신앙을 더욱 갈망하고 있었다. 배고픈 인간이기보다 배부른 돼지의 삶을 따랐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33. 논란이 되었던 문제는 예수와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106p
▪ 그들의 논란은 예수가 신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하거나 유사하지는 않다고 믿는 사람들과, 예수가 인간인 동시에 신이며, 창조자보다 못한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한 주장과의 대립을 의미한다. 이 논쟁은 과거 300년동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던 교리적인 문제였다.
34.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이단자, 유대인, 그리고 이교도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의 물결이 이 지역을 휩쓸었으며, 주교들은 폭력을 장려하거나 또는 묵인하는 한편 사회를 정화하려는 열광적인 수도승들은 직접 폭력을 자행하기도 했다.
▪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마침내 33번의 논쟁이 마무리 되었다. 그 공의회는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또한 그들이 모두 성령과 확고하게 결합된 단일한 신으로써 동등한 지위를 갖는 인격체라고 선포했다. 그럼으로 기독교와 이교도는 확실히 구분이 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 기독교는 폭력으로 이교도를 탄압했다. 이교도의 사원을 불질러 태우는 것이 대중적인 오락거리가 되었고, 문화적인 귀중품들은 종교적인 광신자들에 의해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기독교는 진리라는 이름아래 모든 인권을 무시했던 것이다.
35. 안티오크의 신학자들은 신이 이러한 인간의 경험들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신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말하는 이교도 사상의 기미가 보이며, 또한 예수를 인간으로 숭배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처럼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110p
▪ 신 자신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또한 그가 고통을 겪고 죽고 또한 다시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안티오크의 입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생애를 적은 4복음서는 모두 허풍이 된다. 모든 연고에서부터 멀어진 신은 곧 관념에 머무른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신성을 강조했지만, 성경을 부인함으로 성경 안에 담겨진 신의 모든 속성을 부정하게 되었다.
36.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인간성을 그의 신성과 분리하는 것은 결국 그의 인격성을 떼어 내는 것이며, 그를 신보다 못한 존재로 간주하는 이단적인 아리우스교를 부활시키는 것이라고 응수한다. -110p
▪ 예수의 인간성을 배제한다면, 예수라는 인물을 신성에서 제외함을 의미하며, 예수가 빠진 신성은 인격성이 빠진 신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는 결국 하나의 선지자에 불과하며 예수를 신보다도 못한 존재로 간주하는 이교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이야기다.
37. 유스티니누스는 529년에 아테네의 플라톤적인 아카데메이아를 폐쇄했다. -116p
▪ 유스티니누스는 철학적인 성찰이 이단의 조력자가 되었고, 또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논쟁의 자극제가 되었다는 이유로 이 학교를 폐쇄하였다. 철학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무엇이 진리인가? 사유에는 한계가 없다. 따라서 사유는 신앙의 문제에서조차 걸림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때로는 이런 모습이 조금 껄끄럽기도 하지만, 이러한 대담함이 철학을 철학답게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38. 우리는 신이 자유롭게 부여한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상습적인 죄인들이며, 이처럼 타락한 우주를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은 이성의 허약함과 감각 인상의 본질적인 불확실함으로 인해 제한된다. -118p
▪ 물질 세계가 위험과 유혹으로 가득한 불한정하고 덧없는 장소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즉 물질 세계가 그 작용과 존재를 불가사의한 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예측 불가능한 환경임을 알아야 한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가 내세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젠가는 알아야 할 것이다.
39. 아비세나는 천국과 지상이 신의 의지적 창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유출 emanation'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정통 무슬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123p
▪ 유출설이란 세계가 존재하게 된 연유에 대해 신의 의도를 가지고 창조한 것이 아닌 신이 가진 존재의 충만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유출이 되었다는 입장을 가진다. 여기에서 신은 그 자체로 충만하기 때문에 아무런 의지를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에게 어떠한 의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슬림들에게 어떤 화를 자아냈는지는 의문이다.
40. 이성적인 결론들과 신앙적인 신념들 간에 진정한 모순이 있을 수 없다. -125p
▪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교육받은 일부 기독교 사상가들의 가정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옳은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한 삶, 즉 이성적인 삶과 윤리적 행위를 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천국은 왜 필요한 것인가? 이 질문은 기독교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도했던 것처럼 우주를 설명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연관이 된다. 이성과 신앙은, 아직도 일치를 보기에는 너무나도 멀다.
제 3장. 그의 책들은 날개를 가졌다.
41.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지었는가? -134p
▪ 예수를 배반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박해하고 로마인들에게 넘겼으며, 또한 빌라도가 예수를 살릴 기회를 주었음에도 유대인들은 그를 십자가형에 처할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신을 죽였다. 이것은 결과이며,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들의 죄는 명백해보인다.
42. 일반 대중의 마음속에서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를 팔아 넘겼던 배반자 유다의 이미지와 고혈을 빨아먹는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감이 잘 들어맞았다. -136p
▪ 일반 서민들에게 유대인들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이교도였고, 또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입장이 대중으로썬 달갑지 않았을 터이다.
43. 아벨라르두스의 <예와 아니오>라는 책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폭넓은 영역에 걸친 대안적인 논변들을 보임으로써, 그들이 권위자들간의 어떤 불일치가 실질적인 것이고 어떤 것들이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를 자세히 분석해서 결정하도록 돕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상반된 입장들을 조화시킬 수 있도록 권장하는 것이었다. -137p
▪ 이 책에서는 교부들이 말했던 서로 상충하는 진술들을 모았고, 158개의 서로 다른 명제들을 찬성과 반대의 두 가지 형태로 배열한다. 예를 들어 ‘신앙은 인간의 이성에 뒷받침된다는 주장과 그 반대의 주장’, ‘신이 단일하다는 주장과 그 반대의 주장’ 등등.. 그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따른 대안적인 논변을 통해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상반된 입장 가운데 자신의 철학을 세우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44. 우리는 의심함으로써 질문하게 되고, 탐구함으로써 진리를 깨닫게 된다. -137p
▪ 이는 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글이다. 이 명제는 오늘날까지도 철학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는 몇 안되는 문장이다. 모든 것은 의구(疑懼)함으로써 시작된다. 의심은 곧 질문을 품게 되고,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품을 때 우리는 탐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탐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때 우리는 비로소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45. 유대인들이 예수가 구세주와 신의 아들이었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의도적인 고집 또는 ‘완고함’의 결과이며, 따라서 그들의 지도자들이 그를 박해한 것은 순전한 악의의 산물이었다고 여겨진다. - 138p
▪ 여기의 논증을 따라가다보면 유대인들은 정말 사악한 존재다. 단순한 살인이 신의 규율을 위배한 것이고, 그 자체로서 사악한 행동이라면, 신을 죽인다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행위는 더욱 극악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악의의 산물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악한 존재를 창조한 하나님은 진정 선하신가?
46. 안셀무스는 유대인들이 비난받을 만큼 고집스럽긴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박해하는 것이 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는 치명적인 죄가 아니라 사면될 수 있는 죄라고 선언했다. -138p
▪ 그 시대, 이러한 질문과 맞물려 유대인들은 심한 탄압을 받았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논증은 그 당시 유대교 공동체들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에 반대했던 당시 저명한 학자의 말이다. 무지에 의한 죄가 죄가 될 수 있는가? 율법은 그 자체로 죄를 죄 되게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쉽게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47. 이전의 사상가들은 죄를 의지의 박약함, 또는 금지된 일들을 하려는 충동으로 정의함으로써 그 문제를 흐지부지 넘기고 말았다. -139p
▪ 죄와 무지의 관계는 어렵다. 아벨라르두스의 이러한 논증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향해서 하는 말이다. 죄라는 것이 실존이 아닌 하나의 상태를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죄라는 것에 대해 너무도 가볍게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개개인이 가지는 경향성의 수정만으로 모든 죄가 해결될 수 있다고 결론짓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 ‘유대인들에 대한 죄’라는 문제 앞에서는 너무나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48. 모두가 때때로 욕망, 노여움, 질투심, 반항심, 그리고 다른 파괴적인 충동으로 인해 고문을 받는다. 이런 것들은 죄의 전제조건들이지 죄 그 자체는 아니라고 아벨라르두스는 주장한다. -140p
▪ 우리가 이러한 감정들로 인해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가? 이런 것 모두가 죄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루 24시간 한시도 죄와 함께 하지 않은 날들이 없다. 아벨라르두스는 죄에 대해 결과론적 입장을 표명한 듯 하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들을 직접 죄라고 하지 않는다면, 죄라는 것은 행위의 결과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논리의 흐름일 것이다.
49.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그들은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자를 처벌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신의 아들을 처벌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앎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잘못된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140p
▪ 아벨라르두스에 따르면 죄는 의도의 문제이다. 그것은 ‘동의’, 즉 의지 행위뿐만 아니라 지성의 행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이 동의했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현대사회의 싸이코패스와도 관련이 된다. 그들은 살인을 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결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신병질에 걸린 그들을 죄가 없다고 사면하여 그들이 자신의 행위를 계속 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가? 이는 윤리학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 다루진 않지만, 그래도 깊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50. 세습적인 죄라는 생각은 불합리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의 의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범죄로 재산이 몰수된 사람의 후손들이 재산이 없게 되듯이, 우리는 그들의 형벌을 물려받을 수는 있습니다. -141p
▪ 만약 죄스러운 행동을 하는 데 개인의 동의가 필요하다면, 원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아담과 이브로 인해 죄의 본성을 물려받지 않는가? 죄와 형벌은 무엇의 차이일까? 죄는 공동체에 대해 직접 부적절한 행위를 한 것이고, 형벌은 그 행위를 하고난 이후에 잘못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께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고 있는 중인것이다.
51. 신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방법이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은 그들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구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141p
▪ 이것은 자칫 포괄주의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단독적인 구원에 대해 아벨라르두스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만일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행실이 바른 불교도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차원을 넘어 행위에 사랑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52. 인간의 지성은 결국 약하고 믿을 수 없으며 또한 정념으로 인해 오염된 것이었다. -150p
▪ 이것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논리에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구원에 필요한 신앙과 복종과 같은 미덕을 발전시켜야 할 때에 왜 지성의 궤변과 음모를 믿어야 할 것인가?
53. 신앙은 믿는 것이지 논쟁하는 것이 아니다. -150p
▪ 인간의 이성은 결국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불완전한 이성을 믿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신앙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신앙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논쟁이 신앙가운데 끼어들 여지는 없다.
54. 안셀무스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 즉 ‘모든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가장 좋고 훌륭하고 우수한’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 이것은 안셀무스의 기본전제이다. 이것은 신에 대한 안셀무스의 정의로써 가장 좋고 훌륭하고 우수한 것은 바로 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55.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는 단지 우리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151p
▪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적인 것들을 상상할 수 있다. 관념을 갖는 것에는 어떠한 제약도 필요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 또한 사유할 수 있다.
56. 우리의 정신 내부는 물론이고 정신 외부에도 존재하는 사물들이 우리가 생각만 할 수 있는 정신 내부의 사물들보다 더 위대하고 더 완전하다. -151p
▪ 이것은 실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차이이다.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는 존재하고, 그것이 외부에도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을 때를 말하고 실재함은 정신에도 있고 외부에조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재함은 존재함보다 더 완전할 수 밖에 없다.
57.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그런 존재가 반드시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51p
▪ 왜냐하면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했던 존재보다 더 완전한 존재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것은 존재함보다 더 완전하기에 가장 완전하신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반드시 실재해야한다.
58. 우리의 앎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고 안셀무스는 주장한다. -153p
▪ 안셀무스의 이러한 주장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를 부정하는 것은 ‘가장 순수한 태양 빛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은 태양 빛에 불과한 대낮의 빛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정신 내부와 외부에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59. 예기치 않았던 사회 변화 때문에 성서의 내용들이 현실의 삶에 적용될 때 서로 상충하거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결과들을 낳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154p
▪ 이러한 경우에 단순히 복음서나 교부들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아주 쓸모없는 행위이다. 변화하는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기독교적 전통과 일관성 있는 답변들을 산출할 수 있는 합리적인 해석 방식이 절실하게 요구되어야한다. 그것은 비단 이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60. 가능한 한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켜야 한다. -158p
▪ 신앙에 대해서 이성이 분석할 수 있는 부분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신이 아들을 낳게 되는 방식에 관한 문제처럼 이성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앙의 문제들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처벌이나 창조자가 우주에 부여한 규칙적인 운동 양태와 같은 신의 활동들은 완전히 이해 가능한 것 처럼 보인다. 또한 그 가운데에서 자연적인 과정들과 일관성이 있거나 그것들과 유사함을 보임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없는 성체 성사 등과 같이 초자연적인 성질을 갖는 부분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분석이 교리를 증명해낼 지는 못할 지라도 앎에 굶주린 지식인드로가 비종교인들에게도 더 많은 설득력을 가져다 줄 것은 분명하다.
첫댓글 25개씩인데
minimum이니까 더 하면 포인트 적립^^ 벼리상 그대오 많이 해주오^-^
선생님, 저는 벌써 해서 올렸습니다 25개씩! ㅋㅋ 다음주 쉬네요~ㅎㅎㅎ 아침에 늦게일어날꺼에요!!ㅎㅎ
그래 잘 쉬렴^^
각장마다 5개 miss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