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가문들이 정계를 좌지우지한다. 귀족들은 과거 등을 통해 중앙에 본격 진출한다. 관직을 세습하고 독점시스템을 구축한다. 유력 귀족 가문들끼리 혼인을 통해 강력한 정치 카르텔을 구축한다. 카르텔은 동종 혹은 유사 산업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이 상호간의 경쟁을 제한하고 완화함으로써 시장을 지배할 목적으로 결성한 기업연합체를 말한다. 카르텔 형성은 문벌 귀족사회를 성립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제도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음서라는 또 하나의 제도가 만들어진다. 기득권들의 자제들이 과거라는 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갈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일반 서민들의 자제들의 등용문이 그만큼 좁아지고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문벌 귀족들이 온 나라를 장악한다. 그속에 포함되지 않으면 그냥 그들의 하인노릇이나 해야 한다. 고려시대때 일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현상이 참으로 데자뷔되지 않은가.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바로 그 데자뷔 말이다. 1000년전인 고려시대에 일어난 일들이 요즘과 비교해도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에는 문벌이 모든 것을 장악했다면 현대는 문벌에다 재벌이 가세한 그런 모양새이다. 하긴 과거 고려시대에도 문벌들이 재벌 역할을 대행해했으니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현대에 계급 시스템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현대에는 더욱 요상한 모습의 신계급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한때 사법 고시라는 것이 있어 개천에서도 용이 나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한학기에 엄청난 경비가 드는 로스쿨에 일반 서민들의 자녀들이 도전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자식 로스쿨에 보내려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다 걸기 전에는 말이다. 그렇게 배출된 로스쿨 졸업자들이 이 나라 법조계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 대열에 끼지 않고는 문벌 조직에 끼워보려는 꿈은 이제 꾸기도 힘들게 생겼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집안의 자녀들이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좋으니 그 대열에서 이탈한 부류는 신계급체계에서 하층부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못난 부모를 탓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때는 좋은 머리라도 물려주면 그 자녀들이 각고의 노력끝에 그야말로 용이 되는 현실도 존재했지만 이제는 그럴 가능성이 갈수록 희박해진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라가 가진 부의 대부분을 재벌을 비롯한 경제의 용들이 차지하고 있다. 나름 이 나라 최고의 학부라는 데를 나와야 재벌들이 소유하고 있는 일류 기업체에 갈 수 있다. 여기서도 제외된 부류들이 갈 수 있는데는 공무원밖에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공준생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용은 어렵지만 이무기라도 되고 싶었던 부류들이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공준생 아니든가. 하지만 그 공무원생활도 쉽지가 않다고 한다. 박봉에 희생을 강요하는 공무원사회 속성상 젊은이들이 쉽게 피로감을 느끼고 좌절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공무원 연금이 나름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해 힘들어도 정년까지 참아보자 했지만 이제 연금 개혁의 움직임앞에 그런 희망도 점차 사라져 가는 현실이다.
게다가 인공지능이라는 요상한 괴물이 사회전반에 걸쳐 맹활약하고 있다. 어릴적부터 피나게 연습했던 음악과 미술을 인공지능이라는 괴물은 순식간에 해결해 버린다. 수십년 노력한 그 결실물을 AI는 단 몇분만에 종결시켜 버린다. 그 힘들게 자리를 잡았던 의사 판검사 그리고 회계사 자리도 곧 AI의 몫으로 변할 것이라 예상된다. 일반 회사 직원의 자리도 AI에게 빼앗길 것은 뻔한 일이기도 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문벌과 재벌들의 나라가 된지 오래이다. 문벌과 재벌의 지배속에 이제 AI에게 일할 자리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도처에 적군뿐이고 아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점차 늙어가는 부모의 모습이 처량해 보인다. 그러니 좌절을 하게 된다. 그런 좌절속에 무슨 연애며 결혼이며 자녀 출산의 마음이 들겠는가. 그냥 내 한몸 간수하기도 버거운데 무슨 나라의 장래를, 미래를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출산률과 관련한 대통령의 말이 귀속에 담기겠는가. 문벌 귀족 독점 사회가 단지 고려시대에 국한된 현상이라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 시간이다.
2023년 4월 3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