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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사랑의 두 날개/시편 18:1-3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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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규왕목사
살아있는 물고기는 맑은 물이 필요하고, 메마른 사막에 핀 선인장은 새벽이슬이 필요함 같이, 삭막한 세상을 사는 인간에게는 양식은 물론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기에 세상에 태어났고, 배반한 인간을 변함없이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구원을 받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영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육적인 면에서도 부모의 사랑에 의해 세상에 태어나 자라난 인간이기에 사랑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서 마지막 죽을 때까지 삶의 전 여정에서 가장 행복감에 젖어들 때는 먹고 싶은 것을 배부르게 먹었을 때가 아니라 부모, 형제, 부부, 친구, 교우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을 때입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고독하고 불행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은 배고플 때가 아니라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사랑은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는 시간이 흐르게 되면 반드시 변질되어지는 이기적인 사랑과 또 하나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를지라도 변하지 않고 더 진실해지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가르치고 있고 역사 속에 명언을 남긴 위인들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사랑의 위대성을 말로 글로 격찬하였습니다.
“사랑은 세계의 공통언어이고, 가장 신비한 에너지이고, 또 다른 하나의 태양이고, 하나님의 정원에 피어있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을 때 비로소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행복감에 젖어 살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누구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승리의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바로 오늘 말씀의 시편 기자입니다.
세월이 흘러 갈수록 사랑이 메말라가고 불신이 가득한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충만히 공급받아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는 사람
사람마다 풍기는 각기 다른 이미지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도 신앙의 정도에 따라 제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광의 하나님이라고도 하고, 능력의 하나님이라고도 하고, 기쁨과 소망의 하나님이라고도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라고 하였을까요?
▶1)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는 기초체력이라는 힘이 필요하며 매끼니 마다 그 기초체력의 유지위해 먹기 싫어도 억지로 먹으며 살아갑니다.
▶2) 사람이 사는 것이 생존만을 위한 것이 목표가 아니라 무한 경쟁의 시대에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실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실력이라고 말하는 힘인 것입니다.
▶3) 설령 출세와 성공을 했을지라도 그것을 잘 지켜나가지 못하면 오히려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출세와 성공을 시기하는 경쟁세력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역시 보다 더 강력한 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힘이 체력이고 재력이고 실력이고 권력이라는 힘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막론하고 때가 되면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뭐니 뭐니 해도 사망 권세라는 죽음의 세력입니다. 과연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사람일지라도 사망 권세를 이길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사망 권세를 가진 사단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력과 실력과 권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비록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부모나 형제나 이웃의 배경이 없이 가난하게 태어나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최강의 힘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바로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경험하였고, 또한 까닭 없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원수들도 많았고 그들이 시편 기자보다 힘이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시 18:3)“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 18:17)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과연 어떻게, 무슨 힘으로 그 모든 고난과 많은 원수들의 시험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이 바로 오늘 성경말씀의 핵심 주제로 ‘여호와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곧 세상의 모든 시험과 근심과 환란을 능히 이기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인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에게 힘이 되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가 통일 왕국의 영광스런 왕이 되기는커녕 어렸을 때 벌써 생명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8형제 중에 막내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새는 나이 많아 늙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제일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할 막동이었으나 오히려 궂은일은 도맡아야만 하였습니다.
(삼상 16: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삼상 17: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그의 주된 일은 누구의 몫이 될지 모르는 아버지의 양떼를 도맡아 키우며 풀을 찾아 들판을 헤매는 것이었고 그러는 중에 종종 양을 노리는 사자와 곰을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그 맹수들이 얼마나 날렵하고 힘이 센지 짐작이 될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몇 마리의 양을 희생할지라도 자신의 몸을 도사려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생명을 걸고 맹수와 싸워 양떼를 지켰습니다.
과연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그가 삼손과 같은 천하장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힘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간증하였습니다.
(삼상 17: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 17: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그것만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사울 왕보다 더 인기가 높아지자 그것을 시기한 사울 왕이 친히 삼천 명의 군대를 풀고 총사령관이 되어 은신처를 포위하고 여러 번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였었는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에서 실감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시 18:4)“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시 18:5)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가 구원함을 받고 마치 모세를 물에서 건지신 것처럼 구원함을 받되 겨우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장애물과 대적을 뛰어 넘는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힘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고 결국 원수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시 18:32)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시 18:35)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시 18:39)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우리는 여기서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은 시편 기자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되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지백체가 건강합니까? 가정이 평안합니까? 사업이 잘되고 있습니까? 자녀들이 공부 잘하고 속상하게 하지 않고 있습니까? 알고 보니 시편 기자에게 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붙드시고 건강하게 하시고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신 사랑 때문임을 깨닫고 이제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행복하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고 오는 역사 속에서 오늘 시편 기자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명의 시편 기자를 유명한 사람으로, 연약한 시편 기자를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할 수 있었고 결국 존귀한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는 두 날개와 같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 믿음의 중요성과 순종의 중요성 못지않게 사랑이 더더욱 강조되었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중요하고, 순종이 중요할지라도 사랑의 두 날개가 건재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마치 날개가 부러진 비행기처럼 얼마 못가서 추락해버리고 말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된 우리와의 사랑은 마치 비행기의 두 날개와도 같이 균형 있는 사랑이 요구됩니다.
새도 마찬가지이지만 독수리처럼 땅을 박차고 창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거대한 점보 비행기일지라도 양 날개가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날수가 없고, 설령 하늘 높이 난다고 할지라도 곧 추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에 있어서 두 날개와 같은 균형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고귀함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도 세상에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린아이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만, 다 자라 어른이 된 후에는 도리어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게 됩니다. 부모에게 받는 사랑도 귀하지만 자식을 사랑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먼저이고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도 부모에게 받은 사랑과 비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게 되면 자식도 그렇게 사랑하게 되지만 부모의 사랑에 주린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식을 어떻게 사랑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사랑은 메아리와 같다. 받은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맨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인간관계에서 부자, 부부, 형제, 교우,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은 많지만 받은 사랑을 되갚으려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되갚기는커녕 그 사랑을 배신하는 배은망덕한 자만 많아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힘이 되어주시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시 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라캄이라는 말은 미완료 동사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사랑의 주체는 항상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만 유일하게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체로 나타나 있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말씀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편견 중에 하나는 사랑하는 쪽은 강하거나 많은 사람이고 정반대로 사랑을 받는 쪽은 약하고 가난한 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만하기 쉽고 사랑을 받는 사람은 열등감에 젖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당연히 하나님을 우리를 항상 사랑하시는 분이고 우리 인간은 항상 하나님에게 사랑과 도우심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깬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처지는 한순간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잠시도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위태하고도 가련한 처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사랑을 요구만 하고 사랑받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하여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사랑한다고 오늘 성경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겠노라는 고백이나 결심은 말로만이 아니라 그의 평생 삶에서 그대로 실천되어진 사랑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인 주제에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큰 소리 친다고 할지라도 도대체 무엇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인지 주제넘고 막연하게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상호적인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도 시편 기자와 같이 상호적인 사랑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을 제공하고 구체적으로 삶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우리가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요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오늘 시편 기자 역시 그 같은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였음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시 18:21)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시 18:22)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이는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사람처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따라 살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경우를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 베푸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식은 부모를 위해 돈 버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번 돈을 써가면서 공부 잘하는 것이 곧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최상의 효도이며 결과적으로 부모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시편 기자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명하신 규례와 율례를 떠나지 않고 살았더니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이 의롭고 깨끗하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시 18:20)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시 18:2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자가 짐승의 왕이라면 독수리는 조류들 가운데 왕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독수리가 어느 새보다 높이 창공을 날 수 있는 두 날개와 더불어 매서운 부리와 발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강인하게 훈련시키는 비유를 통해서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세상에서 연단하여 훈련시키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신 32: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오늘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두 날개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날개이며 또 다른 한 날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날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이유도 깨닫고 보면 바로 하나님의 사랑 날개가 되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사랑의 날개아래 거하게 되면 다 구원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도 그 두 사랑 날개로 독수리처럼 힘차게 창공을 차고 높이 오르는 영적인 독수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어려운 세상을 독수리의 두 날개와 같은 건강한 믿음으로 헤쳐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만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드리고, 희생할 수 있을까요?
알고 보면 그러한 베풂과 희생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무슨 어려움을 당할 때 불신자와 같이 돈이나 권력을 의지하지 않고 시편 기자처럼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 18:6)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시 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
2) 물론 세상살이가 어려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좋은 날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럴 때 교만하거나 배은망덕하지 말고 하나님만 높이고 그 좋은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 18:46)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승리나 좋은 결과가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임을 깨닫고 늘 감사 찬송하며, 예배하는 삶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시 18: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로 결단하고 실천하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새의 두 날개처럼 균형 잡힌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자손손에게 더욱 큰 구원의 축복으로 상 주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시 18:50)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