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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반가워."
양손을 흔들며 너스레를 떠는 그녀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이나 초록색 눈동자는 확실히 눈에 띈다.
바닐라색의 부드러운 천장과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 청동색기둥이 천장의 소형 조명을 은은히 반사하며 박혀있어 매우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움이 감도는 웨스턴호텔의 프론트 안이다.
특급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호텔이지만 내부는 조금 시끌벅적한 정도였다.
"오랜만이군. 말테."
그 인파사이로 나타난것은 오늘 오후 나의 뇌리에 멋대로 목소리를 쏘아보냈던 자칭 마법세계의 신검이신 여자다.
여행자. 라는느낌으로 진청색 티에 갈색 판쵸 코트를 단추를 푼체로 걸치고 있다.
"말테언니.. 안녕하세요오.."
어쩐지 부끄러운듯 고개를 조아리는 인사를 했는데 한쪽팔이 부자연스러운 형세를 하고있기 때문이다.
태화는 계속 잡고있던 손을 이제야 놓아주었다.
"응~ 안녕. 제법 사이가 좋아졌는걸?"
"아, 아니에요 이건 태화가.. 우..!"
노려보자 가차없이 심술굿은 미소를 띄우는것으로 태화는 화답했다.
말테는 아메리칸식이라는 느낌으로 이아를 껴안았다.
"안돼~! 우리 순진한 이아가 저런녀석 한테 넘어가면."
이아는 말테의 격렬한 인사에 맥을 못추린다.
"어이.."
태화는 그녀의 전 제산이 될 물건을 손가락에서 빼냈다.
아직 조금의 온기가 남아있다.
티잉-
그것을 튕기자 태화는 이아의 어깨 너머로 말테의 눈이 번쩍이는걸 봤다.
손이 비이상적인 궤적을 그리며 뻗어왔다.
당연히 그것은 허공을 잡을 뿐이었지만.
순간이지만 주변의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을정도의 엄청난 수가 펼쳐졌다.
"흥. 언제까지 여기있을셈이야? 올라가자."
목표물을 놓친 말테는 분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안고있던 이아에게 분풀이다.
"아~아~ 말테언니. 그만해요~"
삐져나온 푸른색 바보털 한올이 삐질삐질 거린다.
"이아도 좀 놔주고..!"
태화는 말테와 이아를 한꺼번에 밀어버렸다.
"우아아.."
"우앗!"
이런 호텔과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들이구만. 라고 생각하며 태화는 홀로 승강기쪽으로 걸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텐션이 오른 여자들을 기다렸다.
"호오? 천화고교의 학생아닌가."
"네?"
생소한 목소리가 들리는곳으로 태화는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는 웬일로?"
말끔한 외모에 포마드컷을한 젊은 신사였다.
'내 또래 정도인가.'
태화는 상대방의 기운과 혈맥을 읽고서 자신과 또래인 사람이라는걸 알았다.
"아. 알던 지인과 약속이 있어서."
그래서 반말로 말을 꺼냈건만.
"뭐? 아하하하핫."
뚜벅뚜벅뚜벅.
구두굽 소리를 내며 다가온 건장한 경호원 3명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아아. 모르고 그럴수도 있지. 그런데 너 말야. 아무리 또래라도 그렇지 처음만난 상대한테 반말해도 되는거야?"
상대를 내려보는 건방진 말투 회색안구와 눈이 맞는다.
물론 이정도쯤에 마음의 동료따윈 일지않는다.
마찬가지로 흔들림없는 어조로 답해준다.
"죄송합니다."
"하핫. 너 재미있네. 그럼 난 이만 갈게. 아, 이 형님 들도 같이 타야할텐데. 비좁지 않을까?"
같이 승강기를 타지않겠다는 의미인가. 것보다 자기는 왜 반말인데?
"먼저 쓰세요."
쓸데없는 트러블이 일어날 확률이 다분하기에 태화는 고이 보내주었다.
띵. 말끔한 센님은 뒤도돌아보지않고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
"최상층까지 올라가는거냐."
멈추지않고 상승하는 승강기의 층번호를 보며 중얼거렸다.
잠시후 여자둘이 다가왔다.
"어이~ 태화. 좀 잡아주지 그랬어. 여기 승강기 충분히 넓은데 말이야. 아니면 부잣집 도련님에게 쫄았다던가?"
"봤다면 알잖아. 귀찮아질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다른승강기 타지뭐."
"...."
이아는 딱히 특별한 평가를 하지않았다.
다시한번 버튼을 누른 승강기가 빠른속도로 도착했고, 태화일동 3명만이 그곳에 올랐다.
"그나저나 너도 최상위층이었다니, 스위트룸이라도 빌린거야?"
"오오.. 스위트룸인가요. 기대되네요."
말테는 당연하다는듯이 말했다.
"하아. 누군가씨를 위해서 세계를 돌아다닌 나한테 그정도 포상은 줄수도있는거잖아?"
"그러셔."
"?"
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너희들 알고있니? 이 웨스턴호텔에 엮인 초능력으로인해 발발한 세계3차대전의 스토리."
내가 언짢은 시선을 보내자 말테가 화제를 바꿧다.
"아! 알고있어요."
"모르는데."
"흐음 태화가 살던 산골에는 전쟁의 영향이 미치지않았던 거야?"
"뭐. 그렇다고 할 수있지.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잘모르지만."
창과 칼, 활부림으로 세상이 어지럽던 무림의 세대에 그다지 이름을 날리진 않았지만 소수에 의해 전수되어왔던 화천(花川)파의 무공비서들과 신공서들은 무사히 보존되어있다.
제대로 지켜낸 것이리라.
흔적수준으로 남아있는 그쪽세계에서 정문대인((正門大人)이라고 불리는 할아버지는 실제로 은거중에 살아계시기도 하고.
"이 웨스턴 호텔은 세계3차 대전때에도 파괴되지않고 살아남은 건물로 유명해. 화기부족으로 약세에 놓인 한국이 연합군에의해서 수도권까지 밀렸던때, 한국군의 절대적인 군사력 '시조'가 거주하는 최우선방위 건물인 이 웨스턴 호텔의 코앞까지 적들이 들이닥쳤지."
"호오."
태화가 흥미를 보였다.
"그들의 주무기인 과학력과 초능력을 결합해서 만들어낸 최초의 무기. 강력한 전차들이 쏜 입자포탄이 에너지 베리어마저 뚫어버리고서 호텔의 외벽에 적중하려던 순간, 이게웬일. 난입한 염동계열 능력자가 그 모든것을 쳐내 상황을 역전시켜버린거야. 덕분에 시조는 과도한 초능력의 사용으로인한 피로를 회복할수있게 되었고 회복된 그녀가 부활하는순간 그것으로 파이널. 바깥의 동상과 기념비에 적혀있는 동상의.."
띵. 11층에 도달한 승강기가 띵하고 공기를 울리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다함께 내리고 말테가 선두에 서서 걸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동상의 인물은 바로."
"이동진씨죠? 염동력에대한 수많은 연구논문을 써 텔레키네시스를 현대의 제 1 초능력으로 발전하게 만든 전설의 인물이잖아요."
"우윽. 그렇지."
마지막을 빼앗긴 이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뚜벅뚜벅 걷는와중에 태화는 그런 말테를 보며 슬쩍 웃고서 물었다.
"전설의 인물이라니. 그분은 돌아가신거야?"
"응. 유작(遺作)인 염동파동(念動波動)[Telekinesis Wave]에 대한 논문을 쓰시던중 화재로.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여러가지 음모론이 돌기도 했지만 수차례에 걸친 염동능력 사용으로인해 과부화된 실험실 안의 기계들이 폭발하면서 겉잡을수없는 화재가 발생한 것이 원인으로 규명되었어. 당시 염동력을 막아내는 소재는 발명되지 않았고 후두부에 손상이 발견된것으로 보아 파편에 의해 의식을 잃어 화를 당하게 됬다는게 유력한 설이야."
E.D.R.인 이아답게 이런 부분에서 박식했다.
말테는 1111호 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서 뒤돌아보았다.
"그럼. 이것도 알고있어? 이 호실이 바로 그 이동진이 당시에 머물렀다던 방이라는거! 오늘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는데, 지친몸을 끌고서 기어온 내가 첫번째 투숙객이 되었단 말씀!"
"오,오오..! 그거 대단한 우연이네요. 신기해요."
이아가 쥐어짜낸듯이 소심히 손뼉을 쳤다.
"아무리 그래도 기어왔을리가.. 나 들으라고 하는소리냐?"
태화는 태화대로 차분.
시선이 다른곳으로 가있다.
다른사람이었다면 오버 오브 오버의 리액션을 보이겠지만 이 둘은 이런면에서 닮아있다.
안달난것은 오히려 말테였지만 툴툴거릴정도로 유치하진 않다.
아무렴 어떠랴는식으로 도어에 패스카드를 긁었다.
철컥. 상투적인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3명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커텐너머의 창을통해 뉘엿뉘엿 기운 해의 애절스러운 붉은빛이 방안으로 들어와 고급가구들에 스며든다.
매일매일 다른 일몰시간의 햇빛을 방안에 들어오는 순간 목격하게 되는 우연이야말로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것이다.
"침실은 들어가지말고, 잠시 TV라도 보면서 쉬고있어."
"그다지 어둡지도 않은데 불을 켜다니. 무드가 없는거냐 너는. 이런 장관을 보여주는 대자연의 뜻을 알아야 하는것이거늘."
"네네~ 혼자서 노을을 주제로 시라도 쓰시지 그러세요?"
태화의 자연 찬양발언에 비아냥거리고서 차라도 내중요량인지 말테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거실만 40평쯤되는 넓은 크기에 안락하고 편안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현대적인 가구들이과 최신 전자기기가 놓여있다.
태화는 교복의 마이를 벗고 패브릭소재로 만든 쿠션이 달린 1인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흐음."
장식장위에 올려진 봉우리가 잘린 역삼각뿔모양의 스텐드조명이 낮은 위치에서 확실한 빛을 내어 방안을 밝혀 주고있다.
태화 키보다 조금높은 위치에 놓인 직사각형 창을따라 파노라마처럼 바깥의 풍경이 보이며 노을빛이 들어온다.
조금있으면 별빛들로 바뀌게 되겠지.
태화가 가만히 앉아 전망을 음미하고있는와중에 이아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여념이없다.
"오.. 샤워룸 외벽이 SLD(슈퍼네추얼 라이트 디스플레이)로 도배되어있다니.. 그리고 찻장에는 맛있어 보이는 쿠키가.. 이 의자도 완전 예쁘다. 물병조차도 예쁘군.."
아예 수색수준이다.
"야야. 방금 밥먹었는데 쿠키에 시선좀 두지마. 그냥 좀 가만히있어."
먼지가 날리는 일은 없지만 왔다갔다거리는게 약간 정신사나웠다.
"이런곳은 처음인걸~ 제대로 봐두지않으면 아깝잖아~"
'금산의 고급 아파트라면 이방보다 더 넓지않을까.'
"그런데.. 말테는 어디간거지?"
주방으로 간지 시간이 좀 지났건만, 돌아오질 않았다.
그보다 어쩌다보니 이아와 함께 오게 되었지만 원래는 은밀히 해야할 얘기였을 것이다.
얼마지나지않아 태화의 목소리에 재촉된듯이 슬라이딩식으로 되어있는 침실쪽 문이 스륵하고 열렸다.
나타난 말테는 온몸에 김을 폴폴 풍기며 가운을 걸치고 있다.
주방쪽으로 가길레 음료라도 내올줄 알았는데, 바로 목욕이냐. 게다가 침실에서 나오다니? 어떤구조로 되어있는거야 이방.
"후우~ 간단히 샤워좀 했어. 이쪽에도 욕실이 있거든."
"에에. 그새 샤워를 하셨어요? 태화를 부르고서 오자마자 샤워라니..이거 전개가 좀 묘하네요."
호텔과 샤워라는 조합으로 그런 생각을 해내다니.
같이 다니면서 알게된것은 이아는 의외로 여러가지 장르에 해박하다는것이었다.
"하하하. 해외에서 날아올때부터 머리를 감지않아서. 영 찜찜해서 말야."
비행기값 절약을 위해 오지탐험을 하던중에 블링크로 지나가던 비행기에 무임승차했다는것과 그후 과정에 대해선 물론 비밀이었다.
말테가 찡긋하며 이쪽을 바라봤다.
'도착하자마자 연락했다는것인가. 정말 급했구나.'
태화는 헛다리짚은 이아가 창피해하며 도망가는것을 방자한 체 자세를 풀며 생각을 전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할거야? 이아도 따라와 버렸는데..]
말테가 테이블하나를 거리로 둔 대형소파에 앉았다.
목욕후 가운이라는 옷의 분위기가 있어서 그런지 은근히 고혹적이었다.
아직 물기가 남아있기도 하고, 덕분에 각종 말단세포가 매우 발달해있는 태화는 그녀의 체취를 확실히 각인했다.
아니 그냥 숨쉬는데 나는데 어쩌라고. 불가항력이었다.
하던거 계속하라는듯이 허락의 제스처를 옥색눈동자가 취한다.
물론 말테의 이 행동에는 절대 이유가 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무성으로 말했다.
핑크색 입술이 옆으로 늘어난다.
-네말대로. 조금 여유있게 알아보려고. 마력도 거의 다 썼고 말이야.
"그런데 검은?"
이부분만은 음성으로 말한다.
"제대로 가져왔다고."
남자치곤 흰 왼손 검지에 끼여져있는 은색반지.
변형물질이라는것으로 서울의 중심부에서 번듯한 집한체 사고도 남을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물론 현대에서 변형물질은 그런 엄청난 가치가 있는 물질은 아니었지만 말테에 의하면 검을 만들 때 사용한 소재가 상당히 값어치가 있다는 것이다.
순순히 그것을 빼고서 뻘쭘함을 무릎쓰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아에게 휙 던져주었다.
"에? 이게뭐야? 먼가 무게감이없네.."
"이아야. 그거 내가 맡겨둔 반지거든 이리주렴."
말테가 '귀찮게'라는 표정으로 태화를 바라봤다.
"아. 여기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 생각해봤어요!"
"?"
"저 여기서 하루 묵어도 될까요 언니? 이틀 후까지 있는다고 하셨죠?"
"딱히 상관없는데.."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부터 예상했다만..부모님께 연락해야하지 않냐."
"하면돼. 당연히 허락해주실거야 헤헤."
"...그런가. 그러면 나도 하루 묵을까나."
"!?"
"!?"
태화의 발언에 여자 두명이 멈칫하고서 고개를 삐끄덕 돌린다.
"에에.."
"뭐라고? 태화주제에 이런 미인 2명과 함께 같은방에서 자겠다는거야?! 그것도 호텔에서?"
"자기입으로 할소리냐! 크기도 큰데 기왕인거 부탁한다고. 난 거실 쇼파에서 자도 되니까말이야. 그리고 할얘기가 있다면서 부른건 너잖아."
"할얘기? 그러고보니 여기에 온이유가 태화를 부른것때문이었지. 무슨말을 하려고 직접 호텔까지 부른거죠?"
'위험해. 치마뒷주머니의 수갑으로 손이 가잖아!'
"중요하게 할얘기가 있었거든. 근데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어. 그러니까 태화 너는 돌아가도 된다고. 호텔에서 디너정도는 먹게해줄테니까."
"음음. 태화는 그쯤에서 빠지는게 일반적인 패턴이지..?"
이아마저 말테의 편에 붙었다.
"기껏불러놓고 아무래도 상관없다니.. 뭐냐고!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특급호텔에서 하룻밤 머무를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니! 이건 횡포다!"
"남자니까요! 남자답게 물러슬줄도 알아야지."
"부탁해. 거실에서 잔다니까~ 여기, 전설의 초능력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머물던 곳이잖아? 이런때가 아니면 다신 못와볼 거라고."
태화는 태화나름대로 순수한 이유가 있었다.
"아휴..~ 그렇게까지 원한다면야.. 이아야?"
말테는 비굴하게 나오는 태화를 보며 맘이 꺽이고 이아에게 의사를 물었다.
"오늘이 아니면 다신 이방에 올수없다는건 맞으니까.."
별수 상관없다는듯이 말했다. 태화의 표정이 밝아진다.
아직 말테의 음성 동의가 없었지만 말이없다는게 곧 동의의 뜻이리라.
"하아..고맙다. 그럼.. 저녁때까지 방에들어가서 좀 쉴게."
"그래. 아.. 겉옷은 벗어줘 여긴 세탁으로도 유명한 곳이거든.. 나갈때 맡겨줄게."
혼자사는 태화에게 호텔의 세탁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것은 크나큰 행운이다.
"나가다니? 어디가려고."
여자앞에서 태화는 부끄럼따윈 전혀없이 내복과 바지를 남기고서 벗으면서 말했다.
17년 인생을 극적으로 사람이 적은마을에서 살아왔고 수련할뿐인 인생이었기에 아예 그쪽으로 자각이 없었다.
가장 호들갑 떨것만 같던 이아 역시도 남자가 상의 탈의하는것 정도는 상관없다는듯이 무덤덤했다.
그녀도 E.D.R.의 훈련을 받으면서 이런장면은 많이 봐왔을 것이다.
제대로 근육이 자리잡힌 태화의 양팔이 드러났다.
"바지는..?"
"맞을래."
"하하. 암튼 고마워."
태화는 말테에게 교복 상의와 셔츠, 넥타이를 건넸다.
"천만에~. 그럼.."
말테는 이아에게 다가가 오버스럽게 팔장을 끼었다.
"이아야 쇼핑가자! 마침 돈이좀 남았거든. 원하는거 있으면 말만해~"
"에에? 그러지 않아도 되요.. 별로 상관없는데."
"에잇 그러지말고 가자! 여기서 좀만 걸으면 백화점이잖아. 거기한번 가보고 싶었다구! 아. 5분만 기다려줘!"
침실쪽으로 뛰어들어가는 말테. 이아는 불안함이 담긴 시선을 태화에게 보냈다.
옷을 사주거나 하는 그런게 문제가 아니라 이아는 성격상 태화가 아닌 다른사람과 좀처럼 친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천적 성격이 아니라 후천적인 병적증세 였다는걸 알게된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였다.
"어..어쩌지.~~.."
이아가 우물쭈물거리며 삐져나온 머리털을 축 늘어트린다.
어째서 그 몇올만 머리칼에서 빠져나온것인가를 물은 적이 있는데, 본인을 창조한 자의 취향이라는 알수 없는 답변
을 받았다.
요즈음은 신생아가 태어날때 그런 옵션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며 감탄하고 지나갔다.
태화가 다가가서 그것을 검지 손가락으로 말며 입을 열었다.
살짝 땡겨서 발생한 통증때문인지 가까워진 거리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움찔거리며 태화를 올려다 본다.
불안에 흔들리는 투명하지만 깊은 청색 눈동자.
쌍커플이 아니고 눈썹이 긴것은 아니지만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색이 진한 검은색이다.
안구와의 경계를 명확히 해준다.
아무튼 말없이 계속 시선을 맞추니 이쪽도 맞춰줄 수밖에.
처음 만났을 때에도 이렇게 관찰하듯이 눈동자를 바라본적이 있었던것 같다.
단순히 보는것이 아니라 관찰하듯이. 라는 표현을 사용한것은 그녀의 눈빛에는 무언가가 담겨있어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표면은 투명했지만 그 시선의 심연끝으로 빠져보면 무엇인가 막혀 있는듯한 답답함이 느껴지는 애처로움이 서린 눈이다.
태화였기에 이정도로 파악할수 있었고, 마음의 창 너머에 뭐가 있는지 간파해버릴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선 안될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용히 시간이 흐르고 체온이 부자연스럽게 올라가려 할때 즈음 태화가 입을 열었다.
"좋겠네 이아. 기왕온거.. 다녀오라고. 말테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방금 네가 건낸 그 반지.. 엄청 비싼거라고 들었으니까. 크큭. 원래 나한테 선물로준 검이야. 트랜스퍼 메터지. 단순히 그것 이상으로도 가치있는거 같던데."
지근거리에서 손가락에 돌돌 말린 푸른색 머리털을 엄지로 만지작 거리며 달래준다.
"거기 둘. 호오~~! 뭐야뭐야. 사이가 너무 가까운데."
"앗."
순식간에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말테가 치사한 타이밍에 나타났다.
태화는 말았던 머리카락을 풀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아랑 떨어지진 않았다.
딱히 니글거리는 연애소설따위에서 등장하는 남주의 심정이라기보단 그런 행동을 하는것이 더 이상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엄청 빨리 갈아입었네."
"이아언니~! 예뻐요."
이아가 말테쪽으로 걸어갔다.
버건디색 원피스를 입고있는 말테. 은색 장발은 포니테일 형식으로 묶어서 간단히 헤어를 정리했다.
처음에 봤던 판쵸코트는 들고있는 백에 들어가있는듯하고 태화가 건낸 교복역시 다른 백에 들어가있다.
"그나저나 둘이 무슨사이? 안본사이에 많이 발달한거같은데.. 부럽다 이아~ 태화녀석..!!"
"아 이건요..~"
"왜왜. 근데 이녀석. 너랑 쇼핑가기 싫어서 불안증세까지 보이는데?"
"뭐?"
"무슨 말이야 태화! 언니. 어서 갑시다."
이아가 안달이나서 따지는걸 태화는 가볍게 무시했다.
"둘이 무슨사인지 나중에 자세히 들려줘~"
"단순히 친구사이에요 친구! 자자 쇼핑갑시다. 태화는 조용히 잠이나 자고있고! 정말. 오해하시잖아."
"흐음~. 그럼 7시까지는 돌아올게."
"오케이."
"바보. 조용히 집이나 지켜."
태화는 손을 휘휘 저으며 어서 가라는식의 제스처를 취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태화는 침실과 반대편에 있는 방에 들으로 들어갔다.
서울의 전망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으로 한쪽벽면이 구성되어있는 방이다.
태화는 좀전에 쉬면서 읽은 메뉴얼대로 유리창에 손을 대고서 3번 터치했다.
그러자 유리창에 UI가 뜨면서 '편안한 휴식되세요. 웨스턴 호텔' 라는 문구가 옆으로 흘러갔다.
벽 디자인 이라고 적힌 버튼을 누르고서 바깥과 완전히 차단되게 해주는 SD(슈퍼네추럴 디펜스)기능을 켜고 호텔과 어울리는 분위기로 모습을 바꿧다.
거실에서 잔다고는 했지만 이아가 말테와 같은방에서 잘경우 이방은 태화의 차지가 될것이다.
태화는 검은색 시트의 낮은 침대로 뛰어들어 몸을 뉘였다.
"아~흐! 편하고 좋구나.."
안락함에 눈이 감긴다.
*
"태화, 자고있었구나-. 어서 나와. 밥먹으러 가자."
눈을 떠보니 캐릭터가 그려진 귀여운 옷에 상아색 면반바지를 입고있는 이아가 보였다.
"다녀왔어? 옷괜찮네.. 음."
"흐응. 평가는 됐습니다. 넘 배고파.. 빨리 준비해줘."
"알았어. 그냥 교복입고 가도되는거야?"
"응. 여기 네옷."
이아가 팔목에 걸치고 있던 교복을 태화에게 건냈다.
"땡큐. 기대되네 호텔밥.."
"히히 나도 기대중임."
셔츠만 입고서 나가보니 이아가 지친듯이 쇼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긴. 입국하자마자 이상하게 텐션이 올라 쇼핑이나 하러 다녀왔으니 그럴만도 하다.
태화는 말테의 뒤통수에 수도를 탁. 하고 내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손바닥에 의해 저지되고 호텔의 식당까지 인간 지팡이가 되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눈코입 모두를 만족시켜주는 호텔의 음식들을 남김없이 먹고나서 다시 1111호실로 돌아갔다.
태화만 빼고 말이다.
"그러고보니 태화도 이번기회에 옷좀 사지그래? 백화점까지 가서 느~긋~ 하게 보고오세요!"
말테는 필요없다는 태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카드를 쥐여주고는 이아랑 함께 호텔방으로 돌아간것이다.
굳이 이런짓을 시키는 이유를 예상해보자면 둘이서 샤워라도 할 예정인것이겠지.
불유쾌한 감정으로 지금 태화는 때아닌 시간에 옷가게가 늘어서 있는 백화점 안에있다.
쇼핑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금세 기분이 풀렸지만.
"흐음. 여러가지 소재가 있구나."
현대의 시대에는 평범한 실같은것으로 옷을 만드는경우는 드물다. 아니, 고대시절 유행하던 기술. 정도다.
오래된 패션 브랜드나 명품브랜드에서 조차 고성능의 옷제조 기계가 만들어낸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소재의 옷을 판다.
그중에는 총알을 막는것에서 지나지 않고 반사해버리거나 불꽃, 전기의 발생까지 가능한 아이템이라 불리는 것까지 있다.
쇠붙이 같은것에 간단히 뚫리는 소재의 평상복은 거의 없다고 보면된다.
예외로 태화의 학교인 천화고교에서는 공산품이 아니라 별도의 사유공장에서 목화를 짜내 만들어낸 자연그대로의
옷감을 사용하는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자연을 잊지 말자. 라는 모토에서 나온 의지라고 할수있다.
학부형들의 불만은 옵션으로 따라오고 입학할때 여러가지 서류의 허가를 거치는 이유나 생명에 관한조항이 적혀있는것이 바로 이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은 남,녀 할것없이 헥사카보네이트 소재의 내복을 입으니까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게다가 유복한 가정의 자재라면 주기적으로 DST(Distortion Skill Toxic)를 주사받는다.
태화에게 안전의 문제는 두번째 경우이고, 첫번째 문제는 수련할때 옷에 땀이 배이는 것이었다.
기왕 공짜니까 땀이 배이지않는 옷을 사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간단히 찾을 수 있었기에 비교적 빠르게 쇼핑을 마친 태화는 웬지 지친몸으로 호텔의 11층까지 올라왔다.
1111호실까지 걸어가면서 태화는 약간 긴장했다.
낮에 왔을때 느낀거지만 여전히 이 플로어에 있는 객실들에서 쎄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삐릿-.
"다녀왔어.."
"아."
"응? 갔다왔나."
문을 열어보니 하얀머리와 파란머리를한 여자둘이 목욕타월을 둘둘만체 거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말테쪽으로 말하자면 태화의 등장에 별 감흥은 없다만 이아는.. 전신에 물방울이 살짝 맺혀있는 상태로 당황중이다.
"어어. 덕분에 좋은 옷 살 수 있었다 고마워 말테."
"그래그래. 됐으니까 그만좀 쳐다볼래?"
말테가 장난끼 섞인 말투로 말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 미안.. 그럼 이쪽이려나?"
"뭐가 이쪽이냐! 변태! 절루가!!"
풀어헤친 상태에서는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길이인가.
아직 열이 남아 달아오른 맨살과 생머리를 보게되다니 이거이거 행운이다.
라면서 절루가지 않은 태화에게 이아가 응징의 펀치를 날렸다.
"좀. 꺼.지.라.니.까!"
"우,우와아?"
악의 감정을 품은 대상에겐 특히 위력이 강력해진다는 치성력으로 물든 펀치다.
'맞으면 아프다. 죽을정도로.'
물리력은 제로수준이지만 저항할수없는 종류의 힘이 파고들어 몸안이 뒤틀리거나 마비되는 기분이다.
가뿐히 피했는데 쏘아낸 힘이 궤도를 바꿔 벽면으로 날아가면서 폭발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뭐야."
"으잉?"
능력을 사용한 이아도 놀란 표정이다.
소리에 놀라 나온 말테가 뭔일인지 하고 두리번 거렸다.
능력이 유도될정도라니, 엄청나게 사악한 무언가가 벽안쪽에 있는건가.
"이 반응은.. 태화. 물러서. 초능력저항반응이야."
"그차림으로 다가오지말라고."
"그러니까 물러서라고 이 바보야."
태화가 엉거주춤거리자 팔로 밀어버리고서 폭발이 일어난 지점에 다가가 손을 대고 능력을 사용했다.
파직. 하고 반발하듯이 스파크가 튀었다.
"이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다니.. 응원을 불러야 하나."
"귀찮게 그럴필요있어? 문제가 있는게 확실한거지? 그렇다면.."
"앗, 태화 함부러 만지면 위험해!"
태화는 불명확한 문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호텔룸의 외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박살낼 생각이었다.
"요즘 물건에 내 힘은 작동불능이거든."
손가락을 톡 하고 데고서 파옥공의 수를 시전했다.
소리없이 가루로 바뀌어가는 벽을 보고서 두 여자가 식겁했다
"좀더 뜯어볼까."
"뭐, 뭐하는거야."
"야야야야 태화야 여기 특급호텔의 특실이라고!"
"그런 사소한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아의 능력이 흘러들정도로 강력한 사기가 깃든 물건임에 분명해. 지금 나도 느껴
질 정도라고."
뒤적뒤적 하다보니 뭔가가 손에 잡히었다.
그것을 꺼내보니 먼지투성이인 서적이 나왔다.
손바닥으로 쓸어보니 오래된 갈색 가죽에 중국어로 제목이 쓰여져 있다.
"? 고서적인가. 이런게 호텔벽안에 숨겨져있다니. 제목은.. 중국어 부분만 빼고 읽으면 세계3차대전 서..양..반점영
웅기."
어느세 다들 다가와서 태화의 손에들린 책을 보고있다.
"우와우와!"
"와, 영웅기라면 혹시 3차대전당시 호텔을 사수한 이동진에대한게 아닐까? 여기, 그사람이 머물었던 방이기도 하고!"
"이익. 우선 옷좀 입고와 이건 쇼파에라도 가져가서 보자."
"아, 알았어. 먼저보면 안되~"
이아가 방안으로 뛰어가고 말테와 태화는 거실의 쇼파에 앉았다.
"다좋은데 저건 어쩔건데?"
말테가 구멍뚫린 벽을 가르켰다.
"저거?"
태화가 그쪽을 향해 손을 뻗자 잔해들이 움직여 구멍을 매꿧갔다.
"호오.."
"말끔하지? 집중해서 처리했으니까 흔적도 안남았을거야. 내가 생각도없이 호텔벽을 부수겠냐. 배상할 돈같은건 절
대 없다고."
"절대없냐. 푸흐흣."
"누군가씨의 변덕때문에 귀중한 재산을 몰수당해서 말이야."
"빌려준거라고 했잖아 빌려준거!"
"요오. 나 옷 다갈아입고왔어. 얼른 열어보자."
이아가 객실용 가운을 두루고 뭔가를 들고와서 태화의 옆에 앉았다.
양옆에 호텔가운차림인 여자둘을 앉혀놓자니 긴장하기도 그렇고 긴장하지 않기도 그렇잖은 태화는 다시한번 표지를 살폈다.
"세계3차 대전 서양반점 영웅기. 중국어 부분을 빼고 읽으면 이래."
태화는 표면이 헤어지고 쪼그라든 가죽으로 된 책을 펼쳤다.
금촉으로 만든 듯한 만년필 한자루가 스프링안에 끼여있고 검은색 잉크로 쓰여진 중국어가 빼곡히 나열되어있다.
또박또박 하다기 보단 흐릿흐릿하거나 힘이없어 보이는 필체였지만 쓸데없는 잉크자국하나없이 깔끔히 적혀있다.
"에..또.. 뭐라고 읽어야 하려나...."
"흐음..중국어는 나도몰라.."
"자자, 여러분 모두 이걸 복용하세요."
이아가 건넨것은 동그란 형태의 분홍색 약이었다.
"이게 뭐야..?"
"AES에서 사용하는 번역용 알약. 먹기만하면 약효가 사라질때까지 지구상의 모든언어를 이해할수 있어. 코흠. 일
반적인 루트로 유통되는게 아니니까 소문내면 안되."
"단순히 이 알약을 먹기만하면 지구상의 모든언어를 이해할수 있다고? 이런 엄청난 물건이 있을줄이야.. 외국어 공
부같은건 할 필요가 없어지는거잖아?"
태화는 손바닥 위에 올려진 알약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어차피 일시적인 것에다가 약에만 의존해서는 지식이 온전히 뇌에 남는것도 아니니까 어학공부를 해야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없어."
"난 책 안읽어도 되니까! 너희들끼리 읽어!"
"됐거든. 어서 먹으라고 바보야."
바보바보 거리는게 입버릇이 되버린 이아가 태화의 턱에 손가락을 데고 앙 벌려지도록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선 약을 집어넣었고 턱을 닫았다.
"말테언니도 아낄 생각하지마시고 드세요."
"으응..."
말테도 아쉽다는듯이 알약을 털어넣었다.
"오. 뭔가 기분이 이상해지는... 글을 읽을수 있어..?"
책에 쓰여진 글자는 처음보는 것들 뿐이었지만 어째선지 읽을 수가 있게 되었다.
"뭐..번역마법이랑 비슷한거네."
"네? 마법이요?"
말테의 중얼거림에 이아가 반응했다.
"아, 아니야.. 정말 마법같은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자, 어서 읽어보라고 태화. 소리내서!"
"내가 책읽어주는 선생이냐."
태화는 헛기침을 한번하고는 읽어내려갔다.
"이 책을 집필한 이유는 제 삶과 이 한국땅을 구한 두명의 영웅에 대해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해서입니다.
제 삶과 한국땅을 구한 두 영웅에 대한 이야기. 세계 3차대전당시 대한민국군의 최종전선이었던 서향반점을 지켜낸 두영웅 위대한 염동술사 이동진과 파천왕 불리는 사나이 강혜조에 대해서."
태화는 흠칫하며 다음장으로 넘기기위해 잡고있던 손을 책에서 팍 떼었다.
말테와 이아가 의아한듯이 바라본다.
"태화?"
"태화야?"
아랑곳하지않고 태화의 시선은 한곳에 꽂혀있다.
"어째서... 여기에? 파천왕 이라고..?"
지구상에 무공(武功)이 사라지게된 최대의 원인.
파천왕. 천여년전 중원무림에 나타나 단신으로 아시아에 존재하는 모든 무예를 절멸시켰 남자의 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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