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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제4회 철도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전지원
그 플랫폼엔 당신이 있었다 / 전지원
해질녘의 플랫폼은 쓸쓸하면서도 아름답다. 불볕더위에 지친 마음을 위로하듯 작달비가 지나간 저녁이다. 어스름을 뚫고 달려온 기차는 서서히 속도를 늦춰 이내 둔탁한 소음과 함께 정차한다. 습기를 머금은 후덥지근한 바람이 플랫폼을 맴돌다가 나의 머리칼을 스치는 사이, 떠나오거나 어딘가로 떠나가려는 사람들이 한데 뒤섞인다. 기차는 떠날 때에도 바람을남긴다. 쓸쓸한 공기가 떠도는 플랫폼은 고즈넉하다. 나는 미끄러지듯 역사를 빠져나간 기차의 꽁무니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포개지지 않을 듯 평행한 기찻길은 구름마저 붉게 물들인 지평선에 이르러서야 하나로 겹쳐진다. 저만치 멀어져간 기차가 지평선을 넘어 내 시야에서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플랫폼에 머무른다. 어둠 속에 희미한 불빛이 점점 다가왔다 이내 멀어지길 반복하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주먹을 꽉 쥐어본다. 움켜쥔 손아귀에 피어오르던 열기는 손가락을 펴는 순간 허무하게 사라진다. 멀어져간 기차처럼, 사라진 손아귀의 온기처럼, 플랫폼의 당신도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나에게 기차는 아버지와 한 몸 같은 단어였다. 내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기차란 단어를 말할 때부터, 칙칙폭폭 기차 소리와 출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함께 기억하는 더 오래 전부터, 나에게 당신은 기차였고 기차는 곧 당신이었다. 아버지는 역무원이었다. 그는 서른여덟 해의 사계절을 플랫폼에 머물렀다. 플랫폼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당신이 불던 호루라기 소리와 당신이 흔들던 깃발의 움직임은 숱한 사람들과 기차를 연결해준 징검다리였다. 아버지에게 플랫폼은 특별한 의미였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스친 공간이자 자신의 청춘을 송두리째 바친 훌륭한 일터였으며 인생의 달콤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맛 본 곳이었다. 그러니 당신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각별한 장소가 바로 플랫폼인 셈이다.
나는 또 한 대의 기차를 떠나보낸다. 북적이던 사람들이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 플랫폼은 한산하기 짝이 없다. 이따금 뺨을 스치는 바람만이 나를 위로할 뿐이다. 나는 불면의 밤을 보내며 뒤척이거나 좀처럼 휘청 거리는 마음의 갈피를 종잡을 수 없을 때마다 표연히 일상을 떠나곤 했다.
굳이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저 떠나야 한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 내마음과 발이 동시에 향하는 곳으로 차표를 끊을 따름이었다. 누군가가 동행했든 홀로 떠났든 돌아온 뒤의 일상은 떠날 때와 별다를 게 없었다. 허나 복잡했던 마음은 손톱을 정돈한 듯 어느 정도 후련해져 있었다. 번번이 가슴앓이와 함께하긴 했지만 내 청춘의 방랑은 시시하고 따분한 일상을 버텨내게 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어딘가를 향해 서슴없이 떠날 수 있었고 또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의 위로를 주머니에 가득 넣고 돌아온 날이면 나는 오늘처럼 플랫폼에 오래토록 머물렀다.
아무도 없는 플랫폼에서 헛헛한 마음을 느낄 때마다 아버지는 한쪽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곤 했다. 아버지의 호주머니에는 늘 호두 두 알이 들어 있었다. 손을 움직거릴 때마다 두 알의 호두는 서로 부딪히고 부대끼며 조금씩 닳아갔다. 울퉁불퉁하던 표면이 매끄러워지면 아버지는 반질거리는 호두를 나에게 주곤 했다. 때론 거창한 선물을 내놓듯 우쭐거렸고 어떤 때는 연애편지를 내미는 수줍은 소년처럼 배시시 웃었다. 딱히 쓸 데도 없고 때론 성가시게 자리만 차지하는 호두알을 매번 건네받으면서도 나는 아버지에게 그것을 주는 이유를 단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에둘러 하는 말과 진중한 행동에는 나에게 전하고픈 나름의 의미가 녹아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서랍에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호두알이 무심코 나의 시선에 와 박히는 날이면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해득하려 애썼다. 예전엔 아무리 생각해도 몰랐던 손때 묻은 호두알의 의미를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모두가 잠든 새벽 뜬눈으로 플랫폼을 지킨 가장의 무게와 텅 빈 플랫폼에서 맞닥뜨린 인생의 쓸쓸함이 그 호두알에 고스란히 아로새겨졌음을 말이다.
늘 헤어짐에 서툰 나는 첫사랑과의 이별로 한창 냉가슴을 앓던 때가 있었다. 대학 시절의 나는 늘 열차로 통학을 했다. 이른 아침 희부연 안개와 눈부신 햇살이 뒤섞인 기찻길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커피를 마시며 잠을 떨쳐내는 직장인들과 겨드랑이에 두꺼운 전공 서적을 낀 대학생들로 가득한 플랫폼의 아침. 그날도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기차의 도착 시간에 맞춰 플랫폼에 나왔다. 엄연히 아버지의 일터였으므로 평상시 우리 부녀는 눈인사만 가볍게 나눌 뿐 굳이 말을 섞거나 일부러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그날따라 내 . 쪽으로 천천히 걸어온 아버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뭔가를 손에 쥐어줬다. 박하사탕이었다. 좌석에 앉자마자 매번 곯아떨어지던 나였건만 그날만큼은 쉬이 잠들지 못하고 손아귀의 박하사탕을 멀뚱히 쳐다봤다. 기차가 다음 역에 정차했을 때 아버지에게서 <딸내미 화이팅!> 이란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간이역마다 정차하고 또 달려가길 반복하는 익숙한 통근행 기차 안에서 나는 박하사탕을 입에 넣었다. 알싸한 박하향기가 목 안으로 퍼졌다. 나는 박하사탕이 온전히 녹아 사라질 때까지 헤어진 남자친구가 아닌 아버지를 생각했다. 이별 후유증을 톡톡히 앓고 있는 딸을 보며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지 헤아리고 싶었다. 요즘도 코가 뻥 뚫리는 박하사탕의 상쾌함을 맛볼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린다. 인생이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기에 덤덤히 이별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을 상기할 때면 어디선가 박하향이 솔솔 풍겨온다. 그때보다 여러 번의 이별을 경험한 나는 알게 됐다. 갑작스런 이별이든 예견한 이별이든 어떤 식의 헤어짐도 결코 슬프거나 아프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눈물을 참으면 참을수록 뻑적지근한 통증이 가슴 언저리를 쑤시고 다닌다는 것을.
불행은 늘 뒤에서 온다. 방심한 순간 뒤통수를 때리며 다가와 작정한 듯 행복한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재작년 추석 전날 아버지는 소세포암 판정을 받았다. 전이속도가 빠른 이유로 생존율이 매우 낮은 무서운 암이 었다. 치명적인 병명이 새겨진 진단서를 보자마자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보호자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당신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아버지는 휴직한 이후에도 종종 옷장에 걸린 코레일 유니폼을 매만지곤 했다. 언젠가 애써 서운함을 숨기던 아버지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출근하고 싶어?”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지금은 무엇보다 건강이 먼저잖아. 빨리 나아서 다시 일하러 가자, 알겠지?”
아버지는 유니폼을 입고 다시 플랫폼에 서길 간절한 바랐다. 그 간절함은 서울 병원을 오가며 받은 혹독한 항암치료를 묵묵히 견뎌내게 하는 힘이었다. 아버지는 워낙 무던한 사람인지라 힘들다는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내놓은 적이 없었다 살고 . 싶다는 생각 하나로 구역질을 참았고 덤덤히 통증을 견뎠다. 하지만 고통을 감내하는 당신의 필사적인 노력을 배반하듯 의사는 번번이 나에게 절망스런 말만 쏟아냈다. 나는 의사와 마주한 순간에도 손등을 꼬집으며 병원 천장을 올려다봤다. 차마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물론 아버지에게 가망 없다는 말을 전할 자신도 없었다. 흔들리는 딸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진즉에 알아챈 당신 앞에서 나는 천연덕스레 거짓말을 둘러댔다. 이번 고비만 잘 버티면 완치할 수 있노라고. 아버지는 나의 뻔한 거짓말에 일부러 속아주며 나보다 먼저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기차에 내려 버스로 한참을 더 가야 하는 병원이었지만 아버지는 자가용 대신 한사코 기차를 타겠다고 고집했다. 항암치료로 쇠약해진 아버지와 수차례 서울을 오가는 동안, 나는 당신과 함께한 기차에서 절망과 행복을 동시에 맛봤다. 깍지 낀 손에서 당신의 체온을 느낄 수 있어 행복했고 따사로운 온기를 오래토록 만끽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일 년만 살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매일같이 반복하며 나는 희망을 꿈꾸곤 했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기차를 탔던 날,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도저히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의 몸 구석구석을 장악한 암 덩어리의 전이 속도는 원망스럽게도 너무 빨랐다. 잠든 아버지 곁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틀어막고 숨죽여 오열했다. 우리에게 이별이란 종착역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더욱이 아버지 혼자 애처롭게 저승행 열차로 갈아타야 한다는 게 애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 날 아버지는 머리카락이 모조리 빠져버린 암환자의 모습으로 일터인 플랫폼에 섰다. 여전히 사람들은 제각각 어딘가로 흩어졌고 기차는 철로를 따라 무심히 떠나갔다.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강인한 아버지는 한참동안 기찻길을 바라보다가 플랫폼에서 서럽게 흐느꼈다. 멀어지다 결국 사라져 버린 기차처럼 아버지도 우리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음을 그때서야 비로소 실감했다.
작년 추석 연휴 내내 나는 아버지 곁을 지켰다. 어지러움과 구토를 수차례 반복하던 아버지는 독한 약기운에 취해 줄곧 잠만 잤다. 행여나 잠결에 당신이 나를 두고 떠날까봐 몇 번이나 숨소리를 확인했고, 종종 불안을 떨쳐내지 못해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플레인 요구르트 몇 숟갈을 겨우 삼킬 정도로 아버지는 위독한 상태였다. 당신의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것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커다란 등이 좋았다. 그 등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포근했다. 열한 살 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먹지도 걷지도 못한 적이 있었다. 매일 유동식만 먹던 터라 기운이 없던 나는 매일 누워 있기 일쑤였다. 한번은 아버지가 나를 업고 동네 약수터에 간 적이 있었다. 가는 도중 슈퍼에 들러 플레인 요구르트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샀다. 약수터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아버지는 나에게 플레인 요구르트를 떠먹이며 간간이 소주를 들이켰다. 해질 무렵 나를 업고 약수터를 내려오던 아버지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당신의 커다란 등이 들썩였다.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은 나의 팔 위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오래토록 슬픔을 비축한 사람이 터트리는 눈물에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가슴 통증이 동반돼 있음을,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나에게 떠먹여준 플레인 요구르트를 아픈 당신에게 떠먹이며 깨달았다.
연휴가 시작되면서 아버지의 배에 복수가 차올랐다. 부풀어 오르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불룩한 배를 본 아버지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복수는 죽음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 당신이었으니 불안한건 당연했다.
“딸내미, 나 항암주사 언제 맞아?”
부푸는 배를 만지던 아버지가 나의 팔을 잡고 물었다. 나는 황량한 병원 복도에서 의사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란 말을 이미 들은 후였다.
“아빠, 지금 간이 안 좋아서 링거 맞고 있잖아. 이거 조금만 더 맞고나면 항암치료 할 거래.”
나는 끝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당신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딸이었다. 그 거짓말이 현명했는지 어리석었는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애썼을 거란 건 분명하다.
추석 이튿날 새벽에는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줄곧 약기운에 취해 잠만 자던 아버지가 간병인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딸내미, 나 이제 뭐할까?”
환자들의 코고는 소리가 서글프게 맴도는 불 꺼진 병실에서였다. 나는 흐린 불빛 속에서 아버지와 눈을 가까이 맞췄다.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에 미안함이 그득했다.
“아빠, 지금 밖에 비와. 눈 감고 빗소리 한번 들어봐.”
“그래. 우리 딸내미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
“응, 졸리면 눈 감고 편하게 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타닥타닥 병실 유리창에 빗물이 튀겼다. 당신과 맞잡은 손아귀에서 서서히 온기가 피어올랐다. 하필이면 내 아버지에게 모진 병이 닥쳤느냐고 세상을 원망했던 마음이, 치열하게 투병 중인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절망하던 내 우울과 무력감이 당신과 맞잡은 그 손아귀에서 조금 녹아내렸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나름의 용기도 생겼고, 당신의 체온을 기억하는 한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힘차게 살아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비로소 나에게 닥칠 이별을 최대한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연휴가 끝난 다음날이었다. 퇴근길에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당신에게로 달려갔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몇 번이나 연습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은 임종의 순간 당신에게 꼭 전하고픈 마지막 인사였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전날과 달리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한바탕 고통을 맞선 뒤에야 아버지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차분히 침대에 누웠다. 준비했던 인사를 건네야 하는 순간이었다.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더욱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진심을 담은 말을 망가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여태껏 나를 키워줘서 고마워. 평생 고생만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파.
무거운 짐은 다 내려놓고 가요. 거기 가서는 절대 아프지 말아요. 어떻게든 정말 살리고 싶었는데 못 살려줘서 미안해. 아빠는 나한테 최고의 아버지였어요. 다음 세상에서도 우리 꼭 부녀로 만나. 그때는 내 자식으로 태어나. 아빠가 그랬듯이 내가 아낌없이 사랑해줄게. 사랑해요 아빠.”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렸다.
“사랑해, 고생했어.”
단 두 마디 말을 두 개의 호두알처럼 남긴 후 당신은 말문을 닫았다. 호스피스 병실로 당신을 옮기는데 병원 복도의 형광등 불빛 때문인지 아버지가 잠시 눈을 떠 나를 바라봤다. 짧은 순간 마주한 그 눈빛이 미안해하지 말라고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승을 등지는 순간엔 잠을 자듯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모습이었다. 가장이란 짐을 짊어지고 오랫동안 플랫폼에 섰던 당신의 두 발을 나는 한참동안 어루만졌다. 생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일 년을 버텨준 당신이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웠다. 아버지는 죽는 그 순간조차 삶을 포기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코레일에서 보내온 화환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장식했다. 조문객들이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마다 내 귀에서는 철로를 달려가는 기차 소리가 맴돌았다. 나는 아버지의 차가운 뺨에 입을 맞췄고 두 발에 꽃신을 신겨드렸다. 입관 후 조용히 눈감은 아버지의 몸에 38년간 착용한 코레일 유니폼을 얹어드렸다. 그 유니폼을 입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한 당신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화장터로 가는 길에 아버지가 근무한 기차역 주변을 잠시 맴돌았다. 여느 때처럼 기차는 역사를 들어왔고 곧 다음 정거장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갔다. 기찻길을 따라 영구차도 달렸다. 한 줌의 재로 돌아온 나의 아버지는 그토록 사랑했던 플랫폼을 떠났고 숱한 삶의 의미를 나에게 남긴 채 떠나갔다.
아버지의 미니홈피에는 ‘기찻길 옆 떠돌이 나그네’라고 당신을 수식한 글귀가 여전히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있다. 기찻길 옆 떠돌이 나그네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아버지는 그토록 사랑했던 기차에 몸을 싣고 전국을 유랑하고 있을 터이다. 나는 여전히 눈물이 날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에게 닥친 슬픔을 정복하는 중이다. 때때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픔이 차오르거나 문득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에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엔 오늘처럼 당신이 머물던 플랫폼을 서성인다. 38년간 플랫폼에 머물렀던 당신은 지금도 기차바퀴의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에게로 온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당신은 기차와 함께 나에게로 왔다가 또 떠나갈 것이다. 기차는 늘 달린다. 우리에게 다가왔다가 떠나간 기차는 지나간 시간처럼 되돌릴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하기에 숱한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인 플랫폼은 매순간순간마다 저마다의 기억에 특별한 사연과 함께 기록되는 것이다. 코레일의 유니폼을 입고 플랫폼에 당당히 섰던 당신을, 이승에 남아있다면 6월에 영광스럽게 퇴직했을 아버지를 내 마음에 아로새긴다. 살면서 굳게 다잡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날 테고 기찻길을 떠돌던 당신과 바람처럼 만나고 또 바람처럼 이별할 것이다 . 그 바람 속에 깃든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를 양쪽 주머니에 가득 담아 돌아온 날이면 당신이 머물던 플랫폼을 오랫동안 서성이며 나지막하게 말할 것이다. 그 플랫폼엔 나를 사랑해준,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