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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언어학의 외부 : 반음계주의적 언어학을 위하여 (1)
1947년 11월 28일 어떻게 기관 없는 신체를 이룰 것인가?
기관 없는 신체:
1.도달하지 못하며, 도달할 수 없지만, 거기에 접근하는 것을 버릴 수 없다.
2.극한(limit). –아르토는 기관과의 전쟁 선포(신의 심판과 절연하기 위해)
3.신체가 상당한 많은 기관들을 갖는 순간, 그것을 등록해두려 하거나 상실하는 순간 이미 시동되어 있다.
4,히포콘드리아적 신체:기관들은 파괴되고, 이미 파괴 완료되었으며,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편집증적 신체:기관들은 여러 영향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지만, 또한 외재하는 에너들에 의해 회복된다.
분열적 신체: 스스로 기관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끄는 내재적 투쟁에 의해 야기되는 신체 긴장증
실험적 분열자 내지 약물 중독된 신체: “인간의 유기체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불충분하다.
고장난 위험이 있는 입과 항문 대신에, 먹는 것과 배설하는 것을 위한 하나의 다목적 구멍을 가지면 왜 안되는 것일까?
우리는 코와 입을 봉해 버리고 위장을 꽉 채우며, 애초에 그래야 했던 것처럼 폐에다 바로 구멍을 뚫을 수 있다.
마조히스트적 신체: 기관들의 작동을 멈추기 위해 스스로를 매달게 하며, 마치 피부에 달라붙어 있는 기관들의 껍데기를
벗겨낸다.
5. 투약량 내지 실험에 내재적인 규칙으로서 조심성:
기관 없는 몸을 찾아서, 자아를 해체하기 위해서(기억을 망각으로 해석을 실험으로 대체)
환상에 대하 정신 분석적인 해석과 프로그램에 대한 반의학적 실험간의 본질적 차이
-환상 그 자체가 다시 해석되어야만 하는 해석과 실험을 추동하는 프로그램 간의 차이.
기관 없는 신체는 모든 것을 제거해 버렸을 때도 남아 있는 것이다.
당신이 가져가 버린 것은 바로 환상이고, 의미화와 주체화 전체이다.
정신분석은 그와 반대로 한다.
즉 모든 것을 환상으로 번역하고, 모든 것을 환상에다 팔아먹으며, 환상을 보존하며, 특히나 실재적인 것 놓치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관 없는 신체를 놓치기 때문이다.
기관 없는 신체를 위해서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이 그 중 하나를 만들어 내는 방식을 구별
- 꿰미기와 채직질. 하나는 다른 하나에 포함.
하나의 국면은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기관 없는 신체를 무언가가 순환하거나 통과하도록 하는
것이다.
동일한 절차들이 두 국면 모두에서 쓰이고 있지만, 그것은 되풀이 되어야 하고 두 번 이루어져야 한다.
(마조히스트가 기관 없는 신체를 이루는 것은 고통의 파동으로 기관 없는 신체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약물에 중독된 신체와 차가움의 강렬도 역시 마찬가지 이다.)
기관 없는 신체의 유형에 관한 질문
1) 어떤 유형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를 사전에 결정하는 것은 어떤 절차와 수단을
통해서 인가?
2) 그것의 양태들은 어떠하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3) 어떤 변이체를 갖는가? 어떤 놀라운 것이 있는가? 어떤 뜻밖의 일이 일어나는 가?
기관 없는 신체와 그 위에 일어나는 일 사이에 종합과 분석
-양태 위에서 무언가가 필연적으로 생산되긴 하지만 그게 무엇일지는 알지 못하는 선험적 종합과, 기관 없는 신체 위
에서 생산되는 것이 이미 신체 생산의 일부를 이루며, 이미 거기에 포함되어 있고 그 위에 있는 무한한 분석(이행, 분할,
하위-생산의 무한성을 대가)이 그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의 실패
-동일한 실패, 동일한 위험. 한번은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하는 수준에서, 또 한번은 그것을 통과하던가 그렇지 않았던가
하는 수준에서다.
사람들은 스스로 훌륭하게 기관 없는 신체를 이루었다고 믿으며,<훌륭한> 장소, 능력, 집합성-완전히 혼자일 때조차도
항상 집합적인 것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순환하지 않거나, 더 이상 거시기가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편집적인 점, 봉쇄적인 점, 착란적인 분출이다.
기관 없는 신체의 방식
-강렬도들에 의해서만 서식 되고 점유되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오직 강렬도만이 통과하고 순환한다.
하지만 기관 없는 신체는 어떤 것이 지나다니는 무대나 장소, 받침대가 아니다. 환
상을 통해 볼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해석해야 할 어떤 것도 없다.
기관 없는 신체는 강렬도들을 생산하고 분배하는데, 이 공간은 그 자체가 강렬하며, 연장을 갖지 않는다.
기관 없는 신체의 공간
- 기관 없는 신체는 강렬도들을 지나가게 하며, 공간 안에서 강렬도들을 생산하고 분배하는데, 이 공간은 그 자체가
강렬하여, 연장을 갖지 않는다.
기관 없는 신체는 공간이 아니며,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을 이러저러한 정도-생산된 강렬도에 상응하는 정도로 점유하게 될 질료이다.
그것은 비지층화 되고, 미형태화된 강렬도의 모태이며,강렬도=0 이다.
그러나 이 영에 대해 음의 값을 갖는 것은 없다.
음의 강렬도 반강렬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은 에너지와 동등하다. 실재작인 것의 생산은 영에서 출발하는 강렬도의 크기다.
유기체의 연장과 기관의 조직화 이전의, 지층들의 형성 이전의 충만한 알은 기관 없는 신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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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도의 알
축과 벡터들, 그레디언트와 역치들로 정의도며, 에너지 변환에 수반되는 역학적 경향, 집단들의 치환에 수반되는 운동학적 운동이나 이전에 의해 정의된다.
이 모두는 부수적 형태들로 부터 독립적인데, 왜냐하면 기관들은 여기서 순수 강렬도들로서만 나타나고 기능하기 때문이다. 기관은 문턱을 넘어설 떄, 그레디언트가 바뀔 때 변화한다.
실체의 문제
모든 실체에 대하여 하나의 동일한 실체가 잇는가, 유일한 실체가 있는가라는 문제는 모든 기관 없는 신체들로 이루어지는 집합이 존재하는가로 모아진다.
기관 없는 신체가 극한 이라면, 기관 없는 신체의 집합의 문제는 일자와 복수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 들의 융합이 다양성에 관한 것이다.
실체적 속성 자체는 실체의 존재론적 단위로 구성. 하나의 동알한 실체 아래 특정 종류의 강렬도의 연속제 존대.
강렬도 안에 모든 실체들의 연속체가 그리고 실체 안에 모든 강렬도들의 연속체가 있다.
(기관 없는 신체=내재성 내재적 극한=내재성의 장=일관성의 구조)
세가지 종류의 욕망의 원칙
1. 사제의 3중 저주-부정적 법칙, 외재적 규칙, 초월적 이상
2. 정신 분석가-쾌락, 죽음, 현실
3. 분석 안된 마조히스트(프로그램)조련 공리.본능적 힘들을 파괴하여 전달된 힘들로 대체하라.(파괴가 아닌 교환과 순환)
-동양의 도와 마조히즘의 문제
구별의 문제
1)기관 없는 신체들의 상이한 유형, 종류, 실체적 속성들로, 예컨데 약물 중독된 기관 없는 신체의 추위, 마조히즘적 기관
없는 신체의 고통이 그것이다. 각각 영점을 생산의 원리로 가진다.
2)기관 없는 신체의 각 유형 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바꿔 말하자면 생산되는 양태들과 강렬도들, 지나가는 파동들이다.
3)모든 기관 없는 신체들의 궁극적 집합(총체), 일관성의 구도
유기체의 해체
1.신체는 신체다. 그것은 단일하다. 기관은 필요없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는 신체의 적이다.
(신의 심판,신학적 체계는 유기체를 만드는 신의 조작이다.)
2. 유기체의 해체는 결코 자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언제나 어떤 배치를 전제로 하는 접속에 그 회로에 통접에
그 수준과 문턱들에 이행과 강렬도이 분배에 측량인의 기량으로 측정되는 영토화와 탈영토화들의 신체에 개방하는 것이다
(무의식을 의미화와 해석으로부터 떼어내는 것-평면의 구도)
3.황량한 신체들의 역설-잘못된 유기체의 해체
: 자신의 기관을 비워버린다.지층들이 치매상태 자살상태
암조직-유기체라고 부르는 기관들의 조직에 대립하는 기관없는 신체가 실재로 존재하지만, 지층에 속해있는 유기체의
기관없는 신체에도 존재하는 것.?
기관 없는 신체 =알
1.퇴행적이지 않고 현재적이며 실험적, 그와 결부된 환경으로서 스스로 가진다.
2.강렬도적인 실재를 지칭하지만, 이는 미분화된 것이 아니라 사물 및 기관으로서 그레디언트,이주, 이웃지대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3.아동기의 블록, 생성이며, 아동기의 기억의 대립물이다. 그것은 성인 '이전의' 아이나 아이 '이전의' 엄마가 아니다.
그것은 성인과 아이의 엄격한 동시성이며, 그것들의 비교 밀도 내지 강렬도의 지더거, 이 지도상이 모든 변이이다.
(<-> 정신분석의 오류는 기관 없는 신체라는 현상을 이미지의 관점에서 퇴행, 투사, 환상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욕망
이런 저런 관계내지 관계하에서는 기관 없는 신체의 구성이 존재할 때에는 언제나 욕망이 존재한다.
이는 이데올러기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물료의 문제이며 질료의 현상이다.
일관성의 구도와 추상기계
일관성의 구도는 모든 기관 없는 신체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일관성의 구도가 거부하는 것이 있으며 선택을 하는 것은 일관성의 구도로서 그것을 그리는 추상기계를 통해 그렇게 한다. 심지어 기관없는 신체 내부에도 일관성의 구도상에서 구성될 수 있으는것과 구성 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제7장 0년 얼굴성 319-363
흰벽, 검은 구멍 –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 - 몸체, 머리, 얼굴 – 얼굴과 풍경[경치, 풍광] - 기사도 연애담[궁정 연애담]
- 탈영토적 정리(定理) - 얼굴의 사회적 기능들 – 얼굴과 크리스트 – 얼굴의 두 형태: 앞면과 옆면, 외면 - 얼굴 해체하기
7장 0년 : 얼굴성 319 / Année Zero: Visagéité
§07.01. 흰벽, 검은 구멍 321 - Mur blac, trou noir.
우리는 두 개의 축을, 의미생성(la signifiance)과 주체화(la subjectivation)의 축을 만났다.
이것들은 매우 다른 두 개의 기호계, 또는 두 개의 지층이다.
하지만 의미생성은 기호들과 잉여들을 기입할 흰 벽이 없으면 안 된다.
주체화는 의식, 정념, 잉여들을 숙박시킬 검은 구멍이 없으면 안 된다. (321)
[두 개의 지층이지만 마치 겉면과 안면이라는 앞뒤와 유사한다. 둘은 대칭도 아니고 이원론도 아니다.
심층이 표면에 솟아나며 그려지려면 화폭과 같은 흰 면이 있어야 하고, 상층에서 표면으로 전달하려면 수신하려는 빈
구멍같은 표면이 있어야 한다. 전자의 능동성과 후자의 수동성이 양면이 셈이다. (50MMC)]
하지만 얼굴, 즉 흰 벽-검은 구멍이라는 체계는 흥미롭다.
흰 뺨의 큰 얼굴, 검은 구멍 같은 눈이 뚫린 백묵 같은 얼굴. 어릿광대의 머리, 하얀 어릿광대, 달의 피에로, 죽음의 천사,
수의를 입은 성자, 얼굴은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자의 외부를 둘러싼 표피가 아니다.
... 어린이, 여자, 가족의 어머니, 남자, 아버지, 우두머리, 교사, 경찰은 일반적인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표 작용
하는 특질들이 특별한 얼굴성의 특질들에 연동되어 있는 언어를 말한다.
본래 얼굴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얼굴을 빈도나 확률의 지대들을 규정하고, 미리 적합하지 않은 표현들과 연결 접속들을 적합한 기표작용으로 중화하는
장을 결정한다. (321-322)
§07.02.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 322 - Machine abstraite de Visagéité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만 할까? 기표의 벽, 주체화의 구멍을 구성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얼굴이 아니다.
얼굴, 적어도 구체적인 얼굴은 흰 벽 위에서 모호하게 그려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검은 구멍 안에서 모호하게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영화에서 얼굴의 글로즈없(gros plan)은 두 개의 극으로써 얼굴이 빛을 반사하도록 하거나, 반대로 얼굴이 “무자비한
어둠 속에” 잠길 때까지 그것의 그림자를 부각시킨다. (322)
하지만 구체적인 얼굴은 완전히 다 만들어진 채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얼굴들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태어난다. 이 기계는 기표에 흰 벽을 주고 주체화에 검은
구멍을 주는 것과 동시에 얼굴들을 생산한다. (323)
[양태로서 얼굴모양은 추상적인 기계인 셈인데, 70억 인구의 추상기계는 차이가 있다. (50RKD)]
323추상적인 기계는 .. 우리가 그것을 기다리지 않을 때 출몰한다. 카프카의 단편 소설인 블룸펠트(Blumfeld)(1915)를
보자. 저녁에 집에 돌아온 한 독신남자가 두 개의 작은 탁구공들이 ... (323)
드뷔시(Claude-Achille Debussy, 1862-1918)와 니진스키(Vaslav Nizinskii, Wacław Niżyński, 1890–1950)의 멋진 발레에서도
작은 테니스공 하나가 황혼녘의 장면에서 튀어 오른다. (323)
324미국의 심리학은 특히 어린이와 어머니의 관계, 눈 대 눈 접촉(eye-to-eye contact)에서 얼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네 개의 눈이 있는 기계라고나 할까? (324)
1) 손, 입, 피부 또는 대체적으로 시각적인, 이른바 자기 수용성(proprioception)의 감각들은 가슴-입의 유년기적 관계와
연관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수면에 관한 아이저코워(Otto Isakower, 1899-1972)의 연구. (324)
[아이저코워(Otto Isakower, 1899-1972), 비엔나 태생, 미국 정신과의사.]
2) 일반적으로 시각적인 내용들로 덮여 있지만, 꿈의 내용으로 자기 수용성 감각들 밖에 없을 때에는 백색으로 남아 있는
꿈의 백색 스크린(un ecran blanc)에 관한 르윈의 발견(Bertram D. Lewin, 1896-1971) (324-325) -
[르윈(Bertram D. Lewin, 1896-1971), 미국 정신과 의사]
3) 이미 백색 스크린은 아이의 촉각적 감각이나 접촉의 대상으로 가슴 그자체를 표상한다기보다는 가슴을 잡기 위해 접근
해가야 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나타나게 하는, 최소의 거리를 함축하는 시각적 지각물이라는 스피츠(René Spitz) 해석 (325) [스피츠(René Arpad Spitz, 1887-1974) 헝가리 출신 미국 정신분석학자.]
§07.03. 몸체, 머리, 얼굴 325 - Corps, tête et visage.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분을 제안할 수 있다. 얼굴은 구멍 표현들, 구멍 뚫린 표면이라는 체계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체계는 (자가 수용적인) 몸체의 고유한 공동-입체의 체계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머리는 몸체에 포함되어 있지만 얼굴이 아니다. 얼굴은 표면이다. ... 얼굴은 하나의 지도이다. (325)
... 요컨대 머리를 포함하여 몸체가 탈코드화되고 <얼굴>이라 불리는 어떤 것에 의해 덧코드화 되어야만 할 때 얼굴이
생산된다. 326
.. 입과 코, 특히 두 눈은 몸체의 다른 모든 입체들과 다른 모든 공동들을 불러내지 않으면 구멍 뚫린 표면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섭고도 휘황한, 모로 박사(Dr. Moreau)에게 걸맞는 작업이다.
손, 가슴, 배, 자지와 질, 엉덩이, 다리와 발은 얼굴화 될 것이다. 페티시즘, 색정광 등은 이 얼굴화의 과정과 떼어놓을 수
없다.(326)
얼굴화는 닮음(=유사성)이 아니라 근거들의 질서(ordre des raisons)에 의해 작동한다.
온 몸체가 구멍 뚫린 표면을 통과하도록 하는 것은 훨씬 더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인 작업인데, 거기에서는 얼굴이 모델이나 이미지의 역할이 아니라 모든 탈코드화된 부분들을 위한 덧코드화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은 성적인 것으로 남으며, 어떤 승화도 없다.
단지 새로운 좌표들이 있을 뿐이다. (326)
[부분(아톰)들을 덮는 표면으로서 얼굴은 부분이 아니며, 백색 얼굴은 그 위에 그릴 수 있는(도표화 할 수 있는) 좌표이다. 그래서 알의 표면에 좌표를 그릴 수 있다고 한다. (50SKH)]
얼굴에는 절대적으로 비인간적인[비인격적] 어떤 것마저 있다.
얼굴이 어떤 문턱, 즉 클로즈업(gros plan)[close-up], 과장된 확대, 엉뚱한 표현 등에서부터 시작할 때에만 비인간적이
된다고 보는 것은 오류이다.
인간 안의 비인간적인 것, 얼굴은 처음부터 그렇다.
.. 이 이상한 되기는 얼rnf성의 특징들 자체가 결국 얼굴의 조직화에서 벗어나게 하고, 더 이상 얼굴, 지평선으로 뻗어가는
주근깨,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우리가 서로 바라보거나 가로질러가는 눈들 등에 의해 포섭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
... 그리하여 나는 나의 귀, 나의 눈, 나의 입술을 닫는다.” CsO.
그렇다, 얼굴은 파괴되고 망가지는 한 거대한 미래를 지닌다. 탈기표작용으로 향하는, 탈주체성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것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327-328)
328머리-몸체의 체계에서 얼굴의 체계로 가는 것에는 진화도 없고 발생의 단계들도 없다.
현상학적 위치들도 없다.
또한 구조적이며 조직화 또는 구조화하는 조직화를 동반하는 부분 대상들의 통합도 없다.
얼굴성이라는 이 고유한 기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미 그곳에 있을 또는 그곳에 있게끔 이끌릴 주체에 대한 지시는 존재
하지 않는다. (328)
얼굴의 문헌에서 시선에 대한 사르트르(Sartre, 1905-1980)의 텍스트와 거울에 대한 라캉(Lacan, 1901-1981)의 텍스트는
현상학의 장에서 반성(réfléchie)되거나 구조주의의 장에서 균열된 주체성, 인간성의 형식을 지시한다는 오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선은 시선 없는 눈, 얼굴성의 검은 구멍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거울은 얼굴성의 흰 벽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328)
[시선과 거울은 부차적이다. 시선에서 구멍이 거울에서 흰벽이 기본(1차적)이다.
유물론의 견해가 먼저이고 다음에 관념 또는 기표를 다룰 수 있다. (50SKH)]
사람들(on)은 손, 가슴, 입, 눈 등 부분대상의 어떤 목록이든지 만들 수 있다.
저들은 프랑켄슈타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nous)는 몸체 없는 기관(des organes sans corps), 조각난 몸체를 고려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우선 기관 없는 몸체(un corps sans organes)를 고려해야 한다.
기관없는 몸체은 서로 다른 강렬한 운동들에 의해 활성화되는데, 이 운동들은 문제가 되는 기관의 본성과 위치를 결정하며, 이 몸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또는 유기체를 그저 하나의 부분으로 삼는 지층들의 체계로 만들 것이다. (210, 328-329)
[여기서 전자는 정신분석학의 라깡을 후자는 들뢰즈와 가타리 견해이다.]
§07.04. 얼굴과 풍경[경치, 풍광] 329 - Visage et paysage.
329이 운동들은 탈영토화의 운동들이다. 동물의 것이건 인간의 것이건 유기체를 몸체로 “만드는” 것은 이 운동들이다.
예를 들어 무엇인가를 잡는 손은 단지 앞발뿐만 아니라 장소 이동에 쓰이는 손의 상대적 탈영토화를 내포한다.
.. 직립한 여성의 가슴은 동물의 유선의 탈영토화를 내포한다.
바깥으로 점막이 젖혀진 입술을 갖춘 아이의 입은 동물의 주둥이나 입의 탈영토화를 표시한다.
그리고 가슴-입술, 각각의 상대방에 대해 상관물의 역할을 한다. (329)
인간의 머리는 그 자체로 탈영토화된 환경(스텝은 삼림 환경과 대립되는 최초의 “세계”이다)으로서의 세계의 조직화를
상관물로 갖는 동시에, 동물에 대하여 탈영토화를 내포한다.
그러나 얼굴은, 이제 더 느리긴 하지만 한층 더 강렬한 탈영토화를 표상한다.
그것은 절대적 영토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얼굴은 아주 중요한 상관물인 풍경을 가진다. 풍경은 환경일 뿐만 아니라 탈영토화된 세계이다.
이 “최상”의 층위에서 풍경-얼굴의 상관관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330)
기독교적 교육은 얼굴성과 풍경성에 대한 정신적 통제를 동시에 수행한다.
얼굴과 풍경의 상보성 안에서 하나를 다른 것으로 구성하라, 그것들을 채색하라, 그것들을 완성하라, 그것들을 정리하라.
얼굴과 풍경의 교본들은 엄격한 훈육의 교육학을 형성하고, 예술이 교수법에 영감을 주듯 그것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330)
영화의 클로즈업은 얼굴을 무엇보다 하나의 풍경으로 취급한다.
클로즈업은 검은 구멍과 흰벽, 스크린과 카메라, 이런 식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이미 다른 예술들, 건축, 회화, 심지어 소설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너의 어머니는 풍경인가 얼굴인가? 얼굴인가 공장인가?(고다르) 탐험되지 않은 미지의 풍경을 감싸고 있지 않는 얼굴은 없고, 사랑받거나 꿈꾸어진 얼굴이 서식하고 있지 않은 풍경, 다가오고 있거나 이미 지나간 얼굴을 전개시키지
않는 풍경도 없다. (330-331)
§07.05. 기사도 연애담[궁정 연애담] 331 - Le roman courtois.
소설 – 페르스발은 야생 기러기 떼가 날아올라 눈에 반사되어 빛나는 것을 보았다. (....)
매가 이 무리에서 버려진 기러기 한 마리를 발견했다.
매는 그것을 덮쳤고, 너무나 세게 부딪혀, 기러기는 떨어졌다.
그리고 페르스발은 발밑의 기러기가 놓여 있는 눈과 아직도 선명한 피를 보았다.
..... 이 선명한 색깔은 연인의 얼굴색깔처럼 보였다.
그 생각할수록 모든 것을 망각했다. ... (...) 우리는 말 위에 똑바로 앉아서 잠든 기사를 보았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있다. 얼굴과 풍경의 고유한 잉여, 얼굴-풍경의 눈처럼 흰벽, 매의 검은 구멍 또는 벽 위에 흩어진
세 방울의 검은 구멍.
.. 기사는 검은 구멍을 가로지르고 흰 벽을 꿰뚫고 얼굴을 망가뜨리며 언제나 더 멀리 운동을 밀어붙일 수 있지 않을까?
(331-332)
동키호테에서 환영과 관념의 도주와 주인공의 최면적이고 강경증적인 상태를 환기시키면서 기사도 소설의 종말을
보는 것은 잘못이다.
베케트의 소설들에거 검은 구멍들과 인물들의 탈영토화의 선과 몰로이(Molloy)나 무명씨(Innommbable)의 분열증적 산책,
그들의 이름과 회상과 계획의 상실을 환기시키면서 소설 일반의 종말을 보는 것은 잘못이다. (332)
소설은 자기 이름도 모르고, 자기가 찾는 것과 행하는 것도 모르는 인물들, 즉 기억상실증, 운동조실증, 긴장증에 걸린 길
잃은 인물들의 모험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을 정의해왔다.
소설 장르와 극 또는 서사시 장르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다
(서사시나 연국의 주인공들은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망상이나 망각 등에 빠진다). (332)
클레브 공작부인(La princesse de Clèves, 1678)은 동시대인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이성, 부재나 “휴식”
상태, 인물들을 덮치는 잠으로 인해 소설인 것이다. (333)
궁정 소설의 기사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기의 이름, 자기가 행하는 것,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말한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르고, 끊임없이 절대적인 탈영토화의 선을 추적하면서, 또한 그 선에서 자신의
길을 잃어버리고, 검은 구멍들 앞에서 멈추고, 그 안으로 빠져버린다.
“그는 기사도와 모험을 기대했다.” 크레티앙 드 트루아를 어떤 페이지든 상관없이 펼쳐보라.
당신은 말 위에 앉아 창에 기대 채, 기다리고, 풍경에서 자신의 연인의 얼굴을 보고,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긴장증에 걸린 기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33)
[랑슬로(Lancelot)와 여왕의 이야기 도 마찬가지]
---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88?-1576) [이탈리아의 화가로 피렌체파의 조각적인 형태주의에 대해 베네치아파의
회화적인 색채주의를 확립했다.]
§07.06. 탈영토적 정리(定理) 334 - Théorèmes de déterritoralisation.
* 탈영토화의 정리들 또는 기계적 명제들 334
제1정리: 혼자서는 결코 탈영토화될 수 없다.
적어도 두 개의 항, 손-사용대상, 입-가슴, 얼굴-풍경이 있어야 한다.
.. 이로부터 손과 도구, 입과 가슴, 얼굴과 풍경 사이의 수평적이고 상보적인 재영토화의 모든 체계가 나온다. (334)
[이 세 가지는 기술, 애정(정념), 그리고 주체화 문제이다.
셋째 주체화가 대상으로부터 탈영토화 한다는 것은 풍경이란 타자로부터 들어오는 고른 면 만으로서가 아니라 타인
으로부터 들어오는 구멍과 안면이라는 벽도 있다는 것일 것이다. (50SLB)]
제2정리: 탈영토화의 두 요소나 운동에서 가장 빠른 것이 반드시 가장 강렬하거나 가장 탈영토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가장 빠른 것은 자신의 강렬함을 가장 느린 것의 강렬함과 연결접속 시키고, 강렬함으로서의 가장 느린 것은 가장
빠른 것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층이나 다른 판 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입-가슴의 관계는 이미 얼굴성의 판 위로 인도된다. (334)
제3정리: 가장 탈영토화 되지 않은 것은 가장 탈영토화된 것 위에서 재영토화 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서는 아래에서 이로 향하는 수직적인 재영토와의 둘째 체계가 나타난다.
입뿐만이 아니라, 가슴, 손, 온몸, 도구 자체도 “얼굴화”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일반적으로 상대적인 탈영토화들(탈코드화)은 이런 저런 점에서 절대적인 탈영토화(덧코드화) 위에서 재영토화 된다. (334)
영화의 클로즈업은 얼굴이나 얼굴의 한 요소뿐만 아니라 칼, 찻잔, 시계, 주전자도 대상으로 한다.그리하여 그리피스(Griffith)에게처럼, 주전자가 나를 바라본다.
따라서 디킨즈(Dickens)가 난로가의 귀뚜라미의 첫 문장에서 “...을 시작한 것은 주전자이다”라고 썼듯, 소설의 클로즈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가.
그리고 회화, 그 안의 정물은 어떻게 풍경-얼굴이 되는가. 보나르(Bonard)와 뷔야르(Vuillard)에게서 물품, 식탁보 위의 컵,
찻주전자는 어떻게 얼굴화 되는가. (335)
제4정리: 따라서 추상적인 기계는 그것이 생산하는 얼굴 안뿐만 아니라 몸체의 부분들, 의복들, 그것이 (유사성의 조직화가 아니라) 이성의 질서에 따라 얼굴화하는 대상들 안에서 다양한 정도로 실행된다. (335-336)
§07.07. 얼굴의 사회적 기능들 336. Fonctions sociales du visage. 215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는다.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는 언제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그것은 언제 시동이 걸리는가? (336)
반대로 권력의 어떤 배치물들은 얼굴의 생산을 필요로 하고, 권력의 어떤 배치물들은 그렇지 않다.
원시사회를 고려해 보면, 얼굴을 통과하는 것은 거의 없다.
원시사회의 기호계는 .. 본질적으로 집단적이고 다성적(polyvoque)이고 몸체적이다. (215, 336)
[참조: <우선 [1]전-기표작용적 기호계가 있는데, 이른바 원시적(primitive) 기호계가 그것이다.
이것은 기호들 없이 작동하는 “자연적” 코드화들(des encodages naturels)에 훨씬 더 가깝다.
여기서는 유일한 표현의 실체인 얼굴성으로의 환원을 찾아 볼 수 없다. ... 예컨대 몸체성(corporéité), 몸짓성(gestualité),
리듬, 춤, 제의(rituel) 이라는 형식들은 이질적인 것 안에서 음성적 형식과 공존한다. (147 228):
제5장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체계들에 관하여>]
예컨대 리조(Jacques Lizot, 1938-)는 “의무, 의례, 일상생활의 분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신에 있어서 거의 완벽하고, (...)
낯설고 상상할 수 없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한 장례식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는 동안에, 어떤 사람들은 음란한 농담을 한다.
또는 한 인디언이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는 피리를 고친다. 또는 모든 사람이 잠이 든다. (336)
“원시인”들은 더 인간적이고 더 아름답고 더 정신적인 머리를 지닐 수 있다.
그들은 얼굴이 없고 얼굴을 가질 필요가 없다. (216, 337)
[구석기 시대는 더 감성적일 수 있다. 머리도 얼굴도 아직 탈영토화가 덜 되었기에?(50SKH)]
337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하다.
얼굴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백인(homme blanc)의 얼굴도 아니다.
그것은 희고 큰 뺨과 눈의 검은 구멍이 있는 백색인(Homme blanc) 그 자체이다.
얼굴은 크리스트이다. 얼굴은 전형적인 유럽인이며,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가 뭔가 관능적인 인간이라
부른 것, 요컨대 평범한 색정광(l’Erotomanie)이다
(19세기의 정신과 의사들이 색정광은 이상발정(nymphomanie, 색정과다증)와는 달리 종종 순수하고 순결한 상태를 유지
한다고 말한 것은 옳았다. 색정광은 얼굴과 얼굴화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얼굴은 보편적이지 않다. 그것은 모든 보편적인 것의 얼굴(facies totius universi)이다.
슈퍼스타 예수. 그는 온몸의 얼굴화를 발명하고 그것을 도처에 전달한다(클로즈업 된 잔다크 수난).
그것은 일대일 대응화, 이원화라는 기능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다. (216-217, 337-338)
첫째 양상에 따르면 검은 구멍은 지칭의 일반적 표면으로서의 벽 또는 흰 스크린 위에서 이동하는 중앙 컴퓨터, 크리스트,
제3의 눈으로 작용한다.
.. 스크린 위에서의 검은 구멍의 자리바꿈(déplacement), 지칭의 표면위에서의 제3의 눈의 여정은 둘씩 연결된 기본 얼굴인
네 개의 눈이 달린 기계처럼 이분법이나 나무성을 구성한다.
여선생과 학생의 얼굴,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 노동자와 사장의 얼굴, 경찰과 시민의 얼굴, 피고와 판사의 얼굴(“판사는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눈은 지평이 없었다...”).
... 우리는 얼굴을 소유한다기보다는 얼굴 안에서 흐른다. (217, 338-339) [어느 영화를 예로 든 것 같은데 주가 없다.]
339다른[둘째] 양상을 따르면,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는 선별적 반응이나 선택의 역할을 한다.
어떤 구체적인 얼굴이 주어지면 기계는 기본적인 얼굴 단위들에 따라 그것이 통과할 것인지 아닌지, 갈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다. 이항적 관계는 이번에는 “아니다-그렇다(oui-non)”의 유형이다. (217, 339)
그러나 그것은[어떤 얼굴은] [사회적 기능에서] 단지 특정한 선택의 층위에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대일 대응관계를 벗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일탈 유형별 격차들(écarts-types de dévience)울 순차적으로
만들어야 하고, 첫째 선택에서 받아들여진 것과 둘째, 셋째 둥의 선택에서만 용인된 것 사이에 이항관계를 수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검은 구멍은 여러 번 기능하는 동안 흰벽은 끊임없이 증가한다.
여교사는 미쳐버렸다. 그런데 광기는 n번째 선택에 적합한 얼굴이다(하지만 최종적 선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떠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그러한 광기에 적합하지 않은 광인들의 얼굴들이 있기 때문이다). (217-218, 339)
만약 얼굴이 크리스트, 즉 어떤 보통의 백색인이라면 최초의 일탈, 최초의 유형별 격차는 인종적이다.
황인종, 흑인종, 둘째나 셋째 범주의 인종들. 그들 역시 벽 위에 기입되어 있고 구멍에 의해 분포되어 있다.
그들은 기독교화, 즉 얼굴화되어야 한다.
백인의 자만인 유럽의 인종주의는 배제한다든가 누군가 “타자(un autre)”로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원시 사회에서이다.
(218, 340)
§07.08. 얼굴과 크리스트 341 - Le visage et le Christ.
341회화는 좀 더 즐거운 방식으로 얼굴-크리스트의 모든 자원을 이용했다.
검은 구멍-흰 벽으로 된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는 크리스트의 얼굴로써 모든 얼굴 단위들뿐만 아니라 모든 일탈의 격차들을 생산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 점에서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 억제되지 않은 자유로써 회화의 환희(une jubilation)[원래 50년마다 오는 축제]가 있다.
(218-219, 341)
다른 예들 중에서 하나만 보자. 풍경의 하얀 배경, 하늘의 검푸른 구멍 위에 연(鳶) 기계가 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빛살에 의해 성흔들은 성 프란체스코에게 보낸다.
성흔은 예수의 몸체의 이미지에 따라 성인의 몸체의 얼굴화를 작동시킨다. (219, 341)
정보이론은 [우선] 완전히 만들어져 있는 기표작용적 메시지들의 등질적인 집합인 척한다.
이 메시지들은 이미 일대일 대응 관계들 안의 요소들로 취해지든지 아니면 이 메시지들의 요소들은 그런 일대일 대응관계에 따라 한 메시지로부터 다른 메시지로 조직된다.
둘째로, 조합의 추첨은 요소들의 수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일정 수의 주체적인 이항적 선택들에 달려 있다. (219, 341-342)
[정보이론(메시지 전달)의 주체화에서 선택을 손디와 로르샤흐까지 연결하는 것이 특이하다. (50SLC)]
의미 생성과 주체화의 혼합된 기호계는 바깥으로부터의 모든 침입으로부터 특별히 보호될 필요가 있다.
심지어는 더 이상 외부는 없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기호론적 스크린과 그 요소들을 보호하는 벽을 이용한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이산적이고 디지털화되고 탈영토화된 요소들을 통해 진행되는 기표작용적 사슬들(des chaînes significates)을 구성할 수 있다. (219, 342)
모든 종류의 나무성들(arborescences)과 이분법들(dichotomies)을 그리는 것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가 생산하는 얼굴들(les visages)이다.
나무성과 이분법이 없으면 기표적인 것과 주체적인 것은 언어 안에서 그것들[나무성들과 이분법들]에게로 회귀하는(reviennent) 것들을 기능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얼굴의 이항성들과 일대일 대응성들은 언어, 언의 요소들, 언어의 주체들의 그것들[이항성들과 일대일 대응성들]과 동일하지 않다.
그것들은 서로 닮지 않았다.
그러나 전자들(얼굴의 것들)은 후자(언어의 것들)를 전제한다. (220, 343)
얼굴성의 기계는 기표와 주체의 부속장치(annexe)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표와 주체의 연결장치(connexe)이며, 기표와 주체를 조건 짓는다.
... 얼굴은 주체나 기표에게 연결장치이고, 그것들에 꼭 필요한 실체를 준다.
스존디(Szondi, 1893-1986) 테스트에서처럼 얼굴을 선택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다.
자신의 주체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얼굴인 것이다.
로르샤흐(Hermann Rorschach 1884-1922, 스위스 정신과의사) 테스트에서처럼 형상을 흰 구멍-검은 얼룩이나 검은 구멍-
흰페이지로 해석하는 것은 기표가 아니다.
기표들을 프로그램하는 것이 바로 이 형상인 것이다. (220, 343)
우리는 다음 물음에 대한 답을 향해 진척을 보였다.
즉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는 언제나 실행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회 구성체에서나 실행되는 것도 아닐진대, 그것에
시동을 거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회구성체들은 얼굴을 또한 풍경을 필요로 한다. (220, 343-344)
언어학이 동음이의어나 애매한 언표라는 문제와 언제나, 그것도 아주 빠르게 만나는 것은 우연(un hasard)일까?
언어학은 이런 문제를 이항적 환원들의 집합을 통해 다루는 것이다.
더욱 일반적으로, 어떤 다성성(polyvocité), 어떤 리좀의 특질도 지지될 수 없다.
달리고 놀고 춤추고 그리는 아이(un enfant)는 자신의 주의력을 언와 글에 집중시킬 수 없다.
그는 이제 결코 좋은 주체(bon sujet)는 아닐 것이다.
요컨대 새로운 기호계는 원시적 기호계들의 모든 다양체를 체계적으로 파괴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것이 잘 규정된 울타리 안에서 몇몇 견해들을 지키는 하겠지만. (221, 344)
[원시적 영토화와 전제 영토화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 게다가 언어에서, pitié란 18세기의 동정과 19세기의 연민은 다르다.
수난과 정열이 다르듯이. 다양체가 물질적 관계들이 달라지면 달라지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50SLC)]
345그렇지만 자신의 유일한 무기들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기호계들이 아니다.
새로운 내용들과 상호 전제를 이루면서, 자신의 결정된 표현의 형식으로서 의미생성과 주체화를 강요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권력 배치물들이다.
독재적 배치물이 없는 의미생성은 없고, 권위적 배치물이 없는 주체화도 없으며, 정확히 기표들에 의해 작용하며 영혼들
또는 주체들에게 행사되는 권력 배치물들이 없는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혼합도 없다. (220-221, 345)
이 [추상적] 기계는 얼굴성(vigagéité)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이 기계는 얼굴의 사회적 생산이기 때문이며, 온몸과 그 윤곽들과 그 대상들의 얼굴화를 전세계와 모든 환경의
풍경화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몸체의 탈영토화는 얼굴 위에서의 재영토화를 내포한다. 몸체의 탈코드화는 얼굴에 의한 덧코드화를 내포한다.
몸체의 좌표들 또는 환경들의 붕괴는 풍경의 구성을 내포한다. (345)
따라서 가면은 얼굴 그 자체이며, 얼굴의 추상이거나 얼굴의 작동이다.
[가면] 그 얼굴의 비인류성(Inhumanité). 그 얼굴은 결코 선행하는 기표나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순서는 완전히 다르다.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의 구체적 배치물 -> 얼굴성, 즉 검은 구멍-흰벽의 추상적인 기계의 시동 -> 이 구멍 뚫린 표면
위에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새로운 기호계의 설치.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 문제, 즉 그 얼굴과 그것을 생산하는
추상적인 기계의 관계, 그리고 얼굴과 이 사회적 생산을 필요로 하는 권력배치물들의 관계를 계속 배타적으로 고려했던
것이다.
[가면의] 얼굴은 하나의 정치(une politique)이다. (222, 346)
346물론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의미생성과 주체화는 서로 다른 체제(원형의 방출과 절편적 선형성), 서로 다른 권력 장치
(독재적 일반화된 노예 상태, 권위적인 소송-계약)를 가진 완전히 상이한 기호계라는 것을 보았다. ..
[한편] 아시아인, 흑인 또는 인디언적인 의미생성의 독재적 구성체들이 있다.
[다른 한편] 주체와 권위적 과정은 유대민족의 운명에서 가장 순수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기호계들의 차이가 무엇이든 이것들은 그래도 역시 사실상 혼합체(un mixte)를 형성하며, 이 혼합체의 층위
에서조차 자신의 제국주의, 다시 말해 다른 모든 기호계들을 으스러뜨리는 공통된 거만함을 정당화한다.
주체성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의미생성은 없다. 기표의 잔재들을 끌고 다니지 않는 주체화는 없다. (222-223, 346-347).
우리가 얼굴성의 기계에 크리스트의 0년과 <백색인(l’Homme blanc)>의 역사적 전개를 부여함으로써 특정한 날짜를 지정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혼합이 더 이상 재절단이나 교차이기를 멈추고, 마치 하얀 물 안의 소량의 검붉은 포도주처럼 각각의 요소가 다른 요소에 배어드는 완전한 침투가 되기 위해서이다. (223, 347)
[크리스트 0년은 서양인으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유물론자이라고 하더라도... 언어와 알파벳 문자도 그러하고(아니 이집트가 있잖아)... 그런데 극한의 얼굴들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도 붉은 포도주의 예를 시와 같다.]
따라서 얼굴성, 또는 검은 구멍-흰 벽 체계가 완전히 확장되는 것은 바로 여기[혼합체]에서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혼합체의 상태와 요소들의 가변적 비율을 구별해야 한다.
기독교 상태에서건 기독 아닌 상태에서건 한 요소는 다른 요소들을 제압할 수 있고, 다소간 강력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극한-얼굴들(des visages limites)을 정의해야 하는데, 이것들은 얼굴의 단위들(les unités)과 혼동되지 말아야
하고 사전에 정의된 얼굴의 격차들(les écarts)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223, 347)
348I. 여기서 검은 구멍은 흰 벽 위에 있다. 이것은 하나의 단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검은 구멍은 벽 위에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고 이항화에 따라 진행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검은 구명, 네 개의 검은 구명 n개의 검은 구멍들이 눈들처럼 분배된다. 얼굴성은 언제나 하나의 다양체이다.
에른스트(Ernst, 1891–1976)의 회화, 알로이즈(Aloïse, 1886–1964)나 뵐풀리(Wölfli, 1864–1930)의 데생에서처럼 우리는
눈들이나 검은 구멍들을 풍경에 서식시킬 것이다.
흰 벽 위에다 우리는 구명의 가장자리를 두르는 원들을 기입한다. (223, 348)
.. 가장 순수한 경우는 아마도 마귀를 표상하는 에티오피아의 민속 두루마리들 안에 있을 것이다.
즉 양피지나 거기에 그려진 각자거나 둥근 얼굴의 흰 표면 위에 있는 두 개의 검은 구멍.
그러나 이 검은 구멍들은 퍼져나가고 재생산되며 잉여를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 둘째 원을 가장자리로 두를 때마다 새로운 검은 구멍을 구성하고 그 것에 눈을 찍는 셈이다. (223-224, 348)
[다음 쪽에 나오는 둘째와 셋째 그림을 설명한 것이다.]
[앞에서 바로 이어진다] 커지는 만큼 갇히는 표면의 포획효과. 그것은 기표작용적인 독재걱 얼굴, 그 얼굴의 고유한 배가
(倍加), 증식, 빈도의 잉여이다.
눈들의 배가. 독재자나 그의 대표자들(representation)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정면에서 본 얼굴, 그 자신이 본다기보다는 검은 구멍들에 의해 덥썩 낚아채인 주체에 의해 보여진 얼굴이다.
그것은 운명의, 즉 지상(地上)의 운명, 객관적인 기표작용적 운명의 모습이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이 모습을 잘 알고 있다. 얼굴, 얼굴의 요소 또는 예견하는 시간적 가치를 지닌 얼굴화 된 대상(추시계의
바늘들은 무언가를 고지한다)에 대한 그리피스의 클로즈업. (224, 348-349) [349쪽의 넷째와 다섯째 그림에 대한 설명이다]
그림: 지상의 기표작용적인 전제군주적 얼굴 - [다섯 가지 그림] [1] 단순한 기계, [2] 가장자리의 배가라는 효과를 가진 기계, [3] 네 개의 눈이 있는 기계 [4] [5] 배가된 가장자리에 의한 눈들의 증식[프락탈을 연상하게 한다]. (225, 349)
§07.09. 얼굴의 두 형태: 앞면과 옆면, 외면 350 - Les deux figures du visage: face et profil, le détournement. 224
350II. 반대로, 저기에서 흰 벽은 검은 구멍을 향해 가는 은실처럼 풀려 나온다.
풍경이 구멍의 주위로 최후의 끄트머리까지 감기는 실이 되자마자 하나의 검은 구멍은 모든 검은 구멍, 모든 눈, 모든 얼굴을 “볏처럼 모아 세운다.” 그것은 언제나 다양체이다[독신기계].
하지만 이것은 운명의, 주체적이고 열정적이고 반성적인(réfléchi) 운명의 또 다른 형상이다.
이것은 얼굴, 또는 바다의 풍경이다[커플기계]. 그것은 하늘과 물, 또는 땅과 물의 분리선을 따라간다.
이 권위적인 얼굴은 옆얼굴(profil)이며, 검은 구멍을 향해 풀려 나간다.
이 두 얼굴은 서로 마주보지만 관찰자에게는 옆얼굴만 보여서, 그것들의 결합에는 이미 무제한적인 분리가 표시되어 있다.
또는 그것은 배반당해서 서로 외면하고 있는 얼굴들일 수도 있다.
트리스탄, 이졸데, 이졸데, 트리스탄, 배반과 죽음의 검은 구멍까지 그들을 밀어 넣는 작은 배에 있는, 의식과 열정의 얼굴성, 공명 또는 커플화의 잉여. (350)
.. 그리피스의 클로즈업에 맞서는 아이젠슈타인(Eisenstein 1898-1948)의 클로즈업(전함 포템킨(Cuirassé Potemkine, 1925)
의 클로즈업에서 슬픔 또는 분노의 강렬한 상승).
여기에서도 또한 얼굴의 두 한계-형상들 사이에 모든 조합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파브스트(Pabst)의 룰루(Lulu)에서 쫓겨난 룰루의 독재적인 얼굴은 빵 자르는 칼의 이미지, 살인을 알리는 예시적 가치의 이미지와 연결접속 된다.
그러나 또한 살인마(Jack l'Eenttreur)의 권위적 얼굴은 그를 칼 쪽으로 그리고 룰루의 살해로 이끌어 가는 모든 강렬함들의
단계들 통과한다. (350-351)
그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의한)바다의 주체적인 권위적 얼굴: [세 가지 그림이 있다.]
첫째, 독신 기계 [옆얼굴 하나가 - 저자들의 설명과 달리 - 검은 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듯이 보인다.]
둘째, 커플기계 [양쪽에서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양쪽의 옆얼굴은 각각 여성과 남성이다.
셋째, 복합적 기계. 1) 음악성의 선과 6) 열정의 선, 2) 회화성의 선과 5) 의식의 선, 3) 풍경성의 선과 4) 얼굴성의 선 등..
[세 겹으로 둘러싸인 중심의 감겨진 구멍이 있다.
구멍이라기보다 (엉긴)덩이로서 구멍(다양체)일 것이다. 복합기계는 사회성과 연관 지어 설명하기 위한 것 같다.](226, 351)
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두 한계-형상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언급할 수 있다.
한편으로 흰 벽, 희고 큰 뺨들이 기표의 실체적 요소라 할지라도, 검은 구멍, 눈들이 주체성의 반성적 요소라 할지라도 결국
그것들은 늘 함께 간다.
... 다른 한편으로 어떤 경우에건 검은 구멍은 본질적으로 가장자리가 둘려있고, 심지어는 덧-가장자리가 둘려 있기도(sur-bordé)하다.
가장 자리는 벽의 표면을 증가시키거나 선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351-352)
그리고 검은 구멍은 언제나 가장자리의 내부에 있으며, 눈들은 언제나 구멍의 내부에 있다. 검은 구멍 안에 있을수록 더욱
잘 보는 죽은 눈들. 이 공통적인 특성들은 얼굴의 두 형상들의 극한에서-차이(la différence-limite)를 볼 수 없게 하지 않으며,
어느 한 형상이 혼합 기호계 안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게 하는 비율들을 볼 수 없게 하지 않는다.
즉 지상의 기표작용적인 독재적 얼굴과 바다의 주체적이고 열정적인 권위적 얼굴(사막은 또한 대지의 바다일 것이다)이
각각 존재하는 것이다.
운명의 두 형상, 얼굴성 기계의 두 상태. 장 파리(Jean Paris, 1926-2001)는 회화에서 이 극을 - 독재자적 예수에서 열정적
예수에 걸친 - 의 실천을 잘 보여주었다.
한편으로는 비잔틴의 모자이크에서처럼 금빛 배경 위에 눈들의 검은 구멍이 있고, 앞 쪽으로 온 깊이가 투영된, 정명에서
본 예수의 얼굴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15세기(Quanttrocento)의 화폭에서처럼 다양한 선들을 그리면서 그 자체에 깊이를 통합하는 비스듬한
시선들이 있는, 사분의 삼 정도나 옆얼굴로 교차되거나 외면한 얼굴들이 있다. (226-227, 352-353)
(이행과 혼합에 대해 아무 것이나 하나 예를 들 수 있는데, 가령 물가 풍경 위에 그려진 두치오(Duccio, 1255/60경–1318/9경)의 「사도들을 부르심」을 보면 둘째 공식은 이미 크리스트와 첫째 어부를 장악하고 있는 반면 둘째 어부는 비잔틴적 코드 안에
사로잡힌 채 남아있다.) (353)
353스완의 사랑. 프루스트는 얼굴, 풍경, 회화, 음악 등을 공명하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스완과 오데트의 이야기에서
세 번. (MP 227 353)
우선, 전적인 기표작용적 배치가 설립된다. 희거나 노란 색의 넓은 뺨을 지닌 오데트의 얼굴, 그리고 검은 구멍 같은 눈.
그러나 이 얼굴 자체는 끊임없이 다른 것들을, 똑같이 벽위에 배치된 다른 것들을 지시한다. (227 353)
해석들의 지시작용 안에서 이 모든 의미 생성의 배치는 열정적이고 주체적인 둘째 계기를 준비하고, 여기에서 스완의 질투,
호소망상, 색정광이 전개될 것이다.
이제 오데트의 얼굴은 단 하나의 검은 구멍, 즉 스완의 “열정”의 구멍 쪽으로 질주하는 선 위에서 뻗어나간다. 풍경성, 회화성, 음악성 등의 다른 선들도 이 긴장증의 구멍 쪽으로 서둘러 가고, 그 주위를 감싸면서 몇 번이고 그것의 가장자리를 두른다.
(353)
§07.10. 얼굴 해체하기 354 Défaire le visage. 228
하지만 셋째 순간, 자신의 오랜 열정에서 벗어났을 때 스완은 한 파티에서 가서 우선 하인들과 손님들의 얼굴이 자율적인
미적 특질들(traits esthétiques autonomes)로 해체되는 것을 본다. (228, 354)
화자는 자신의 마들렌느, 즉 잉여, 비자발적 회상의 검은 구멍을 씹는다.
그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가 빠져나와야 하는, 탈출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 그러나 그는 예술을 통해서,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거기에서 빠져나올 것이다. (224, 354)
검은 구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어떻게 벽을 뚫을 것인가? 어떻게 얼굴을 해체시킬 것인가?
프랑스 소설이 아무리 천재적이라 해도 이것은 프랑스 소설이 하는 일이 아니다. (224, 354)
프랑스 소설은 심히 염세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며, “삶의 창조자라기보다는 삶의 비판자”이다.
프랑스 소설은 인물들을 구멍 속으로 쑤셔넣고, 그들이 벽에서 튀어 오르게 한다.
프랑스 소설은 조직화된 여행들과 예술에 의한 구원만을 착상해낸다.
그것은 여전히 가톨릭적 구원, 다시 말해 영원성에 의한 구원이다.
프랑스 소설은 선들, 능동적 도주선이나 긍정적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기보다는 점을 찍느라 시간을 보낸다.
영미 소설은 전혀 다르다.
“떠나라, 떠나라, 나가라! …지평선을 가로질러라(traverser) …”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에서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에서 밀러(Henry Miller, 1891-1980)까지, 가로지르고 빠져
나오고 관통하고, 점 말고 선을 그리라는 동일한 문제가 울려 퍼진다. (MP 228, 354-355) -
[traverser의 의미가 에피쿠로스의 자유를 위한 형성으로서 빗금(déclinaison)이란 의미보다, 현상의 표면에서 활동의 능동
성을 강조한 것이다.]
영미 소설가들은 기표의 벽을 관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고 있었다.
크리스트 이후로, 크리스트를 통해 그것을 시작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었다.
그러나 크리스트 자신도 가로지르기(traversée)와 도약(saut)에 실패했다. (MP 229 356)
[유일신앙 종교 속에서 기표의 관통은 내가보기에 불가능하다. 그것은 벽을 뒤로 물릴 수 있을 뿐이다.
기표를 기만과 미신으로 치부해야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50SKH)]
벽을 통과하기, 중국인들은 아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댓가로?
동물-되기, 꽃이나 바위-되기를 댓가로, 또는 이상한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사랑하기와 하나일 수밖에 없는 냉혹하게-
되기(devenir-dur)를 댓가로.
이것은 설사 제자리에서 일지라도 속도의 문제이다.
이것은 또한 얼굴을 해체하기 또는 밀러가 말한 것처럼 더 이상 눈을, 눈 안을 바라보지 않기, 헤엄쳐 눈을 가로지르고, 자기
몸을 늘 더 큰 속도로 움직이는 빛살로 만들기인가?
물론 여기에는 예술, 최고의 예술의 모든 자원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글의 모든 선, 회화성의 모든 선, 음악성의 모든 선 등이 있어야만 한다. (229, 356).
왜냐하면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글(l’écriture)을 통해서이고, 지각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색(la couleur)에 의해서이고,
냉혹하고 기억이 없게 되는 동시에 동물이 되고 지각 불가능하게 되는 것, 즉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음악(la musique)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결코 목적(fin, 끝)이 아니다.
예술은 삶의 선들(les lignes de vie)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229-230, 356-357)
[동물되기가 글쓰기라는 것은 좀 이상한데... 밀러의 예인가보다. 카프카의 벌레되기(변신)이라든지. ]
다시 말해 예술은 안에서 생산되는 것은 아닌 이 모든 실재적 생성들, 예술 안으로 도주하는 것, 예술 안으로 피신하는 것에
있지 않은 이 모든 능동적인 도주들[탈주들], 예술 위에서 재영토화 되지 않고 오히려 예술을 탈기표작용적인 것, 탈주체적인 것, 얼굴-없음의 영역 쪽으로 데려갈 이 긍정적 탈영토화들인 삶의 선들(les lignes de vie)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인 것이다.
(230, 357) [크리스트-0년의 얼굴이 아닌 삶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 사는 것이먼저고 철학은 다음이다. ]
357얼굴을 해체하기,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광기의 위험이 있다.
분열증 환자가 얼굴, 자신의 얼굴과 타인들의 얼굴의 의미를, 풍경의 의미, 언어와 그것의 지배적인 기표작용들의 의미를
동시에 상실하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일까? (230, 357)
경련이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얼굴의 주권적인 조직화에서 벗어나려 하는 얼굴성의 특징과 이 특징 위에서
갇히고 그것을 다시 붙잡고 그것의 도주선을 봉쇄하고 그것을 다시 조직화하는 얼굴 그 자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싸움이다
(단속성 또는 발작성 경련과 강직성 또는 경직성 경련 사이의 의학적 구분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도주하려는 얼굴성의
특징의 우세, 후자의 경우에서는 가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하는 얼굴의 조직화의 우세를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얼굴 해체하기가 커다란 일인인 것은 이것이 단순한 경련의 역사라든가 아마추어나 탐지주의자의 모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굴이 정치라면, 얼굴 해체하기 역시도 정치의 하나이고, 실재적 생성들, 전적으로 잠행자-되기에 관여한다. (357)
분열분석의 프로그램과 슬로건은 이렇게 된다. 당신의 검은 구멍들과 흰 벽을 찾아라, 그것들을 인식하라, 당신의 얼굴들을
인식하라, 당신은 그것을 다른 식으로는 망가뜨리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다른 식으로는 당신의 도주선을 그리지 못할 것이다. (358)
358따라서 이제 다시 우리는 실천적 신중함들을 배가해야 한다. 우선 문제는 결코 <…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문제는 원시인들의 전-기표작용적이고 전-주체적인 기호계로 “되돌아가기”가 아니다.
우리는 흑인이나 인디언, 심지어 중국인인 척하는 데 언제나 실패할 것이다. (231, 358)
로렌스가 멜빌에게 유감 스러운 것은 단 한가지였다. 그것은 얼굴, 눈과 지평선, 벽과 구멍을 가로지르는 법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잇었다는 점, 하지만 동시에 이 가로지름, 이 창조의 선을 “불가능한 회귀”, 티피(Typee)의 미개인들로의 회귀와 혼동했으며, 예술가로 머물면서 삶을 증오하는 방식,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는 보장된 방식과 혼동했다는 점이다. (“... 멜빌은 근본적으로 신비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였다. ... 그는 자신의 이상적인 총들에 집착했다. 나는 내 것들을 버린다. 나는 말하노니, 옛 총들은 썩게하라. 새것들을 구해서, 똑바로 쏘아라.”)(231, 358-359)
359우리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오로지 신경증 환자만이, 또는 로렌스가 말하듯 “배교자”, 기만자만이 퇴행을 시도한다. 왜냐하면 기표의 하얀 벽, 주체성의 검은 구멍, 얼굴 기계는 막다른 골목이며, 우리 굴복과 예속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났고, 우리가 몸부림쳐야 할 곳은 그 위이다.(231 359) [심층에서 솟아나서 그 표면에서 살고 행동하고 죽는다]
오직 얼굴 한 가운데에서, 얼굴의 검은 구멍의 바닥에서, 하얀 벽 위에서만 우리는 새들처럼 얼굴성의 특징들을 해방시킬 수 있으며, 원시적인 머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특징들이 그 자체로 풍경에서 해방된 풍경성의 특징들과 연결접속 되고, 각각의 코드로부터 해방된 회화성과 음악성의 특징들과 연결접속되는 조합들을 발명할 수 있다. (232, 360)
화가들이 모든 의미에서, 모든 방향에서 크리스트의 얼굴 자체를 이용했을 때 얼마나 기뻣을까. 그 기쁨은 단지 그리려는 욕망의 기쁨만이 아닌 모든 욕망들의 기쁨이었으리라. 그리고 궁정 소설의 기사의 경우, 우리는 그의 긴장증이 그가 검은 구멍 깊은 곳에 있다는 점에서 유래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여행을 위해 그를 거기서 빠져나오게 한 입자들에 그가 올라타고 달린다는 점에서 유래하는지 말할 수 있을까? 랑슬로에 비견되었던 로렌스는 이렇게 쓴다. “머리를 비운 채 기억 없이 혼자 있기. (....) 햇빛 비치는 모래 위에 있는 거무스름한 원주민처럼 혼자 있거나 없거나 있거나. (....) 멀리로, 멀리로, 마치 죽은 후에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다른 행성 위에 착륙한 듯이. (....) 풍경?- 그는 풍경에 관해선 개념치 않았음. 인류? - 존재하지 않았음. 사유? - 돌처럼 물속으로 떨어졌음. 위대한, 매혹적 과거? - 바닷가에 던져진 부서지기 쉬운 반투명한 조개껍질처럼 얇게 달아빠져 부서지기 쉬움.” (232, 360)
361우리는 추상적인 기계의 서로 다른 두 상태를 본 셈이다. 때로는 그것은 단지 상대적인 탈영토화를 또는 절대적이지만 부정적인 채로 남아있는 탈영토화들을 보장하는 지층들 안에 잡혀있고, 그와 반대로 때로는 새로운 추상적인 기계들을 형성하는 힘으로써 “도표적인”기능, 긍정적인 탈영토화의 가치를 그것에 부여하는 고른판 위에서 전개되었다. 때로 추상적인 기계는 얼굴성 기계로서, 의미 생성들과 주체화들 위에 나무성의 노드들과 소멸의 구멍들 위에 흐름들을 몰아간다. 그와 반대로 때로 추상적인 기계는 진정한 “탈얼굴화”의 수행자로서, 자신의 행로에서 지층들을 해체하고, 의미생성의 벽들을 관통하고, 주체화의 구멍들에서 분출하고, 진정한 리좀들을 위해 나무를 쓰러뜨리고, 긍정적인 탈영토화의 선들과 창조적인 도주선들 위로 흐름들을 인도하는 일종의 자동유도장치(têtes chercheuse)들을 해방시킨다. (232-233, 361)
그러나 얼굴성에서 해방된 각각의 특징들은 풍경성, 회화성, 음악성에서 해방된 특징과 함께 리좀을 만든다. 그것은 부분대상들의 모임이 아니라 살아있는 블록, 줄기들의 연결접속이다.
362얼굴,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자연스런 얼굴은 모공들, 평평한 부분들, 뿌연 부분들, 빛나는 부분들, 하얀 부분들, 구멍들을 가진 달의 풍경이다. 얼굴을 비인간화하기 위해 그것을 클로즈업 할 필요가 없다. (233, 362) [타인의 시선이 나의 지옥이라는 사르트르나, 윤구병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고슴도치들이 서로 끌어안고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50SKH)]
사실상 비인간성들만이 존재한다. 인간은 아주 상이한 본성들에 따라, 아주 상이한 속도로 아주 상이한 비인간성들로부터만 만들어진다. .. 얼굴 너머에 완전히 다른 비인간성(une tout autre inhumanité)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원시적인 머리의 비인간성이 아니다. (233, 362) [새로운 되기의 비인간성, 잡초되기, 나무되기, 고원되기, 아오지되기, 산(山)되기, 자연되기도 있을 것이다.(50SLC)] [- 그러면 본성(la nature)을 찾을라나? ]
잠행자(Devenir-Clandestin)가 되어라, 도처에서 리좀을 만들어라. 인간적이지 않은 삶의 경이를 창조하기 위하여. 내 사랑 얼굴이여, 마침내 자동유도장치가 되는 …. 선(禪)의 해[年], 오메가의 해(w의 해)…. 원시적인 머리, 크리스트-얼굴, 그리고 자동유도장치들, 이렇게 세 가지 상태에서 끝나야 하는가, 더는 없고? (234, 363)
철학미학 - 생명과 혁명 ( 발제문 모음 / 다중지성공원)
다지원 생명과 혁명 세미나(6월 5일)발제자 김영철
텍스트 : <천개의 고원> 들뢰즈 가타리 공저, 김재인 역, 938쪽 미학모델 ~ 945쪽 18
< 내용 요약 >
1. 유목민 예술과 이 예술의 계승자를 정의하기 위해 많은 실천적. 이론적인 개념들이 고안되었다.
우선 원거리 파악과 구별되는 근거리 파악이 있다.
두 번째로 광학적 공간과 구별되는 “촉각적 공간” 또는 오히려 “촉지적 공간”이라는 개념이 있다.
“촉지적”이라는 말은 두 감각 기관을 대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눈 자체가 광학적 기능 이외의 기능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938
1-1 촉지적이고 근거리 파악적인 매끈한 공간의 첫 번째 측면은 방향, 좌표, 접속의 연속적 변주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점점 더 가까이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먼 곳을 볼 수 없으며, 또한 이 공간을 멀리서 볼 수도 없다.
어떤 “정면”에 있는 것도 그렇다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단지 어떤 것 “위에” 있을 뿐이다.) 939
1-2 “단자론적” 관점은 오직 유목적 공간에만 접속될 수 있다.
전체와 부분들은 그것들을 보고 있는 눈에 광학적인 것이 아닌 촉지적인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접촉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동물성으로, 눈에 의지하더라도 정신이 손이 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이보다 훨씬 통속적이긴 하지만 만화경도 똑같은 기능을 한다. 눈에 손가락의 기능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940
1-3 가까이에서 파악하면 공간은 이미 시각적인 것이 아니다.
눈 자체가 광학적인 것이 아니라 촉지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대지와 하늘은 어떠한 선에 의해서도 나누어지지 않는데, 이 둘이 동일한 실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평선도, 배경도, 원근법도, 한계도, 윤곽이나 형태도, 중심도 없다.
중개적인 거리는 없으며, 오히려 모든 거리가 중개적이다. 에스키모의 공간처럼 말이다. 941
2. 제국의 대 종교들은 (사막과 같은) 매끈한 공간을 필요로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매끈한 공간에 하나의 법을, 즉 모든 점에서 노모스에 대립하며 절대적인 것을 전환시키는 하나의 법을 부여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943
3. 우리가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이원성을 환기시키는 것은 “촉지적인 것”, “ 근거리 파악”이라는
차이 자체도 이러한 구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3-1 발달된 광학적 기능은 빛을 해방시키고 색을 변조시키며 또 평면들이 서로 간섭하는 제한되지 않은 장소를 구성하는
일종의 대기적인 촉지적 공간을 복원함으로써 매끈한 것을 다시 줄 수도 있다. 945
천개의 고원, 945-952, 이서현
1. 요약
1.1. 보링거는 추상적인 선이라는 관념에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이 선이 예술이 시작하는 점 자체 또는 예술 의지의 최초의
표현이라고 강조한다.
1.2. 보링거는 추상적인 선을 기하학적 결정적 형태로, 즉 직선적인 이집트 제국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처럼 본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추상적인 선을 유목적인 선으로, 이 선은 다양한 방향성을 갖고, 점이나 형상이나 윤곽 사이를
지나는 추상적인 선이다.
1.3. 들뢰즈와 가타리의 추상적인 선은 매끈한 공간들의 변용태이지 홈파기에 호소하는 불안감이 아니다.
1.4. 완전히 선사예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직선이 아닌 추상적인 선을 사용했기 때문이며, 원시예술은 추상적인 것 또는
전-구상적인 것에서 시작한다.
1.5. 제국적인 선들은 추상적인 선과 동시에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1.6. 추상적인 선은 정주민 예술의 제국적인 선과 상호 작용, 영향력 행사, 투쟁을 계속하면서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유목민 예술의 독자성 속에서 나타난다.
1.7. 추상과 구상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1.8. 추상적인 선은 아무 것도 제한하지 않고 어떠한 윤곽도 그리니 않는 선...연속적 변주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는 선을 말한다.
1.9. 추상적인 선은 점들의 공명이나 선들의 접합접속에 기초한 안정된 대칭적 표현의 양식을 구성하지 않는다.
1.10. 추상적인 선은 선과 더불어 이동하며 효과를 조금씩 증가시켜 나가는 표현의 질료적 특질을 갖고 있다.
1.11. 보링거는 추상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을 대립시킨다.
1.12. 보링거는 기계론적이며 자유로운 행동의 선, 소둉돌이적 선이라는 것을 유목적인 선이라고 말한다.
1.13. 유목적인 선은 비유기적이기때문에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것은 기하학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모두와 구별된다.
1.14. 유기적인 재현이 홈이 패인 공간을 주재하는 감정이듯이 추상적인 선은 매끈한 공간의 변용태이다.
1.15. 추상적인 선은 기하학적인 것과 직선적인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
□다지원 생명과 혁명 세미나 ∥ 2016년 6월 5일 일요일 ∥ 발제자: 손보미
텍스트: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옮김, 952~962
1. 요약
14 1440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1. 공간은 그 안에서 행사되는 힘들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홈이 파이고,
또 공간은이 과정에서 다른 힘들을 발전시켜 이러한 홈 파기를 가로질러 새로운 매끈한 공간들을 출현시킨다.
빠르건 느리건 운동만으로도 다시 매끈한 공간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매끈한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 충분하다고 절대 믿어서는 안된다. (953)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S 지층, 성층 작용
1.2. 지층은 대지라는 <몸체>위에 빽빽해지는 현상으로, 분자적인 동시에 그램분자적이다.
각각의 지층 또는 분절은 코드화된 환경과 형식화된 실체로 구성되는데, 형식과 실제, 코드와 환경은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분절의 추상적 성분들이다. (957)
1.3. 지층은 다양한 형식의 조직화 <유형>과 다양한 실체의 전개 <양태>를 갖고 있으며, 그 결과 지층은 곁지층과 겉지층으로 나뉜다.
하지만 모든 지층은 조성의 통일성을 지니며 이는 지층의 모든 실체나 환경에 있는 실체적 요소 또는 공통된 재료와도 관련
되어 있다. (957~958)
1.4. 지층들에는 커다란 유동성이 있다. 두 지층 사이에 또는 지층들이 둘로 나뉠 때 사이지층 현상들 즉, 코드 변환, 환경의
변화, 혼합들이 나타나는데, 이는 성층작용의 활동이기도 하다.
성층 작용은 카오스로 부터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으며, 이 창조는 연속적으로 갱신되는 창조이다. (958)
1.5. 하나의 층을 구성하는 분절은 항상 이중 분절이다. 그것은 하나의 내용과 하나의 표현을 분절한다. 형식과 실체는 실재적
으로 구분되지 않는 반면, 내용과 표현은 실재적으로 구분된다.
내용과 표현은 각각 나름의 형식과 실체를 갖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일치 관계도, 원인-경과 관계도, 기표-기의 관계도 없다. 실재적인 구분, 상호 전제, 그리고 동형성이 있을 뿐이다. (958)
1.6.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 비유기체적 생명, 비인간적 생성이 그저 순수하고 단순한 카오스와는 다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아주 신중한 구체적 규칙들을 따라야만 한다. (959)
A 배치물
1.7. 배치물들은 지층들 속에서 만들어지지만, 환경이라는 탈코드화 지대에서 작동한다.
배치물은 환경에서 하나의 영토를 솎아낸다. 영토는 온갖 종류의 탈코드화된 단편들로 만들어진다.
여기서는 리듬들조차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리토르넬로) 영토는 배치물을 만든다.
영토는 배치물을 만든다. 영토는 유기체와 환경을 한꺼번에 초과하며, 이 둘간의 관계를 초과한다. (960)
1.8. 영토적인 것인 한 배치물은 아직 지층에 속해 있다. 그러나 배치물이 지층들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거기에서 표현은
기호 체계가 되고, 내용은 실천 체계, 능동작용과 수동작용이 되기 때문이다. (960~961)
모든 배치물은 한편으로는 기계적 배치물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아직 지층들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가 설립된다.
즉, 언표나 표현은 몸체나 내용에 그런 것(성질)으로서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을 표현해준다. (961)
1.9. 배치물의 또 다른 측면은 바로 이 배치물을 가로지르고 탈취하는 탈영토화의 선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961)
배치물의 영토성은 환경에 대한 특정한 탈코드화에서 기원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필연적으로 이 탈영토화의 선들로
연장된다. 영토는 탈영토화와 분리될 수 없다. (962)
2. 질문하거나 토론하고 싶은 문제
2.1. 성층 작용과 배치물의 관계.
성층 작용은 카오스로 부터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며 리듬과 관계가 있다.(958)
그리고 영토적 배치물에서는 리듬들조차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고 되어있다.(960)
그렇다면, 성층 작용에 의해 발생한 리듬이 영토적 배치물에서리토르넬로가 된다고 이해 할 수 있을까?
2.2. <A 배치물>에 나오는 “비물체적 변형” (961)에 대한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발제문 p 962 R 리좀 ~ 969. 10 창조자라고
1. 요 약
리 좀
962. 지층뿐 아니라 배치물도 선들의 복합체이다.
963. 첫 번째 상태의 선이 그리는 공간은 홈이 패인 공간이다.
그램분자적이며 나무형태의 이항적, 원형적 절편적 체계를 형성한다.
두 번째 선의 종류는 분자적이며 리좀 유형을 하고 있다. 이 선은 윤곽을 만들지 않으며, 사물들 사이를, 점들 사이를 지나간다. 하나의 판을 그리고 고름을 획득한다. 그것은 다양체, 유목적이고 특이한 다양체이다.
이 두 유형을 구분한다고 해도 이 둘은 서로 내재적이며,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상대방으로부터 ‘나온다.’
964. 나무 형태의 다양체와 그렇지 않은 다양체가 있다기보다는 다양체의 나무화가 있다.
접합 접속되어 분자적 흐름들의 축적점이나 응고점들을 절편화하고 정정할 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리고 리좀의 줄기들은 나무에서 나무로 도약하며 뿌리에서 벗어나는 연결 접속들을 끊임없이
발명해낸다.
공간은 온통 매끈해져서 이번엔 홈이 패인 공간에 다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리좀의 선들은 나무의 선들과 이 선들을 탈취하는 도주선이나 단절선 사이에서 오간다.
이 세 가지 선들은 나름의 위험을 갖고 있다.
즉 등질적인 공간의 홈파기를 강요하는 절편적인 선, 검은 구멍으로 운반하는 분자적인 선, 순수하고 파괴의 선으로 돌아설
위험을 간직한 도주선들이다.
고른판, 기관없는 몸체
965. 고른판 또는 조성의 판(평면태)은 조직의 판 또는 전개의 판과 대립된다.
조직과 전개는 형식 및 실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고른판은 실체나 형식을 알지 못한다. 이 판 위에 새겨지는 <이것임>들은 개체화의 양태들이다.
이 판은 강렬한 변용태들의 조성 속에 추상적이지만 실재적으로 존재한다.
둘째로 고름은 이질적인 것들, 이산적인 것들을 구체적으로 고르게 재결합한다.
고름은 필연적으로 중간에서, 중간을 통해 작용하며, 합목적성의 판과 대립된다.
고른판에는 <이것임>, 유목적 본질, 강렬함의 연속체, 연속적 변주, 근방역으로 끌고 들어가는 생성들, 매끈한 공간이 새겨진다. 매번 기관없는 몸체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966. 이 판은 일렬로 늘어서 있는 문들과 같다. 이 판이 즉 연결접속 양태가 기관없는 몸체에 필적하는 텅 비고 암적인 몸체를 제거할 수단을, 매끈한 공간을 뒤덮고 있는 등질적인 표면을 처치할 수단을, 도주선의 길을 바꾸는 죽음과 파괴의 선을
중성화할 수단을 제공한다.
연결접속의 수를 증대시켜 주는 것만이 유지되고 보존되고, 따라서 창조되고 존속되는 것이다.
탈영토화
967. 탈영토화의 기능, 그것은 도주선의 작동이다.
기표작용적 체제에서 높은 층위의 D에 이르지만, 그것은 재영토화의 체계 전체를 작동시켜 도주선을 봉쇄하며 부정적 D만을 존속시킨다.
한편 D가 긍정적이되고 그러면서도 상대적인 것으로 머물 때, D는 검은 구멍들 속으로 빠지거나 검은 구명(파국)으로 종결
된다. 정념적이고 의식적인 D를 동반하는 주체적 기호 체제의 경우가 그러하다.
968. 이러한 D의 두 가지 주요 형태는 후자가 전자에서 나올 수도 있고 전자로 갈 수도 있다.
D의 온갖 종류의 혼합된 모습들이 있는 것이다.
D, 영토, 재영토화, 대지 사이의 관계
1) 영토 자체는 내부에서 탈영토화를 작동시키는 탈영토화의 벡터들과 분리될 수 없다.
2) D는 자신과 상관관계에 있는 재영토화들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재영토화는 영토로의 회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D 자체에 내재하는 미분적 관계들, 도주선에 내재하는 다양체를 표현한다.
3) 대지는 D의 반대가 아니다. 대지는 영토 바깥에 있으며, 오직 D의 운동 안에만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지는 <우주(Cosmos)>에 속해 있으며, 인간이 우주의 힘들을 포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재료로 제시된다.
D는 대지의 창조자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단지 재영토화가 아니라 새로운 대지, 하나의 우주의 창조자라고.
2. 이해가 안되는 부분
2.1 p 963, 파토스 관점, 실천의 관점, 이론의 관점이란?
3. 토론하고 싶은 부분
3.1 도주선의 위험성과 창조성, 그리고 신중함이란?
□다지원 생명과 혁명 세미나 ∥ 2016년 6월 5일 일요일 ∥ 발제자: 김정연
텍스트: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969. 11 ~ 976 끝
1. 요약
1.1. “절대”란 초월적인 것이나 미분화된 것을 표현하지 않으며 상대적 운동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운동 유형을 표현할 뿐이다.
1.2. 어떤 운동이 절대적일 때는 운동의 양과 속도가 어떻든 다양하다고 여겨진 “하나의” 몸체를 매끈한 공간에 관련시킬
때이며 이때 이 몸체는 이 공간을 소용돌이치는 방식으로 차지한다.
어떤 운동이 상대적일 때는 운동의 양과 속도가 어떻든 <하나>로 여겨진 몸체를 홈이 패인 공간에 관련시킬 때인데, 이때
이 몸체는 이 공간 안에서 자리를 바꾸고 또 적어도 잠재적인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직선에 따라 이 공간을 측정한다. (969)
1.3. 절대적 D는 반드시 상대적 D를 통과하며, 역으로 상대적 또는 부정적 D 자신도 작동하려면 상대적 D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적어도 D의 네 가지 형태가 서로 대적하고 조합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체적 규칙들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970)
M 추상적인 기계들(도표와 문)
1.4. 추상적인 기계들은 구체적 배치물들 속에서 작동한다. 그것들은 배치물의 네 번째 측면, 즉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점들에 의해 정의된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형식들과 실체들을 알지 못한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과 형식적이지 않은 기계
들로 이루어져 있다.(971)
분명 배치물의 여러 차원 안에서 추상적인 기계들은 자유상태를 갖는 여러 형식들과 실체들 속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동시에 추상적인 기계는 자신을 조성하고 고른판을 조성해야만 했다.
1.5. 추상적인 기계들이 형식과 실체를 알지 못하면 지층들 또는 나아가 배치물들의 또 다른 규정인 내용과 표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고른판은 하나의 연속적 변주의 판이며, 각각의 추상적인 기계는 내용과 표현의 변수들을 연속시켜주는 변주의 “고원”으로
간주될 수 있다. 또 내용과 표현이라는 구분은 특질이라는 상태에서 존속하고 심지어 재창조된다. (972)
1.6. 결과적으로 절대적 탈영토화는 “탈영토화하는 것”과 “탈영토화되는 것”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리고 각 경우마다 하나는 표현에 다른 하나는 내용에 분배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행해지지만 언제나 이 둘 사이에는 상대적 구분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연속적 변주는 필연적으로 내용과 표현 모두를 변용시키지만, 그에 못지않게 여전히 하나의 동일한 생성의 요소들로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흐름의 양자들로서 두 가지 비대칭적 역할을 분배한다.(973)
1.7. “특정한(la)” 추상적인 기계가 매우 특수한 조건에서 초월적인 모델로 기능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구체적 배치물들은 <기계>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과 관련되며, 그것들이 기계를 실현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들의
잠재성과 창조성을 고려하는 계수들에 의해 변용된다.
1.8. 우리는 특히 이형조성적이고 인간 형태의 두 가지 거대한 배치물인 전쟁기계와 국가장치를 살펴보았다.(974)
전쟁 “기계”는 그것의 변신역량을 잃게 만드는 국가 장치보다 추상적인 기계에 더 가까이 있다.
배치물은 연결접속들을 더 많이 열어놓고 배가시킬수록, 또 강렬함들과 다짐을 양화하는 장치들을 가지고 고른판을 더
많이 그릴수록 그만큼 더 살아있는 추상적인 기계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배치물이 창조적인 연결접속들을, 블록화를 만들어내는 집합접속들(공리계들), 지층을 만들어내는 조직들(지층
측정기들), 검은 구멍을 만들어내는 재영토화들(절편 측정기들), 죽음의 선들로의 전환들(파괴 측정기들)로 대신할수록
추상적인 기계에서 멀어진다. (975)
1.9. 모든 추상적인 기계들은 다른 추상적인 기계와 연관되어 있다.
추상적인 기계들이 정치적, 경제적, 과학적, 예술적, 생태학적, 우주적이고 또 감각적, 정서적, 능동적, 사유적, 물리적,
기호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서로 경합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상이한 유형들을 교차시키기 때문이다.
기계권. (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