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간 금요일 - 참된 직무를 살아가는 용기
오랜만에 뵙네요. 지난 월, 화, 수 3일 동안 남동지구 신부님들과 동해 쪽으로 함께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뜨겁고 맹렬한 태양 속에서도 그래도 지구 신부님들과 서로가 겪고 있는 애환들, 또 고민들, 그리고 서로 친교를 나누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제는 우리 교구 순교자 현양대회를 이승훈 베드로 기념관 축복식과 함께 했어요. 그런데 우리 본당은 별도로 참석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교구에서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어제 날씨가 참 특이했죠. 행사 전에 꽤 비가 많이 왔어요. 그래서 노천에서 미사하는데 걱정이 많이 됐는데, 희한하게도 미사하기 전에 비가 그치더라고요. 그리고 흐릿한 날이 계속 이어지더니, 미사 끝날 때까지 다행히 비가 안 오고, 행사 다 끝나고 집에 가는데 그때 또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우들이 모이는 이 아름다운 순간에 순교자분들이 그래도 비맞고 고생은 안 시키셨구나. 그래도 신자분들이 미사를 끝내고 돌아가시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희망하고 바라는지에 대한 삶의 이야기들을 되새겨볼 수는 있었습니다.
오늘 신학교 강의까지 다녀와서, 강의 끝나고 오는 길이 엄청나게 막히더라고요. 왜 이렇게 막히나 했더니 오늘부터가 황금연휴의 시작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고생하면서 왔습니다. 오늘 학교에서 신학생들 강의를 하는 과목 중에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는데, 인공지능 시대라고 그러잖아요. 인공지능 말을 많이 들으시죠? 앞으로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면 일자리가 우리 사람들이 익숙하게 가지고 있는 일자리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는 그런 걱정들을 많이 해요. 근데 제가 신학생들한테 그랬어요. 모든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미래에 없어지지 않을 대체 불가한 직종이 하나 있다, 신부다. 모든 직종은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는데, 이 가톨릭 신부는 그 어떤 것도 대체 불가하다. 여러분들은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다. 사실 그렇죠? 우리 카톨릭 교회에서 계신 게 목사님들이나 스님들이나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있어요. 더 멋진 설교와 더 멋지게 사람들의 마음을 컨설팅해 줄 수 있어요.
우리 가톨릭 교회는 직무적 사제직이라는 것이 있어서, 인격적인 안수를 통해서 이어진 사제 직무로만 성사의 유효성을 이루는 교회이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 교리가 바뀌어서 성체성사가 바뀌거나 아니면 교계 제도에 대한 그런 기본적인 가르침이 바뀌지 않는 한, 가톨릭 사제 직무의 고유성은 존중되겠죠. 미래의 교회가 여러 가지 위기에 빠져서 점점 서구 유럽처럼 사라지는 위기를 겪는다 하더라도, 그렇듯 교회가 사라지거나 사제 직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굉장히 인간적으로 뛰어난 학식과, 또 요즘 말로 하면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나름 남들 앞에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지식과 자신의 모든 세속적인 가치는 다 쓰레기처럼 버리고,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에 자신을 온통 바쳤다고 하죠..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자기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면, 삯을 요구할, 요즘 말로 하면 내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직무는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 그리고 그 복음을 진정 선포하기 위해서는 그냥 내 인간적인 조건에 맞춰서 내 능력껏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경기장에서 월계관을 얻기 위해서 달리는 사람처럼, 더 절제하면서 영원한 썩어 없어지지 않을 화관을 얻기 위해서 쉴 틈 없이 달려가면서 자신을 단련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했어요. 저도 사실 본당에서 사목자로 살지만, 신학생들하고도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제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무엇이 복음인지, 무엇이 복음적 삶인지는 말로 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지만, 그 복음적 삶을 내가 사는 문제는 전혀 다르거든요. 열심히 살면서 그 삶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사람들한테 나누어지면, 그 말에는 힘이 있어요. 화려한 말솜씨나 논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안에서 풍기는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거든요. 사람들은 그럴 때 감동하죠. 그 사람의 어떤 품격과 인품이 함께 어우러지지 않은 언어는 공허하고 맹목적이게 느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본당에서 사목을 하면서도 저도 저에게 주어진 직무잖아요. 직무인데 이 직무가 내가 가진 은사를 사람들에게 평가받거나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생기면 마음에 스크래치가 많이 생겨요. 학생들하고도 얘기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는데, 왜 사제는 직업이 아니라 천직, 소명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는지를 얘기를 한 거예요. 우리는 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직업의식을 갖고 있잖아요. 내가 내 노동력을 제공해서 돈을 벌어 생활을 하는 직업적 윤리와 소명을 갖고 있죠. 덕분에 지금의 세상은 인간의 노동권에 대한 게 워낙 강조가 되니까, 내 노동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정받고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잘 보장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더 그런 문제들에 대한 쟁론이 커지니까 법적 규정도 까다롭고, 그거에 대한 형평성 문제도 굉장히 심각해지고, 모든 걸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의 논리에서 살다 보니 소명이라는 단어, 부르심과 소명과 천직이라는 그 소명의 의미가 좀 많이 퇴색된 거죠. 그래서 언제든지 내 삶 자체가 내 능력에 따라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소명이 내 삶이 그 자체로 봉헌될 수 있는 그런 천직을 사는 것이 사제라고 얘기를 신학생들도 하거든요. 요즘 젊은 사제들, 저도 그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많은 젊은 사제들의 생각 속에는 사제의 직도 직업군처럼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사제가 신자들하고 사목을 할 때도 내 노동의 권리, 내 쉴 권리, 내 휴가의 권리 이런 것들을 굉장히 명확하게 따지는 요즘은 MZ세대 사제들도 있거든요.
그래서 원로 신부님들이나 연배 비슷한 신부님들을 만나서 보좌 신부님들하고 살고 있는 신부님들을 만나면 매우 당혹해요. 우리가 살 때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런 생각을 젊은 신부들이 한다. 우리가 꼰대가 된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게 자연스럽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논리가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영향을 미치는 거더라고요. 저도 스스로 반성을 해보죠. 여기 성당에 와서 많은 일들을 벌이고, 또 교우들에게 영적인 프로그램이든 성당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이든 여러 아이디어를 내서 교우들에게 협조를 청하고 무슨 일을 추진할 때 항상 딜레마에 빠지는 건, 이게 나의 관심인가? 아니면 교회가 가야 될 비전인가? 이것이 신자들에게 정말로 유익한 걸까? 아니면 내가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자기 성찰을 좀 하게 돼요
이번 주부터 우리 성심홀과 논고개방 리모델링이 시작되서 성당이 좀 분주해졌죠. 당연히 하나의 사안을 놓고 사람들은 생각이 다를 수 있죠. 어떤 분들은 공간을 새롭게 꾸미는 우리 성당이 아름다워지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고, 신부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잘 되겠지? 라는 그런 믿음을 가져주는 분도 있지만, 괜한 돈들여 공간을 만드는게 의미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갖는 부도 있으시죠. 사목이란 그런 생각들에 서로가 잘 교집합을 찾아서 가장 최선의 것을 찾는 것이니까. 그런데 제가 혼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게 나의 생각을 본당에서 펼치는 내 능력이나 내 마음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그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제가 마음 편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마치 내 의지에 반하는 그런 것이 나를 나에게. 동의해 주지 않는 듯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떠오르는 거예요. 내가 갖고 있는 이 사제 직무가 내 능력에서부터 온 것일까? 아니면 하느님께 주어진 그냥 소명일까? 만일 소명이라면,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내가 그것 때문에 기분 나쁘거나 속상할 일이 없는 거죠. 그냥 그것은 또 하나의 사목의 영역 안에서 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영역이구나, 이렇게 생각도 되는 거죠. 오늘 예수님 복음에서도 형제 간의 관계에서 서로의 눈 속에 들어가 있는 티를 빼주겠다고 나섰는데, 그런데 정작 자신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걸 나무라 하시거든요. 역설적으로, 거울처럼 상대방의 모습 안에서 내 모습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부부 싸움을 많이 하는 이유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을 그 상대방의 배우자에게서 볼 때 제일 힘든 거예요.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에서도 서로가 이렇게 지내면서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모습 안에는 내 자신에게서 가장 실망스럽고 싫은 모습이 다른 사람들한테 보일 때, 굉장히 불편한 감정을 느껴요. 그래서 그것을 빼내주고 싶다는 말에는 사실 무의식 속에 내 그런 모자란 것을 숨기면서, 때로는 치유받고 싶어하는 욕망도 그 안에 들어가 있거든요. 다 비슷한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은 우리가 하느님께 부르심 받고 살아가는 우리 본당 교우들의 소명들도, 우리 각자가 가진 정말 좋은 은사들이 있는데, 그 은사들을 서로가 잘 격려해주고 끌어주고, 또 때로는 교정해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들이 서로서로 잘 어우러질 때, 우리가 진정한 교회 공동체가 성장하는 거거든요.
성장에는 성장통이 필요해요. 아픔이 필요하다. 내 마음 안에 있는. 그런 여러 갈등들이 생길 때, 한 번은 '이건 하느님께서 나를 되돌아보라는 뜻이구나.'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내 개인적인 욕심과 능력에서 온 것인지, 정말 하느님의 그런 마음으로부터 내가 진솔하게 살고 있는 것인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아멘!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
첫댓글 하느님께 부르심 받고 살아가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