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 천리 길을 걷노라면(일곱 번째, 完)
(강경→웅포→군산, 2016. 11. 26∼11. 27)
瓦也 정유순
강경에서 금강하두둑 까지 40여㎞ 남겨두고 주변의 문화유산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지난 5월부터 금강발원지인 뜬봉샘에서 걷기를 시작하여 여기 까지 오는 동안 때로는 일부구간을 건너뛰기도 했고, 보행 상 약간의 어려움이 있어 생략한 구간도 있었지만, 금강 주변의 역사∙문화와 주변의 삶에 대한 애환도 느껴보려 했으나 건성건성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금강-서천에서>
전라관찰사를 비롯한 신·구 고위 관료들이 인계인수를 하던 황화정(皇華亭)은 옛날 5·16쿠데타 이전에는 분명 전라도 땅이었다. 그러니까 1963년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에는 전북 익산군 황화면이었으나, 금산군이 충남으로 편입될 때 같이 논산군으로 편입, 구자곡면과 통합되어 지금의 연무읍이 되었다.
<황화정 표지석>
그 유서 깊은 자리에는 황화정이란 정자는 온데간데없고 봉곡서원 담벼락 밑에 표지석만 덩그렇다. 그 표지석이 있는 자리가 정자가 있던 자리인지도 아무설명이 없어 불분명하다. 봉곡서원(鳳谷書院)은 우암 송시열과 오봉 이호민의 발의로 전라도 여산현(황화면)에 건립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근래에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기왕이면 황화정도 함께 복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안은 채 후백제왕 견훤왕릉으로 이동한다.
<봉곡서원>
견훤(甄萱)은 900년에 후백제를 세우고 중국의 오∙월(吳越)나라와 수교를 하며 궁예와 왕건에 대항하였다. 927년에는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자결하도록 하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후삼국 중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으나, 후계문제로 장남 신검에게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도망 나와 왕건에게 항복하고, 그를 도와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등창으로 죽는다.
<견훤릉 비석>
죽을 때 후백제의 산천이 보고 싶고 도읍지 완산(전주)을 바라볼 수 있는 쪽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묘를 썼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실한 고증이 없어 앞에 전할 전(傳)자를 붙여 ‘전 견훤의 묘’라 고도 한다. 묘는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 있고, 봉분 주변에는 상석 외에는 아무런 석물이 없는데, 문중에서 세운 ‘후백제왕견훤릉(後百濟王甄萱陵)’ 비석이 능을 지킨다.
<견훤왕릉 봉분>
견훤왕릉을 보고 돌아서는데 ‘금곡1리 서재필박사 본가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눈에 확 들어온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 선 서재필(徐載弼, 1864. 1∼1951. 1)은 전남 보성 외가에서 태어났지만 얼마 안 있어서 충남 논산시 구자곡면 본가로 와서 성장했다고 한다.
<서재필 본가 표지석>
일곱 살에 서울로 올라와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와 교유하며 영향을 받아 21살의 나이에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실패로 이곳에 살던 일가친척들이 비운을 겪었다고 한다. 이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하였으며, 임시정부의 구미위원장을 맡아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서재필 본가>
다시 조금 더 올라가 논산시 부적면에 있는 계백장군(階伯將軍)묘역으로 바삐 움직인다. 계백은 5천결사대로 5만의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열하게 전사한 백제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패전국의 장군으로 이곳 수락산 기슭에 오래전부터 ‘계백장군 묘’ 또는 ‘백제의총’으로 구전되어 오던 큰 무덤이었다.
<계백장군 묘>
그러나 1965년 백제문화 되찾기 운동의 하나로 이 무덤을 계백장군의 무덤으로 인정하여 충남 지방기념물 제74호로 지정하고 정비하였다. 묘역에는 매년 4월에 제향을 모시는 충장사(2005년 건립)가 있고, 백제의 군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백제군사박물관이 준비되어 있다.
<충장사 전경>
<계백장군 영정>
<백제군사박물관 전경>
오늘의 출발지인 강경으로 오는 길목에는 강경천이 있고, 강경읍과 채운면의 경계지점에서 하얀 억새꽃이 만발한 하천 길을 따라 약1㎞쯤 제방 밑에 옛날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미내다리가 나온다. 재료는 화강암으로 길이 30m, 폭 2.8m, 높이 4.5m로 3개의 홍예로 되어있다. 처음에는 평교(平橋)였으나 1731년(영조 7년)에 충청도 강경과 황산, 전라도 여산사람들이 재물을 모아 축조한 다리로 삼남지방에서는 제일 큰 다리였다고 한다.
<미내다리>
이 다리에 관한 것은 은진미교비(恩津渼橋碑)에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다리 난간 밖으로 호랑이 머리가 선각(線刻)되어 있고, 홍예의 정상부위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미내다리 천정에는 돌 틈에서 새어나오는 석간수(石間水)의 영향인지 돌고드름이 석순(石筍)처럼 자라는 것 같다. 그러나 분명 강경천을 건너던 교량이었을 텐데, 왜 지금의 제방 밑으로 와있는지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미내다리 천정 석순>
바쁘게 강경에 도착하여 옥녀봉에 오른다. “옥녀봉 아래로 흐르는 물이 맑았고 숲이 우거져 있으며, 사방으로 펼쳐진 넓은 들이 있어 경치가 덧없이 좋아 옥황상제의 딸이 노닐다가 끝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었다”고 하여 강경산이 옥녀봉으로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바로 밑으로 강경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지점이 보이고, 강경시내와 들녘 건너 논산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옥녀봉 올라가는 길>
<송재정>
옥녀봉은 논산 8경 중 한곳으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송재정(松齋亭)이 있고 옆에는 봉수대가 있다. 그리고 조금 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 예배당인 초가집이 있는데 성지순례지로 지정되어 찾아오는 이가 많으며, 강변 쪽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곰바위와 강경포구의 조석간만의 원인과 시각 등을 바위에 기록한 해조문(解潮文)이 있다.
<봉수대>
<최초 침례교회 초가>
젓갈로 유명한 강경에서 젓갈백반정식으로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오후부터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가까운 곳에 있는 익산시 망성면 나바우성당으로 이동한다.
이 성당은 1845년(헌종11년) 김대건(金大建)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처음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6년 프아넬신부가 설계를 한 것을 베르모레르 신부가 감독을 하고 중국인 기술자를 동원하여 지은 건물이다. 당시에는 앞면 6칸, 옆면 13칸 목조건물이었으나 1916년 건물을 개조하면서 일부를 벽돌로 바뀌었다. 남·여의 출입문이 서로 다르고 예배당도 남·여가 따로 앉아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으며,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지은 건물로 우리 전통양식과 서양양식이 합쳐진 점이 특이하다.
<나바위 성당 정면>
<나바위성당 측면>
교회 뒤로하여 나바위(羅岩)가 있는 화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김대건신부의 성상과 순교기념탑이 있고, 정상에는 망금정(望錦亭)이 있다. 망금정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1912년부터 매년 6월에 화산 정상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며 피정을 한 곳이었는데, 1915년 베르모렐 신부는 주교의 피정을 돕기 위해 정자를 짓자, 드망즈 주교가 망금정으로 명명하였다.
<김대건신부 성상>
<망금정>
망금정에서 우측 계단으로 내려오면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김대건 소나무도 나오고, 수탉이 알을 낳다가 돌이 되었다는 수탉바위도 보인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가 첫 착지한 십자바위가 있는데, 이는 그 때만 하여도 이곳까지 금강이 흘렀고 고기잡이배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뱃길이 화산 아래로 이어져 있었던 것 같다. 화산이라는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후학을 가르치던 강경의 팔괘정에서 이 산을 바라보며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바위에 華山(화산)을 직접 새겨서 되었다고 한다.
<수탉바위>
<십자바위>
<송시열이 쓴 화산>
진눈개비로 변하여 세차게 내리는 가운데 다시 성당포구로 향한다. 성당포구(聖堂浦口)는 전북 익산시 성당면에 있는 포구로 고려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세곡을 관장하던 성당창(聖堂倉)이 있던 곳으로 전통적인 포구마을의 역사를 그대로 담아낸 벽화와 황포돛배, 금강의 생태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성당포구마을에는 희귀보호식물인 고란초의 집단서식지가 있다고 한다.
<성당포구 가는 길>
<성당포구 유람선>
<성당하도습지>
제방 길을 따라 금강 변으로 걸어 나가니 제방 밑에는 유람선이 기다리고 부곡천과 만나는 지점에는 성당하도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오뉴월 진한 향을 내 뿜던 해당화는 빨간 열매로 늦가을을 붙잡고, 잡초에 묻혀버린 길을 찾아 겨우 올라가니 어느 검객(劍客)이 검술연습을 했는지 날카로운 죽창모습으로 서있는 대나무 숲이 나온다. 정상에는 ‘백제의 숨결 익산둘레길’이란 표지가 보이는데 있던 길을 없는 길처럼 더듬으며 내려온 곳이 성당포구마을이다.
<해당화 열매>
<대나무 밭-죽창>
<백제의 숨결 익산둘레길>
다시 웅포대교를 건너 ‘세모시’로 유명한 충남 서천군 한산면을 경유하여 부여군 양화면 유왕산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유왕산(留王山)은 “660년 나당연합군에 백제가 멸망하고 의자왕이 12,807명의 포로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갈 때, 백성들이 이곳에서 전송하며 머물게 했다”고 구전으로 내려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왕산 유왕정>
유왕산에는 해마다 음력 8월 17일이 되면 양화면 인근은 물론 먼 곳의 부녀자들 까지 함께 모여 음식과 정담을 나누며 이별의 한을 노래로 부르다가 헤어지는 풍속이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고 한다. 전승되어 내려오는 풍습대로 유왕정(留王亭)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며 그 때의 한을 노래로 불러본다. 땅거미는 지고 오늘을 마감하려 내려오는 계단에는 이별을 하며 흘렸던 눈물이 피 빛 단풍이 되어 자꾸 발에 밟힌다.
<백제유민정한불망비>
<유왕산 계단의 단풍 낙엽>
어제는 비도 내리고 하여 걷기보다는 주변 명소를 탐방하는데 더 주력한 것 같다. 그리고 아마 내 고향에서 가까운 곳들이라 더 가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어려서 봄 가을로 소풍갈 때 빠지지 않고 원족(遠足)을 했던 숭림사를 찾아간다.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던 입구에는 잎이 진 가지들만 앙상하다. 숭림사란 명칭은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중국 하남성(河南省) 숭산(崇山)의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 동안 면벽좌선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숭산의 ‘숭’자와 소림의 ‘림’자를 따왔다는 설이 있다.
<함라산숭림사 일주문>
또한 함라산숭림사(咸羅山崇林寺)는 금산사의 말사로 금강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익산시 웅포면에 있는 작은 고찰이다. 이 사찰은 고려 충목왕 원년(1345년) 선종(禪宗)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전할 뿐 그 뒤의 변천은 확실하지가 않다. 대웅전 대신 보광전(보물 제825호)이 있고 그 안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木造釋迦如來坐像) 등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확실하게 달라진 것은 어려서 소풍 때 보았던 건물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아마 중창불사(重創佛事)를 많이 했나 보다.
<숭림사 보광전>
웅포면 고창리 금강변으로 이동하여 웅포중학교 부근에서 제방 자전거도로에 올라 ‘곰개나루’를 향해 본격적인 걷기를 시작한다. 골프장 앞으로 하여 금강 수면이 뿌연 안개 속에 넓게 펼쳐지는데 강 건너 충남 서천군 신성리 갈대밭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래도 수면 위는 정적이 흐를 만큼 고요하고 이미 찾아온 철새들은 자맥질을 하며 한가롭다.
<금강변 이정표>
웅포(熊浦)라는 지명은 “옛날 금강의 빼어난 경치에 반한 큰 곰 한 마리가 이곳에 살면서 맑게 흐르는 강물을 보면 하늘에 떠있는 해가 금강 위에도 또 하나가 생기는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해하며 이를 갖고 싶어 궁리 끝에 물을 다 마시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머리를 내밀고 강물을 마셨는데, 전혀 줄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곰이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 하여 곰(熊)개(浦)나루라고 부른데서 연유하였다. 혹시 순수한 우리말인 ‘곰개’를 한자화 하면서 웅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곰개나루>
강변에는 웅포관광단지가 마련되어 오토캠핑 나온 캠프족들로 붐빈다. 금강을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자전거들도 캠핑장 옆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선착장에는 유람선이 손님을 기다린다. 용왕제를 모시는 용왕사(龍王祠)에 올라 금강을 걷는 동안 보살펴 주신데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웅포 캠핑장>
<대기 중인 자전거>
원래 곰개나루는 강경나루로 오고가는 중간 기착지로서 많은 물산이 풍부하여 자연스레 시장(市場)이 열렸던 곳이란다. 인근 주민들은 강경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보다 곰개장에서 사는 것이 더 신선하고 값이 싸다고 여겼으며, 그래서 소리 소문 없이 실속을 챙기는 시장이었고, 새로운 문명이 들어오는 창구역할을 한 곳이라고도 한다.
<유왕정>
곰개나루를 지나 커브길 언덕 정상은 군산시가 시작되는 나포면(羅浦面)이다. 이 언덕을 넘어 다시 평지의 강변길을 걸어가면 공주산(65m)이 나온다. 이 산은 공주에서 떠 내려왔다 하여 공주산(公州山)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고조선 준왕이 위만에게 패하여 처음으로 도착한 곳으로 준왕의 딸이 머물렀다고 하여 공주산(公主山)으로도 불린다. 서해바다와 금강을 함께 조망할 수 있어서 맑은 날 해넘이는 일품이라고 한다.
<공주산>
공주산을 지나자마자 ‘원나포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원래 이곳은 조선조 때 임피군 하북면에 속했던 ‘나리포’란 마을이었다. 1720년(숙종45년) 조창이 설치되고 관영포구가 열리면서 나리포가 언젠가부터 나포로 줄여부르게 되었으며, 제주도를 비롯한 도서지역의 해산물과 수공업제품을 내륙의 곡식 등과 교류되는 시장으로 활기를 띠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나포면이 되면서 면소재지가 옥곤리로 되자 나리포가 본래의 나포라는 뜻으로 원나포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나포마을 표지석>
옥곤리로 접어들자 십자들이 넓게 펼쳐지고 강변 제방에는 철새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설들이 죽 늘어서 있다. 초입에는 대나무로 발을 만들어 울타리처럼 쳐놓고, 중간 중간에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부터 회랑(回廊)식 건물을 만들어 실내에서 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이는 사람에 민감한 철새들에게 사람의 실체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이고, 사람에게도 추운 강바람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다.
<대나무 발 철새 탐조대>
<회랑형 철새 탐조대>
<회랑형 탐조대 내부>
나포십자들은 원나포에서 서포리까지 갈대가 무성했던 갈대밭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간척사업을 통해 총 530ha의 농경지로 바뀐 곳이다. 십자들 인근은 강폭이 넓고 사람들의 접근이 비교적 적어 경계심이 강한 가창오리들이 주로 생활하는 곳이다. 가창오리는 군집성이 강한 철새로 금강에서만 약50만 마리가 월동을 한다고 한다. 겨울 석양하늘에 가창오리가 연출하는 군무(群舞)는 자연이 선물하는 최고의 황홀한 예술이다.
<가창오리의 군무-네이버캡쳐>
나포면 서포리에는 장류(醬類)음식만 고집스럽게 만들어 식당을 운영해 오다가 폐교를 개조하여 더 넓게 만든 식당에서 오전을 마무리하고, 서해안고속도로 금강대교 밑에서 오후 일정을 시작한다. 오전의 안개는 다 걷히고 시야가 트인다. 금강하굿둑으로 호수가 된 금강호에는 철새들이 무리지어 노닌다.
<서해안고속도로 금강대교 교각>
<서해안고속도로 금강대교>
<금강의 철새들>
강변 산책로를 따라 ‘금강성산지구 생태습지’로 들어선다. 갈대와 억새가 어우러진 생태습지는 훨씬 밝은 햇살에 더 아름답게 빛난다. 넓은 하천부지에 띠풀, 달뿌리풀, 수크렁, 꽃창포, 연꽃 등이 연못과 습지에 골고루 식재가 되어 있어, 새싹이 돋아나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싱그러운 생태습지를 만끽하며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 것 같다.
<금강 성산지구 습지공원>
<금강정>
걸어 갈수록 금강천리 길의 종점인 금강하굿둑이 점점 가까워 온다. 금강하굿둑은 전북 장수군 뜬봉샘에서 장장 401㎞를 흘러나와 서해바다로 들어가는 금강하구 안쪽인 전북 군산시와 충남 서천군을 잇는 둑으로 각종 용수 확보와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하굿둑이 건설된 후 금강의 종점이 되어 금강의 연장거리도 395㎞로 6㎞가 짧아졌다.
<금강철새전망대-군산>
<금강호휴게소-군산>
하굿둑은 총연장 1,841m로 1990년에 완공되어 연간 3억6천만 톤의 용수를 공급하고 있고, 둑 위로는 왕복4차선 도로가 개설되었으며, 장항선과 군산선이 연계되어 전북익산까지 철도가 연결되어 있어 사람의 왕래는 쉬워졌다. 부근에는 철새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어도(魚道)가 설치되어 바다와 민물로 왕래하는 통로가 있기는 하지만 바다와 민물이 소통이 안 되어 자연은 답답해하는 것 같다.
<금강하구둑 배수갑문>
하굿둑을 건너 충남 서천 금강호반에서 ‘금강천리 길 걷기’를 마무리하고 한산면으로 이동하여 신성리갈대밭을 거닐며 금강의 처음과 끝을 조용히 정리해 본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빼 먹지는 않았는지? 사전 계획대로 제대로 실행을 했는지? 같이한 도반(道伴)들에게 언행으로 실수를 하여 부담을 주지 않았는지? 등등 많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강 건너 멀리 아침에 걸어왔던 전북 웅포의 곰개나루가 어머니의 포근한 품처럼 따뜻하게 다가온다.
<신성리갈대밭>
<신성리갈대밭>
<곰개나루 원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