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산 현충사에 들렀다. 젊었을 때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둘러봤다. 많이 변한 것같이 생소한 느낌이었다. 샛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경내는 마지막 단풍이 더욱 붉은 빛을 띠었다. 사당에 향을 피워 참배하고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때는 못 보던 곳이 보였다. 장군의 아들 이면의 묘도 있었다. 충무공의 활약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왜군은 장군의 가족을 해치려고 아산으로 왔을 때 면은 혼자 맞서 싸우다 죽었다. 한쪽 팔이 잘리자 남은 팔로 싸웠다. 면은 장군의 셋째 아들로 당시 21살이었다. 저절로 숙연해졌다. 면의 묘소 옆으로는 장군의 장인 장모의 묘소도 있었다. 장인 방진은 당시 보성군수를 하였다고 한다. 대대로 살던 고택 옆으로는 장군의 자손들 묘가 모여 있었다. 본인은 선조 임금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후대는 장군 덕분에 대우를 받으며 잘 살았다고 한다.
날이 꾸물대더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온 후에는 남아있는 은행잎마저 다 떨어질 것이다. 사발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고 충무공 묘소를 찾아 나섰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온 김에 다 보고 갈 참이다. 묘소는 현충사에서 이십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충무공 묘소를 찾는다는 것이 어찌 생각하면 괴기할 수도 있지만, 그냥 가 보기로 했다. 묘소 관리소에 주차했다. 자격지심에 관리 직원이 이상하게 볼까 염려하면서 우산으로 비를 피하며 올라갔다. 길은 잘 닦여 포장되어 있었고 소나무 가지를 다듬는 작업을 하는지 곳곳에 솔가지가 쌓여 있다. 아마도 장군의 제삿날을 맞춰 단장하는 모양이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 한 달 후인 음력 11월 19일이다.
마침 비가 그쳐 꼼꼼히 둘러보았다. 묘는 충무공과 부인 방수진의 합장묘이며 비석에는 삼도 수군 절제사이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고 씌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이 장군이 전사한 후에 홀대받았다고 하는 데 아니다. 1등 선무공신으로 이순신 권율 원균이 올랐으며 장군은 좌의정에 추증되고 정조 때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신도비까지 하사하였다. 임금이 신하에게 신도비를 하사한 것은 장군이 유일하다. 묘소 밑에는 정조가 하사한 신도비가 누각 안에 서 있었다. 묘소 근처에는 논이 있는데 위토다. 이 땅은 일본 강점기에 종손이 은행에 빚을 져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를 안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갚았고 남은 돈은 현충사를 중건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날이 저물어 가는데 묘소에 한 사람이 왔다. 묘역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참배를 하고 내려갔다. 저 사람도 우리나라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어두워지는 길을 재촉하며 집으로 달렸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조선 선조 때부터 일본이었거나 북쪽은 중국, 남쪽은 일본으로 나라가 갈라져 남의 나라 지배를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당시 명나라와 일본은 종전 조건으로 조선을 나누자는 협상이 있었다. 이처럼 장군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조선 시대는 물론 지금까지 우리의 영웅이며 자존심이다. 금요일이라 길은 막혀도 그냥 할 도리를 다한 양 마음이 뿌듯한 귀갓길이었다.
여담 : 충무공은 이순신은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났고 중국의 성군 복희, 요순임금, 우 임금의 이름을 따고 신하 신자를 써서 맏형은 희신 둘째 형은 요신 장군은 순신 동생은 우신이라 지었다. 자식은 3남 1녀다. 서자는 2남 2녀다. 왜란 중에 첫째 이 회 둘째 이 열은 항상 아버지 옆을 지켰고 아산에 남아있던 셋째 이 면은 아산으로 쳐들어온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후 이 회는 현감, 이 열은 찰방을 하였고 노량해전 때 장군 곁을 지킨 조카 이완은 맏형의 아들로 정묘호란 때 의주성이 포위되자 이순신 장군의 서자 이 신과 함께 병기고와 함께 자폭하여 죽었다. 서자 이훈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괄의 난 때 전사하였다.
충무공은 죽은 뒤 붙여진 시호다. 자는 여해라 한다.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녹둔도, 해미에서 근무하였고 류성룡 대감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임진왜란 전에 정읍 현감에서 6등급을 뛰어넘는 전라 좌수사에 임명하여 전쟁에 대비하게 하였다. 인재를 알아본 류성룡의 공도 크다. 충무공이란 시호는 조선 시대에만 아홉 명이나 된다. 그러므로 구별하기 위해 이순신을 이충무공이라 한다. 시호가 충무공인 사람으로 우리가 잘 아는 사람으로 진주대첩을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도 있고 태종의 외손자 남이 장군이 충무공이다.
또 이순신 장군은 또 있다. 동명이인으로 충무공을 도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분으로 무의공 또는 입부 이순신이라 한다. 입부 이순신은 왕실 종친으로 양녕대군 5대손이다. 이런 종친이 또 있다. 이억기 장군이다. 정종의 아들 덕천군 후손으로 입부 이순신과 12촌이다. 이분은 충무공이 전라좌수사일 때 전라우수사로 함께 싸웠다. 그러나 충무공이 백의종군할 때 원균이 지휘하던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가끔가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상류층 사람도 있다.
이순신이 태어난 곳은 한양 건천동이다. 비가 오지 않을 때 물이 흐르지 않는 곳을 건천이라 하여 생긴 지명으로 오늘날에는 마른내 길이라는 도로명이 붙어있다. 충무로역에서 을지로3가역 중간 지점에 명보극장(현재 명보아트홀)이 있는데 그 앞에 이순신 집터라고 표석이 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많이 살던 혼마치(本町)였다. 해방 후 일본의 기운을 씻어내려고 충무공의 시호를 따 충무로라고 하였다. 덧붙이면 충무공의 이름을 딴 지명이 부산에는 충무동이 있고 충무시라는 도시도 있었다. 또 수군 통제영이 있던 곳이라 하여 통영시도 있다.
현충사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처가로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외가도 이곳이다. 이후 자손 대대로 여기서 살았다. 조선 숙종 때 충청도 유생들의 건의로 사당인 현충사를 세웠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으로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때 종손의 은행 채무(2,400원)로 위토와 현충사 부지가 경매로 일본인에게 넘어가게 될 위기에 처하자 지식인들이 모금 운동을 하였다. 2만여 명이 참여하고 1만6천 원을 모금하여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이후 1966년 성역화 사업으로 새로 짓고 살던 사람들은 이주시켜 확장하였다. 2011년에는 기념관을 건립하여 문을 열었다. 현충사는 처음에 유료였다가 지금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충무공 묘소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에 충무공 묘소가 있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 중인 1598년 11월 19일(음력) 관음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 나이가 54세였다. 시신은 이락사, 충렬사를 거쳐 고금도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12월 운구를 하여 다음 해 2월 아산 음봉면 산정리 금성산에 묻혔다. 15년 후(1614년) 현재의 묘지 어라산으로 이장하였다. 이곳에는 장군의 부모와 형제가 능선을 따라 묻혀 있다. 처음 묻혔던 금성산 묘지에는 둘째 아들이 묻혀 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장수는 진천 출신 가리포 첨사 이영남, 평택 출신 낙안군수 방덕룡이 있다.
사족 : 최근 2009년에 충무공파 종손 며느리의 7억의 채무 문제로 고택 부지와 임야가 경매로 나왔다. 15대 종손이 자식 없이 죽어 재산은 종부 명의로 되어 이를 담보로 빚을 졌기 때문이다. 이에 덕수이씨 종친회에서 사과하고 매입하기로 하였다. 또 재산 문제로 종친회와 종부 간 소송이 있고 종부는 부동산업자의 고발로 사기죄로 구속 되어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다.
첫댓글 멋진 자료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