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
프랑스에서 어떤 여자가 살충제를 먹고 생을 마감한다는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위액을 조사한 결과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그녀의 위액 속에는 살충제의 흔적은 전혀 없고 대신 독성이 전혀 없는 음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녀는 실제로 무독성 음료를 마신 것인데 살충제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어느 책에선가 어떤 사람이 절벽에서 추락해서 고통 속에 있을 때, 친구가 아스피린을 진통제라면서 자기에게 주었는데 이를 먹은 뒤에 고통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플라시보우(Placebo) 효과라고 하네요. 진통제를 요구하는 환자에게 진통제를 주면 치명적이어서 그 처방이 불가능할 때 그와 비슷한 모양의 약을 환자에게 줘서 정신적 효과를 얻게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되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지요. 겸호라는 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길일이라도 그날 악한 일을 행하면 반드시 흉일이 되는 것이요, 흉일이라도 선을 행하면 반드시 길하게 된다. 길흉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날에 달린 것이 아니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지금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한날한시에 똑같은 환경, 똑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각자의 길은 각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상은 우연으로 다가오지요. 그 우연을 좋은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이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그 우연을 나쁜 운명으로 만드는 이는 실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이 약혼녀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그 이유는 결혼도 하기 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지요. 의로운 사람이라고 복음서에 적혀 있듯이, 요셉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간음한 여인이라고 신고해서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도록 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해진 운명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운명을 거슬러서 자신의 의지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지요. 이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운명을 거슬러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뒤에야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 잉태에 대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만약 정해진 운명이라고 하면서, 율법대로 마리아를 신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의 강생이 있을 수 없었겠지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운명 탓으로 외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빠다킹신부
사랑해요
-조명연 신부-
결혼한 지 13년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사랑해”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세미나에 참가한 뒤, 아내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말했지요. “사랑해.”
아내는 깜짝 놀라서 다시 묻습니다. “예?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뭐 잘못 먹었어요?” 이 남자는 너무 창피했지요. 하지만 저녁에 남자가
집에 들어왔을 때, 아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했다고 합니다.
만약 남편이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똑같은 일상의 삶 안에서
서로 힘들게 살 뿐이었겠지요. 바로 이렇게 용기 있는 남자의 말 한마디가
가정의 평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랑’은 용기를 함께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그 용기 있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데는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일반적인 우리들의 관습들,
별 것도 아닌 나의 체면 등등….
오늘 복음의 요셉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용기를 내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내 마리아를 받아들입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밤 뉴스에서는
-김명희-
종종 신문·방송의 뉴스를 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이 더 많습니다. 누가 누구를 고소하고 고발하고 누구는 이렇게 누구는 저렇게 잘못했고, 내 탓은 없고 네 탓만 있는, 서로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가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잉태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에게도 정혼녀가 임신한 사실은 작은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1장 18-19절에서 요셉은 비록 드러내려 하지는 않았으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20절 이후를 보면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씀하신 내용을 받아들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인한 것임을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는 마리아에 대한 믿음과 주님의 천사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가졌던 마리아에 대한 신뢰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지금 우리의 마음에 겨자씨만큼이라도 있다면 오늘 밤 뉴스에서는 좋은 일만 보도될 것 같습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요셉의 믿음과 신뢰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축복과 영광을 약속하시는 하느님
- 경규봉 신부-
성령께서는 예언자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사로잡으시고 황홀경 속에서 당신의 메시지를 접하게 하셨다. 오늘 예레미아 예언자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환상 중에 하느님을 뵙고 예언한다. 민수기(24,2-7.15-17)에서 소개되는 발락 예언자도 자신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그들의 장래와 그 주변국들의 운명까지 예언할 수밖에 없게 됨을 볼 수 있다.
거칠고 메마른 광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은 미래에 축복과 영광을 누리리라. 이스라엘은 급류가 좌우로 힘차게 뻗쳐 흐르는 골짜기처럼 그 위용이 대단하며, 마실 물이 풍부하여 생명력이 넘쳐흐르고 수확이 풍부하여 부족함이 없으리라. 가나안에 정착할 그들은 물가에 자라는 느티나무와 송백처럼 위엄 있고 찬란하여 축복과 영광을 누리며 그 후손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며 번성하리라(신명 8,7). 이스라엘의 왕은 아각(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을 최초로 공격한 강력한 족속인 아말렉 왕의 왕호)을 누르고 국위를 널리 떨치리라.
이어서 발락은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야곱에게서 한 별(왕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 :마태 2,2; 묵시 22,16)이 솟아 만백성의 왕이 나타날 것을 예언한다. 그 메시아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물리치고 의인에게는 구원을, 악인에게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이사 42,1-9; 묵시 22,16). 그리하여 메시아가 통치하는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가 될 것을 예언한다.
오늘 예레미아 예언자도 같은 내용의 예언을 하고 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하지 않고, 그 대신 “이스라엘 집안의 후손들을 북쪽 땅에서, 그리고 당신께서 쫓아 보내셨던 모든 나라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자녀들이 당신을 거스르고 배반할지라도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미래에 대해 들려주시는 까닭은 자녀들이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자녀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죄를 지음으로써 그 대가로 혹독한 고통과 시련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죄의 결과에 대해서 예언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죄를 짓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른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게 되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느님께 울부짖으면 그에 대해 마음 아파하시며, 구원을 약속하신다. 자녀들이 시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고자 미래에 누릴 영광과 축복을 예언해 주신다. 하느님은 그처럼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를 탈출시키시어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시련과 고통을 당하도록 하심으로써 이집트에서 물들었던 죄와 우상숭배의 흔적들을 깨끗이 씻도록 하셨다. 마치 용광로에서 불로 단련하여 순수한 쇠를 얻어내듯이 당신 백성을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순수하게 단련시키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축복과 영광을 누릴 것임을 예언해주심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이 영광과 축복을 받을 것이며, 먼 훗날 메시아의 나라가 세워질 것임을 예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예언자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악 속에서도 선을 끌어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과 영광을 주실 것임을 굳게 믿고 살아가자.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가자.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받고 모든 고통을 극복하자..............◆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인내하자.
-이창신 신부-
제가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군생활의 어려움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제가 힘들어했던 것 중에 하나가 태권도였습니다. 군복무기간 중에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저는 자대배치를 받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평소 훈련이나 작업이 없으면 짬짬이 시간을 내어 선임자들로부터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그러다 승단시험이 있다고 하면 중대에서는 한 명이라도 승단시험에 합격시키려고 강도 높은 연습을 시킵니다.
몸에 좋은 운동이기는 하지만 많이 힘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몸이 유연하지 못해 연습이 너무 힘들었고, 매번 아침이 되면 태권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했었습니다. 두 번이나 시험에 떨어져 남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한 덕에 다른 사람보다 늦기는 했지만 태권도 유단자가 되었습니다. 승단시험에 합격한 그날의 감격과 기쁨은 아마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행복과 기쁨을 꿈꾸지만 고통의 시간도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생의 여정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함께 있듯이 기쁨을 원하는 만큼 고통의 시간에 대한 준비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생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생에 겪게 되는 어려움, 고통을 제 나름대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봤습니다.
우선 누구나 살아가면서 당연히 겪어야 할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겪게 되는 고통이요, 이 사회 일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어려움들입니다. 제가 군에서 태권도 유단자가 되기 위해서 힘들었던 연습을 했던 것도 군인이기에 당연히 감수해야 할 어려움이었습니다. 학생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공부라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한 여자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산고를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 공공 질서를 위해서 우리는 정해진 법규들을 준수할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사회적, 가정적, 그 외 나의 위치에 따라 주어진 당연한 고통입니다. 이 어려움의 극복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기 보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고, 이러한 고통의 극복은 나로 하여금 현실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세상엔 회피해도 되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선택적인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사정 등으로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당연히 감수해야할 고통이 아니기에 피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고통을 견딤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고통이 있습니다.
나의 재물을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나눈다거나, 사회정의를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으로 헌신하는 일 등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할 고통보다 더욱 고통스럽고 벅찬 것들이지만 이 고통의 감내로 세상은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탄신 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의 고통과 성모님과 함께 자신의 삶을 하느님을 위해서 바친 요셉의 생을 보면서 그들이 선택한 삶은 피할 수 있었던 고통의 삶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지게 됨으로 겪게 될 사회적 비난을 하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법대로 살아가는 요셉 역시 잉태한 마리아를 받아들임이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어 더 큰 뜻을 위해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선택한 고통으로 세상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온 인류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에도 지금 고통의 언덕이 어떤 형태 이로든 놓여있을 것입니다. 그 고통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든, 세상을 위한 것이든 힘껏 참아내십시오. 우리 앞에 놓인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그 고통을 인내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씩 더 큰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물론 회피라는 방법도 있겠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또 하느님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고통을 안고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손길이 내 인생에 닿는 순간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자신의 인생 안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그 전환점은 다름 아닌 "강렬한 하느님의 손길의 체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요셉에게 닿는 순간 요셉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돌아보니 제 인생 안에서도 가장 은혜로웠던 순간은 하느님 그분께서 제 인생에 개입하시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분의 실재를 생생히 느끼던 바로 그 순간의 기쁨과 환희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렇게 좋아 보이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시시하게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더 이상 재물도, 명예도, 사람조차도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더군요.
진정한 내적 변화, 회개다운 회개, 새 삶, 이런 단어들은 결국 하느님과의 절실한 만남 그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셉에게 있어서도 하느님 체험의 순간은 얼마나 은혜로운 순간이었던지, 그 짧은 순간, 과거의 요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새로운 요셉이 탄생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느님 체험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마리아로 인해 요셉은 배신감과 분노로 치를 떨어야만 했습니다.
약혼녀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을 알게된 요셉의 하루 하루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하루 하루였습니다.
"마리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 네가 어떻게 이렇게 배신을 때릴 수 있나?"
그러나 요셉의 인생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으면서 요셉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는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은 즉시 태도를 바꿉니다. 억울함, 분함, 불평불만, 아쉬움 등 인간적인 감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침묵 중에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했습니까? 언제 우리 삶 안에서 그분의 생생한 자취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감미로운 현존에 취해 지나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잊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번 성탄,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한번 하느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체험하는 기쁨의 시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느님 그분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이 우리 삶을 스치는 순간 우리 인생은 점화된 촛불처럼 의미와 활기를 지니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자취가 우리 삶에 각인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한번 영적 여정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순간입니다.
벙어리 수사님
-양승국신부-
침묵과 은둔의 생활을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수사님 한 분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냅니다. 몇 년에 한번이나 만날까 말까 하지만 수사님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조용히 그리고 주의 깊게 제 말을 들어주시고 고개를 끄덕여주시고는 그만입니다.
수사님이 몸담고 계시는 수도회의 다른 수사님들 사이에서도 그 수사님의 침묵은 유명합니다. 특히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거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수사님은 그 순간부터는 즉시 벙어리가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전혀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수도 공동체 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필요한 노력이 언어구사에 있어서의 신중함, 과묵함, 진지한 침묵, 결점을 덮어주기와도 같은 노력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제 하루의 삶을 분석해보면서 남 이야기하는데 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웃들의 긍정적인 측면이나 장점을 인정해주기 보다는 이웃을 "까는"데 습관화되어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셉이 보여준 삶의 스타일은 얼마나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것인지요. 자신에게 들이닥친 엄청난 손해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침묵합니다. 침묵 중에 자신에게 다가온 사건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갑니다. 우리처럼 절대로 떠벌리는 일이 없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침묵을 사랑했던지 복음서 안에서 요셉은 거의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따를 뿐입니다. 여기에 요셉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요셉은 침묵으로 인해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서 전반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 요셉의 이미지는 고지식하지만 조용히 하느님의 말씀을 명상하면서 침묵의 길을 걷던 사람입니다.
또한 요셉은 언제나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향해 명령하실 때마다 그는 언제나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이고 일관된 수용 그것이 바로 요셉의 삶이었습니다. 요셉의 일생은 뚜렷한 이정표나 계획이 없었던 여행이었기에 고달팠고 피곤했었습니다.
하느님 언약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은데 대한 실망으로 요셉의 삶은 무척 힘겨웠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성소여정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언약이 보다 가시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지 않음으로 인해 답답해했고 지루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기대와 그분께 의탁하는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걷기 성가신 캄캄한 밤길을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길 떠났던 여행길이 바로 요셉의 길이었습니다.
"침묵을 사랑하십시오. 침묵
진짜 바보
-민경철 신부-
참 바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산 적이 있었습니다.
남이 날 등쳐먹으려 하면 속아줄 수 있고, 욕을 해도 웃을 수 있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인생이 다 그러려니 하며 그냥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 하지만 내 것을 잃고 싶지 않은 욕구와 내 것이 아닌 것을
찾아 나서려는 욕구 때문에 언제나 바보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진짜 바보를 한 사람 만납니다. 예수님 아버지 요셉. 꿈속에서 나오는
천사의 말 한마디에 사생아를 잉태했다고 생각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요.
글쎄 성령으로 말미암은 아기라고 들었습니다. 이름도 주어져버렸습니다.
그때 당시 이름 짓는 권한은 아버지에게 있었는데 아버지 역할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지요. 요셉은 너무도 단순하게 그리고 주저 없이
들은 대로 행합니다. 내가 요셉이었다면 얼토당토않은 이 얘기를
순순히 따를 수 있었을까? 이 사실을 누가 알기라도 하면 ‘등신’이라고
욕할 것 아닙니까요? 요셉 참 대단하지요. 하지만 바보가 될 수 있었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오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오영숙 수녀-
하느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온 세계를 뒤흔드는 로마 제국의 귀족 처녀도, 세력가 유다 집안도 아닌, 식민지 유다 산골지방의 처녀에게 당신 아드님을 맡기십니다.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난 아이를 받아줄 사람 또한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의로운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셨습니다. 그 아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메시아로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자각, 그 현존에 대한 끊임없는 의식입니다.
성인들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의식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향하게 됩니다. 무언가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도 그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의 생각은 온통 그분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힘든 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신앙의 길은 언제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아가려 노력하며 나의 모든 순간에 그분을 초대하며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삶입니다.
주님의 탄생은,
-홍성만 신부-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바로 그곳에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경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은 했지만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자 혼자 속으로 조용히 결심합니다. 파혼하기로 말입니다. 법대로 사는 의로운 그였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굳히기까지 요셉 성인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요셉은 처음에 자신의 귀와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잉태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배신과 분노의 감정이 그를 휘몰아쳤을 것입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이는 그 시대에, 복수의 방법은 간단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요셉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데까지 이릅니다. '평소에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마리아, 하느님 안에서 마리아를 사랑하기에 해치지는 말자. 이에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파혼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기를 잉태시킨 남자와 잘 살수 있지 않겠나?' 생각은 여기에까지 이르렀지만, 실망과 외로움은 요셉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할 일을 다한 요셉은 더 이상 견딜힘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껴안는 일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꿉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알려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배신감과 분노로 며칠 밤낮을 고통스럽게 지내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혀 마리아를 풀어주고자 하였지만, 실망과 허전함, 그리고 외로움으로 시달려야 했던 요셉의 아픈 마음, 이 아픈 마음이 따뜻한 햇살에 얼음이 녹듯 녹아 내립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기 예수의 탄생에는 인간을 향한 요셉의 끝없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배려할 힘조차 없어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견디어야만 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좇아 들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힘을 서서히 활동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그 마음속에서 성령은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그곳에 주님의 탄생은 예비되어 있습니다.
나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주님께서 탄생하셔야 할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천사와 요셉의 거래
-박상대신부-
마태오복음 1-2장은 예수님의 공생활(가르침과 행적)을 소개하기에 앞서 비교적 먼 과거의 이야기를 엮어만든 전사(前史)에 속한다. 이러한 전사는 루가복음(1-2장)에도 있다. 둘 다 원전(原典)이 될 마르코복음과 예수어록에 없는 전승들과 각자 고유의 자료들을 토대로 전사를 엮었을 것이다. 루가복음의 전사(前史)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 그리고 성장과정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 암시한다. 아울러 루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즈가리야, 엘리사벳, 마리아, 요셉, 목동들, 그리고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 등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서술도 포함시켰다. 이와는 달리 마태오는 예수님 단 한 분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족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경위, 동방박사들의 방문, 헤로데 대왕의 베들레헴 아기학살, 이집트 피난, 그리고 성가정의 나자렛 정착에 관한 이야기를 위주로 전사(前史)를 엮었다. 미리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이러한 전사(前史)들이 예수의 생애 시초와 어린 시절에 대한 확실한 사실을 근거로 엮어진 기록들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성과 그 의미를 밝히려는 신학적인 서술이라는 것이다. 즉, 인류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신뢰와 신앙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사가 마구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전사가 사실과 달라야 하는 법도 없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경위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물론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설명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의 족보를 소개한 마태오가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마태오가 저술한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전자(前者)는 인간의 이름이요, 후자(後者)는 하느님의 이름이다. 즉, 예수는 인간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어야 하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어야 한다. 마태오는 다윗의 후손인 요셉을 예수의 합법적인 아버지로 서술함으로써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 되게 하였다. 마태오는 예수의 공생활 중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예수께 8번이나 더 부여한다.(마태 9,27; 12,23; 15,22; 21,9.15 등)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만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 밝혔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히는 일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 일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추진하신다. 그것이 바로 "동정녀의 잉태"(이사 7,14), 즉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이다.(18절)
루가복음은 예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하느님의 계획과 이 계획에 대한 동정녀 마리아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짐을 시사하고 있다.(루가 1,26-38) 또한 루가는 마리아의 합법적인 남편 요셉을 두세 번 언급할 뿐 전적으로 배경에 머물게 한다.(1,27; 3,23) 그러나 마태오는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에 관한 사실은 간단하게만 밝히고, 오히려 요셉을 부각시킨다. 마리아의 잉태가 자신과 무관한 사실을 알았을 때 요셉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이 점은 상상에 맡기겠다. 복음은 요셉이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나, 마리아를 법대로(신명 22,20-21) 다루지 않고 자비로이 선처(善處)하려 하였음을 시사한다. 이 때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여 다윗의 후손인 요셉에게 사건의 정황을 설득시키고, 요셉은 이에 순명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들에게 천사의 명대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된다.(21절, 25절)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합법적인 아들로서 다윗이 자손이 되었고, 동정녀를 통한 성령의 잉태로 하느님의 아들이 된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 인간의 아들이요, 하느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더 나은 이름이 있다. 바로 "임마누엘"이다.(23절)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린 적은 없다. "임마누엘"은 실상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는 의미상의 이름이다.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참다운 만남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예수께서 저 바깥 마구간 구유에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느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만들어야 한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마태1,18-24)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이라는 이름이 여섯 번이나 나온다.
요셉이란 이름은 무슨 뜻인가? 요셉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보태 주시다. 하느님께서 얹어주시다. 하느님께서 덧붙이시다."라는 뜻이다. 요셉이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그런 은총을 덧붙여 주셨기 때문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같이 살기 전에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요셉의 마음이었다.
오늘 복음은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라고 말하였다. 만일 요셉이 자기의 생각대로 마리아와 파혼하였다면 예수님의 양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라고 말해주는 것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양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요셉이 자기 생각대로 파혼을 하였다면 그는 절대로 예수의 양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예수의 양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천사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셨고 또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고 그러한 당신의 계획을 요셉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알려주어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던 그의 마음을 바꾸도록 은총을 덧붙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셉이 위대한 점은 바로 하느님이 그에게 내려주시는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이 요셉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요셉은 절대로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되실 수 없었다.
요셉을 통하여 이루신 모든 일은 요셉이 이룬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루신 일이다. 즉 하느님이 요셉에게 덧붙여주신 것이다. 하느님이 요셉에게 얹어주신 것이다. 요셉은 다만 하느님이 덧붙여주시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뿐이다. 하느님이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가 결국은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천사가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고 하였고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라고 하였다. 요셉은 천사가 "맞아들여라."고 말한 대로 "맞아들였다." 즉 요셉은 하느님이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맞아들인 사람"이다. 은혜를 은혜로 맞아들인 것이요,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맞아들인 것이요, 파혼하기로 자기 생각을 굳혔었지만 천사가 "맞아들여라"고 말했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천사의 말을 맞아들인 사람이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붕어 빵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밖에 없는 세계 유일한 존재로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을 닮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서하느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은 아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가꾸어야 하고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힘으로만 또는 나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이 덧붙여질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형성되고 그렇게 되어간다. 나쁜 생각을 하게 되면 나쁜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고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만들어다.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라고 말씀하셨다. 즉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려면 그리고 하느님을 닮아 가는 사람으로 되려면 빵으로만 불가능하다. 빵과 더불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다. 나의 생각이 이미 굳혀졌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나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생각한 것이 하느님의 말씀과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생각을 고집한다면 나는 나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만 머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하느님의 말씀을 맞아드린다면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으로 넘어가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질 것이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은총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요셉에게 은총을 덧붙여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새로운 은총을 덧붙여 주신다. 매 순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시간이다.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매일 나의 모습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요한 세례자가 말씀하신 대로 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서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하느님은 내 안에서 더 커지셔야 한다. 나의 생각은 점점 더 작아지고 하느님의 생각은 더 커져야 한다.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새로워지고 날로 더 큰 사람으로 자라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은총은 선물이기 때문에 나는 그 선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하느님께서 매 수간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인 만큼 나는 성숙할 것이고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갈라 6, 1)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갈라 6, 8)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고린 후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