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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를 들고있는, 여리여리한 선에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와 얼굴부분만 보자면 여자같지만 그밑으로 내려가면 알차게 자리잡힌 근육과 젊은 생체기하나없는 어린 피부로 보아 소년임을 알수있다.
검정색 폴더폰을 들고 조작하여 전화를 걸고는 오른쪽 귀에 댄다.
스피커를 통해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상쇄되어 근처로 퍼진다.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창문에 비춰진 약간 고개를 숙인 소년의 얼굴은 진지했다.
"어, 어. 그래 내일은 결석이야.. 이아랑같이. 하아 이렇게 중간테스트를 던지게 되는건가. 아, 위험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할건 없어. 무토. 그럼 부탁해. 그래. 취재할만한 거리가 있으면 전달해 줄테니까. 그럼 이만. 끊는다~."
삑.
"학교에 연락은 해두었어. 그럼이제 어쩔거야?"
통화를 마친 소년이 눈앞의 하얀머리 여자를 노려본다.
"하루정도 시간내봤자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불평은 안받아. 어떻게든 날아갈거니까... 이아가 뻗어버린게 누구 책임인진 알고있겠지?"
"그걸 만지게 내 존재가 들통나니까..이아에겐 미안해. 그래도 영상은 확실히 전해받았다구."
말테는 느긋하게 그런식으로 대답했지만 여유와 짜증은 종이 한장차이라고 할수있다.
태화는 심기가 살짝 불편했다.
어찌됐든 이아가 다친것은 틀림없으니까.
하지만 이아는 그야말로 신의 힘이라고 여겨질만한 회복능력을 가지고있고 자신이 할수있는것과 해야하는것이 있기에 더이상 그것에 대해 할말이없었다.
"후.. 아무튼 이건 무인인 입장에서 중대한 사건이야."
태화는 어두운 조명아래의 상아색 쇼파로 다가가서 말테와 마주 앉았다.
태화는 눈을 감고서 그의 할아버지 정문대인에게서 들었던 강혜조의 무용에 대해서 떠올렸다.
당시 그의 경지를 표현할수 있는 용어가 없었기때문에 무림의 협객들은 그의 경지를 모든것을 뛰어넘었다는 뜻인 초월자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무용실력을 뽐냈던 초신성 강혜조.
후에 강호의 제 일인자가 되어서 천하를 호령하는 인물이 될줄만 알았던 그가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서적을 불태우고 전수자들을 살해하고 맥을 끊어 무의 존재를 실전시켜
버리는 인물이 될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소림과 불가, 정파 사파 마도 구별할것없이 무를 접한 사람이라면 강자,약자 가릴것없이 단 한명의 초월자에게 내공을 빼앗겼고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진 금고에 보관된 명문가의 독문무공(獨門武功)서적이 그의 검에 천번 만번 잘리고 그의 손에 삼매진화(三昧眞火)의 불꽃과 함께 불살라졌다.
사태가 돌이킬수 없을정도로 심각해지자 무림 각 세력의 우두머리라 할수있는 17명의 신장(神將)들과 도원향(桃園鄕)으로 승천한 무림 제 1인자 였던 신선(神仙)조재걸이 천상군 십수명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와 17인의 신장들과 결의(決意)하여 강혜조와 최후의 결전을 펼친다.
등봉조극(登峯造極)에 이른 15명의 독재자들의 펼쳐낸 천하를 절단내며 요동치는 무형검(無形劍)과 두명의 법사들이 펼쳐내는 알수없는 주술들, 빛나는 백의을 걸치고 길게 늘어진 수염을 기른 신선 조재걸과 황금갑주를 입은 그의 천상병들의 무위가 오로지 단하나의 초월자를 노리고서 펼쳐진다.
그들의 범상한 무용에 처음에는 강혜조가 밀렸으나 그는 목이 잘려 죽어도 살아났으며 전신이 주박술에 걸려 썩어문드러지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적들을 베어갔다.
결국 조재걸은 인간계에서 보이면 안되는 천황천신검(天皇天神劍)을 뽑아드는 중죄를 범하고서야 강혜조의 신체를 소멸시킨다.
이에 조재걸은 신선의 직위를 박탈하고 그의 내공을 전부 잃게되었지만 중원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전쟁이 막을 내리는듯 했다.
하지만 잠시후 믿을수없는 일이 벌어진다. 십여개의 돌산너머에 숨어서 광경을 지켜보던 정문대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의 색이 전부 사라지고 검고 흰 빛덩이들이 나타나 태극의 문양을 이루며 회전했고, 그것이 지상으로 떨어지며 옷자락하나까지 멀쩡한 강혜조가 강림했노라고.
살아난 강혜조를 중심으로 펼쳐진 적갈색 태풍같은것이 순식간에 주위의 모든 무인들을 감쌋고, 거산과도 맞먹었던 크기의 태풍이 번갯불을 일으키며 점점 크기가 줄어들더니 하나의 점이되어 사라졌고, 그들이 싸웠던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간직한 대지는 살랑살랑한 모래바람이 불며 덩그러니 남게되었다.
설명하는것도 이해하는것도 난처한 그런 전쟁과 현상덕분에 지구상에 더이상 자연의 기운을 다스리는 내공을 이용한 무예인 무공은 극소수의 몸소게 자리잡은체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정문대인의 가문인 화천파는 날때부터 철저히 세외에서 살아가던 특이한 부족이기 때문에 신에 근접한 인간의 기술인 무공을 가지고 살아남을수 있었지만.
그 사건이후로 무(武)가 완전히 무(無)가 된것은 아니지만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수되는 현대의 무예들은 그 진수(眞髓)가 소실된 맹탕일 뿐이다.
태화는 감았던 눈을 떳다.
40여년 쓰여진 역사서에 그가 등장했다는것은 지금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건데, 아무리 환골탈태를 거듭하여 장기와 신체조직이 인간의 것이 아닌것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특별한 인연이 없는이상 천여년동안 수명을 유지하는것은 불가능.
사람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그가 깨달음을 얻어 신선이 될수있을리 역시 만무하다.
역사서에 쓰여진 내용이 진실이라면. 분명히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중이었던 것이고, 3차대전이후 고작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예가 장대했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었던 무예라 하지만 자연의 법칙 그 자체를 뛰어넘은 초능력이 만연하는 현재..그는 당연히 세계최고의 사나이가 아니다.
그래서 날뛰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인가.
타인은 무자비 하게 죽였음에도 자신만은 꾸역꾸역 살고 싶었던 것인가.
도대체 왜 무예를 멸하려고 했던 것인가.
태화는 우선 3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이 수수께끼의 답을 말해줄 권리가 있는 사람은 강혜조 밖에없다.
40년전 한국의 이 호텔에서 목격되었으니 어쩌면..아직 한국에 있을수도 있다.
'설마 정의통총회가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단체인건가?' 태화는 그리 생각했고 아니라곤 할수 없었다.
아무튼 전세계에서 그런게 가능할만한 장소는 센트럴 시티뿐.
현재 시장의 취임이후로 서울에서 그런 위험도 높은 조직이 적발되지 않기란 쉽지가 않다.
태화의 경우도 자꾸 접촉한다면 들통날수 있기때문에 더이상 접근하지 않는것이다.
하지만 센트럴 시티라면.
센트럴시티는 뛰어난 능력자들이 몰려있어 치안을 유지하는게 불가능에 가깝기때문에 대낮의 공터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사건은 일상수준인 거의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저 이름만 도용한 사칭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 강혜조를 나타내는 한자와 영웅기에 적혀있는 그가 선보인 기술들은 태화의 본가에 있는 역사서에 적힌것과 일치했다.
강혜조의 이름을 한자로 정확히 아는사람은 강호가 번성하던 시기에도 드물었다고 들었으니, 본인이 장백련에게 알려준것이 틀림없다.
태화는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몸소 파천왕 강혜조의 행적을 조사할 예정이다.
"하지만 클로버가 관련되어있어. 무언가의 함정일지도 몰라."
말테가 근심어린 시선으로 태화를 바라본다.
그게 진짜 의문이다. 클로버란 현 서울시장을 부르는 코드네임.
태화와 말테, 그리고 이아는 왜 이런 책에 그가 남긴 메시지가 들어있는건지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클로버에게 전화를 걸어 '저기요. 왜 그러셨습니까?' 라고 불어볼수도 없는 노릇이고.. 발견한 클로버를 시청에 제출한다는 생각은 당연히 해봤지만 헛수고다.
싱싱한 네잎클로버를 아무리 만져도 더이상 메시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시지를 전하려는 대상이 태화일행인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나 이 책을 발견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던 메시지 치고는 너무 성의가 없다.
영상에서는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안녕이라는 투로 입술만 움직였을 뿐이니까.
태화와 말테는 이아가 기절한 이후로, 무토에게 전화를 걸기전에 책에대한 회의를 했다.
회의에서는 두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첫째. 일반적인 가능성이다. 어쨋든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은 확실하니까 대충 예상해 보자면 시청으로 가져오라는 뜻이라고 볼수있다.
둘째. 가령 예지능력자에 의해서 태화일행이 객실에 머무른다는것을 알고있었다고 쳐보자면, 그리고 책의 내용으로 보았을때를 생각해보자면 시장은 태화가 엄청난 실력의 무인이라는것을 알고있다는 의미이다. 태화라면 당연히 파천왕의 흔적을 쫓을것이니 이 책을 보고서 찾아보라는 것. 클로버의 의도는 알수없지만 일부러 이 책을 태화에게 노출시킨 것이라는 가능성이 있다.
당연히 태화는 파천왕의 흔적을 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클로버가 지켜보겠다는 것인가.
파천왕의 흔적을 찾는것은 동류인 태화가 찾는것이 수월할테니 말이다.
결국 까보기 전까진 머리만 아파질일일 뿐이지만 말테와 태화는 일단 움직이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태화는 눈앞에 있는 하얀머리 소녀에게도 의심이 갔다.
태화가 진지한 투로 입을 열었다.
"..다시 물을게. 진짜로 이 책이 있을 줄 알고 이방을 빌린거 아니지?"
"계획적인건 아니야. 이런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계획같은걸 짜겠어? 하고싶으면 그냥 하면된다고.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마법사니까. 적당히 처신하면 완전 내 세상이라고.. 마침 일반에게 공개되는 시점이라 흥미로 빌린것 뿐이야."
"마법사니까 알수 있었던건 아니고? 너.. 분명 '상층부'와 접촉할수 있는 방법을 찾고있었잖아."
"그야 그렇지만.. 이건 진짜로 몰랐다구."
말테가 차분차분하게 답변했다.
"하아. 그렇다면 다른 방에서 대기하는 형씨들은 멍청해서 이 방을 빌리지 못했다는거야?"
일단 당연한 태클을 걸어준다.
"아아.. 너도 눈치쳈구나?"
"당연하지 지나오는데 객실에서 풍기는 살기가 장난아니라서 말이야."
태화는 살기따위를 운운하면서 부르르 떨며 양손으로 자신을 껴안았다.
표정이랑 하는 행동이 다른 어색한 연기를 보며 말테가 살짝 웃고는 입을 연다.
"무슨 조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호텔의 최상층을 거의 다 빌릴정도라면 상당한 재력이 있는 조직이야... 조심하는게 좋겠어. 초능력에 있어 역사적인 인물인 이동진이 머물렀다는 이 방을 얻을 수 있었던건. 약간의 공간마법을 사용한다면 불가능한것은 아니야. 그런데 이런 책이 있을줄은 정말 몰랐다니까. 마침 상층부 녀석들에게 볼일이 있었는데 이런식으로 접촉책을 가지게 되서 역시 기쁘긴 하지만!"
말테는 '상층부'와 접촉할 수 있는 실마리가 생겼다는것에 기뻐했다.
"흐음.."
그런 그녀를 보며 태화는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그녀라면 자신에게 거짓말해봤자 좋을게 없는 입장이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부른것이 아니라고 태화는 믿기로 했다.
좀전에 이아가 보았던 영상은 말테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서 말테도 '클로버 루트'를 목격한 사람이 되었지만 영상이 드문드문 잘려있고 생략된 부분이 있어서 높다란 시청에 그가 앉아있는 방으로 가는길을 찾는건 역시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녀는 일단 신검이니 정신력에 아무런 영향이 가지않은듯 했다.
"상층부라.. 그러고 보니 서울이나 센트럴 시티는 어째선지 권력자와 일반 시민간에 갭이 큰거같아."
오랜만에 머리를 많이쓴 태화는 이제 생각하기 싫다는듯이 머리를 짚고서 탈탈 털었다.
탈탈털자스트레스도 같이 털어져 나가며 기분이 환기되었다.
"서울 한정으로 이런 체제가 된건 긴 이야기가 지나가고나서야. 간단히 축약하면 초능력자들이 우글우글 몰려있는 마을에 사는건 인간이 좋하하는 장수룰 하기위해 좋은 여건은 아니잖아? 상층부 녀석들이 공개적으로 이동하거나 대외행사를 할때 벌이는 경비들을 직접 보면 체감할걸. 음식먹는것도 웬만큼 신뢰있는 자가 한 요리가 아니라면 입에 데지도 않는다고 들었어. 일종의 자기방어 플러스 실력행사지. 그들은 대부분 초능력 클래스가 높으니까."
신변의 차별없이 힘을 가진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머리가 좋은 사람, 즉 사회를 운영할만한 인재는 그냥나오는게 아니고 상대적으로 매우 소수다.
극단적으로 말해 서로 거리를 유지하지 않는 이상 소수는 다수의 사냥감이 되고, 그로인해 질서가 파괴될 우려가 있다.
세계전쟁의 아픔을 격어온 세대가 숨쉬며 살고있는 현재지만, 언젠가 과거가 진정한 과거가 되고. 평화가 찾아왔을때, 느슨해진 마음이 또다른 끔찍한 재앙이 이 세상에 도래할수도 있다.
그래서 그 똑똑한 소수는 인격이 어찌됐던지 막론하고 현대사회에서 경각심을 가지고 매우 소중히 다루어져야할 존재다.
"자연을 넘어선 힘을 가진 대가로군."
"결국 힘을 쓰는건 인간이야. 심성이 좋은사람이 있으면 나쁜사람도 있는법인거지뭐. 클로버,.. 그는 다른 권력자들과는 달리 정부의 상층부 멤버이며 물론 강력한 힘을 지닌 능력자라고 알려져있어. 그리고 비밀주의를 좋아하는 음침한 녀석이야."
"하아.. 그냥 메시지에 나 여기에 있어요 발견자씨. 만납시다. 하면 될것을 알수없는 메시지를 넣어두고 말이야."
태화는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려고 했다.
그래서 악담거리를 찾았다.
"그 비밀주의자씨.. 대체 어떻게 출마가 된거야? 선거는 어떻게 했고."
"시장 선거때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어. 오로지 음성으로만."
"에엑?"
"초능력이 만연한 세계에서 대장 노릇하는건 그저 힘이 강한 녀석이면 되거든. 머리가 좋거나. 돈이 많거나. 권력자의 집안이거나. 뒷배경 그런건 다 소용없어. 다들 초능력을 얻게되면 그런 펜으로 결재만 할뿐인 일을 나서서 하고싶어 하는 사람이 적다는거지. 특히 서울시장같은 머리아플것 같은 일은 말이야. 이곳은 그런곳이잖아?"
법보단 힘이라는건가.
아니. 힘이 법이라는 것이다.
"잘도 돌아가는구나."
"시민들도뭐.. 시장에게 불만인 점은 언론기관을 없애버렸다는것 말고는 딱히.. 여기에 있는 행정기관들의 숫자는 적지만 그들이 가진힘은 어마어마하니까. 어찌됐든 평화는 제대로 지켜지고있어."
뭐.. 이정도로 잘갖춰진 환경과 시스템에 불만을 품을 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클이나 파벌, 팀, 단체. 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모임은 지나친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단체들 뿐이다.
태화는 이아가 푹신한 침대에서 골아떨어져있을 침실쪽을 바라봤다.
"아아. 저렇게 어린데도 대단하지."
"누군 어른인줄 알겠다?"
말테가 약올리자 태화가 주먹을 쥐어 말테의 정수리에 툭 하고 떨궜다.
말테가 보드라운 양손으로 그것을 감고서 올려다본다.
"함께해준다는 약속. 깨지않을거지?"
갑자기 휙휙변하는 여자의 화술은 감당하기 이아랑 3개월간 붙어 다녀면서도 적응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이미 전화한거 봤잖아. 오늘밤 이랑 내일뿐이니까. 그 다음날부턴 학교에 가야돼. 파천왕의 흔적도 찾아야되고."
우연히 발견한 세계 3차대전 영웅기에는 전설로 남은 텔레키네시스 이동진과 천여년전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두 전설에 대한 행적이 적혀있다.
또한 불과 하루도 되지않은듯한 비밀주의자 서울시장 '클로버'의 메시지가 책갈피로 끼워져 있다.
세계3차대전 영웅기의 첫 발견자는 태화일행이 아닌것이며 클로버 또한 이동진과 파천왕 강혜조에 대해서 알고있는것.
책의 발견자들에게 자신을 찾아오라는것을 암시하는 목적이 불분명한 메시지를 감상평으로 남겨두었다.
그렇다면 사건의 전말을 열어보지 않고서는 베기지 않는다.
말테는 '상층부'인 서울시장과 접촉하여 '신'과 대화할수 있는 단서를, 태화입장에서는 무예를 절멸시킨 남자인 강혜조의 흔적을 쫓아야 한다.
늦은시각의 호텔방안은 왠만큼 좋은 날씨의 초여름보다 더 아늑하고 따뜻했지만 모험이라는 단어가 주는 가슴속의 뜨거움보다는 못했다.
태화일행은 이아에게 편지를 쓰고 객실안에 둔체 떠날예정이다.
늦잠자서 학교에 지각할지도 모르지만 여기라면 학교와도 가깝고 회복력이 뛰어난 이아라면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모닝콜 서비스라도 예약해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예약 하는 방법 따윈 모르니 그 일은 말테에게 맡기기로 해두자.
태화와 말테는 잘 가공된 린넨소재로 만들어져 적당히 단단하고 푹신하며, 시원하기까지만 일어나기 싫어지는 쇼파에서 엉덩이를 떼고서 현관앞까지 걸었다.
상쾌하고 평화로운 호텔의 공기가 아쉽지만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태화가 현관으로 걸어가서 문에달린 손잡이를 잡는다.
"슬슬인가..."
"그래요."
이럴때만 존댓말을 쓰는 이아다.
태화가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
"아?"
"아?!"
"아?"
"아?!!"
덜떨어진 톤의 아가 서로를 향해 4번 울렸다.
"아아앗??!"
뒤이어 한번 더.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는 승강기에서 약간 실랑이를 벌여던 샌님이 보인다.
포마드로 올린 머리는 풀어버리고 뒤로 짧게 묶은 스타일의 회색 머리카락.
그의 옆에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한명이 있었는데 태화 자신보단 연상인듯한 얼굴이지만 짙은갈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고 어린스러워보이는 금속제 안경을 쓰고있는 키덜트스러운 스타일을 하고있다.
그들의 뒤로는 마지막 탄성의 주인인 떡벌어진 어깨에 키 190cm은되어보이는 검은양복차림의 건장한 남자.
서로를 살피는 시선과 어색한 침묵에 행동이 멈춘다.
이 침묵이 깨지지않는한 이 문을 다 열수 없을것만 같아 태화는 일단 삐질삐질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건네며 문을 완전히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물론 이순간 더 긴장한것은 눈앞의 삼인방이지만.
"아,안녕하세요? 어디 나가시는 중인가봐요?"
이상한 낌새를 눈치첸 말테가 말없이 나와 태화의 옆에 선다.
태화가 문을 열자 회색머리의 남자 역시 문을 완전히 열고서 밖으로 나왔다.
차례로 수연과 경호원이 나와 옆과 뒤에 선다. 마치 서는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는것처럼 딱딱맞춰진 포지셔닝이다.
"아아. 자네는 낮에 봤던 청년인가. 그때는 미안했어. 이녀석들이 융통성이 없어서 말이야."
'본인도 내려보는 시선을 보냈었던것 같은데.'
태화가 웃음기를 유지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낮에는 몰랐지만 그의 차림세를 자세히 보니 재법 고급진 수트를 입고있다.
재벌2세라 불러도 어색함이 없는 특유의 분위기. 부티와 자신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태화는 한마디 대화를 나눈것으로 끝내고 그냥 가려고했는데 그 남자가 한마디를 더한다.
"지금부터 우린 늦은 저녁이라도 먹으러 갈예정인데 같이 어때? 사과의 의미로 저녁은 내가 사도록할게."
분명 이 호텔의 특식은 두번먹어도 질리지않을만하고 배부르게 먹었다 하더라도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싶은만큼 맛있다.
그 제안에 태화는 마음이 풀렸지만 아쉽게도 할일이 있었다.
"와 정말요? 근데 모처럼 권유하셨는데 죄송해요 저흰 이미 저녁을 먹었거든요. 지금은 잠시 일이있어서 나가는 겁니다."
태화가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서로의 동태를 살피는 말테와 수연의 눈이 맞았다.
여전히 여자들은 아무소리도 안내고 있는 상태다.
"어? 그러고보니 그 옷. 천화 고등학교의 마크..아닌가요? 와 선배님이시군요?"
태화가 수연의 가슴께에 달려있는 지,예,강,평,애,신,성 을 상징하는 7개의 꽃송이를 보고서 말했다.
자신의 교복과는 달리 모든 꽃잎이 푸른색이 아니고 잎마다 색이 달랐다.
태화는 이들이 자신을 감시하고있는 주범이라고는 추호도 모르고 있다.
그랬기에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물을수 있었는데, 수연역시 흔들림없이 답한다.
"응. 안녕. 천화고교에서 재학중인 3학년 윤수연이라고해 반가워. 본교생이라서 본적은 없을거야."
심드렁해보이는 분위기와는 달리 붙임성있게 인사를 하는 여자라고 태화는 생각했다.
하긴 이런 특이한 스타일이라면 학교에서 한번쯤보면 잊혀질리가 없기때문에, 수연이 먼저 보충설명을 해준다.
이어서 태화가 자기소개 하려는데, 말테가 상의의 밑단을 꼭잡아 끌었다.
"태화."
"응?"
무언가의 기운이 말테의 손쪽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 직후, 태화의 머릿속이 울렸다.
-이사람들 이상해. 날 보호해줄수 있어?
-...왜그래?
-아무튼 지금은 빨리 벗어나자.
자신없어하는 말테의 목소리는 처음 들었지만 태화는 영문을 몰랐기에 그냥 인사를 한다.
"저는 예태화라고 해요. 천화고교 1학년입니다."
인사는 윤수연에게 했지만 돌아온 목소리는 다른사람의것이었다.
"예태화라. 제법 남자다운 이름이네. 난 천민임이라고 한다."
회색머리카락의 남자의 특이한 눈동자가 태화와 시선을 맞추며 손을 내밀었다.
"?!"
두근. 심장이 덜컥내려 앉는게 느껴진다. 그와동시에 엔돌핀이 과도분비되며 뇌리로 솟구쳐 올랐다.
목근육이 움찔거리는걸 참는게 죽을만큼 힘들다. 이러다가 쥐가 날지도 모르겠다.
물론 겉으로 내색은 하지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목구멍안쪽에서 무언가가 올라온다.
"끄..프..흡.."
끄으...이건 참기힘들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해야 한다. 절대 절대로 뿜어선 안되.
고상한 분위기와 아주 잘 매치되는 이름을 가진 남자를 향해 경의감까지 느낀 태화가 이도저도 못하고있자 내민손이 뻘쭘해진 그가 태화를 재촉한다.
"여전히 예의없는 녀석이구나 너는. 천민임이라고 천민임."
태화는 일부러 재빠르게 손을 들어 그와 악수를 하면서 최대한 절대된 웃음을 보이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천민임 씨.."
이래저래 필사적인 상황에, 머릿속이 말테의 웃음소리로 가득차 시끄럽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천민임이래 천민임 크크크큿.
'어이 그만해 나도 참기 힘들다고.. 젠장 왜 전음으로 웃는거냐.'
-그치만 그치만 대체 부모님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이름을 지은거야?
말테는 좀전에 보였던 긴장했던 태도가 부티나는 소년의 커밍아웃(?)에 씻은듯이 사라졌다.
다행히 둘은 간신히 속으로만 웃어댔기에 그들의 비웃음을 눈치체지 못한 천민임은 마지막으로 경호원에 대한 소개를 했다.
모두의 소개가 끝나고, 이래저래 인연이라고 여겨준 천민임의 주체로 태화는 천민임과 함께, 수연은 말테와 함께 짝을지어 같이 승강기를 타고 1층까지 내려갔다.
가는동안에는 이상하게도 모든 방에서 느껴지던 살기가 씻은듯이 사라진 상태였다.
띵.
승강기문이 열리면서 남자둘과 여자둘. 그리고 경호원 한명이 내렸다.
사실 경호원이라는건 가장 먼저 내리고 가장먼저 나와야 하는건데. 왜 굳이 후방에 자리잡고 경호하는지에 대해 태화는 의문이 들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것에 대해선 자신있다는 건가.
부자들은 실전활용의 빈도가 적긴 하지만 대게 고클래스인 경우가 많긴하다.
딱히 친한적하며 거동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색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상류층의 그룹같이도 보였다.
반짝이는 사람곁에 있으면 그 주위사람도 덩달아 좋아보이는 법이랄까, 특히 하얀색 숏컷스타일은 많지만 말테처럼 하얀장발이 잘어울리는 경우는 보기 귀하다.
주변사람의 시선을 제대로 받으며 그들은 프론트의 중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였다.
늦은밤의 호텔안은 여전히 밝았다. 정문의 리볼빙도어도 쉴세없이 돌아가고 있으니 이곳은 특급호텔치곤 사람의 왕례가 많은곳이다.
최소 3가지 이상의 다양한 언어, 발걸음 소리, 캐리어백바퀴가 구르는 소리. 좋은 호텔에 묵게되어 신이난 어린아이들. 그 이상으로 기대에 찬 어른들의 환호성.
워낙 다양한 인종들이 한국을 찾다보니 비싼호텔이라도 쉴세없이 돌아가는것이다.
돈쓰러 온 외국인 입장에서본다면 그렇게 비싼건만도 아니고, 이곳은 소수계층만을 대상으로 한 자잘한 격식같은걸 따지는 곳이 아니다.
기본적 모토인 '편안하고 즐거운 휴식처' 라는 문구대로 사용되고 있는 느낌이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인상적인 작은 라이트가 비춰주는 청동색 기둥과 정문유리의 디스플레이 이미지, 각종 수려한 인테리어들이 다소 빠르게 돌아가는 이 분위기에 제대로 녹아들어 있다.
"식당이라면 분명 저쪽이죠? 여기요리 엄청 맛있더라고요."
태화가 식당소개를 하며 입을 열었다.
죄다 처음들어보는 이름의 요리들 뿐이었기에 추천메뉴에 까지 도달하진 못했지만.
스테이크야 맛있는게 당연하니 스테이크 엄청맛있어요~ 라기도 하기가 좀 그랬다.
이런곳의 음식에 대해선 그다지 유식할리가 없는 그다.
'스테이크가 어쩌니 어쩌구 해서 맛있고 어떤 소스가 들어갔으며 어울리는 음료는..'라는 설명을 해야할것만 같은 선입견이 있는 태화는 아직 돈많은 부류들을 상대하는것에 어색했다
저녁먹기엔 약간 늦은 시간이었지만 웨스턴 호텔뿐만 아니라 초능력의 시대가 도래한 현대에는 대부분의 음식점과 레스토랑이 24시간 운영되므로 늦은밤 발동이 걸렸다고 해도 전혀 위해될게 없다.
"그래? 기대되네~ 하아 점심 먹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먹는바람에.. 너무 배가 고픈거 있지."
천민임이 배를 쓸면서 대답했다.
"그럼 좋은 저녁되세요."
태화가 화답하면서 말테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수연도 천민임 옆에 가서 선다.
"근데 둘이서 지금 야간데이트라도 가는거야? 미성년인 학생이 벌써부터 호텔에 여자와 함께.. 솔직히 호텔에 오는것도 대담하다고 생각했는데."
천민임이 제대로 변화구를 날리며 짓굿은 투로 말했다.
"아, 아니에요! 이건 뭐,뭐랄까 단지 그냥...놀러온거에요."
"놀러왔어도 말이지~ 지금 나간다는건 둘이서 야간데이트 가는게 맞잖아? 이 주변 공원도 좋고 볼것도 많고~ 죄다 데이트 코스뿐인걸. 그리고 호텔에 돌아와서..흐흐흐."
"아니 천민임씨 저~얼대 그런일은 없어요 저~얼대로요. 그런사이 아니라니깐요."
태화가 양팔을 휘두르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한다.
"헤헤.. 당연하죠. 태화는 저의 주인님 이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말테가 태화에게 팔짱을 끼고 안기며 밤공기를 뎁히는 말을 한다.
태화보다 작은 몸을 가진 그녀가 파뭇힐 정도로 앵겨붙는다.
머리카락이 팔과 옷에 달라붙어서 머리카락 빠질까봐 확 빼버릴수도 없고 거슬린다.
이참에 기회다 싶어서 한 말테의 장난인데 태화로써는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좋으냐 싫으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머나.~ 예후배...어머어머.."
수연은 아예 손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한다.
"휘유..요즘 청소년은 말이지.."
민임은 '안돼겠구만 이녀석' 이라는 투로 양팔을 벌리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말테만큼 적극적인 리액션들을 선보이는 둘.
태화는 더이상 버틸수가 없어 내공을 끌어올려 말테를 튕겨내고 주먹을 쥐여 망치찍듯이 그녀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켁!"
거북이처럼 목부터 쏙 들어가며 말테가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 버린다.
"어머!"
"하하..여자친구 다루는게 험한데."
민임과 수연이 놀라며 주춤거린다.
그정도로 태화의 스매싱은 대단했다.
내공을 담아 후려친것이니 모 만화의 표현처럼 김이나지않은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여친아이네요.. 공공장소에서 그런짓 하지마! 하.. 천민임씨 윤수연선배님 맛있는 식사되시고 좋은 저녁되십시오.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머리를 싸메고 주저앉아있는 말테에게 동정이 몰리기전에 태화가 빠르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바이바이 멘트를 했다.
"공공장소에선 말이지... 그래. 여튼 좋은 밤되라고."
"후배.. 여자는 살살 보살펴 줘야 하는거야. 그럼 좋은밤되."
하나같이 좋은밤. 이라는 의미심장한 단어를 하며 입술 한켠을 들어올리는 민임과 수연에게 태화는 한번더 손사례를 쳤다.
물론 그들은 한귀로 흘릴 뿐이었지만.
한차례 소동이 지나고 민임과 수연, 경호원이 드디어 식당쪽으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들을 보고서 긴한숨을 내쉰 태화는 홀로 정문입구로 발걸음을 옮긴다.
"야! 나는 두고가냐! 같이가~"
머리를 싸메고 주저앉아있던 말테가 울상지으며 일어나서 태화에게 외친다.
태화는 말도 안하고 그냥 나가서 투명한 유리문 밖에 기대어서 주머니에 손을 꼽고 열을 삭혔다.
밤이라 하더라도 초여름의 밤. 좀처럼 열은 삭혀지지 않겠지만.
말테는 태화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가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태화에게 사과의 제스쳐를 취한다.
주광색 조명아래에서 서로 투닥거리는 그들과 멀어지는 또다른 일행.
부드러운 카펫위로 걸어가며 상쇄된 발소리를 내며 걷던 그들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멈춰섰고, 천민임 일행은 태화와 말테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민임의 입이 열리고 주저없이 음성이 튀어나온다.
"추적해라."
-예.
-알겠습니다.
-추적대 세 조를 투입하고 루트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이 통신의 보안은 제대로 되어있는거겠지?"
-완벽합니다. 전파계 능력자가 끼어든다 하더라도 문제없습니다.
"움직여."
-라져! X9
민임의 뇌리에 굵직 굵직한 사내들의 목소리가 호령한다.
"재밌는 녀석들이군. 우리의 정체를 알면서 연기한거 같진 않다만.. 행선지를 보면 알게되겠지."
수연도 민임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네.. 저희를 알아보진 못한거 같더군요."
"흠. 수상쩍은 부분이 없다는게 더 수상쩍어. 하긴 알아보지 못하는게 정상이긴 하지. 이밤에 정말 데이트하러 나가는건가..?"
"도련님. 질투하는 건가요?"
수연이 민임을 바라보며 다가가 그의 왼손을 꽉 잡아준다.
"아~니."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레스토랑으로 걸어가는 그들을 한켠에서 바라보고 있는 경호원이야말로 가장 질투가 나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눈가에 맺친 뜨거운 사나이의 눈물 한방울을 훔쳐낸뒤 도련님 일행을 쫓아갔다.
*
그야말로 심야에 데이트하기에는 썩 괜찮은 조도를 유지중인 서울 시가지의 밤이다.
호텔에서 조금만 벗어나니 금세 어두운 골목길에 도달했다.
선남선녀 두명이서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두가지. 첫번째는 뻔한상황이고 둘째는 뻔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들에게 휩싸여 있는 분위기는 후자의 경우였다.
"따돌렸겠지?"
"후. 후. 아직 위험해. 설마하니 트레이서가 있을줄이야.. 다행히 프로수준은 아니고 태화의 경공술(輕功術)이 없었다면 따라잡혔을 거야."
말테가 가쁜호흡을 내쉰다.
블링크할정도의 마력을 공급받으려면 약간 시간이 걸리는데, 추적자들은 그런 틈같은건 주지않았다.
트레이서란 사물을 꿰뚫어보는게 가능하거나 텔레포터, 목표대상의 냄새나 온도, 호르몬등을 수km이내에서도 감지하는등, 추적하기에 용이한 계열의 능력을 직업화한 사람들을 말한다.
그녀가 펼친 손바닥위에 있는 작은크기의 홀로그램지도를 닮은 '오브젝트 뷰'와 태화의 경공술이 아니었다면 저항할 틈도없이 따라잡혔을 것이다.
물론 그 마법은 도망치는데에 큰 기여를 한것은 아니지만 추적자쪽의 큰 실수라면 클래스0인 태화에게 방심한 탓이 크다.
천시지청술(千視祗聽術)을 유지한 체로 태화가 입을 열었다.
"뭐.. 마주치면 사주한 사람이 누군지 알수있으니 상관없지. 그보다 이런 차림으로 가도 되는거야?"
태화가 웨스턴 호텔 1111호의 거실벽에서 발견한 '세계 3차 대전 영웅기' 를 품속에서 꺼냈다.
거기에는 전설적인 텔레키네시스 이동진과 파천왕 강혜조 에대한 기록이 적혀있었고 태화가 쫓아야 하는 사람은 강혜조이고 말테가 쫓아야할 사람은 '상층부'의 클로버지만 이동진의 행방을 우선 쫓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도망도중에 빌딩의 커다란 TV화면에서 서울시장인 '클로버'가 러시아를 방문하기위해 떠난다는 속보가 떴기 때문이다.
타이밍적으로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것을 직감하지 못하는 자는 사랑니와 신장결석을 동시에 겪고있어 다른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는 가여운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여객기의 속력으로 8시간 정도 걸리는 러시아로 날아가야 될 판이되었지만, 태화일행은 추적자들에 의해서 쫓기는 상황이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지만 지금이 무슨 시대인가?
초능력의 시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물질만능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런면에서 볼때 태화가 세계최고의 초능력자인 시조에게서 받은 '라이트'는 매우매우 값비싼 축에 속하는 '아이템'이다.
초능력의 시대에 과학을 무시하는 크기로 압축된 개인항공기 따윈 돈만있으면 가질수 있다.
15cm정도 되는 그다지 흥미롭지 못한 이 막대기는 마하를 돌파할정도로 빠른 비행이 가능한 플라잉 바이크로 변신이 가능하다.
Incredible. BUT IT'S REAL!
태화는 교복의 상의주머니에서 '라이트'를 꺼냈다.
도심의 불빛이 닿지않는곳에서 그것은 정말 태화일행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줄만한 물건이다.
물론 시의 허가없이 개인이 항공기를 사용하는것은 불법이지만 태화에겐 생각이 있었다.
"말테야 반지줘봐."
"여기있어. 설마라고 생각하지만..몰라. 난 쉴드로 보호할테니까 알아서해."
반지를 건내받은 태화가 곧 그것을 검의 형태로 만들었고, 씨익하고 미소지으며 말테를 안았다.
"그럼 제대로 실드치라고. 어검비행(馭劍飛行)으로 날아간다."
그것은 바로 검과 하나가 되어 비행하는, 인간으로써의 한계가 없어지는 검술상 최상의 경지.
어검비행(馭劍飛行)이다.
태화는 고대어가 적혀있는 검의 끝을 하늘을 향하도록 똑바로 들었다.
경락(經絡)에 기분좋은 흐름이 느껴지며 검을 쥔 손으로 흘러갔다.
시퍼런 검신중앙에 쓰여진 고대어가 녹색으로 발광하는가 싶더니, 두명이 쉭. 하고 꺼지듯이 사라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악!!!!"
"뭘 이정도가지고 계집애처럼 소릴질러..흐흐."
이미 몽실몽실한 구름과 지근거리까지 상승한 태화와 말테.
태화가 공중에 우뚝. 하고섰다.
말테가 눈가에 촉촉한것을 머금고 입술을 앙다문체 무서운 기세로 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번더 쉭 하더니 계속해서 계속해서 올라갔고 이내.
구름을 발밑에 두게되었을 때, 공주님 안기를 시전하는 자세가 되버린 태화가 잡고있는 15cm 크기의 막대기가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