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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3月 ☞소통과 합력의 달☜
고후8:1-24절) 영적 평균
자녀를 여러 명 둔 가정에서 자녀들이 다 출가하고, 나머지 어머니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보따리장수처럼 물건을 머리에 이고 나르기 시작합니다.
좀 여유가 있는 아들과 딸의 집에 가면, 못사는 아들과 딸이 생각나서 남은 음식과 물건을 보따리에 싸서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새벽같이 집을 나서 못사는 아들과 딸의 집을 찾아가 그 보따리를 풀어 놓습니다.
그러나 잘사는 집의 며느리와 딸은 어머니가 보따리를 챙겨 가지고 형편이 어려운 언니나 동생 집에 갖다 주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들이 어렵게 사는 것은 순전히 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머니가 쌀이나 반찬, 양념 등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왔다 갔다 하다가 다칠 수도 있고, 일부러 사서 고생하는 것이 보기 싫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려도 어머니는 자녀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자식생각만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가난하게 살다가 예수를 믿고 잘살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사치(奢侈)를 한다거나 낭비(浪費)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것들을 절약해 살고, 가능하면, 미래에 대비해 저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절약하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인색하게 굴 때도 있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삶을 살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 지성(知性)을 갖게 되면서 입으로만 믿고, 실제로 그 자신은 헌금도 하지 않고, 몸으로 헌신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성적(知性的)인 것을 좋아하고, 토론(討論)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헌금을 한다거나 몸으로 봉사하는데, 아주 인색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 마게도냐의 여러 교회와 고린도 교회는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라든지 베뢰아 교회, 빌립보 교회 등 마게도냐 교회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고 헌금했습니다.
반면 고린도 교회는 말이나 지식, 믿음은 엄청난 것 같지만. 헌금에 있어서는 지지부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에게 8:24절)...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고 하면서 이미 시작한 헌금을 끝마치기를 권면합니다.
Ⅰ.가난 가운데 넘치는 사랑
하나님은 신(神)이시기에 돈이나 물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우리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헌금하라*고 강요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한편 사람은 희한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시간이나 돈을 투자한 대상에 대해서는 무한정의 애착을 갖지만, 아무리 소중한 것일지라도 거저 주어지면, 처음에는 고마워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관심해지고,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6:21절)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려운 중에 돈을 주고 산 물건이나, 집(아파트)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과 애착을 가집니다. 즉 자신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어렵게 구한 물건에 대해선 애착을 가지고 잘 버리지도 않습니다.
반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남이 거저 주거나 너무 쉽게 얻게 된 것은 무가치(無價値)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배당을 지어주시고, 헌금도 하지 말라*고 하시면, 처음에는 너무 감사하고 좋아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음속에서부터 교회와 멀러지고, 집(아파트)을 사거나, 자녀들 공부하는데, 돈을 다 쓰고, 나중에는 *신앙까지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목회자나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례비(私禮費) 없이 무보수(無報酬)로 일하는 경우, 처음에는 구원받은 감격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봉사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거나 더 급한 다른 일이 생기면, 슬슬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사람들은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서 *돈이 되는 일을 쫓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보수(報酬)나 사례(私禮)를 주는 것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끈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마다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게 하셨고, 십일조(十一條)를 바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그 돈을 가지고 *이방신(異邦神)을 찾아가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게도냐로 갔을 때, 사도 바울은 거기서 심한 우울증 증세로 고통 받기도하고, 육체적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곧 마게도냐 교인들이 환난과 궁핍함 중에서도 크게 기뻐하고, 봉사하면서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해 헌금까지 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8:1-2절)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사실 교회들마다 사정과 형편이 다르므로 어떤 교회에서 행한 좋은 일을 듣고, 자기 교회에 와서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하지 못하는 거냐?* 라고 하면서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에서 아주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어려운 중에서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바람이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이든지 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은 기쁘고, 기분 좋은 소식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도 신랑 신부가 결혼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특히 신부가 단장한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 모습은 마치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모습처럼 아름다운데, 부흥이 일어난 교회는 신랑 신부의 결혼식처럼 아름답습니다.
예를 들어 몽골에서 신랑 신부가 결혼하는 모습도,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신랑 신부가 결혼하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특히 신부가 예쁘게 단장하고 신랑을 만나는 것은 최고로 아름다운 순간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 모습은 마치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모습처럼 아름다운데, 부흥이 일어난 교회는 신랑 신부의 결혼식처럼 아름답습니다.
복음(福音)이 없거나 신앙이 침체(沈滯)되었을 때, 사람들은 대단히 신경질적이고 술을 많이 마시고, 폭력적이고, 음란(淫亂)합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지역(地域)에 복음이 없으면, 남자들이 집에 있지 않고, 하루 종일 밖에 나가서 술을 퍼마시고, 노름을 합니다.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를 두들겨 패고, 아이들을 야단치고 때립니다. 가장(家長)이 돈을 벌지 않고, 술이나 퍼마시고 노름이나 하면, 아이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고철 등을 줍고, 배고픔에 쓰레기통을 뒤집니다.
그러면 아내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화가나 소리를 지르거나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교회에 점잖은 목사가 부임합니다. 목사는 설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가정을 심방해서 부인(婦人)들에게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만나길 권면하고, 아이들에게도 교회에 나오라고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곳이 곧 미신(迷信)과 우상(偶像)이 많은 지역, 오산(새희망 교회)와 신도시가 개발되기 전, 동탄 은혜교회입니다. 부인(婦人)은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는 남편에게 잔소리도 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는데, 정말 멋지고, 매력적인 부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부인(婦人)은 남편만 바라보며 살다가 크게 실망했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자 기쁨이 생기고,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부인(婦人)은 아이들도 깨끗이 씻겨서 교회에 보냈습니다. 아이들도 교회에 나오면서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지금 그 가정에서 변하지 않은 사람은 술 마시는 남편이 유일합니다.
처음에 그 남자는 부인(婦人)이 교회에 가서 바람이 났는지 의심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얼마나 잘 생긴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몰래 따라옵니다.
또 전에 늘 자살(自殺)을 생각하고 술을 자주 마시는 부인(婦人)이 있었는데, 교회에 오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라, 아내를 감시(監視)하러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에게 설거지를 시키자 그는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찾아가서 교회에 잘 나오다가 무슨 이유로 안 나오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자기 부인이 갑자기 변해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어 감시(監視)하기 위해 교회에 나갔는데, 계속 다니다 보니까 안심되어 이제는 교회에 따라가지 않아도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남편은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남편들이 더 열심히 교회에 나옵니다. 아빠가 교회에 나오자 아이들이 좋아합니다. 또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고, 밖으로 나가 무슨 일이든지 하자. 아이는 돌아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아도 된 것입니다.
그 남편은 교회에 수리할 것이 있으면, 가서 수리하고, 안내할 일이 있으면, 안내도하며 봉사를 합니다. 술 마시던 돈이나 노름하던 돈을 가지고 헌금을 하는데, *목사님이 그것으로 먹고 살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자기는 나가서 돈 벌면 되니까 헌금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가장 아름다운 때요, 그 성도의 생애에 있어서도 가장 행복한 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2017년 낙후(落後)된 동탄 지역이 재개발 되는 바람에 부패한 정권과 막가파 토개공의 대책없는 약탈로 믿음이 연약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즉 개종한 새 가족들 중, 한 가족은 실족되고, 타 지역으로 간 교인은 이단에 빠졌다가 겨우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이것은 영혼 살인죄요, 주님의 몸되 교회인 하나님의 눈을 찌른 반역행위입니다.
마18:7절)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그때부터 국가적으로 큰 재앙과 국력이 기울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회적 혼란을 우려해서 물리적 대항은 하지 않고 각 해당 기관에 민원을 보냈지만 우이독경(牛耳讀經)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극심한 가난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대인의 박해(迫害)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고, 흉년의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인에게는 다시 주님을 만난 기쁨이 있었습니다.
8:2절)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어떤 어려운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아름답게 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배와 봉사에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 8:5절)우리가 바라던 것 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헌금을 적극적으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대개 은혜를 받으면, 몸으로 섬기는 일을 먼저 하게 됩니다. 마게도냐 교인들 역시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은혜 받은 교인들은 먼저 예배나 모임에 아주 적극적이게 됩니다.
전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다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은혜를 받고 난 후에는 모임이라는 모임은 다 참석합니다. 그리고 봉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헌금도 드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기쁨이 넘쳐 자신의 것을 내주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8:2절)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형편에도 적극적으로 헌금을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일이 가장 기쁜 일이 되었고,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8:3절)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사도 바울이 보기에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들이 드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였기 때문입니다. 신부(新婦)는 모든 것을 신랑(新郞)에게 주고 싶어 하는데, 신랑(新郞)의 것은 결국 신부(新婦)의 것이 됩니다.
Ⅱ.예수 그리스도의 가난
사실 마게도냐 교인과 고린도 교인이 예루살렘 교인을 돕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헬라인이었던 이들은 항상 유대인과 경제적으로 라이벌(rival)관계에 있었고, 원수(怨讐)처럼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과 마게도냐 교인에게 *예루살렘 교인을 위하여 헌금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헌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교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 자신도 예루살렘 출신의 목회자들로부터 많은 차별과 무시를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이방인 사도와 예루살렘 출신의 목회자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갈라진 틈을 메울 수 있는 것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며, 무시당하던 이방인이 정성껏 보낸 헌금으로 그 사랑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먼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결국 주인공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고린도 교인이 입으로만 잘 믿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에 인색(吝嗇)했다면, 고린도 교회와 마게도냐 교회는 그렇고 그런 시시한 교회가 되었고, 그들에게 보낸 편지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희생하고 헌금을 보냄으로써 복음의 주도권(主導權)은 이방인에게* 넘어갔습니다.
8:7절)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린도 교인에게는 믿음도 있었고, 말도 있었고, 지식과 은사도 풍성했습니다.
그들은 사랑도 많았다고 했는데, 사도 바울은 *그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해 보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복(福)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의 모든 부요(富饒)하심을 버리고, 가난하게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8:9절)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하늘 위에서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영광과 지식, 부요(富饒)함이 무궁무진했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마치 왕(王)이 감옥(監獄)에 일부러 들어온 것과 같고, *거지 소굴에 자진해서 들어온 것과*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영광의 옷을 걸치지 아니하셨고, 부귀(富貴)와 권세(權勢)를 가지고 오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비천(卑賤)한 자로 오셨으며, 가난하셨고, 업신여김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우나 새보다 못하다고 하셨는데, *여우에게 굴이 있고, 새에게 둥지가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 예수님은 자신이 입은 옷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옷마저도 로마 군병들이 벗겨 갔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되셨을 뿐만 아니라, 극한의 고통과 온갖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모든 축복(祝福)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것은 다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이 가져도 좋지만, 아무것도 갖지 않아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 모두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돈이나 명예, 지식, 권력을 갖게 되면 좋아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돈이나 이런 것들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즉 남자가 좋아하는 이성과 사귈 때, 돈이 없으면, 그저 걷기만 해야 합니다. 여자는 높은 구두 때문에 걷는 것이 힘든데도 남자는 죽어라 걷기만 합니다.
또 돈이 있으면 따뜻한 펜케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좋은 선물을 사 줄 수도 있어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선물을 받아 마음이 부요(富饒)해지고, 선물을 준 사람은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챙기려고 하면,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이 *너는 이 세상에서 자기 상(賞)을 이미 다 받았느니라.*고 하실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명예도 가지고, 돈도 가지고, 지위도 가진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천국(天國)에 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모두 가질 수는 없습니다.
천국(天國)을 사모하는 사람은 가난해야 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갖는데, 열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지위(地位)가 너무 높아지고, 돈을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유명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 상(賞)을 이미 다 받은 것입니다.
Ⅲ.평균의 원리
이 세상을 보면 돈을 가진 사람이 돈을 더 쉽게 버는 것을 봅니다. *돈이 돈을 버는 것*입니다. 또한 학벌(學閥)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성공할 기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 사람들은 지위(地位)나 학벌(學閥). 기회가 있으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성공하는데, 시용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들이 인간의 노력이나 생각대로 되는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빨리 성공한 사람들 중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장기적으로는 모든 것이 믿음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한때, 복(福)을 주셨지만, 계속적으로 복(福)을 주지 않으시면, 그동안 잘 살았던 것이 소용없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믿음대로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부요(富饒)한자가 복(福)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가 나중에 존귀하게 되고, 유명하게 되고, 물질적으로도 복(福)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부요(富饒)하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 나라의 복(福)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심령 부흥이 일어나야 하고, 생명의 말씀에 부요(富饒)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의 복(福)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을 굉장히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돈을 함부로 낭비하거나, 허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을 꼭 써야 할 곳에 쓰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성령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하나님의 축복(祝福)이 자기로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흘러가는 것을 굉장히 기뻐합니다.
8:13-14절)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사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주고, 스스로 가난하게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에게 이런 것을 요구한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아끼는 모든 것들을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고, 자기에게 없어도 되는 것은 얼마든지 남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사랑일지라도 어려운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8:15절)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거둘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욕심을 부려 만나를 많이 거두었던 사람도 장막에 가서 보면, 꼭 먹을 만큼만 있었고, 힘이 들어 조금 거두었던 사람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기본적으로 먹어야 하는 것은 비슷합니다. 그 외에 집(아파트)나 자동차, 공부하는데 돈이 들고, 옷이나 액세서리(accessory) 등 사치(奢侈)하는데 돈이 들고, 미래 생활에 대비해 저축하는데 돈이 듭니다.
앞서 말했듯이 먹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좋은 집(아파트)에서 살고 싶을 것이고, 좋은 자동차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는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성도님들 중에 선교사(宣敎師)를 위해 돈을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교사(宣敎師)가 낮선 선교지에서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산지(山地)족을 위해 예배당을 짓는데, 돈을 보내고, 송아지 살 돈을 보내고, 우물 팔 돈을 보내고, 대학(大學)을 짓는데, 돈을 보내기도 합니다.
교회 선교비와 상관없이 아무도 모르게 그런 일을 하는데,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서 모은 많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8:20절)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여기서 우리는 이번에 사도 바울이 거둔 헌금이 거액(巨額)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逮捕)되었을 때, 총독(總督)은 그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돈을 뜯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석방(釋放)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의심의 눈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험담(險談)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헌금이 투명(透明)하게 사용되도록 믿음의 아들 디도와 함께 신뢰할 수 있고, *복음의 영광이요 교회의 사자(使者)인 형제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또 다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고 말합니다.
8:24절)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고린도 교회는 스스로 사랑이 많은 교회임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적인 헌금에 있어서는 별로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입으로만 잘 믿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첫 사랑으로 부흥의 열매가 풍성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아-멘
본문 토의와 적용
1.최근 한국 교회는 목회자가 설교 시간이나 광고 시간에 교회 건축이나 선교사 지원을 위한 헌금을 강조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일로 교인들에게 기쁨을 주거나, 힘에 넘치도록 참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에 대해 부정적 영향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자신에게 꼭 필요하지 않는 옷, 책 등 물건이나 돈을 다른 교인이나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때, 어떤 유익이 생기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축복(祝福)이 되는가? 그리고 이런 일을 실제로 실천해 보는 것은 어떤가?
3.교회에서 헌금을 맡아서 관리하고, 지출하는 사람은 신실한 자여야 할 뿐만 아니라, 복음(福音)증거에 열정을 가진 자여여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재정(財政)과 지출(支出)은 언제나 복음(福音)증거를 위한 것이 전제(前提)가 되어야지,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각 셀(cell) 공동체가 투명하고, 객관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찬송가 317장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알림(연속5)
▣ 교갱원 소속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금년 ☞ 정착과 부흥의 해*
3月 ☞소통과 합력의 달☜
◈4월1일-5월31일 춘계 대심방(세례겸)과 셀(cell)현장 점검을 위해 장소, 날짜,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신청해야만 심방이 가능하고 소속이 될 수 있으며, 정착하지 않고*특권과 은혜감사*를 실천하지 않는 셀(cell)의 무관심이 *생명의 양식*촛대를 전체 삭제하고 옮기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전반기 셀(cell)보고서 결과로 결정)
※리더(leader)1명을 뽑아 *필수과목*을 필하고,예배 인도 등 교갱원과 계속 소통해야 소속으로 안전할 수 있습니다(직분자도 동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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