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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엘 이후
창 33: 1-11
야곱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형 에서 때문입니다. 야곱이 집을 떠나게 된 이유가 에서 때문입니다. 에서가 그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눈치챈 어머니 리브가가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을 수 없다하여 야곱을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시킵니다. 그러면서 에서의 분노가 사그러 지면 사람을 보내어 돌아오게 하겠다고 했는데 20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입니다. 이것은 아직 에서의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할수 밖에 없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은 종들을 보내어 형 에서에게 야곱이 돌아옵을 알립니다. 그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 종들의 보고에 의하면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야곱을 맞으러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야곱은 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야곱의 공격에 대비해서 자식과 재산을 세떼로 나누고 거리를 멀리 띄워 얍복강을 건너 보냅니다. 야곱은 모든 사람들과 재산들을 내어보내고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게되자 얍복강에 혼자 남게됩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밤, 외로운 밤, 고독한 밤을 맞게 된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방법이 무색해지고 인간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나고 모든 소망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어찌할바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찾아주십니다. 밤새도록 그와 씨름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에게만 메달립니다. 당신이 축복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놓지 않겠다고 하면서 끈질기게 메달렸습니다. 결국 그날 밤에 야곱은 육체적인 힘의 상징인 환도뼈가 부러집니다. 그는 자신의 환도뼈가 뿌러지는 아픔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제는 야곱이라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근본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놀라운 은혜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은혜의 체험이후 야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람의 스타일이 변했을까요 안 변했을까요?
오늘 33:1절에 보면 그가 하나님을 체험하기 이전에 그를 공포와 두려움으로 몰아넣었던 문제가 그대로 다시 등장합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오늘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게 체험한 야곱이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야곱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브니엘 사건 이전의 야곱과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달라진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남자가 한 여자만 만나도 그의 인생이 변하는데 심지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도 그대로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큰 은혜체험을 하고 난 뒤에도 그의 모습에는 크게 달라진 모습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은혜 체험을 했다면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정상이 아닙니까? 이렇게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그러한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리고 맙니다. 야곱의 행동은 실망을 안겨줍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했다고 하면서도 그의 모습은 그의 삶의 스타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뭔가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는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1. 에서를 만나는 야곱
에서를 만나러 가는 야곱은 이런 조처를 취합니다. 그 여종과 자식들은 최전방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그 다음에 둡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두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혹시 에서를 만나는 순간 일이 잘못되어 자신과 가족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자기가 죽더라고 가족들은 피할수 있도록 자신에게 중요한 순서대로 배치한것입니다. 이것은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가졌던 야곱의 생각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기 이전과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물론 야곱이 아내와 자식들을 이런 방식으로 배치한데에는 학자들 마다 다른 해석을 취합니다. 칼빈은 야곱이 도망치기 위해서 이렇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에서에게 점점 더 중요한 인물들을 만나게 함으로써 그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런방식으로 대형을 취한 것은 혹시라도 잘못되어 유혈참사가 일어나게 된다면 가족의 일부를 건질 때 아마 이런순으로 건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직도 야곱의 마음속에 극복되지 못한 두려움이란 불신앙의 흔적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그를 만나주셨습니까? 얍복강을 건너지 전에 두그룹의 군대를 보내여 만나게 함으로 그를 보호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생명을 보존받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생명과 가족을 확실히 보호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두려움에 떨면서 어떤 인간적인 시도를 할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져다 주시는 승리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가 보장되어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나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7-58). 하나님은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을 항상 제거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능히 이길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두려워 떨면서 어떤 시도를 할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나아갔어야 했습니다.
에서가 다가오자 야곱은 맨 앞장서서 간교하게 굴욕적인 인사치례를 합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무려 일곱반이나 몸을 땅에 굽혀 절을 합니다. 이것은 형제사이에 행하는 예의가 아닙니다. 몸을 일곱 번 굽혀서 절하는 경우는 그 당시 왕을 맞이하는 신하의 자세이거나 재판받는 죄수가 재판장의 호의를 바라는 마음으로 경의를 표하는 자세입니다. 기원전 14세기에 아마르나 서신에 보면 작은 도시의 영주들이 바로앞에 나아갈 때 일곱 번 땅에 엎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신하로서 왕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법정에 재판으로 받으러 나가는 완전히 죄수의 모습과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야곱이 이런 굴욕적인 상황에 처해야 합니까? 무엇을 잘못했길래에서 앞에서 마치 재판받는 죄수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야곱의 행동은 단순히 20년전에 장자권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와 형을 속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짜원인은 야곱의 불신앙입니다. 에서앞에서 야곱의 신앙은 악세사리에 불가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도 에서앞에서는 굴욕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체험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에서 앞에서 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야곱의 잘못된 태도 때문입니다. 에서를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크게 본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 절을 한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속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하는 에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제쳐버리고 하나님의 능력도 보잘 것 없이 보이게 하는 에서는 무엇입니까?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에서에게 절할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에서가 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고 크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그러나 야곱은 하나님보다 에서를 크게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와 약속보다도 에서를 더 강하게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불신앙은 없는지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크게 체험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제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가장크신분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과 임재와 약속을 누리는 것입니다.
2. 야곱을 맞이하는에서
야곱의 모습을 발견한 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야곱을 보자 에서는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압맞추고 피차 웁니다.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에서는 칼로서 야곱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에게 "도망갈때는 언제고 지금 뻔뻔스럽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보자 달려와서 그냥 얼싸안고 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신것입니다. 에서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악한 생각을 버리게 하신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악한 본성을 일시적으로 억제해서 야곱을 해치지 못하도록 선한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서 에서는 한계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려고 해도 에서 때문에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에서는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었고, 넘을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뛰어넘지 못해 20년동안 종살이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에도 이삭은 야곱에게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려웠던 넘을 수 없는 벽을 한순간에 뛰어 넘게 하신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야곱이 일곱 번 절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완악한 에서의 마음을 돌린것든 야곱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하기 위해 내가 어떤일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나를 내려놓는 일이고 하나님이 하신 것을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속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충만케 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일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서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에서를 주라칭합니다. "5절에 주의 종이, 8절에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합니다. 10절에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13절에 내주도 아시거니와" 야곱은 에서를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그 반면에 에서는 야곱을 9절에 보면 "내 동생아"그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야곱이 세운 인간적인 계획이 전혀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서를 굴복시켰을 뿐 아니라 에서의 마음중심까지도 변화시켜 놓은신 것입니다.
기도제목
1. 야곱의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신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언제 어떻게 체험했는지를 소개합시다. 이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나의 불신앙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회개합시다.
3. 나를 어렵게 만들고 우리의 신앙을 무력하게 만드는 에서는 무엇입니까? 그 에서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합시다. 아니 이것을 극복하고 이길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아니 에서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고 에서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의존하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묵상
1. 나는 언제 어떻게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때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나의 불신앙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3. 나를 어렵게 만들고 우리의 신앙을 무력하게 만드는 에서는 무엇입니까?
회해의 만남(광복절)
창 33: 1-11
오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얻은 지 5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올해
의 광복절이 더욱 설레는 것은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것 때문입니다. 각각 100명씩의
이산가족 명단을 이미 주고받았습니다. 남북공동성명 이후 그간 끊겼던 대화의 통로도 활짝
열렸습니다. 이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던 것입니까? 세계의 이목도 한반도를 주목하고 있
습니다.
1천만이 넘는 남북의 이산가족이 100명씩 200명이 남과 북을 넘나들면서 서로의 가족들을
상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만남은 계속되어 모든 이산 가족이 만나
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즈음 성경의 형제 상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
로 에서와 야곱의 만남입니다. 이 형제의 만남이 광복절을 맞아 이산 가족을 만날 일에 들
떠 있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형제의 헤어짐
에서와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 부부의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라이벌
의식 속에 살았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싸우며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장자로 태어나지
못한데 불만을 가지고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뺏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
다. 야곱은 사냥에서 돌아와 배고픔을 호소하는 에서에게 장자권을 넘겨줄 것을 제안합니다.
판 한 그릇과 떡 몇 조각에 눈이 먼 에서는 결국 그의 장자 명분을 아우에게 넘겨줍니다.
(창25:29-34)
에서는 사냥꾼인데 그가 사냥한 짐승의 요리를 이삭이 좋아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에서에
게 짐승을 사냥하여 맛있는 요리를 해올 것을 부탁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
했기 때문에 그것을 몰래 야곱에게 대신하게 했습니다. 야곱은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에서
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것을 나중에 안 에서는 노발대발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야곱을 죽이려고 했고 야곱은 외삼촌의 집에 피신해 갔습니다. 20년 동안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겪으면서도 외삼촌을 도와 일했습니다. 나중에 부자(富者)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에서가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곱은 변화된 모습으로 에
서 앞에 나타납니다. 바로 오늘 성경의 말씀이 에서를 만나는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을 지켜보면서 에서와 야곱의 만남을 떠올리는 것은 그 상황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헤어졌던 형제처럼, 우리 민족은 원하지 않았지만 헤
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형제의 헤어짐이 한 사람의 분에 넘치는 욕심과 다른 이의 그것을
용서치 못하는 미움이라면 우리나라의 이산의 고통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서 헤
어졌던 형제가 화해하고 만나듯 우리나라 이산가족의 만남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형제의 만남
오랜 세월 남의집살이에 힘겨웠던 야곱이었지만 자나깨나 형 생각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지금의 우리 현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엔 아직도 형은 진노한 모습
의 형입니다. 야곱은 그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진노를 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1. 주도면밀한 계획
(창32:3-23)에 보면 야곱이 형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계획을 잘 세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기 전에 사자(使者)들을 먼저 보내 형의 동태를 살핍니다. 그러나 보고는 절망입니
다. 형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야곱을 향하여 살기 등등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이때 야곱은 제 2단계의 전략을 짭니다. 두 무리로 나누어 진행하도록 하고, 에서에게 선물
을 보내 그의 마음을 움직이려 합니다. 선물이 많은 것도 많은 것이려니와 몇 번씩 나누어
가져가게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정성을 다한 예물을 준비합니다. 암염소 200마리, 숫
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약대 30마리,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
마리, 어린 나귀 10마리를 선물로 보냅니다. 받기를 거절하는 에서에게 간청하여 결국 받게
합니다.
(잠18:16)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데 선물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이 모든
일의 성취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노력을 안 하는 것을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2. 회개의 기도
(창32:24-32)에서 야곱은 얍복나루에서 밤을 세워 씨름합니다. 그것은 곧 기도입니다. 20년
이 지난 그대까지도 형 에서는 아우 야곱의 목숨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에서 앞에 서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얍복나루만 건너면 형 에서의 영토입니다.
야곱은 형의 땅에 들어서기 전에 해결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밤새우는 기도로 나타
납니다. 물론 (창32:9-12)에서 벌써 기도로 준비했습니다. 기도는 문제해결의 열쇠입니다.
지금까지 형을 속이고 자기 잇속만을 위해 살아왔던 과거를 청산하는 기도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결국 그는 그 기도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간사한 야
곱은 급기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됩니다. 변한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얍복
나루를 건넙니다.
지금 이산 가족이 만난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변하지 않은 상태로 만나 봐야 아무 소용이 없
습니다. 그냥 얼굴 한 번 보는 것으로 그칠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와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눈물을 누구에게 기대하겠습니까? 남북한 정치인들에게 입니까? 지금
설레는 가슴을 안고 가족 만날 꿈에 부푼 이들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민족과 나라를 책임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와 나라, 민족의 파수꾼입니다.(겔33:8) 그
간 나팔을 제대로 불지 못했음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3. 변화된 믿음
기도를 마친 야곱은 다리를 저는 상태이지만 믿음만은 예전의 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400명
의 군대를 이끌고 마주 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회개의 기도는 그
를 변하게 했습니다. 형 앞에서 죽을까 두려워 떨던 그가 이제는 "죽으면 죽으리라"(에4:16)
하는 생각으로 변했습니다.
(창32: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자신이 기도했던 내용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막9:23)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
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란 말씀은 이론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이론이
던 야곱이 얍복나루의 회개와 기도응답 후에 실제가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못할 짓을 했던 과거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그 회개
를 바탕으로 한 신뢰구축, 즉 변화된 믿음입니다. 이 만남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이 믿음 갖
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무너지면 우리의 만남은 헛것입니다.
화해의 만남
(4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들의 만남은 화해의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간 자신이 형의 권한을 가졌다
고 뻐기던 야곱은 그 변화된 모습 그대로 형에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3절)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형과 아우 사이
에 무슨 격식이 있겠습니까?
이번 우리 이산가족의 만남이 바로 이런 화해의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형제애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이익과 정치인들의 인기를 위한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노력과 준비 못지 않게 그간 미움과 저주에 대한 회개가 있고, 진정한 형제애로
거듭나는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아픔을 씻고 진
정 부둥켜안는 형제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이 일을 위한 역사의 부름 앞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보고 하라기에 앞서 여러분
이 바로 이런 화해의 만남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하나님
창 33: 1-11
들어가는 말)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성공을 이룹니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결혼을 못한 사람이 결혼을 합니다. 혹은 또 직장에서 승진을 하거나, 큰 돈을 벌거나 큰 집으로 이사하는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동안 바란 일이기에 모든 것이 행복할 것 같죠! 그런데 성공을 했지만 그것이 가져다 주는 환경 변화가 때문에 스트레스가 찾아 오기도합니다. 이런 것을 성공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성공한 연예인이 마약에 손을 대는 이유도 이런 증세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등장하는 야곱에게 성공의 후유증이 찾아옵니다. 야곱에게는 그동안 고향을 떠나서 21년간 정신없이 살아왔습니다. 형을 속인일 때문에 타향만리 외삼촌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외삼촌은 아무리 친족이라도 돈에 인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고 야곱보다 더 사기꾼 같은 외삼촌에서 온갖 어려운 일은 당하게 되지요! 레아와 라헬 두 자매의 경쟁하는 사이에 아들을 11명을 두고 딸 디나를 낳아서 12명의 자녀를 거느리게 됩니다. 바울의 말처럼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나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 한 여자에 대한 편애와 여인사이에서 질투가 일어나지만 결과적으로는 야곱을 통하여 12지파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때때로 힘겨운 시간일 찌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시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14년간은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장가가는 시간이였다면, 자기의 재산 증식을 위해서 7년을 일을 해서 노비와 가축을 두 떼나 이룹니다. 이 수치를 대략 따져 봐도 염소와 양 소와 나귀가 이 최소한 천 마리는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21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밧단아람이라는 곳에 올 때는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이제는 타향에 와서 이룬 성공입니다. 그때에 주님의 부르심을 듣게 됩니다. 우리도 정신없이 살아가는데 그 속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1. 고향으로 돌아가라
먼저는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31장 3절에 “여호와께서 야곱에세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고향은 어떤 곳입니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자기의 성공을 가장 인정받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고향입니다. 그향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면 ex)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였던 워싱턴은 종신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고향 버지니아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한 말이 “나를 고향으로 데려다줘 나는 남부에서 나고 남부에서 살고 남부에서 일했다. 나는 남부에서 죽고 싶으며 거기에 매장되고 싶다”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그가 이미 떠나갈 때 다시고향으로 오게 될 것은 벧엘에서 사닥다리가운데 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성공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성공은 성공의 후유증을 반드시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을 하기위해서 가족이나 믿음, 나의 정체감을 포기해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찾아갔지만 그것 마져도 신기루처럼 날라가 버리는 곳입니다. 성공이라고 말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의 문제가 찾아옵니다.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가정의 자녀가 아내가 내게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믿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 것은 나의 성공을 사랑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세상적인 성공은 하나님 나라에게 환전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우리가 세상에서 한일을 가지고 환전을 해서 송금을 해야 하는 데 하나님 나라의 은행은 환전이 안 됩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20절에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뜷지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리라”
바울은 그것을 고린도전서 3장에서 공력, 성과라고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믿음의 터전에서 선택한 재료로 건축물을 세웁니다. 어떤이는 금이나 은 혹은 보석으로 건축물을 짓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음의 터전에 나무나 줄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게 되는 됩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행한 일대로 보응을 받는데 불에 의해서 그것들이 불타게 됩니다. 그때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대로 공력이 남지만 풀이나 짚과 같은 공력은 불에 의해서 다 태워지고 그거 겨우 구원만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성공은 어떤 성공입니까? 그것은 믿음 안에서의 성공이고, 교회 안에서의 성공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성공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성공이 진짜성공입니다. 따라서 합니다. 하나님 앞의 성공이 진짜성공이다. 바울을 보시면 그는 공부도 많이 하고 바리새파였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 진리를 깨닫고 나서 이전의 것이 다 배설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였고, 유대인중의 유대인이고 학식과 지혜가 풍부한 줄 알았는데 주님 앞에서 살지 못한 그 시간을 죄인주의 괴수라고 말을 합니다.
ex) 하나님의 성공은 세상의 기준과는 많이도 다릅니다. 얼마 전에 저희 아들이 할머니 집을 다녀오느라고 저희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탔습니다. 그랬더니 개인택시아저씨가 전화를 받고 막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처제가 있는데 홍대를 나와서 학원을 해서 크게 돈도 잘 벌었는데 자기 동서를 만나서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면서 성도는 20-30명 모이는 데 쌀을 붙여주었는데 오래 묵은 살이라 냄새가 나는데도 그걸 고맙다고 한다고, 그게 무슨 짓이냐고 그래서 저희 어머니께서 그래도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냐고 그랬더니 이분이 화를 더 내더라는 겁니다. ‘아무리 목회를 해도 아이들도 권리가 있다 여름이 되서 수박한통도 못먹고 학원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게 무슨 바른 목회냐’고 도리어 화를 내셔서 아무소리 안하고 저희아들은 귀를 막고 택시를 탔다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이야기를 듣고 제가 다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 저는 목회를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비록 힘이 드는 때가 있어도 목회자가 된 것이 참 행복 합니다”
이전에 어느 선교사님이 인도에서 귀국을 할 때 일입니다. 자신은 늙고 병들어서 쓸쓸하게 귀국을 하는데, 배에서 내리자 브라스 밴드가 울려 퍼지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인가 보니까? 대통령이 그 배를 이용해서 방문지를 다녀오는 길이더랍니다. 많은 사람의 깃발과 환호성가운데 입장을 하는데 자기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던지 “하나님 나는 도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평생 일을 했지만 이제는 늘고 병든 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합니다.” 그때 하늘가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감동을 주시는데 “아들아 네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에게 올 때 그깟 브라스 밴드가 문제가 되겠느냐 하늘의 수많은 천군과 천사를 너를 영접할 것이다” 하늘의 위로를 듣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할 수만 있다면 이 땅에서도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성공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다른 이를 도와 주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세상의 성공 잠시 지나갑니다. 손에 욺켜진 모래처럼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성공은 우리의 고향 천국에서의 성공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성공입니다. 믿음 사람들에게 검증된 성공이 진짜성공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장애물을 넘어서라
두 번째는 장애물을 넘어서라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그 뜻을 묻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실 때 '마음에 불타는 소원'으로 주십니다. 그 생각이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마음속에 더욱 견고해집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기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뜻을 실천하는데 언제나 장애물이 있습니다. 지금 야곱에게 장애가 있습니다. 야곱에게 있는 두려움은 그의 형 에서입니다. 팥죽한 그릇으로 속이고 장자권을 샀지만 여전히 그의 형님입니다. 21년이 지났지만 동생을 죽이려고 군사를 이끌고 저 건너 얍복강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실과 맞닥뜨립니다.
지금 야곱은 고향은 가야하지만 형님을 만날 자신은 없습니다. 환경적인 문제를 그를 엄습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그날 야곱은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사투를 벌입니다. 그 밤에 천사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밤새워 씨름을 하십니다. 그 시간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그가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실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지금 나에게 있는 환경은 내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나의 과거의 잘못은 내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전의 잘못을 이렇게 주님 앞에 엎드리며 간구합니다. 이와 같이 밤새워 씨름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보시고 환도뼈를 부러뜨리시고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축복을 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 너무하시다. 그 정도 열심이면 축복을 하시고 칭찬을 하셔야지 왜 환도뼈를 부러뜨리는가?
여러분 그렇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잘해 보려고 하는데 왜 그의 환도뼈를 부러뜨리실까? 어떤 면에서 환도뼈의 시험은 형과의 화해의 문제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는 환도뼈의 사건을 통해서 형의 마음을 아프게 한 한 죄의 문제가 그처럼 무섭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를 속이고 상처를 준 그 문제가 나의 환도뼈가 부러지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나의 죄의 문제와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위한 고통이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입니다.
결국 야곱의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막혔던 장애물을 돌파 하고나서야 관계가 회복이 되어집니다.
10절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오니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다” 지금 야곱은 형님 앞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가 건너온 그 땅을 바라보며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이지만 자신을 죽이려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어느 경우에서도 사람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서 영향을 주기도 내가 변화되기도 합니다. 희망은 사람사이로 흐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바울에게 다메섹에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눈이먼 바울을 위해 직가의 아나니아를 부릅니다. 이방인 고넬료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 그의 가정을 구원하기위해서 베드로를 보내어 주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지만 그것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바로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이 싫어서 피하는 태도는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나 혼자만 드리는 예배도 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신학교를 보시면 가끔 사람이 싫고 세상에 속아서 신학교에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이 다시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은 그 싫어하는 사람의 관계를 넘어서야합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한 번도 사람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과의 관계가운데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의 약함을 탓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기도하지 못하는 제자를 향해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의 약함을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을 부인을 하는 베드로를 찾아갑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다시 한번 기회를 허락해주십니다. 끝까지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삶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사람의 장애를 넘으시기 바랍니다. 미움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 회복의 현장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오는 말)
결론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야곱을 고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부르심은 터전을 이루며 살아가는 땅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돌아가 영원한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외롭게 혼자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름도 성도 몰랐던 사람들이 서로가 어깨를 부둥켜 안고 형제애를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영원히 이루어야할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 천국을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하여 천국의 예행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모습을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가 부모님을 통해형성이 되고 친구를 만나고 배우자를 만나고 믿음안에서 형제자매를 만나게 됩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사랑을 알아갑니다. 이러한 사람과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을 허락해주십니다. 그 사람이 장애물과 같이 힘겨울 때도 있지만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걸림돌이 아니라 우리의 성장을 위해 디딤돌로 보내주십니다.
오늘 만나게 하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보내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시간이 있을 때 다음이라고 늦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고 미래의 시간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을 살고 계시는 주님께서 다만 현재를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 현재를 이루기위해서 나에게 사람을 보내어 주십니다. 요한일서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현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님께서 주신 시간의 의미를 깨닫고 함께 어깨동무하며 영원한 천국으로 함께 나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