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정철훈
죽은 병사들이 학이 되어 날아갔다는 러시아 가요 「주라블리」의 가사는 진부하다
죽은 자는 죽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는다
주라블리의 하얀 날개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선에서 불똥이 튈 때 어머니는 군화를 신 듯 두꺼운 양말을 조여 신고 일어선다
어머니의 일생은 이미 패배한 것이어서 자식을 찾아오기 전에는 다시는 앉지도 눕지도 않을 것이다
흔히 죽은 자의 영혼은 날아오른다고 하지만 문제는 대지에 남은 육신이다.
뼈와 살과 흥건한 핏물……
자작나무는 영혼이 빠져나간 시신을 뿌리로 휘감으며 자란다
자작나무숲에 들어가보면 안다
잘박이는 낙엽을 밟는 순간 물컹하게 풍기는 피비린내
하늘은 어둡고 자작나무 껍질은 은박지처럼 반짝이는데 거기 맺혀 있는 건 어머니의 눈물
체첸에 파병된 아들을 찾아나선 병사들의 어머니회원들이 모스끄바에서 그로즈니까지 도보시위를 벌일 때 그들의 손에는 흰 깃발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자작나무 밑에 시체가 썩고 있다고
가슴의 붉은 리본은 아들이 전사통지
산 아들이 아니라 죽은 아들을 찾으러 가는 어머니들의 걸음은 이미 총알 빗발치는 전장을 밟는다
아들의 시체를 찾아 헤매는 동안 어머니의 얼굴엔 수염이 자란다
그리하여 모든 병사들은 적군이 아니라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 것이다
적군은 앳된 얼굴의 체첸 전사가 아니라 그 병사의 어머니며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 것이다
언 땅으로 눈발은 흩날리는데 거기 반쯤 묻혀 무엇인가를 움켜쥐려고 내뻗은 시신의 손목
어머니들은 얼어붙은 손목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든다
우리는 알고 있다
주라블리들이 떼지어 겨울 하늘을 날아가는 저 진부한 노래가
왜 어머니의 심장 속에서 흘러나오는지를
<시 읽기> 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정철훈
러시아어 ‘주라블리’는 우리말로 ‘백학’. 최민수와 고현정이 나와 크게 히트한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가로 친숙해진 노래이기도 하다. 남저음 목소리가 매력적이어서 가끔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다. 왜 노래가 자꾸 입에 붙나 했더니 아들 잃은 어머니들의 가슴과 눈에서 고통의 진액으 ㄹ뽑아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그런가보다.
‘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라는 절규가 큰 울림을 갖는 이유는 우리 민족도 그런 아픔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총칼에 죽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어머니들이 그 뒤에서 울음과 한숨과 불면으로 죽었다. 어머니들이 아직 숨을 쉬고 있다 해도 이미 오래전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그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 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니자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나희덕, 「허공 한줌」 부분)
자식이 치명적인 불행을 당하면 그 순간에 어머니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죽은 몸으로 숨 쉬고 밥하고 청소한다. 자식을 위해 마음은 죽어도 몸은 마음껏 죽을 수 없는 것이다. 아기는 어머니의 팔이며 다리이며 심장이므로 어머니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다. 자식을 죽이는 것은 그 자식과 한몸인 어머니의 팔을 자르는 것이며 심장을 도려내는 일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하기 어렵다. 원한이든 복수든 이데올로기든 민족주의든 전쟁은 집단적 광기를 필요로 한다. 전쟁은 군인을 그 광기에 취하게 하여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한다. 광기를 통해 개인은 용맹한 남성이 되고 정의와 이념이 되고 국가가 된다. 그러면 싸우는 상대도 인간이 아니라 없애야 할 적이 되고 악이 된다. 거기에는 여성과 어머니와 눈물과 슬픔이 끼어들 틈이 없다. 자신이 쏜 것이 적군이 아니라 어머니의 심장이었다는 사실은 집단적 광기가 어느 정도 식은 후에야 보이게 될 것이다.
군인은 몸으로 죽지만 어머니는 가슴으로 죽고 기억으로 죽는다 군인은 단 한 번한순간에 죽지만 어머니는 수십 년에 걸쳐서 수십 수백 번 죽는다. 군인은 죽어서 썩지만 어머니는 다 썩은 다음에 죽는다. 살아서 하루에도 여러 번씩 죽는 어머니의 죽음은 어머니의 몸이 죽어야 비로소 끝난다.
―김기택,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다산북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