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뒤인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하여 1251년에 그 완성을 보게 되니, 16년에 걸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완성된 고려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모셨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져서 서울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그 뒤 조선시대 태조 임금 때인 1398년에 해인사로 다시 옮겨 모신 것이다.
대장경의 경판에 쓰인 나무는 섬 지방에서 벌목해 온 자작나무와 후박나무로서,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그었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에야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경문을 쓰고 나서 그 글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판각하는 순서를 거쳤다. 대장경을 만드는 데에 들인 정성과, 한치의 어긋남과 틀림도 허용하지 않은 그 엄정한 자세는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도 없거니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곧, 글자를 한자씩 쓸 때마다 절을 한번 하였다고 하니, 그렇듯이 끝간 데 없는 정성을 들임으로써,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의 솜씨로 쓴 무려 52,382,960개에 이르는 구양순체의 그 글자들이 한결같이 꼴이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일정하며,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자가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고 있다.
경판의 마무리까지 세심하게 손을 본 이 대장경은 그 체제와 교정이 정확하고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여서도 그렇지만, 이미 없어진 거란장경의 일부를 비롯하여 중국 대장경에는 없는 경전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도, 중국 최고의 대장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만력판이나 또 후세에 만들어진 어떤 대장경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빼어남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대장경은 특히 근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대장경을 비롯한 현대의 불교 대장경들의 으뜸가는 보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대장경을 만들 무렵에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랑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임금과 귀족과 백성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다시 이루어 놓은 것이 팔만 대장경이다. 오늘날 몇몇 경솔한 사학자들이, 칼과 창을 들고 오랑캐와 맞서 싸우는 대신에 대장경을 만들기에 힘을 쏟은 그때의 염원을 무기력한 시대사조로 그릇 되이 평가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대장경 간경 사업은 역사의 맥을 바로잡아 이어 가려는 민족의 염원이 그토록 간절하고 컸다는 것을 드러내는 민족 의식의 총화라는 데에서 그 의미가 빛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세계 정신사의 산맥에 우뚝 솟아난 한 봉우리이기도 하며, 아울러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물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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