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하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으니 잠시 후 익숙한 곡이 흘러나왔다.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아람브라 궁전의 추억>.
언제 들어도 애수어린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곡을 듣자니 몇 년 전 아람브라 궁전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궁전 곳곳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이 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트레몰로로 연주된 이유를 불현듯 깨달았던 기억이 뒤이어 떠올랐다. 현장에 가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스페인은 한국인이 매우 좋아하는 여행지 중 하나다. 어제도 스페인의 몇몇 도시에 대한 문의가 맞게방에 올라왔는데, 바르셀로나 이외의 도시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단연코 아람브라가 있는 그라나다를 추천한다.
<아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으며 생각 난 김에 몇 년 전 썼던 스페인 여행기 중 아람브라 편을 다시 읽어 본다. 언제고 다시 방문하고픈 곳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cYC2pCDk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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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남부 지방 안달루시아에서도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그라나다는 눈이라고는 한 송이도 내리지 않고 일 년 365일 중 360일이 맑다고 할 정도로 비도 거의 오지 않지만 가뭄을 겪지 않는다.
멀리 보이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눈 덮인 산정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차가운 시냇물이 생명줄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아람브라 궁전은 산 중턱에 있지만 지형의 높낮이를 정밀하게 계산하여 치수에 활용한 이슬람 왕국의 왕궁답게 그 물을 끌어들여 곳곳에 늘 물이 흐르게 했다.
시에라 네바다에서 흘러온 맑고 차가운 물은 계단 옆의 작은 수로를 따라 흐르다가 바닥보다 약간 높게 만든 분수를 거쳐 작은 폭포가 되어 떨어져 내린다. 그래서 왕궁을 둘러보는 동안 어디선가 계속 물소리가 들린다.
졸졸졸 졸졸졸...
아람브라 궁전을 걷는 동안 내내 따라다닌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타레가의 <아람브라 궁전의 추억>에 처음부터 끝까지 트레몰로가 쓰인 이유를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이 곡의 트레몰로는 바로 이 물소리를 표현한 것이었구나.
아람브라의 물소리는 비운의 왕비의 눈물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신하를 사랑했던 왕비.
그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계략을 꾸며 왕비가 부른 것처럼 그 신하를 부른다.
신하가 온 불리어 온 곳은 금남의 구역이다. 왕비와 후궁, 그리고 남자는 오직 왕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으로서 “사자의 정원”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중정과 그 주위의 방들이다.
왕은 그곳에 들어온 죄를 물어 신하를 처형한다. 화려하고 화려한 그 방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비극.
후세 사람은 안타까워하며 그 방에 신하의 이름을 붙였다. 아벤세라헤스의 방.
무하마드 8세의 왕비 아이샤와 신하 아벤세라헤스 얘기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정적 아벤세라헤스 일족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왕이 연회를 핑계로 불러 죽인 후 왕비와 내통했다는 소문을 낸 것이라는 해석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이슬람의 정밀한 건축술, 과학, 치수(治水)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도 어려운 이 이야기에 사람들이 더 끌리는 이유는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하다. 사실을 나열하기만 해서는 흥미가 생기기 어렵지만 사실들 간에 연관을 짓고 의미를 부여하면 흥미가 생겨난다. 지식이 발달할수록 스토리텔링이 중요해지는 이유이다.
아람브라의 물소리는 로드리고의 눈물도 떠올리게 한다.
<아랑훼스 협주곡>을 작곡한 호아킨 로드리고는 어릴 때 디프테리아로 실명한 맹인이었다.
아내의 도움을 받아 아람브라를 방문했을 때 그는 두 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람브라가 너무 아름다워서 한 번,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어서 또 한 번.
빼어난 아름다움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 그것은 아마 두 감정이 본질적으로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람브라를 둘러본 후 천변 카페에 앉아 아내와 상그리아와 맥주를 마시며 왕궁을 올려다 보니 수백 년 전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