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가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 중에서
서정주[ 徐廷柱 ] 1915 ~ 2000
저서 / 벽, 화사집, 귀촉도,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산시, 늙은 떠돌이의 시
주요저서 / 시집 《화사집》(1941), 《신라초》(1960), 《질마재 신화》(1975), 《한국의 현대시》《시문학원론》
주요작품 / 시 《화사》《자화상》《귀촉도》《국화 옆에서》《동천》《추천사》《춘향유문》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에는 모두 24편의 시가 실려 있다. 서정주의 시적 출발을 알리는 이 시집에는 그가 젊은 시절에 지녔던 삶과 시에 관한 다양한 고뇌가 압축되어 있다.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자화상」은 서정주의 첫 시집의 자서(自序)이자, 서정주 시 전체의 자서(自序)로 볼 수 있는 시이다. 서정주는 스물세 살의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쓴 이 시에서 "애비는 종이었다"와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두 개의 문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단호하고 비장하게 요약한다.
서정주의 시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언어의 보물 창고이다. 서정주의 현실 인식에 비판적 관점을 지닌 사람들도 이 점은 부정하지 않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서정주가 5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시인이라는 세간의 평가도 이 점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세상이 점점 더 빠르게 서구화, 현대화, 다국적화, 무국적화되고 있는 점을 생각할 때, 서정주 시의 가치는 그에 비례해 점점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전통문화와 풍속과 언어를 찾을 것인가? 거기에 담긴 한국인의 내밀한 감각과 섬세한 인간미와 한국어의 리듬을 현재형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내면을 흐르는 역사와 문화를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현장의 하나가 서정주의 시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자 문명의 사막에서 우리가 서정주의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댓글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황금의 제국] 에서 저 시의 내용이 일부 나와서
새삼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네요...
서정주의 <자화상> 참 유명한 시지요
이력과 약력까지 올려 주시고 역시 푸른 꿈길을 걷습니다
비가오지 않는 제주도....경상도.. 전라도...
비가 넘치던 서울 경기 강원도..........울고 울리던 아픔 속에 세월은 흘러가는 군요.....
아침 서늘한 바람에 한기를 느끼고 얇은 덮개를 덮어야하니...
세월 속에 울 카페를 사랑 하시던 회원님 고운 작품과 고운 뎃글 많이많이
서늘한 새벽 바람 속으로 사랑의 카페 속으로 실어 보내주세요..
정과 행복과 미소가 있는 우리들 카페 사랑합니다..
울님 행복한 가을 속으로...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