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부사는 송기로(宋綺老, 1830~1898)이다. 1882년(고종 19) 12월 28일에 장흥부사에 임명되었다가 1884년(고종 21) 7월 13일에 광주목사와 상환(相換)되었다.
송기로(宋綺老)
1830년(순조 30)∼1898년(고종 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중호(仲皓), 호는 송석(松石).
아버지 송윤희(宋潤熙)와 어머니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864년(고종 1) 음사(蔭仕)로 휘릉참봉(徽陵參奉)이 되었으며, 이후 전생서부봉사(典牲暑副奉事)‧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한성돈녕(漢城敦寧)‧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평강현감(平康縣監)과 의령현감(宜寧縣監), 김제군수(金提郡守)를 지냈다. 그 외 1885년(고종 22) 광주목사(光州牧使)를 거쳐 서흥부사(瑞興府使)를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공주판관(公州判官)에 제수되었다가 1887년(고종 24)에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에도 계속 외직을 맡아, 장흥부사(長興府使)와 순창군수(淳昌郡守)‧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냈다.
1889년(고종 26)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가, 2년 뒤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올랐다. 얼마 후 다시 부호군(副護軍)이 되었으며,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자리를 옮겼다. 1892년(고종 29) 거창부사(居昌府使)로 임명되었다가 다시금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 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대전 회덕(懷德)으로 돌아왔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유성에서 문석봉(文錫鳳)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는데, 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1898년(광무 2) 2월 26일 사망하였다. 내신협판(內新協辦)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석집(松石集)』 5책(冊)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