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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성소 주일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입니다. 성소(聖召)란, 신앙인들이 살아갈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성소는 다양한데, 오늘은 그중에서 특별히 사제직과 수도 생활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제와 수도자는 교회의 삶과 사명에 있어 근본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서구 유럽은 우리보다 일찍 성소자 수의 감소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비오 12세 교황(1939~1958 재위)은 교황 권고 Menti Nostrae[멘티 노스트레]를 통해 사제 지원자의 감소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했습니다. 이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습니다: “교회가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언제나 필요한 사제들을 가지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가능한 다른 모든 방법으로 다양하게 협력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임을 그리스도의 모든 백성에게 가르쳐야 한다”(「사제품」 11항). 성 바오로 6세 교황(1963~1978 재위)은 이 교령을 준비하던 1964년, 부활 제3주일을 성소 주일로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1969년 전례력이 개정되어 1970년부터는 지금처럼 부활 제4주일에 성소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성소 주일은 우리 교회 전체가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기도와 활동으로 협력해야 함을 자각하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성소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얻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고, 성소 육성의 첫 자리인 가정과 본당에서부터 꾸준한 관심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점도 일깨워주었습니다. 한 공동체가 지니는 활력은 사제와 수도자의 배출로 가늠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젊은이가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 교구의 성소자가 풍부해지기를 희망합니다.
[가톨릭 신학12]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며” 2: 참으로 사람이신 그리스도
동정녀로부터의 탄생 사화는 마르코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두 복음서가 이 사화를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고백하듯이, 사실 이 두 복음서의 의도도 다르지는 않습니다. 두 복음서 모두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1)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세례 사화에서, 하늘로부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이 들렸다고 전합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형태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 그리스도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 아버지 품 안에 계신 외아드님,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선언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네 복음서 모두, 방식은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합니다.
한편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은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보다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니케아신경(325년)에 근거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381년)입니다. 그런데 니케아신경에는 단순하게 “몸을 취하시고 인간이 되셨으며”라고 나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이것을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라고 더 풍요롭게 표현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이니 표현이 추가된 것은 전혀 문제가 없지만, 왜 그랬을까요?
초대교회 때부터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인간이심을 부정하는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예수님께서 참으로 ‘역사’ 안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사셨음을 강조하기 위해 구체적인 표현을 추가합니다. 이를테면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묻히셨으며”, 등등입니다. 그 추가된 것 중 하나가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입니다. 이 표현들은 실제 사람 이름을 언급하거나 사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묻히셨으며’라는 표현처럼 실제로 인간의 몸을 가지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으며, 비록 죄를 짓지 않으셨지만, 인간 삶의 모든 조건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 참 인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은,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동시에 참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음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7)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14.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516항)
신앙에 대한 관심과 노력 절실한 시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앙인이라고 하면, 세례받는 그날부터 모든 의문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진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방황하고 똑같이 괴로워합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제 방황과 괴로움을 기억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엔도 슈샤쿠 「나의 예수」)
신앙생활 어떠십니까?
신앙생활에 대해 이야기 나눠 볼까요? 독자분들은 신앙생활 잘하고 계십니까? 세례 때 뜨거웠던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살고 계신가요? 아니면 반대로 너무 바빠서 성당도 못 가고 기도할 시간도 없이 지내시는지요? 심지어 요즘 세상에 가톨릭신자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신앙의 위기나 방황을 겪지는 않는지요?
만일 전자라면 세상사 새옹지마라 하듯 언젠가 인생의 어두운 밤도 찾아올 수 있으니 안이한 마음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을 더 닦으시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후자라면 우리 삶이 사춘기가 있듯 그런 과정도 있을 수 있고 오히려 위기의 시간을 통해서도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전자든 후자든 신앙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냉정하게 말해, 요즘은 신앙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많고, 그래서 신앙을 위한 활동이 우리 모두에게 적다고 진단됩니다. 성당, 기도, 교리, 성경 읽기보다 ‘유튜브, 먹방, 스포츠와 연애 동영상, 해외여행, 맛집’에 대한 관심이 더 많습니다. 요컨대 신앙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고 따라서 신앙을 진지하게 여기는 삶의 태도와 신앙을 위한 노력들이 시급해 보입니다.
사회교리 해설 글에서 신앙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회교리 문헌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583개의 항으로 이뤄진 「간추린 사회교리」에도 신앙과 믿음이라는 단어가 88회나 등장합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단순히 사회에 대한 지식이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사회교리는 신앙의 빛을 받은 지식, 신앙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지식(Knowledge enlightened by faith)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75항)
가장 근원적인 힘이자 은총인 신앙
사회에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를 보며 저마다의 생각과 감정을 토론합니다. TV에서 정치 관련 이슈가 나오면 전문가처럼 분석하고 견해를 설파합니다. 그래서 “정치 얘기 그만하시죠!”라며 주위에서 자중을 요청합니다. 누구나 의견은 피력할 수 있으나 아쉬운 것은 신앙의 관점이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신앙은 하느님의 뜻과 가르침이라는 핵심적 의미부터 용서, 화해, 이웃사랑과 형제애, 친절과 배려, 경청과 존중 같은 신앙의 열매에까지 확장됩니다.
사회와 세상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실망스러운 일, 숨 막히는 경쟁, 갈등과 분열도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간직해야만 합니다. 왜입니까? 참된 신앙은 인간을 살리는 힘이며, 공동체의 분열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참된 신앙을 통해서만 인간과 사회가 가야 할 길을 잃지 않으며, 인간이 참다운 인간이게 하는 가르침과 힘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삶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평화로 채워 준다.”(「간추린 사회교리」 516항)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14. 여섯째 계명 ④ (「가톨릭교회 교리서」 2360~2400항)
혼인의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 삼위일체 사랑에 참여하는 것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니까 저렇게 고생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었는데, 시인도 어머니가 되어 보니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리서는 부부 관계를 하느님 사랑의 본성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당신 사랑의 신비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를 당신 모습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그 관계 안에서 당신 사랑과 일치의 소명에 참여하도록 섭리하셨다는 것입니다.(2331)
따라서 부부 생활의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 삼위일체 사랑을 깨닫고 그 본성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교리서는 부부의 사랑이 결국에는 “타인과 친교를 이루는 능력”(2332), 곧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으로 확장됨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혼인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육체를 통해 하느님의 너그러움과 풍요로움을 본받아야 합니다.”(2335)
그렇다면 교회는 혼인의 어떤 면에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깨닫게 된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부부 일치와 자녀 출산입니다.
“부부의 육체 결합으로 혼인의 두 가지 목적, 곧 부부 자신들의 선익과 생명의 전달이 실현된다”(2363)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먼저 부부는 혼인을 통해 “인격적인 합의로 맺은 결코 철회할 수 없는 계약”(2364)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부부의 신의는 약속을 항구하게 지킴으로써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2365) 성부께서는 아드님께 성령을 한량없이 베푸시고(요한 3,34 참조), 아드님께서는 그런 아버지께 순종하여 당신의 피 흘림으로써 교회라는 자녀들을 탄생시키셨습니다. 이런 의미로 “교회는 ‘모든 혼인 행위는 그 자체로 인간 생명의 출산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가르칩니다.”(2366) 교회 자체가 “십자가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온 교회의 놀라운 성사”(766)로 태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전해줄 소명을 받고 있는 부부는 하느님의 창조 능력과 부성(父性)에 참여하는 것입니다.”(2367) 이처럼 부부는 자기 증여의 계약을 통한 일치, 또 새 생명의 창조에 협력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마찬가지로 간음이나 사음, 혹은 이혼이나 피임, 그 밖의 모든 남녀 관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관해서도 삼위일체 신비의 모델에 비추어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예를 들면 피임이나 인공수정 등에 관한 문제에서도 자녀 출산을 위한 관계 안에 어떠한 제삼자의 개입이나 부부의 분리를 유발하는 기술의 도입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합니다.(2375-2377 참조) 그 이유는 성부와 성자의 사이에 성령의 계약 외에는 어떤 제삼자도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혼이나 일부다처제, 결혼을 미리 시험해본다는 식의 관계는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본질상 용납될 수 없습니다.(2382-2391 참조) 하느님 안에는 그러한 모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부부 공동체는 자기 구원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사랑의 시스템을 하느님 본성에 참여시키기 위한 구원계획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신의를 지킴과 생명 전달의 두 소명을 완수함으로써 하느님 창조의 의의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2369 참조)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부활초(candela paschalis)
부활 시기 미사 중에는 독서대 옆에 부활초를 켭니다. 파스카 성야 때 축복된 부활초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초는 벌들의 밀랍(蜜蠟)으로 만들어지는데, 예부터 벌은 동정성을 지닌 창조물로 여겨졌고, 벌에게서 얻은 밀랍은 동정 잉태의 결실 곧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초에 붙여진 불은 어둠을 밝히시는 그리스도의 빛을 가리킬뿐더러,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비추며 앞장섰던 불기둥(탈출 13,21.22; 14,24)을 떠올려줍니다. 이러한 내용은 파스카 성야 ‘부활 찬송’(Exsultet)에서 장엄하게 선포됩니다: “이 밤에 불기둥의 빛으로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셨나이다.” “거룩한 교회는 벌들이 만든 이 초를 봉사자의 손으로 장엄하게 바치며 아버지께 이 제사를 봉헌하나이다.”
부활초에는 십자가가 새겨지고, 십자가 위에는 그리스 문자의 첫 글자인 알파(Α)가, 아래에는 마지막 글자인 오메가(Ω)가 적힙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나뉜 네 공간에는 그해의 연도가 표시됩니다. 또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다섯 상처를 나타내는 다섯 개의 붉은 향 덩이가 꽂힙니다.
사제가 축복한 새 불꽃을 부활초에 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제(또는 부제)는 부활초를 들고 행렬하며 “그리스도 우리의 빛”을 세 번 노래하는데, 두 번째 노래한 다음에는 부활초에서 불을 당겨 모든 신자에게 전달합니다. 파스카 성야 미사 중 세례성사가 거행되는 경우엔, 세례 때 사용할 물에 부활초를 담그며 세례 수를 축복합니다. 또한 세례 서약 갱신 예식 때는 다시 한번 부활초의 불을 붙여 모든 신자에게 전달합니다.
부활초는 부활 시기, 곧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강림 대축일까지 미사와 성무일도 등 전례 때마다 밝혀집니다. 그리고 부활 시기가 끝나면 적절한 장소에 보관되다 세례성사와 장례미사 때 다시 사용됩니다. 이는 부활초가 새로 태어나는 이의 영적 생명과, 고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학11]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며” 1: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는 먼저 그분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생물학적 기본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고백은 어떤 분들에게는 걸림돌일 수도 있겠고, 어떤 분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니 불가능할 것이 무엇이겠냐 싶어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 이 내용은 마태오복음(1,18-25)과 루카복음(2,1-7)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데다, 아마도 그 출처가 성모님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것에 대해 신학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당연해 보이는 것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생각지 못한 더 깊고 중요한 진리를 깨닫기도 합니다. 아이작 뉴턴이 사과가 왜 아래로 떨어지는지 질문하지 않았다면 지구에 중력이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더 늦게 (어쨌든 누군가는 또 질문했을 테니까요) 알려졌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누군가에는 당연해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은,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분’에 대한 신앙고백에 대해서도 한 번쯤 질문해도 될 것 같습니다.
특이한 것은 마르코복음과 요한복음은 이 내용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은 왜 이 이야기를 전하는 걸까요? 단순히 사실이기 때문일까요?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에는 ‘동정녀에게서의 예수님 탄생’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갈라 4,4에 매우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1세기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낳고 이름을 주는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의 이 선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기술하는 것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이 족보에서 아들 탄생의 주체는 항상 남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이 틀이 깨집니다. “야곱은 요셉을 낳았는데, 그의 약혼자는 마리아였고 그로부터 예수가 태어났다.”(마태 1,16) 예수님의 탄생은 여성인 마리아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적 사랑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으로, 즉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에 대한 신앙은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이심, 곧 그분의 신성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수난과 돌아가심,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부활 후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성령께서 사실은 예수님 삶의 모든 순간, 탄생에서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 관여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분”에 대한 고백은 제자들의 이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13.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132항)
“노동자는 숫자가 아닌 사람” 관심과 형제애 지녀야
“사람이 진정한 재산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노동 공동체도, 기업도, 경제도 없습니다. 일터의 안전은 인적 자원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인적 자원은 하느님의 눈과 선한 기업가의 눈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합법성은 사람이라는 최고의 자산을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전한 노동은 모든 이로 하여금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벌어 자기 자신을 최고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가 노동의 존엄을 더 챙길수록, 노동의 질과 아름다움이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2022년 1월 20일자 바티칸뉴스, 프란치스코 교황 “노동자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유연한 노동?
최근 정부의 노동시간 정책이 논란입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주 52시간 근무제도를(51조 2항) 이른바 ‘주 69시간’으로 개편하자는 내용인데, 이는 근무 총량은 유지하되 일하는 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해서 노사의 이익과 생산성을 향상하자는 의도로 보입니다. 일할 때 바짝 일하고 쉴 때 쉬자,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자는 취지인 셈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거나,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업무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분들에게는 좋은 제도일 겁니다. 더 많이 일하는 것이 기회가 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재계는 기업활동 촉진을 위해 과도한 노동규제 철폐와 노동시간 유연화를 지속적으로 요청해 왔습니다. 현 정부가 자유와 공정을 공약으로 내세웠듯 이번 정책도 노동과 경제 분야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규제 완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 내일 쉬겠습니다, 가능하세요?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요? 일선 사업장에서 납품기한, 공사기한, 프로젝트 완성에 매이다 보면 일과 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포괄임금제가 대부분인 한국 상황에서 휴식이 보장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에 쫓겨 연차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를 정부와 고용노동부가 관리감독을 할 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무엇보다 한 주에 69시간을 일하고 차주에 쉰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일하면 병이 날 겁니다.
그래서 장시간 노동보다 더 무서운 게 불규칙 노동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출산과 육아가 가능할까요? 요컨대, 개인과 직종의 차이는 있겠으나 많은 경우 정당한 소득과 휴가가 보장되기 어려울 확률이 크며 건강과 생명이 침해될 것이란 우려가 많습니다.
정부의 역할, 우리의 역할
정부는 문제점들을 개선해서 노동시간 유연화를 실행한다고 합니다. 여러 문제를 풀어야 하고 제도 도입에 앞서 노사합의도 선행돼야 합니다. 기업을 포함해 일하는 사람들과 다른 여러 관점들도 수렴해야 합니다. 또한 국민들을 정치적 소비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며 소통하고 정말로 필요한 것을 마련할 수 있는 정부가 돼야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제는 정부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관심과 형제애가 그것입니다. 동료가 정당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가, 마음의 곤궁함은 없는가, 나는 그에게 감사할 것이 무엇인가, 이런 마음들은 제도를 완성하고 선용하게 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우리의 품격 있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이웃을 어떠한 예외도 없이 또 하나의 자신으로 여겨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웃의 생활을 고려하여 그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수단들을 보살펴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132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