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寶物 제739호 高嘻影幀外門中遺物
▸ 61선장 43쪽『…李謹敏 都事朴璘 前縣監嚴思敬 郡守申澤 經歷申晟 注簿李奉憲 前主簿李時楨 僉正李春福 別坐安世瑊 察訪金彦晟 別坐魏德毅 訓練院正魏德和 前監牧官申侃 永春縣監黃琇 福州守麒 泰山監鳳 湖南』
이근민(李謹敏) 도사(都事) 박린(朴璘) 전 현감(縣監) 엄사경(嚴思敬) 군수 신택(申澤) 경력(經歷) 신성(申晟) 주부(主簿) 이봉헌(李奉憲) 전 주부(主簿) 이시정(李時楨) 첨정(僉正) 이춘복(李春福) 별좌(別坐) 안세감(安世瑊) 찰방(察訪) 김언성(金彦晟) 별좌(別坐) 위덕의(魏德毅) 훈련원정(訓練院正) 위덕화(魏德和) 전 감목관(監牧官) 신간(申侃) 영춘현감(永春縣監) 황수(黃琇) 복주수(福州守) 기(麒) 태산감(泰山監) 봉(鳳) 호남(湖南)
※ 魏德毅(1540 중종 34~1613 광해 5)
호는 청계(聽溪)는 이순신보다 3년 앞선 1573년(선조 6)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임진년(1592)에는 의주로 가서 피란 중이던 선조로부터 주부(主簿)에 제수되고 영남 운향관(運餉官)이 되어 임지에서 군량의 운반을 감독하다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난중 행적은 불분명하다. 정유 일기(Ⅰ)의 같은 날짜 기록(정유) 8월 19일)을 보면 벼슬이 있는 자이되 이순신에 의해 '피란인(避亂人)'으로 불리고 있음을 주목할 만하다.
위덕의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명나라 장수 여응이 극찬하여 이르기를 '공이 살고 있는 곳에 천관산(天冠山)이 있으니 승경이 동국(東國)의 으뜸이요, 사람은 관산인(冠山人)이 있으되 위덕의가 가히 보배로다'라고 하고, 동정기(東征記)에 쓰기를 '柳成龍의 충성강개(忠誠慷慨), 李德馨의 소년영기(少年英氣), 魏德毅의 치축험조(馳逐險阻), 李恒福, 申湜, 崔致遠, 禹倬, 鄭夢周 등이 이름 있는 현인'이라 하였다.(湖南節義錄, 湖南誌)
여기서 치축험조(馳逐險阻)란 '험하게 막힌 것을 달려들어 물리친다'는 뜻으로 군량운반에 관련된 일종의 해결사적인 의미의 업적 평가로 보이기도 하나, 극찬에 적당한 연유는 확실치 않다. 그런데 이 날짜의 기사를 보면 회령포 만호 민정붕(閔廷鵬)은 위덕의의 술과 음식 등에 매수되어, 전선(戰船)을 사적(私的)인 용도로 이용하도록 내어 주었기에 때마침 당도한 통제사 이순신에게 발각되어 곤장 20대의 처벌을 받고 있다.
여기서 위덕의(魏德毅)의 사적 용도란 전선을 이용할 정도로 규모 있는 전란 중의 상거래임을 의미할 것이며, 그의 솜씨 있는 장사수완은 명나라 장수 여응종의 찬사와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박 교수 등의 이순신의 일기는 비교적 정확히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여응종의 위덕의에 대한 찬사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있다. 여응종은 임금의 안위를 살피는 갸륵한 정신과 운향관으로서 군량조달임무를 평가한 것이다.
• 보물 제739호/ 고희 초상 및 문중유물 (高曦 肖像 및 門中遺物)
고희 초상 및 문중유물(高曦肖像 및 門中遺物)은 조선 중기의 무신인 고희(1560∼1615)의 영정과 유품을 비롯하여 제주 고씨 부안 문중에서 12대손까지 13대 372년 동안(1522∼1894) 작성된 각종 고문서와 일괄 유물들이다.
고희는 조선 선조 17년(1584)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어 임진왜란 당시 왕을 호종한 공으로 선조 37년(1604)에 호성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후에 호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지정된 유물을 연대별로 간략하게 살펴보면 중종 때부터 인조 때까지의 유물 76점, 숙종∼고종때까지 유물이 139점 등 총 20종 215점이다. 이 중 영정은 전부 고희의 것으로 전신상 1폭과 안면상 2폭 등 그 외 고희와 관련된 유품들이다. 이 유물들은 전북 부안의 석불산 아래 효충사 유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맨마지막에
복주수 기...이기
태산감 봉...이봉...이씨 종친으로 생각되는데...
맨마지막의 호남은 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 계시면 알려주십시요...^^
재치(財痴) 위현동
고희 유물의 내용이 벼슬명과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바 임란 당시 활약한 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에 나온 '호남'은 앞의 인물들이 호남사람이란 뜻이 아닐까요~
원문과 함께 게재하니 더욱 실감납니다.
군수장교가 군수품을 함부로 쓰면 바로 제대하고 군법에 의거 형사처벌을 받는데 당시 곤장으로 다스려젔다면 명나라에 무언가를 보여주기위한 형직적인 처벌로 보입니다. 명나라에 요구를 들어주는 일에 청계공께서 나서서 해결했는데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이를 간파한 이순신 장군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재치(財痴) 위현동
태산감 봉에서 봉은 이름으로 생각되고, 성씨를 생략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씨나 고씨로 여겨집니다. 쓴 작자와 동 성씨이기 때문에 생략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