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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5월18일 (백) 부활 제5주일
[수원] 내 마음의 평화에 대한 책임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사도 6,1-7
† 제2독서 : 1베드 2,4-9
† 복음 : 요한 14,1-12
오늘 전례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유혹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길을 굳건히 따를 용기와 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또한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맞아 민주주의를 위하여
자신을 바친 모든 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며, 그 고귀한 희생이 우리
사회에서 정의와 평화와 화해로 열매 맺을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해야겠습니다.
★ 교회 공동체가 커지자 사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봉사할 사람 일곱을 뽑는다.
그들은 모두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자라나면서 예루살렘 공동체가 점점 성장한다(제1독서).
★ 교회의 기초와 사명에 대한 가르침이다. 주님께서는 살아 있는 돌이시다.
신앙인들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 쓰이도록 해야 하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어야 한다
(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있으며, 당신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다고
선언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몇 달 전 벗들과 처음으로 대만을 여행하였습니다. 관광지 가운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지우펀'이라는 옛 광산 마을입니다. 바다가 멋지게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옛 골목과 집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풍치가
그윽한 곳입니다. 전통 찻집에서 좋은 사람들과 우롱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바라본, 막 해가 질 무렵의 바다 경치는 절경이었습니다. 또한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면서 등이 하나씩 켜지는 골목길은 낭만적이면서도 정취가
배어 있었습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지우펀에 가고 싶었던 것은 대만의 역사 영화 '비정성시'
(悲情城市)의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제주 4·3 사건'이나 '5·18
민주화 운동'의 비극과도 비교되는 대만의 '2·28 사태'를 주제로 한 이 영화를
1990년 극장에서 본 기억이 매우 큰 체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지우펀 마을은, 시대의 폭력으로 고통 받고 희생되었으나 이제 숭고한
희생자로 기억되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지금 그곳은 아름다운 관광지로, 느긋한 분위기의 차 한 잔이 어울리고
젊은이들의 즐거운 수다가 골목을 채우는 곳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여기저기서 '비정성시'란 현판을 보기도 합니다.
때가 차서 지난날의 비극의 흔적이 현재의 행복에 자리를 내놓는 것은 순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비극을 망각하고 왜곡하는 것이 지금 행복을
가져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일 것입니다. 기억의 맥박을 잃지 않는
것이 오히려 희생의 자리에서 생명과 번영을 길어 낼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폭력의 악순환이 아니라 화해와 평화의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980년의 광주를 민족의 십자가로 기억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기억만이 화해와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억하지 않는다고 비극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폭력이 순환할 수 있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김준태 시인의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민족의 십자가 광주를 기억합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 매일 미사 -
◈ [청주] 예수님을 통하여|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18일 부활 제5주일 (요한14,1-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12
예수님을 통하여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명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알맞은 사랑을 주셨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은 이
세상에 국한 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생명에 이르는
길도 알려주시고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을
차지하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가 34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를 마음을 다해 부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선언하셨습니다. ‘길은 말씀으로 안내되고,
진리는 옳고 바른 이치이며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생명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진리 안에서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수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아버지와의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길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주신 구원의 길잡이 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누릴 천상복락의 행복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있는지 생각해 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희생의 길이 남이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 바로 내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인식한다면 여기서부터 이미 천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예수님의 길이 나의 길임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진리 같은 분, 진리와 비슷한 분이 아니라 진리 자체 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고(요한17,17)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요한1,14)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전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모든 것은 옳고
그릇됨이 없다는 것을 믿습니까? 예. 믿는다면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면서 왜 따르지 않아요? 아마도
지금 당장은 화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이 더 매력적이고 마음을
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입니다.
다수결에 의해 변할 것 같으면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깨우치는 진리, 사람이 알아야 하는 진리이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커감으로서 이런 저런 불평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과부들의 배급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때 사도들은“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하고 선언하고 공동체 안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봉사자 일곱을 뽑았습니다. 사도들은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 ‘말씀과 기도’를 부여잡았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마음에 불평과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면 진리의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을 차지하면 곧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써
받아들여 실현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요한복음17,3절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곧 그 삶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사실 영생은 예수님과 함께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빵이신 성체를 통하여 영적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자주
모심으로써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영생을 지금 여기서 누리게 됨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시대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돈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처럼 잘못 살고 있습니다. 물질을 다른 모든 것에 앞세우는
현실입니다. 돈만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돈이 되면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합니다. 돈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고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단절되며 형제간의 관계도 소원해 지고 이웃 간의
관계도 냉랭해집니다. 우리에게는 부모에 대한 효가 있었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었으며 이웃 간에 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생명보다 물질이 우선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부작용이 얼마나 큰 아픔을
주고 상처를 낳는지 ‘세월호’침몰사고를 통해서도 뼈저리게 느낍니다.
잃어버린 생명과 평화와 화목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이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실천하게 될 때
부모와 자녀, 형제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어렵고 힘에 겨울수록 진
말씀과 기도에 충실해야 합니다. 물질은 하느님을 섬기는 도구입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둘 때 물질도 빛을 발하게 됩니다.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을 등지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길을 다니다 보면 공사장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보통 푯말이 붙게 됩니다.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그런데 흔히 보게 되는
이 푯말 밑에는 낙서가 씌여집니다. 뭐라고 쓸까요? “잘 알면서 왜 그래.”
불편을 주는 것 알면서 왜 그러냐고요?
인생여정에서 잘 알지만 생각처럼 안 되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야말로 선한
결심을 해도 작심삼일이고 마음이 흔들비쭉입니다. 어떤 이는 성격의 문제로
인하여, 인간관계의 문제로 인하여 그리고 질병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술,
도박 등 잘못된 습관으로 인하여 고민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좋은 것
같은데 속을 보면 누구나 자기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들을 한
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로 좌절하고 낙담하며 슬퍼하고
힘에 겨워합니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그런 문제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며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기회가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면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이 됩니다.
자신의 지혜와 삶의 방법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게 되면 놀랍게도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주님을 믿고 믿는 대로 행하게 되면
“주님의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됩니다”(요한 14,12).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여정은 모두 공사 중입니다. 잘 알지만 안 되는 것들을
고치는 중입니다. 아무쪼록 그 공사가 마무리 될 때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어 아버지 집에 거처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통하여 진리요, 생명을 만나길 기도하며 최민순
신부님의 ‘오늘 나의 길에서’라는 글로 마감합니다.
“주여 오늘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와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소서”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이제는 조정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2014년 가해 5월18일 부활 제5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12
전에 갑곶성지에 있을 때, 비가 엄청나게 왔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당의 지하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고, 또한 성지의 마당은 바닷물이 역류해서
온통 물바다가 되었지요. 쏟아지는 비가 참으로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가 온다고 해서 제가 이렇게 말했을까요?
“왜 이 비는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나를 힘들게 하는 이 비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또 이런 일도 생각납니다. 직원들과 함께 어디를 놀러갔다가 글쎄 새 똥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때 기분이 얼마나 안 좋았겠습니까? 즐거운 야유회를 간
것인데, 뜻하지 않게 하늘에서 새 똥을 맞았으니까요. 그때 혹시 제가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 새는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다고 나를 향해 똥을 쌀 수 있지? 이 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저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고 또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날씨나
새를 제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향해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을 종종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서, 왜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할까요? 사람은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는 사람을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조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을 만났는데, 이 분께서는 절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그 이유를 물으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던 어머니가 교회를
가시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 열심히 당신을 섬기던
어머니를 데려가는 하느님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충분히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힘으로 우리를 조정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더 큰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조정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쫓아서 우리 역시 사랑의 삶을 살아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이러한 분을 또한 이분이 사랑하는 나의
이웃들을 왜 부족하고 나약한 내 힘으로 조정하겠다는 욕심을 부릴까요?
이제는 조정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내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는 의탁과 굳은 믿음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시듯, 우리 역시 주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 밖에서 행복을 찾지만 이는 어리석은 짓이다. 행복은 자기 자신
안에 있고 매일 매일의 사고방식 속에서 나온다.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면 행복할 텐데!(‘그럼에도, 행복하라’ 중, 앤드류 매튜스)
행복하게 살고 있는 부부에 대해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배우자를 만나기 전에도 행복했었다.”
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 누군가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내
생각에는 아마도 영화나 노래에서 나온 것 같다.
영화나 노래의 주인공들은 흔히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나는 너무 외롭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당신이 내 삶을 바꿔놨어!”
이런 것이 근거 없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노래나
영화와는 다르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난 그저 불행하기만 했어.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나서
내 인생은 정말 비참해졌어!”
이래야 맞는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에게 끌리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에게
끌린다. 당신이라면 기분이 아주 좋은데 ‘우울해하고 있는 사람을 좀
만나 봐야겠어’라고 생각하겠는가! 절대 그럴 리 없다! 당신은 우울한 사람
대신 또 다른 행복한 사람을 만나고 싶을 것이다. 유유상종이다. 그러니
긍정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싶으면 당신이 먼저 웃고 다녀야 한다.
당신이 기분이 좋지 않거나 우울할 때에는 누구도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스스로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당신이 밝은 면을 보기
시작하면 주위에 행복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만약 당신을 짜증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화를 내지 말고 다르게
대응해 보자. 굉장히 즐거워하거나 기뻐하는 것은 어떨까? 자신의 인생이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정해진 규칙이 적으면 적을수록 행복해지기가 더
쉽다.
공감이 가는 글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행복하세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 마음의 평화에 대한 책임
2014년 가해 5월18일 부활 제5주일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복음 : 요한 14,1-12
< 내 마음의 평화에 대한 책임 >
20년 전 ‘그렘린’이란 영화를 꽤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교훈도 꽤 있고 오늘 복음과도 잘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빌리는 말단 은행원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조금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발명가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줄 성탄 선물을
찾다가 차이나타운 골동품 가게에 들러 아주 귀여운 모과이라는 동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사려고 하지만 주인은 팔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과이를 키우려면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에 팔 수 없습니다.”
모과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3가지를 꼭 지켜야 하는데, 빛을 보면 안 되고,
물을 주어도 안 되며, 12시 이후에는 절대 음식을 먹여서는 안 되는
조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모과이를 사게 됩니다. 너무나
귀엽고 순하며 이 세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빌리는 이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뻐합니다. 옆집에서 놀러 온 아이에게도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금기사항을 모르던 아이는 그만 물을 모과이 몸에
엎지르고 맙니다. 물이 쏟아진 모과이의 등에서는 또 다른 모과이들이 물방울
숫자만큼 튀어나옵니다. 처음 모과이와 생긴 것은 비슷하지만 조금은 거칠고
못돼서 몰래 자신들의 숙주인 모과이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악하기도 해서 빌리의 시계를 멈추어 놓아 12시 이후에 자신들에게 음식을
주게 만듭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빌리는 12시가 안 될 줄 알고 그 못된
모과이들에게 음식을 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음식을 받아먹고는 푸른
괴물인 그렘린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들은 힘도 세고 영악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고 심지어 살인까지 하기도 합니다. 마을은 온통
그렘린에 의해 아수라장이 됩니다.
이젠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빌리는 경찰에게 알리지만 경찰도 너무
강력해진 그렘린 군단을 처치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들의 번식력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그렘린들은 나중엔 풀장에 뛰어들어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고 이젠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마을이 지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대소동이 벌어졌지만 너무나도 약한 모과이와 빌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빌리가 자신이 벌여놓은 일을 자신이 수습하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는 상황이 좀 바뀝니다. 그렇게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모과이는 빌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옆에서 도와주며 그들을 완전히
퇴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모과이와 빌리는 머리를 써서
그렘린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죽여 버리고, 마지막 남은 그렘린
대장을 죽이는데도 모과이가 커튼을 걷어 빛을 들어오게 함으로써 마지막
하나까지 처치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고
하시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모두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겠다는 필립보의 질문에 예수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느냐?”며
당신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분이 만들어놓으신 길, 즉
모범을 따르는 것이 생명에 이르는 진리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분이
어떻게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지,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온 평화를 책임감 있게 유지해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신 평화인 하느님 아버지를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바로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뜻 안에 있게 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곧 평화이시기에 그분을 당신 안에 고이 모시고 있는 것이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리스도를 당신 마음
안에 모시고 계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의 ‘종’으로써 그분의 뜻에 온전히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아기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밖에는 없듯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곧 우리 안에 계시며 평화과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 안에 평화를 주셨더라도 내가 그 평화를 유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평화는 걷잡을 수 없는 전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내
안에 평화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아기를 잉태하면 그 아기는 아무 힘도
없지만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된다는 기쁨과 평화를 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는 내 안에서 완전히 나의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기를
잉태하면 그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마치
모과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지켜야 하는 규정들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들을 조금씩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신부님을 찾아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마당엔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엔 수십 마리의 잉어가 놀고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들은 그
잉어들이 겨울을 어떻게 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연못이 얼어버리면
먹이를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물고기들은 겨울잠을 잔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깊은 곳에 모여서 몇 달 동안을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봄이 와서 얼음이 녹으면
그들이 다시 나오는데 하도 먹지를 못하여 힘이 없어서 먹이를 던져줘도
제대로 입도 벌리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음식을 주던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에 음식을 주던 두
가지 중 하나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른 것에 양식을 주면 줄수록 그것이
너무 강대해져서 평화는 그것들에 짓눌리게 됩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나를 평화롭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물과 음식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물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고, 음식은 그 옳지 못한 것의 배를 불리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이 배불러지면 더 이상 내 안의 대소동은 우리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평화와 싸우는 내 안의
적이 생겨나지 않도록, 겨우내 음식을 먹지 못하여 음식을 주어도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도록 만들어 놓아야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란 말이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란 뜻인데,
기원전 1세기 말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로마의 평화시대를 의미합니다.
‘로마의 평화시대’란 적이 없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적은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있던 성벽도 헐어버렸습니다. 어떤 민족도 로마에
감히 도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로마의 힘이 강대했기 때문에 성벽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3세기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로마에 성을 쌓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가 서로 갈라지고 약해지면서 그 힘이 축소되는 동시에
이민족들이 호시탐탐 로마를 침공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도 항상 싸움이 있습니다. 평화가 우세할 수도 있고 걱정,
근심, 두려움, 긴장감이 더 우세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편에
양식을 주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결국 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둘의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누군가 하나에게 전혀 양식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힘도 없어 평화를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내 안의 그리스도. 그분의 뜻만 따라서 그분이 내 안의 왕으로 굳건하게
계신다면 담을 쌓을 필요도 없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그 양식이 오로지 그분 뜻을 따르는
것에만 사용되지 않고 다른 세력의 힘을 키워주는 데에 사용된다면 다시
전쟁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법은 절대
그리스도의 뜻 아닌 것에 양식을 대어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고 키워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기타] 신앙의 길.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벽한 모습이 아닙니다.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참된 행복의 길을 찾고자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2014년 가해 5월18일 부활 제5주일 복음묵상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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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음이라는 말을 쓸 때는 그 믿음에 상응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저 세례를 통해 얻은 신자라는 이름이
아닌, 구체적으로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걷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여, 야고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2,17)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서2,26)
이상의 말을 모르는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대로 흔들림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하고 용서하고 욕심, 욕망 버리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실수 없이 옳은 길만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아니 어느 누구도 그분의 뜻대로 완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다면, 성인, 성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겠지요.
행동이 따르지 않는 약한 믿음이라고 스스로를 너무 책망하지 마십시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당신이 가르쳐주신 길을 따르라 하신 것은,
삶은 끊임없는 자기 싸움과 함께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넘어짐과 다시 일어섬의 경험 없이는 참된 뉘우침과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 안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인정하고 끝까지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하루 아침에 우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루 아침에 완전한 회개도 불가능합니다.
하루 아침에 완전한 사랑을 만들고 지속할 수 없습니다.
하루 아침에 완전하고 변함없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삶 전체를 놓고 조금씩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깨닫고 실천으로 나아가는 길이
바로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하느님의 대화법
2014년 가해 5월18일 부활 제5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12
하느님의 대화법
예수님의 생애가 인간에게 건네신 하느님의 몸말씀(Body-Language)님.
하느님 안에 계시는 예수님, 예수님 안에 하느님, 짙은 사랑표현이지요.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역사에 없을 겁니다.
이런 신비한 내용을 글자로 서술해 놓은 것에 감탄하여 기쁨이 솟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기록해 놓은 성경에 감탄합니다.
소리말이 아닌 예수님의 생애라는 인생언어가 하느님의 대화법이었네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서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면서
2014년 가해 5월18일 부활 제5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12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강론을 할 때, 강론대가 왼쪽에 있었기 때문에
주로 왼쪽을 보고 강론을 하였습니다. 한 교우분이 오른쪽도 보면서 강론을
해 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안 그러면 다른 성당으로 가신다고 했답니다.
사제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적성 성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교우분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자기 후배가 임진강에서
이 추운 겨울에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거기서 쏘가리를 몇 마리 잡았답니다.
후배는 선배를 위해 쏘가리를 가져왔고, 교우분은 쏘가리를 보는 순간 신부님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우분 집엘 갔더니 쏘가리와
메기 그리고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몇 마리 있었습니다. 회를 뜨고, 매운탕을
끓이고 소주한잔 하려고 하는데 "후배"가 왔습니다. 그러자 우리 교우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사드려라!" "내가 부모님 보다 더 존경하는
신부님이시다!" 물론 그 후배는 성당에 다니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교우분의 말씀을 듣고 송구스럽고 미안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후배는
선배의 이야길 듣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인사를 꾸벅하는데 또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교우분들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먼저 신부님들을 생각합니다. 교우분들은
사제의 건강과 영혼을 위해서 늘 기도합니다. 교우분들은 삶의 자리에서
힘겹고 고되지만 신앙인임을 드러내고 증거하려고 노력합니다. 용인 쪽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었습니다. 주인께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점심만 먹으러
갔는데 동동주를 공짜로 주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를 치료하려 치과에
가도, 머리를 손질하러 미장원에 가도, 약을 사러 약국에 가도 신자 분들이
하시는 곳엘 가면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십니다.
신학생 면담을 하러 신학교엘 갔습니다. 3학년인 신학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신부님 사제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건강입니다. 아무리 의욕이 앞서도 몸이 아프면 제대로 사목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체력을 키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운동은 거의 체육학과 수준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지식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 철학, 성서, 심리학, 교리 교수법 이런
것들을 충실히 배우라고 했습니다. 군대 갔다 와서 좀 힘은 들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정해진 기도 시간에 충실하고,
시간을 더 내서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건강해도, 지식이 뛰어나도 금세 지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적 독서를 하고, 가능하면 일기를 좀 쓰라고 했습니다. 건강과
지식은 눈에 보이는데 기도는 분심도 들고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은행들이 서로 합병을 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합병되는 은행의
직원들은 합병하기 하루 전날 은행의 금고 비밀번호를 바꾸었고 자신들의
퇴직금을 미리 정산해서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은행의 문도 열지
않았고 모두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 한곳의 지점만 지점장과 모든
행원들이 정상 출근을 했고 다음 사람들에게 인수인계를 하였다고 합니다.
비밀번호를 바꾸고, 미리 퇴직금을 정산하고, 도망간 사람들은 모두
형사입건이 되었고 가지고 간 돈도 모두 회수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충실하게 출근하고 고객을 위해 은행 업무를 한 지점장과 행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 은행에 다시 채용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지점장만은 자신은
이제 은행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만 두었고 행원들은 모두 ‘특채’
되었다고 합니다. 내일 은행 일을 그만 두더라도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충실하게 하였기 때문에 다시 특채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돈을 버는 일, 명예를 얻는 일, 권력을 얻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소중한 일에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을 10년 벌 수 있어도 10년 동안 번 돈으로 잃어버린 건강은 살
수 없는데도 우리는 건강보다 돈을 버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곤 합니다.
소중한 일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족을 돌보는 일, 건강을 돌보는 일,
이웃과 신뢰를 쌓는 일, 명상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일 등이
있습니다. 바로 인생을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주도적인 삶을
살면 여유가 생기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생기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끊임없이 주도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제자의 배반에도, 유대인들의
조롱에도, 하느님의 무심함에까지도 예수님은 반사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주도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너희에게 평화를 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사도들은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음식을 나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욱 소중한 일을 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는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재물과 음식을
나누는 일은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에게 맡기게
됩니다.” 그러자 하느님의 말씀은 널리 퍼졌고 예루살렘에서는 신도들의
수효가 부쩍 늘어났으며 수많은 사제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재물과 권력의 유혹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그래서 영원한
삶에로 나아갈 수 있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꼭 필요한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지도’입니다. 지도에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의
길이 자세히 나와 있고 어느 길이 가장 빠르고 손쉬운 길인지 나와 있고 어느
곳에서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가계가 있고 어느 곳에서 피곤한 몸을 쉴 수
있는지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머무를 곳에 미리 가볼 것이다. 그곳은 머무를 곳이 참으로 많다.
이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너희가 들어갈 문이다.”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가 가야할 하느님 나라의 지도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과 기적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표시된 지도입니다. 우리의 지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한 번 뿐인 우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인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2014년 가해 5월18일 부활 제5주일(요한 복음 14장 1~12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12
오늘 복음 서두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 말씀 뒷부분에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얼마 전에 본 영상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교육방식에 대해서 비교하는 영상이었는데요. 거기 보니까 다른 나라
학생들은 성적 때문에 거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거 같습니다.
일단 공부의 양이 많지 않고, 성적도 등수가 아니라 ‘이 학생이 수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느냐.. 어떤 과목에 관심을 보이고 있느냐.. ’ 하는 것만
체크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가서 부모님과 이야기할 때 아무 부담이 없는
거 같았습니다. ‘어떤 과목에 대해 흥미를 보이는지.. 열심히 참여했는지..’를
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더라고요.
그와 달리 우리나라에는 석차가 있잖아요. 그래서 일단 선생님께 성적표를
받는 날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합니다. 경쟁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못했다.. 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주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면 어머니가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죠. ‘너 영어
등수가 왜 떨어졌니... 국어 점수가 왜 이래..’ 하면서 따져 묻습니다. 어머니
딴에는 아이가 혹시나 공부를 못해서 사회적으로 뒤처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일 테고, 아이는 높은 성적이나 등수를 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 같은데요.
우리나라 교육제도 안에서는 많은 아이들이 스트레스와 피곤함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경쟁체제이고 높은 성적과 등수는 피라미드의
윗부분에 해당하는 일일 텐데,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소수이고 한정되어
있어서 대부분이 힘들어 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아닐까.. 하는데요.
복음을 읽으면서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그 아이들과 부모님들처럼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겠다..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늘나라에 자리가
많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나라가 피라미드 구조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리라 생각합니다. 경쟁해서 이겨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서로
도우며 함께 갈 수 있는 넉넉함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곳이니 우리가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모습, 곧 경쟁하고 이기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려는 모습을 버리고, 너의 기쁨과 슬픔을 나의 기쁨과
슬픔으로 생각하며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을 만들어야겠죠?
오늘 하루, 혼자 가지 말고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갑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프리카 사람이 이름을 물어봐서
‘세례자 요한 John the baptist’ 라고 했더니,
“J and B..” 하면서 “양주이름?” 하더니,
연수 내내 ‘제이 앤 비’ 라고 별명을 부른다...^^;
- 인천교구 밤송이 세례자 요한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 [수원] 고난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요한14,1-6)
2014년 가해 5월18일 부활 제5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12
고난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요한14,1-6)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또 거처할 곳이 많다.” 고
말씀을 하십니다. 요즘 여러분과 또 많은 국민들의 마음이 많이 산란했었지요?
이제 좀 안정이 되셨나요? 많은 학생들, 사람들이 죽어간 것에 대해서 많은
고통과 슬픔,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 이런 것이 쭉 이어지면 좋은데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모습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에서는
삼백여명의 여학생을 납치해다 팔았다는 소식이 있고, 터키에서는 탄광이
무너져서 삼백여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건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데 그 영혼들을 위해서,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매일 40여명정도가 자살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낙태로 인해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기도하면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고 이 세상에 기쁨과
사랑을 주기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하느님나라에 믿는 모든
이들을 데려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희망도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지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런데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께 갈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에 대한 답을 ‘벼락을 맞았습니다’
라는 책에서 사람이 죽으면 누구든지 미사 드려지는 곳에 데려가지고 그
곳에서 병자성체를 모실 수 있는데 거기서 마저 거부하면 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하느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들에게도
다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나라에 갔는지 안 갔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속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살았을 때
예수님을 자주 모시고 기도하며 하느님나라를 그리워하며 죽었을 때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천국에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죽어서도 똑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수난의길 고난의 길
고통의 길을 간다하더라도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 힘든 일들
고난 고통이 자기 자신도 모르게 닥치더라도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항구하게 주님을 믿으면서 나와 주님이 함께 계시다, 나를
돌보아주신다. 나를 구원하기를 갈망하고 계시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산란해지지 않게 됩니다. 고난이 더 예수님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고 예수님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는 고난이
닥치거나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멀어지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태어나는 고통과 나이 들고 병들고 죽게 되는 고통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조차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을
마련해 주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고난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될 때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이쪽으로 불면 이리 흔들거리고 저쪽으로 불면 저리 흔들리며
하느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늘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라면 한결같고 굳건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화나고 속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내기 보다는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평화와 온유의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성령의 열매가 맺어질
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고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미사 중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간절히 구합시다. 아멘.
- 수원 교구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 [수도회]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단상]
부활 제5주일(2014년 5월 18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12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요즘 평안하십니까? 평범한 우리의 일상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큰
파장이 일어납니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우리 삶에도, 무던하던 우리 삶에도 요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큰 바윗돌이 우리 삶에 떨어졌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이
우리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부터 지금까지 큰 파장이,
큰 파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세월호 참사 때문입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것도 어린 학생들이
우리 눈 앞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통해하고 있습니다.
벌써 부활 5주일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큰 파장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보통
사람이었던 사람들이 하느님을 굳건히 믿는 이들로 변했습니다.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부활은 어떻게 보면 제자들에게 ‘회심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 세월호 사건은 과연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잔잔한 일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큰 표징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삶, 우리 일상의 삶을 다시금 진지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세월호의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악마의 소리같은 선내 방송 때문에
모두 갇혀 깜깜한 물속에서 죽었습니다. 아니 집단 살해당했다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변화이며
움직임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를 움직이지 않도록
마비시키는 악마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최고다,
물질이 최고다는 소리입니다. 이전에 이런 광고가 유행했습니다.
“부자되세요!!” 과연 우리는 이런 광고 소리에서 자유롭습니까? 많은 경우
돈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돈은 권력입니다. 돈은 힘입니다.
물신입니다. 물질이 신입니다.
사실 세월호의 아이들은 돈 때문에 살해당했습니다. 돈 앞에서 인간의 진실과
생명이 무시되는 현실입니다. 우리 사회는 ‘돈의 먹이사슬’에 얽매어 있습니다.
(청해진 회사.. 돈.. 선원들… 해경… 그 위로 위로… 정치자금… 뒷돈거래…)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를 묻습니다.
하나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다시금 생각하게 우리를 각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은 우리가 걸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면 길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찾는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여정이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움직이면 생명의 고동 소리를 느낍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방향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침묵 시위를 하면서 이런 문구를 들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건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부활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삶입니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을
향하여 매일 매순간 움직입시다. 사람들이 물신을 섬길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도록 합시다.
여기에는 용기와 믿음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회심의 길을 걷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며 이렇게
격려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의 북음 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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