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7년판 영화 <오리엔트 특극열차 살인>에서 케네스 브래넌이 분한 포와르 탐정
[ 세기의 레판토 해전 ]
오스만 제국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다음 서쪽으로 팽창함에 따라 지중해에서도 투르크 갤리선(1)은 동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부근 해역의 제해권을 장악합니다. 이후 16세기 중엽이 되자 터키인들은 서부 지중해 해역까지도 위협을 가합니다. 1571년, 교황 피우스 5세가 이와 같은 이교도인 투르크인들의 위협에 직면하자 십자군 조직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베네치아 공화국도 동지중해의 무역 거점이자 전초기지인 키프러스 섬(2)을 상실할 위험에 처했습니다.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기독교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세기의 해상 전투라고 일컬어지는 레판토 해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결과는 기독교 국가들이 결성한 신성동맹 함대가 오스 만 제국의 함대에 승리를 거둡니다. 오스만제국의 팽창을 저지했다고 평가받는 이 세기적인 레판토 해전은 투르크 군대가 1570년 6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였던 키프로스 섬을 함락하면서 촉발이 됩니다.
* 레판토 해전에서 신성동맹측 병사들
* 키프로스 함락
베네치아 공화국이 다스리는 키프로스 섬은 동지중해 한복판, 이슬람 세력권인 아나톨리아와 레반트(3), 이집트 사이에 유유하게 떠 있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동지중해 전체의 무역로를 통제한다는 잇점 때문에 키프로스는 크레타와 더불어 당시 베네치아의 중요한 해외 영토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키프로스가 동지중해 한복판에 있다는 점은 곧바로 동지중해를 장악한 오스만 제국이 이곳을 눈엣가시로 보고 공격해 올 확률도 크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베네치아는 그동안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평화적으로 키프로스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매년 공납금을 받아먹으며 키프로스의 안전을 보장하긴 했지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베네치아가 영원히 키프로스를 지배하도록 놔 둘 의향이 없었습니다.
* 키프러스 섬, 왼쪽에 크레타 섬이...
더군다나 키프로스에 근거지를 둔 기독교도 해적선들이 한창 항해 중인 무슬림 상인들 또는 메카로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들을 공격하는 바람에 오스만 제국의 부아를 돋우고 있었습니다.대제 슐레이만 1세의 뒤를 이은 술탄 셀림 2세는 1566년 즉위 때부터 "짐의 첫 번째 목표는 키프로스이노라"라고 선언하며 키프로스 정복을 천명한 상황이었습니다. 곧 이어 주화파였던 재상 소콜루보다는 주전파의 의견이 우세해지면서 오스만 제국의 키프로스 침공이 결정되었습니다.
당시 키프로스에는 1만 명 전후의 베네치아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은 8만 명이 넘는 대병력을 이끌고 왔던 까닭에 애초부터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오스만 군은 상륙하자마자 키프로스 전역을 유린했습니다. 다행히 파마구스타는 튼튼하게 요새화된 지역이었고 요새와 연결될 수 있는 항구가 있어서 보급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포위망을 구축한 오스만군은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이듬해 4월까지 기다렸습니다.
* 오늘날의 파마구스타, 그리스령입니다
마침내 그 규모를 20만 명으로 늘인 오스만 군대는 넉 달의 공격 끝에 결국은 파마구스타를 함락했습니다. 하지만 당초 항복할 경우 키프로스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베네치아 군대는 크레타 섬으로 보내주기로 약속했으나 오스만군 사령관이었던 라라 무스타파 파샤는 애초부터 이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 휘하 병사 가운데 5만이 전사한데다 전투 도중 포로로 잡힌 오스만군이 예외 없이 처형당했고 더구나 자신의 장남이 전사한 데에 격분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군은 파마구스타 수비군 사령관인 마칸토니오의 귀와 코를 베서 끌고 다니다가 살가죽을 벗겨 허수아비를 만들었습니다. 마칸토니오는 살가죽이 벗겨진 상태에서도 얼마간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죽이 벗겨진 채로 흙바닥에 끌려 다니다가 소금기 가득한 바닷물에 수차례 담가지기를 반복하는 등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 밖에 마칸토니오의 부관들도 모조리 속을 내장을 드러내어 허수아비로 만들어 전리품으로 베네치아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베네치아 군대는 물론 교황청을 비롯한 스페인 등 기독교 국가들의 격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제 두 세력 간에 충돌만이 남았습니다.
* 키프러스 혹은 사이프러스, 오른편에 파마구스타가 보입니다.
< 레판토 해전 >
넉 달 가까운 공격 끝에 키프로스의 파마구스타를 함락한 뒤 오스만제국의 함대는 그리스 코린트만의 레판토 해 부근인 파트라스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집결해 있던 기독교 신성동맹의 함대는 파마구스타 함락 소식을 듣고 바로 아드리아해 입구의 코르푸 섬에 기착한 다음, 10월 7일 레판토로 출동했습니다.
신성동맹의 함대는 200척 이상의 갤리 선, 6척의 갈레아스 선(4), 24척의 대형 수송선, 그리고 50척의 소형선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알리 파샤가 이끄는 투르크 함대는 250척의 갤리선, 60척의 갤리오트 선(소형 갤리 선)으로 구성되었습니다.
* 레판토 해전 상상도
당시 해상에서의 전투는 배끼리 부딪치고, 배에 기어올라 싸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기어올라 싸우는 전투 병력은 신성동맹 측 20,000명, 투르크 측 16,000명이었습니다. 노를 젓고 항해하는 데 투입된 이른바 노잡이들은 이보다 훨씬 많아 각각 64,000명과 72,000명이었습니다.
* 갤리선
레판토 해전에서 사용된 주력 전함은 갤리 선으로서 페르시아 전쟁 중 살라미스 해전(4)에서 사용된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당시 갤리 선은 길고 협소하며, 갑판이 하나인 배로서 길이 약 150피트와 무게 170톤쯤 되었습니다. 배 양쪽에 30개씩 60개의 노를 설치하고, 각각의 노에는 4~6명의 선원을 배치하는데 주로 노예들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바람이 좋을 때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돛을 사용했으나, 갤리 선은 기본적으로 노를 저어 항해하는 배였습니다.
* 신성동맹 총사령관 돈 후안(왼쪽)
양측 갤리 선은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유형이나 약간의 차이가 났는데, 그 차이가 나중에 상당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신성동맹 측 갤리 선은 뱃머리에 5문의 대포를 올려놓았고, 약간 작은 투르크 갤리 선에는 3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성동맹 측 함대만이 보유한 무지막지하게 큰 갈레아스 선은 무려 30문의 대포를 장착했습니다.
갈레아스 선은 갤리 선보다 약 2배의 크기로서, 느리기는 하지만 많은 병력을 싣고 많은 포를 싣고 있었습니다. 또한 신성동맹 측 병사들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데 반해 투르크 병사들은 주로 활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신성동맹 측은 화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 갈레아스 선
10월 7일 아침 양측 함대는 레판토 서쪽 약 40km 떨어진 곳에서 공격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양측은 8km 전선에 뻗쳐 대치했고, 10시 30분부터 교전을 벌여 정오경에는 주력부대가 완전한 교전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30여 년 전에 프레베자 해전(6)에서 승리를 맛본 적이 있었던 터키군은 사기가 높았고 전의에 불탔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성동맹의 병사들도 키프로스 섬의 오스만 제국 군대의 잔혹한 행위에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 레판토
6척의 거대한 갈레아스 선이 투르크 갤리 선에 대포를 쏘고 전열을 흐트러뜨리면서 양측은 3시간의 난전에 돌입했습니다. 신성동맹 측의 뛰어난 항해술과 병사들의 무장이 우위라는 사실이 점차 입증되면서 점차 투르크 측이 패색을 보이기 시작하자, 육지와 가까운 곳의 투르크 함대는 해안으로 도주하고 신성동맹 측은 먼저 좌익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에서의 전투는 다소 시간을 끌었지만 괴물 같은 갈리아스 선이 마구 설쳐대기 시작하자 투르크 함대의 전열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투르크인들은 화승총에 쓰러졌습니다. 또한 신성동맹 측 함선에 타고 있던 노잡이들은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자유 시민이었고,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그 즉시 무기를 빼들고 싸울 수 있는 전투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갤리선의 노잡이는 기독교도 노예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함대가 조금씩 밀리는 기색이 보이자 노잡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오스만군은 기독교 함대와 교전을 하면서 동시에 노예들의 반란도 진압해야 했으므로 정상적으로 전투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안팎으로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신성동맹의 총 지휘자인 돈 후안 사령관은 투르크의 기함을 쇠갈퀴에 걸어 잡아당기고 군기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상대방 총대장인 알리 파샤의 목을 벰으로써 승리를 결정지었습니다. 우익은 보다 투르크 군의 완강한 저항에 눌려 초기에는 매우 고전했습니다. 그러나 신성동맹 측의 중앙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반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측(신성동맹의 좌측)과 중앙에서 밀리고 있음을 알고 나머지 투르크 함선들은 도주했고 이윽고 4시경에는 모든 전투가 끝이 났습니다.
* 투르크 함선
이 전투에서 투르크 측 손실은 막대했습니다. 53척의 갤리 선이 격침되고 117척과 대포 274문이 포획되었습니다. 15,000~20,000명이 전사하고, 기독교인 노예는 10,000명이 죽고 15,000명이 해방되었습니다. 갑판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터번들이 굴러다녔습니다. 목이 잘린 오스만 병사들의 머리였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시체가 너무 많아 배를 움직이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석양이 지는 에게 해는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한편 신성동맹 측은 13척의 갤리 선과 7,566명을 상실하는 데 불과했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기독교 세력은 투르크의 지중해 서쪽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투르크인들은 곧 새로운 함대를 건설했고, 17세기까지 서지중해 지역인 북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 해전 상상도
* 화력으로 승부가 결정 난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되다
이 전투는 약 17만 명의 병력이 맞붙어 해상에서 격돌한 16세기 유럽의 최대 규모 해전이었으며, 화력으로 승부가 결정 난 최초의 해전이었습니다. 동시에 갤리 선 시대의 최후 전투였습니다. 양측 함대는 거의 육군처럼 싸웠습니다. 그들 지휘관들은 육군이었고, 지상에서의 경험을 기초로 한 전술을 적용했습니다. 범선과 포술의 발전에 의해 대양에서 본격적으로 해상세력을 겨루는 해전의 양상은 레판토 이후에 나타났습니다.
(1) 갤리선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지중해의 지배자였던 범선의 한 종류이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주로 사용했다. 노를 주로 쓰고 돛을 보조로 썼다.
(2) 키프러스 섬
키프로스는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1960년에 독립했다.
1974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과 터키계 키프로스인 사이에 11년 간의 내부 분쟁(1963–1974)이 끝나고 키프로스 섬을 그리스에 병합하고자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계 키프로스 민족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였고 이때 터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섬의 37%를 점령하했다.
그 후 그리스계가 사는 남부와 터키계가 사는 북부로 분단되었다. 섬의 중앙에 있는 니코시아도 갈라져 세계 유일의 분단 도시로 남아 있다. 그리스계가 거주하는 남쪽은 ‘키프로스 공화국’이라는 국명으로 1960년 독립했지만 터키계가 살고 있는 북부는 아직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3) 레반트
레반트(Levant)는 역사적으로 근동의 팔레스타인(고대의 가나안)과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이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정지역을 명확하게 가리는 용어라기보다는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지닌 지역을 아우르는 용어로 대략 그 범위는 북쪽으로 타우루스 산맥, 서쪽으로 지중해, 남쪽으로 아라비아 사막, 동쪽으로 북서 이라크를 경계로 하는 지역이다.
(4) 갈레아스 선
갈레아스 전함은 갈레아스는 레판토 해전 당시 기독교 함대의 선봉을 담당했던 베네치아의 군함으로 강력한 화력과 범선과 노선의 특징을 모두 갖춘 대형 전투 갤리선이다. 해상포대라는 별명에 걸맞게 갈레아스는 선수에 2문, 선미에 6문, 양 측면에 각 11문 등 30문의 함포를 장착해 단 일격으로 적함을 격침할 수 있을 정도의 화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거대해진 선체로 인해 민첩한 해상기동은 기대하기 힘들었지만 강력한 화력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고 이를 통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해전이 벌어지자 당시 기준으로 갈레아스와 같이 거대하고 강력한 전투함을 본 적이 없었던 터키 함대는 갈레아스의 무시무시한 포격에 큰 혼란에 빠졌다.
(5) 살라미스 해전
제3차 페르시아 전쟁중인 BC 480년 9월 23일,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연합해군이 살라미스 해협에서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괴멸시킨 해전을 말한다. 테르모필레이 방어선을 돌파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끄는 대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아테네를 점령했다 이때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노약자와 부녀자를 피난시키고 페르시아 해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灣)으로 유인하여 11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하였다
(6) 프레베자 해전
1538년 알바니아 해안의 프레베자에서 벌어진 오스만 터키의 함대와 유럽연합함대간의 해전을 말한다. 해적 출신의 바르바로스 파샤라는 뛰어난 제독의 지휘로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오스만 군대는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1537년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했다. 결국 오스만 함대와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유럽연합함대는 1538년 프레베자에서 맞부딪쳤는데 오스만 함대가 승리했다.
[ 오리엔트 특급열차와 페라 팔라스 호텔 ]
이스탄불은 오리엔트 특급 열차의 종착지였으며 영화 <007 위기일발>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또한 영국의 여류 추리 작가의 <오리엔트 특급열차 살인 사건>이라는 소설로 인해 신비스러운 동양의 비밀을 간직한 도시로 남아 있습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걸작 추리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프랑스와 이스탄불을 잇는 초호화 열차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럽의 귀족, 부유층, 지식인들은 이스탄불을 찾아가는 일을 일생의 영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 열차 내부
당시 이 열차는 오늘날의 특급호텔에 결코 뒤지지 않는 화려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독립된 침실은 최고의 장식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좁은 공간이지만 최상의 것을 갖추어놓은 욕실도 세련된 품위가 넘쳐났다고 합니다.
사흘간의 여행 기간 동안 최고의 요리가 펼쳐지는 식당차에서는 유럽은 물론 미국과 전 세계에서 온 사교계 인사들이 술과 연회로 여행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루마니아의 캐롤 왕은 침대차 3425호의 단골 고객이었고, 기차 애호가였던 불가리아의 왕 보리스 3세는 직접 기관차를 운전하기도 했습니다.
* 페라 팔라스 호텔
원래 오리엔트 특급 열차는 1883년 파리를 출발하여 스위스의 로잔느-이탈리아의 베네치아-유고의 베오그라드-불가리아의 소피아-이스탄불의 시르케지 역을 연결하여 운행하다가 나중에는 영국의 런던까지 연장해서 운행되었습니다. 이 열차는 84년 만인 1977년 5월 비행기에 밀려 승객이 감소함에 따라 운행이 중단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과 부호들은 침대차가 주는 안락함을 맛보면서 발칸반도를 지나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동양의 이국적인 신비를 만나곤 했습니다. 열차에서 내린 이들 승객들은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머무는 곳이 바로 페라 팔라스 호텔입니다. 이 호텔은 1895년 문을 열었습니다.
특급 열차를 타고 이스탄불의 시르케지 역에 내린 귀족들이나 부호들은 네 명이 들고 가는 가마를 타고 이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이 호텔이 건축될 당시에는 아메리칸 병원, 이을드즈 궁전과 함께 페라 팔라스 호텔만이 전기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페라 팔라스 호텔은 터키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운영되는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페라 팔라스 호텔입니다. 현재의 페라 팔라스 호텔은 안에 들어가 보면 하나도 새 것이 없고 모두 옛날에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유지 보전하고 있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엘리베이터, 가구, 램프, 유리 등 모두 역사의 향기가 물씬 나는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 아가사 크리스티가 묵던 방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에는 이 호텔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열강의 스파이들이 우글거리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페라 팔라스 호텔은 오리엔트 특급 열차의 승객들이 유숙했다는 사실도 유명하지만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이라는 아가사 크리스트의 추리 소설이 바로 이 호텔에서 쓰여졌다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크리스티는 이 호텔 객실 411호에서 묵었습니다.
* 아가사 크리스티
탄탄한 스토리와 매력적인 캐릭터의 스릴러물인 이 책은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이스탄불에서 런던으로향하는 초호화 열차 안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완벽한 알리바이를 지닌 13명의 용의자와 이를 파헤치는 명탐정 포와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열차 안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눈사태로 오도 가도 못하는 가운데 포와르가 이 사건을 추리해나가는 것으로 되어있는 이 책은 그동안 여러 번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이자 그녀가 탄생시킨 최고의 명탐정 '에르큘 포와르'가 등장하는 작품 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
현재까지 본 적 없는 매혹적인 스릴러의 탄생을 알리고 있는 2017년 판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이스탄불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초호화 열차 안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완벽한 알리바이를 지닌 13명의 용의자와 이를 파헤치는 세계 최고의 탐정 포와르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영국 추리 소설의 황금기를 이끈 대표적인 작가이자 명실상부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탄탄한 스토리가 주는 숨 막히는 긴장감과 초호화 출연진의 완벽한 열연으로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줍니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50년 동안 80여 편의 추리 소설을 집필했고 그녀의 소설들은 10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40억 부 이상을 판매했습니다. 이는 성경과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기록이기도 합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다채롭게 그려진 캐릭터들은 물론 긴장감 넘치는 장면과 미스터리한 분위기,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2017년 판 영화 <오리엔트 특급열차 살인>의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은 케네스 브래너는 원작에 대해 “아가사 크리스티의 원작은 특별한 분위기가 있고 당시 여행의 황금기로 우리를 안내한다”면서 “엄청난 긴장감은 물론 흥미로운 캐릭터와 심오하고도 아슬아슬한 주제가 얽혀있는 작품”이라고 밝히며 깊은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케네스 브래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여행의 황금기는 물론 밀폐된 공간이 주는 재미와 흥분감, 오락 요소 등을 모두 갖춘 작품이다”고 말했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손자인 매튜 프리처는 “화려한 분위기, 스토리의 독창성, 파격적인 해결책이 합쳐진 작품이다”며 기존의 추리 스릴러와 다른 이번 작품만이 가진 독보적인 매력을 전했습니다.
* 제작 노우트이 영화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고전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스크린에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할리우드의 명품 제작진과 스탭들이 똘똘 뭉쳐 완성도를 높이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이 영화는 초호화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그대로 재현한 열차 세트뿐 아니라 이국적인 풍광을 완벽하게 담아냈다는 평이었습니다.
* 영화에서 포와르 탐정, 누가 범인일까?
이스탄불 기차역 세트,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산 세트까지 상상 그 이상의 사실적인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이 영화는 냅킨과 창유리, 그릇, 테이블에 놓인 리넨까지 디테일하게 구현됐습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세계적 명탐정 포와르는 그녀가 탄생시킨 가장 유명한 캐릭터이자 영화의 전체 흐름을 움직이는 중요한 캐릭터입니다. 제작진과 케네스 브래너는 이런 포와르의 캐릭터를 스크린에 완벽하게 구현해내기 위해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케네스 브래너는 포와르로 완벽하게 변신하기 위해 아가사 크리스티가 쓴 포와르의 콧수염에 대한 모든 묘사를 수집했습니다. 그 후 ‘영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콧수염’이라고 묘사된 것에 부합되는 콧수염을 만들기 위해 장장 9개월간의 연구 개발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케네스 브래너는 “포와르에게 콧수염은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며 “헤어 디자이너와 함께 애거서 크리스티의 묘사를 바탕으로 외적으로 화려하면서 중대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콧수염을 디자인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오리엔트 특급 열차는 모든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이자 모든 인물이 등장하는 배경으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제작진은 또 하나의 주인공인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스크린에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논의를 거쳤고 결국 영화의 스토리와 어울리는 완벽한 버전의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제작했습니다.또한 사건의 출발을 알리는 이스탄불 시르케지 역 세트 역시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제작진의 디자인팀은 세트장을 거대한 기둥과 플랫폼, 그리고 두 개의 철로로 채웠습니다. 또한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이스탄불 시르케지 역 세트를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스튜디오의 도로 일부를 막고 철로가 주차장으로 향하도록 하여 기차가 역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완벽하게 연출해낼 수 있었습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첫댓글 레판토해전 흥미롭게읽었읍니다
키프러스 베네치아공국 혹시
지금 이태리의베니스인가요.?
베네치아는 베니스라고도 부릅니다. 베네치아는 이태리어, 베니스는 영어로...
같은 도시이지만 피렌체가 이태리어, 플로렌스가 영어로 불리듯이...옛날 이스
탄불 근무할 당시, 터키령 키프러스의 니코시아에 출장갔을 때 옆방에서 두 남녀
가 지르는 신음소리 때문에 밤새도록 잠을 못 잔 적이...어떻게 그렇게 새벽까지
떡방아를...아침에 일어나 두 남녀의 몰골을 한번 보려고 했지만 해가 중천에 떠
오르도록 끝내 방에서 나오질않더라구요. 허기야 지들도 골아 떨어졌을겁니다. ㅎㅎㅎ
ㅋ 알흠다운 떡의 흑역사가.,!
우리나라도 여인숙 베니야판벽
만만찮습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