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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편 95:1~11
오늘 읽은 시편은 어느 시편 못지 않게 자기 자신과 남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합니다. 찬양은 힘있게, 사랑과 정열을 가지고 수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마음 중심에서부터 해야 합니다.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되는 대로가 아니라 정성을 들여서 해야 합니다. 열심히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까?
본문 1, 2절을 보십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영적인 즐거움은 감사와 찬미의 요소입니다. 우리가 온전하시고 복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 이 신가를 말씀하십니다.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크게 찬양을 받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무한하시고 무궁하십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완전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약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을 받을 만한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 위에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큰 권세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어떤 신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겸손한 마음과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고 찬양해야 합니다.
6절에 “보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하였습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육체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살면서 교만할 수 있는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음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감사와 감격,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찬 마음의 풍성함을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과 인자하심에 감동된 사람답게 하나님께 노래하며 찬미와 시로 즐거이 불러야 합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부르는 찬미는 생명력이 상실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될 수 없고 우리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소유는 너무나 크십니다.
5절에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하였습니다. 한 나라가 가지고 있는 영토가 넓다면 얼마나 넓습니까? 물론 우리 한국 땅은 큰 나라인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중국, 러시아에 비하면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주 전체로 볼 때 그것은 극히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온 세상과 거기 충만한 것을 다 소유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그 장중에 붙드시고 계시며, 지배하시고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땅의 깊은 곳, 그러니까 지하의 샘과 광산이 그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산들의 높은 것, 그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가령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인간 중에 가장 비천한 자, 땅의 낮은 곳과 같은데 그런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가 되어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 같은 최대의 위인도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세상 땅 위에서 볼 때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높이 비행기를 타고 몇 천 미터 올라가 보면 높은 산, 낮은 산, 높은 집, 낮은 집,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의 구별이 없이 똑같아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표준으로 보면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 따로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전에서는 높고 낮은 것이 없이 똑같은 것입니다.
오는 본문 중에 4절과 5절을 자세히 보십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이 시간, 하나님이 지으신 산과 바다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가 산에 오르면 여러 가지 면으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는 산을 통해서, 바다를 통해서 많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구원의 크신 역사와 성경에 나타나는 위대한 인물의 생활에는 산과 관계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게 하여 하나님의 지배하심을 사람에게 나타내셨으며, 아브라함은 자기의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바쳤고,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신의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이김으로 참신이신 하나님을 증거했고, 기드온은 길르앗산에서 300명의 장병을 뽑았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생각할 때도 산과 바다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팔복산이라 이름하여 거기에 조그마한 예배당을 짓고 세계 여러 나라 말로 팔복을 기록했는데, 우리 나라 말로도 쓰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조용히 기도하셨습니다. 산에 올라가셔서 변모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갈보리산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인물들이 산과 관련된 생활을 하였고, 또한 우리에게 이 산은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일찍이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 이 시인은 산을 바라볼 때 푸른 나무만 본 것이 아닙니다. 우뚝 솟은 봉우리, 기암절벽만을 바라보며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산을 바라보세요.
첫째로, 산은 조용합니다.
복잡한 도시의 소음 공해 속에 살던 우리는 산이 그립습니다. 이 산들이 언제 생겼는지 그 연수를 정확히는 몰라도, 과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수억 년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지만 산은 언제나 조용합니다.
100년도 못사는 인간들이 모이면 왜 그다지도 시끄러운지, 산을 바라보면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산은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어 인류사회에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작은 도움을 주고도 크게 떠들썩한 우리 인간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소란하던 사회에서 시달리던 우리들이 산을 찾아가면 산은 우리에게 안식을 줍니다. 떠들썩하던 마음도 조용히 가라앉혀 줍니다. 예수님도 일에 지치고 사람들에게 시달리시다가 틈만 있으면 조용한 산을 찾으셨습니다. 거기서 기도하시고 계획하시고 피곤한 심신을 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산과 같이 조용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나실 때 호적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여관의 방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들끓었지만 예수님은 조용하게 나셨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동방에서 찾아온 세 사람의 박사들 외에 누구도 몰랐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그는 조용히 나셨습니다. 자라나실 때도 그랬습니다. 그가 전도사업을 시작하실 때도 조용히 시작하셨습니다. 중환자를 고치시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셨습니다. 누가 알까봐서 오히려 조용히 피하셨습니다. 주님은 문자 그대로 온유와 겸손의 화신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가 그렇습니다. 조용한 종교입니다. 혹 어떤 사회의 사람들은 기독교가 무엇 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는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널리 선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하는 일을 잘 모릅니다. 물론 신문에 선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본연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했습니다. 소금이 맛을 내는 데 소리내지 아니합니다. 빛을 비추는 데 떠들지 아니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구제하면서, 기도하면서 소리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상을 이미 세상에서 다 받았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조용히 일하십니다. 햇빛을 조용히 비추십니다. 지구가 돌아가도 소리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할 때 “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조용한 사람이라야 일을 바로 합니다. 조용한 사람은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아니합니다. 자기의 일을 자기가 바로 합니다. 조용한 사람은 일하면서도 조용합니다. 투덜거리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조용해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용한 사람, 조용한 가정, 조용한 교회, 조용한 나라, 조용한 세계가 되기 위해 기도하십니다.
둘째로, 산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오고, 이렇게 하기를 천지창조 이래 오늘까지 계속해 왔지만, 산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있습니다. 겨울에는 흰 눈으로 옷을 입고, 여름에는 녹음 방초로 그 몸을 단장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습니다.
산을 대할 때마다 부끄러운 것은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도 쉽게 흔들리고,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심은 조변석개이란 옛 말이 옳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하면 구원함을 얻고, 다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은 우리가 건강할 때, 젊었을 때, 사업이 잘될 때 가까이 하지만, 병들고 늙어지고 실패하면 다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이 약속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낮에도, 밤에도 지켜 주십니다.
산은 변하지 않는 것의 상징입니다. 우리 나라 애국가에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고 했습니다. 동해의 물이 마를 수 없습니다. 만찬가지로 백두산이 닳아 없어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충성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도 변치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2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합니까?
셋째로, 산은 높습니다.
그러므로 오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합니다. 산 위에 오르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그래서 남산에 오릅니다. 백운대에 오릅니다. 한라산에 오릅니다. 히말라야산에 오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이사야서 40장 9절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생활입니다.
1.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후렴 :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 곳에 서게 하소서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2.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3. 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 없는 곳
기쁘고 참된 평화가 거기만 있사옵니다
4.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5. 내 주를 따라 올라가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영원한 복락 누리며 즐거이 노래 부르리
우리 모두 높은 산에 오릅시다. 마음의 슬픔, 괴롬과 죄만 있는 이 세상에서 빛나고 높은 저 곳,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산봉우리를 향해 올라가십시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 우리의 마음을 넓힙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런 편지를 했습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 6:11-13)
우리의 마음이 좁음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까? 높은 곳에 올라 우리의 마음을 넓힙시다.
그리고 바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는 보기만 해도 시원합니다. 바다에는 아름다운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바닷속의 그 풍경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수하는 사람들은 그 깊은 곳에서 내려가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광경에 도취된다고 합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면 이런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맛본 자만이 아는 세계가 신앙의 세계입니다. 높은 산에서는 이 세상을, 깊은 바다에서는 신비의 세계를 맛보게 됩니다.
바다는 무엇이라도 포용합니다. 바다에는 군함도 빠졌습니다. 돌도 빠졌습니다. 강물이 흘러 들어갑니다. 그러나 한번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빠지면 바다는 가슴이 넓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바다는 누구나 용납합니다.
바다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육지는 경계가 있어서 세계지도가 얼마나 자주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다에는 경계가 없어 어디에나 갈 수 있습니다. 바다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리 안에서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높은 산에 올라 산 같은 은혜를 받으시고, 깊은 바다에서 신령한 은혜의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종의 비밀
(시 95:1-11)
찬송 204장
시편 95편은 천지말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로 성전예배에 사용된 감사예배시이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신정시로 지금도 안식일 예배에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내용은 먼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초청과 찬양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에 과거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출애굽 1세대의 비극적 역사적 회고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 말씀 기억하면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완악한 마음 다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순종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