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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넷째주 메시지 세상에 참남편은 없다
요한복음 4장 강해 3부 세상에 참 남편은 없다
말씀 요한복음 4장 15-18
요절 16절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오늘 말씀의 제목이 ‘참 남편은 없다’ 입니다. 당시의 남편은 지금의 남편과 달랐습니다. 남편은 생계를 책임져주는 존재였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그런 남자를 찾으려고 방황하였지만 그런 남자는 없었습니다. 그가 세계의 모든 남자를 만나도 그런 남자는 없습니다. 남자는 같은 피조물이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먹고 사는 것을 책임져주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주고 우리가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참 남편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구하였습니다.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처음에는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야곱보다 더 좋은 분으로 알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생수를 달라고 합니다.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합니다. 그 생수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여인은 지금 그 물이 성령인지는 모르나 그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신비한 물로 생각하였습니다.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로 생각하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그 신비한 샘물을 구하였습니다.
여인은 지금까지 수가의 우물물을 통하여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남편을 통하여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섯 명의 남편과 결혼하고 지금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어도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탈진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성령의 생수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그 생수를 지금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물을 먹고 다시는 물 길러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힘들게 바꾸지 않고 살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영혼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목마름을 육신적인 것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여인은 남편을 통하여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성공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쾌락을 통하여, 그 목마름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금물처럼 더 갈증을 증폭시킬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우리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통해서 갈증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단념하고 예수님을 통하여 목마름을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저는 부에 대한 목마름은 약간 있었지만 목회자로서 성공과 명예에 대한 목마름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을 단념하는 이런 시를 써보았습니다. 쇼츠로도 올리자 조회수가 오백 회가 넘어셨습니다.
나는 실패한 목회자가 되고 싶다
성공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나는 배고픈 목회자가 되고 싶다.
돈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나는 무명한 목회자가 되고 싶다
명예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나는 주님을 위해서 욕 얻어먹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
하늘의 큰 상을 위해서
이렇게 실패한 목회자가 되고, 무명의 목회자가 되고, 가난한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남편을 남편으로 생각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결단을 하였을 때 오히려 나의 마음에는 평안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2) 거짓 남편을 불러와야 영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구하는 여인에게 뜬금없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을 불러와야 생수를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인은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남편이 있었습니다. 여인에게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여인은 하나님보다 남편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도 남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나님보다 남편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인은 남편 때문에 울고 웃었습니다. 남편 없이는 못살았습니다. 그것이 여인의 우상입니다. 이런 우상숭배가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에게도 남편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처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그것 없이는 못 사는 것, 그것 때문에 울고 웃는 것,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우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영생의 샘물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됩니다. 영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해도 나의 우상을 찾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우리의 우상을 찾는 아주 쉬운 방법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허전하고 불안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우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가 남편이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오지 않자 그들은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요즘에도 사람마다 남편은 다릅니다. 실제 남편이나 아내가 남편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나 쾌락이이나 인정이 남편이 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남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독된 것이 남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치우고 그것이 있던 자리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성령의 샘물이 솟아납니다.
최일도 목사의 아내는 김연수 사모입니다. 그 분의 간증을 들으며 저는 두 개의 남편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연수 사모는 수녀였습니다. 최일도 목사보다 다섯 살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김연수 사모는 결혼하지 않고 수녀로 살고자 종신서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최일도 목사가 그녀를 사랑하여 결혼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최일도 목사의 어머니는 홀어머니입니다. 홀어머니를 설득하여 김연수 사모에게 한 남자 살리는 셈 치고 결혼해 달라고 편지도 썼습니다. 김연수 사모는 수녀로서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자신이 한 사람을 죽게하는 것으로 갈등하였습니다. 한 사람 살리는 셈치고 수녀를 그만 두고 당시 신대원생인 최목사와 결혼하였습니다.
두 명의 아이를 낳자 시어머니가 아이를 보아주고 학교선생하며 시어머니랑 5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시어머니는 홀어머니고 최일도 목사는 외아들이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아들은 아들이고 남편이고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내와 손 붙잡고 들어오는 것도 시기 나서 보지 못하였습니다. 온갖 트집을 잡아서 혼내켰습니다. 당시 최목사는 신대원생이고 김연수 사모는 당시 국어 선생으로 경제문제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은 시어머니랑 살 수 없을 것 같아 굶어죽으려고 강원도 예수원으로 갔습니다. 며칠을 굶었는데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장애물 앞에서 즐겁게 노래부르며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 시냇물도 장애물을 만나서 노래를 부르는데 나는 시어머니의 장애물을 만나서 자살하고자 하려고 했다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편집기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정리하며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후 남편에게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엄마를 내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최목사는 울며불며 슬퍼하는 어머니를 내 보냈습니다. 그리고 모든 돈이나 선물을 아내를 통해서 어머니를 주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회복되고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시어머니의 마음 속에 있는 아들 우상을 제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김 사모는 최목사에게 어머니를 보내지 않으려면 이혼하자고 하였습니다. 사실 최목사에게 아내는 아내이면서 인생의 전부인 신적인 존재입니다. 아내가 없이는 살 수 없고 죽고자 하는 자였습니다. 수녀를 찾아가 결혼해 달라고 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녀가 가는 곳마다 찾아가고 전화를 하였습니다. 최목사에게 우상은 아내였습니다. 이혼하자는 말을 통해서 최목사도 아내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마음의 첫 자리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남편이든 어머니든 중심에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모셔야 참 행복이 있습니다.
둘째, 남편을 불러오라고 한 것은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으로 인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이혼하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꽁꽁 숨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상처를 고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상처를 치료해야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아픈 상처를 드러내야 합니다. 아픈 곳은 수술을 하듯이 아픈 상처를 드러내야 합니다. 조심스럽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 상처를 예수님의 피로 씻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안에 예수님을 모실 수 있고 성령의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나도 11년 동안 감추었던 죄를 드러냈을 때 성령의 강물이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3) 참 남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영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이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에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진심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여자가 과거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그들이 참 남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있는 자도 함께 살고 있으나 참 남편이 아니니 여인의 말이 참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진정한 남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셔서 그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사람이 참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만을 참 남편으로 모시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참 남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 아내도 없습니다. 참 부모도 없습니다. 참 자녀도 없습니다. 참 스승도, 참 제자도 없습니다. 참 지도자도, 참 백성도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예수님만이 참 남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아버지라고 불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지도자라고 불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참 지도자는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참 스승은 성령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린느 남편 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할 때 ‘너 없이는 못산다’는 사람과 결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나를 참 남편이나 참 아내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우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결혼하면 피곤하고 그 사람도 참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상처만 받습니다. 우리는 ‘너 없어도 잘 살아!’ 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너 없어도 예수님이 있어서 잘 산다는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한 분이 있어서 행복하다 충분하다 넘친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너가 있으니 더 좋다는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백예슬의 자기 고백적인 노래가 있습니다. “너 없이도 잘 살더라”입니다.
유난히 추웠던 밤에
마지막 너의 모습은
왜 이리도 좋아 보여
마치 내가
널 붙잡은 것처럼
설명하는 너를 나는 왜
듣고 있었어
혹시나 하고
사랑을 말하던 너를
기다렸었는데
너 없이도 잘 살더라
와르르 쏟아진 그날
모든 게 깜깜해진
맘들이 이제는
무뎌져 괜찮아지더라
또 혼자라서
하지 못했던 것들 다
할 수 있어서
바쁘게 지나가는 하루에
더 이상 아프지가 않아
이 노래는 한 남자를 왜 그리도 좋아보여서 집착하였는데, 그 남자가 사랑한다는 말해 주기를 기다렸는데, 남자는 여자가 그를 붙잡은 것처럼 말하고 결국은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헤어져 보니 그 사람 없이 못 살 줄 알알았는데 그 사람 없이도 잘 살더라는 것입니다. 헤어질 때 모든 것이 깜깜해져서 절망했지만 지금은 괜찮아지고 혼자서 할 수 있고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 없이는 못 살아 하는 그것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있으면 돈 없이도 잘 잘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자유함이 있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참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그것이 있어서 더 좋은 것입니다. 돈이 있어서 더 좋고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자녀가 있어서 더 좋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결론) 예수님이 참 남편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에서 남편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요 존재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의 대상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못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불안하고 허전해 지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참 남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참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참 남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참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경배의 대상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행복해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돈도 벌어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어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채워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머니가 위대해도 자녀의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자가 양들의 마음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의지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참 남편으로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것이 있어서 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 4장 강해 3부 세상에 참 남편은 없다
말씀 요한복음 4장 15-18
요절 16절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한복음 4장 강해 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