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대공황으로 경제활동이 마비된 1930년대 전반기 영국에서는 이 주제를 둘러싸고 하이에크와 케인즈 사이에 20세기의 명승부라 할 수 있는 드라마틱한 논쟁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 출신 하이에크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확립하고 자유방임 원칙에 따라 시장질서를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반면 언제나 현실문제에 주된 관심을 가졌던 토박이 케인즈는 자유방임의 곤란함을 지적하고, 정부가 자본주의의 결함을 수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드라마는 케인즈가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을 출판하면서 막을 내렸다. 대공황이 수년간 지속되는 상황에서 그저 기다리라는 하이에크의 정책 처방은 부적절했던 것이다.
케인즈는 고루한 관습과 낡은 인식의 틀에 반대했으며, 인간의 창조적 정신이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양식있고 직관력을 가진 엘리트들이 사심없이 정책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케인즈의 가치관은 그의 출생지 이름을 따라 "하비로의 전제"라고 불린다.
1929년 뉴욕 주가 대폭락을 계기로 자유주의자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불능" 판정을 받으면서 자본주의 경제는 수렁에 빠졌다. 자유의 메카라던 미국에서조차 시장기능이 마비되고, 3%에 불과했던 실업률은 25%로 치솟았으며, GNP(국민총생산)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기존의 경제이론으로는 공황을 분석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케인즈는 시대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칸, 미드, 로빈슨 같은 훌륭한 제자들과 함께 1931년부터 36년까지 생산을 늘리고 실업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일반이론"이다.
케인즈의 처방은 정부의 과감한 개입으로 유효수요를 늘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는 그냥 놔두면 장기적으로 침체할 것이라는 평소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화폐개혁론"(1923)에서 기계적 금본위제 대신 관리통화제도를 주창했던 케인즈는 이미 1926년 베를린에서 행한 "자유방임의 종언"이라는 강연을 통해 자유방임의 허구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개화된 인간의 자리심이 항상 공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보이지 않는 손"의 신화는 경제학적 연역일 뿐, 현실세계에서는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개별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개인들은 공익이라는 선을 이루어 내기에는 너무 무지하거나 미약하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역설적이지만 정부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케인즈는 당대에 그의 이론이 인정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매우 행복한 경제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아꼈던 영국이 경제적으로 서서히 쇠퇴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는 점에서는 불행한 경제학자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처칠이 영국에 했던 봉사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수행한 애국자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일반이론"은 단순한 경제이론서가 아니라 한 실천적 경제학자가 평생에 걸쳐 연마하고 축적한 철학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책이다. 그의 이론은 완전고용을 가능하게 하는 정책수단의 유효성에 대한 분석일 뿐 아니라 불평등하게 분배된 부와 소득의 바람직한 분배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케인즈가 20세기에 드리운 그림자는 21세기에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약력 ▲1948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프린스턴대 박사 ▲미 콜럼비아대 교수, 런던 정경대-독일 보쿰대 객원교수 역임 ▲저서 "거시경제론" "금융개혁론""중앙은행론""경제학원론(조순 공저)"
[존 케인즈는] 러셀 등 당대 석학들과 교분…
존 메이나드 케인즈(1883∼1946)는 경제학자였던 아버지와 자선사업가이자 케임브리지시의 시장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학문에서도 현실에서도 승리했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의 서재에 드나들던 알프레드 마셜 등을 통해 학문적 분위기를 익혔고 명문 이튼고의 엄격한 교육을 통해 세계가 크고 넓다는 것을 배웠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한 후 '사도회'에서 러셀, 화이트헤드, 스트래치와 같은 당대의 쟁쟁한 지성들과 재기의 불꽃을 피우며 쌓은 교분은 그를 자유분방한 사상가로 만들어주었다. 그의 명석함에 대해 러셀은 "케인즈와 논쟁을 할 때면 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지 않는 때가 한번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케인즈는 원래 수학을 전공했으나 경제학으로 전환했고, 1905년 졸업후 재무부에 근무했다. 이어 케임브리지대학 강사, 파리강화회의 재무성 수석대표, 브레튼우즈 협정 영국대표, 국제통화기금과 국제부흥개발은행 총재 등을 지냈다. 그는 "부르조아 계급에 어떤 결함이 있더라도 그들은 인류발전에 씨앗을 뿌리는 존재"라고 외쳤다. 케인즈는 빅토리아 시대의 근엄함과 산업사회의 천박함을 함께 지닌 지식인 예술인 그룹 '블룸스베리 클럽' 회원이었다. 동성연애를 즐겼고, 42세가 되어서야 소련 출신의 발레리나 리디아 로포코바와 결혼했다.
그는 또한 경제학이 돈을 벌 수 있는 학문임을 증명한 드문 경제학자였다. 빈틈없는 투기꾼이었던 그의 아침 일과는 침대에 누운채 금융정보를 검토하고 전화로 지시를 내리는 일로 시작했다. 그는 보험회사 경영에 성공했고, 발레단을 후원했으며, 모교인 킹스 칼리지의 재정을 도왔다. 케인즈의 경제학은 70년대 들어 인플레 속의 경기침체라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나고 물가안정에 주축을 둔 정책 전환이 실효를 거두지 못함으로써 통화학파의 도전에 직면할 때까지 30년 이상 위력을 발휘했다. 1983년 6월 케임브리지대에서 케인즈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렸을 때 사뮤엘슨(MIT대), 토빈 (예일대), 칼더(케임브리지대) 등을 비롯한 100여명의 케인지언들이 외친 구호는 "제2의 케인즈 시대를 열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