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이야기
민선의원설립 건백무릇 인민으로서 정부에 대해 조세를 지불할 의무가 있는 자는 곧 그 정부의 일에 대해 알고 가부를 할 권리를 지닙니다. 이것은 천하의 통론으로서, 소란스럽게 신들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들이 조용하게 원합니다, 유사들도 이 원칙을 어기질 않기를. 지금 민선의원을 설립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이 말하길 "우리 백성이 배우지 못하고 지식이 없으며 아직 개명의 영역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민선의원을 세우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합니다. 신들은 정말로 그 말과 같겠냐고 생각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학문과 지혜를 갖춰 개명의 영역에 나아가게 하려면 먼저 그 통의권리를 보호해주고, 그들이 자존자중하며 천하와 슬픔과 기쁨을 같이할 기상을 세우게 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자존자중하며 천하와 슬픔과 기쁨을 같이할 기상을 세우고자 하는 길은 그들로 하여금 천하의 일에 참여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했는데 인민이 고루함에 안주하며 불학무지함에 스스로 만족하는 일은 여태껏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스스로 학문과 지혜를 갖춰서 스스로 개명의 영역에 들어가길 기다린다는 것은 돼지가 날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심하게는 "지금 급히 의원을 설립하는 것은 천하의 어리석은 자들을 모으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아아, 스스로 너무나 오만하여 이렇게 인민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사들이 또 말하기를 "오늘날 영미에 의원이 있는 경우는 일조일석에 설립된 의원이 아니"라고 합니다. 점진적 진보를 통해 이룬 것이 어찌 의원뿐이겠습니까. 대개 수많은 학문, 기술, 기계 모두 이렇습니다. 그런데 수백 년이란 오랜 시간이 걸려서 그것을 이룬 것은 대개 이전에 성규 없이 모두 저절로 경험하고 발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성규를 택하여 그것을 취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도모한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혹 우리 스스로 증기의 이치를 발명하는 것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증기기관을 사용할 수 있으며, 제련의 이치를 발명하는 것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제련소를 설치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정부는 정말로 손을 댈 일이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거듭하여 오늘날 우리 국민 민선의원을 설립해야 하는 이유와 오늘날 우리나라 인민 진보의 정도가 이 의원 설립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음을 변론하는 것은 유사들이 그것을 거부할 근거를 없애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원을 설립하는 것은 천하의 공론을 신장하고 인민의 통의권리를 세워서 천하의 원기를 고무함으로써 상하가 가까워지고 군신이 서로 아끼며 우리 왕국을 유지 발전시키고 행복안전을 지키려는 데 있습니다. 청하건대 제발 그것을 주시길 바랍니다. 1841년 5월 1일 베를린 일간지
민선의원설립 건백
무릇 인민으로서 정부에 대해 조세를 지불할 의무가 있는 자는 곧 그 정부의 일에 대해 알고 가부를 할 권리를 지닙니다. 이것은 천하의 통론으로서, 소란스럽게 신들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들이 조용하게 원합니다, 유사들도 이 원칙을 어기질 않기를.
지금 민선의원을 설립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이 말하길 "우리 백성이 배우지 못하고 지식이 없으며 아직 개명의 영역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민선의원을 세우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합니다. 신들은 정말로 그 말과 같겠냐고 생각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학문과 지혜를 갖춰 개명의 영역에 나아가게 하려면 먼저 그 통의권리를 보호해주고, 그들이 자존자중하며 천하와 슬픔과 기쁨을 같이할 기상을 세우게 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자존자중하며 천하와 슬픔과 기쁨을 같이할 기상을 세우고자 하는 길은 그들로 하여금 천하의 일에 참여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했는데 인민이 고루함에 안주하며 불학무지함에 스스로 만족하는 일은 여태껏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스스로 학문과 지혜를 갖춰서 스스로 개명의 영역에 들어가길 기다린다는 것은 돼지가 날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심하게는 "지금 급히 의원을 설립하는 것은 천하의 어리석은 자들을 모으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아아, 스스로 너무나 오만하여 이렇게 인민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사들이 또 말하기를 "오늘날 영미에 의원이 있는 경우는 일조일석에 설립된 의원이 아니"라고 합니다. 점진적 진보를 통해 이룬 것이 어찌 의원뿐이겠습니까. 대개 수많은 학문, 기술, 기계 모두 이렇습니다. 그런데 수백 년이란 오랜 시간이 걸려서 그것을 이룬 것은 대개 이전에 성규 없이 모두 저절로 경험하고 발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성규를 택하여 그것을 취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도모한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혹 우리 스스로 증기의 이치를 발명하는 것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증기기관을 사용할 수 있으며, 제련의 이치를 발명하는 것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제련소를 설치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정부는 정말로 손을 댈 일이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거듭하여 오늘날 우리 국민 민선의원을 설립해야 하는 이유와 오늘날 우리나라 인민 진보의 정도가 이 의원 설립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음을 변론하는 것은 유사들이 그것을 거부할 근거를 없애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원을 설립하는 것은 천하의 공론을 신장하고 인민의 통의권리를 세워서 천하의 원기를 고무함으로써 상하가 가까워지고 군신이 서로 아끼며 우리 왕국을 유지 발전시키고 행복안전을 지키려는 데 있습니다. 청하건대 제발 그것을 주시길 바랍니다.
1841년 5월 1일 베를린 일간지
국권팽창론우리들은 결코 압제자들이 하는 바를 모방하여 쓸데없이 병탄잠식을 행하는 것을 주로 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다. 진실로 약소민족을 흥기하는 정신으로 그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체코인 모두 걱정하는 바는 헝가리의 발호도량이고, 병탄잠식이다. 따라서 스스로 그것을 막을 능력이 없는 곳들은 몽매고루하여 죈네 에포크의 문화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곳일 뿐이다. 그리고 죈네 에포크의 문화로써 이미 세계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곳은 체코의 접경국 중에서 우리 독일뿐이다. 따라서 중앙유럽의 선진인 우리나라는 도덕상 또한 필요상, 이 체코의 쇠운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구하는 길은 원래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 주권을 장악하여 정치를 개혁하고 민심을 일으키거나, 혹은 우리가 그 국사를 감호하고 문화의 진보를 꾀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그들과 우리와의 무역을 장려하고, 우리 문화적 국민으로 하여금 그들의 후진적 국민과 접촉하게 함으로써 그 감화를 촉진하는 것 등은 아마도 가장 효력이 빠른 것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해외 착수의 움직임이 이와 같이 결과적으로 체코의 쇠운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그 결과가 병탄잠식의 경우와 비슷하다고는 해도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옳겠는가. 1891년 5월 24일 자유신문 논설
국권팽창론
우리들은 결코 압제자들이 하는 바를 모방하여 쓸데없이 병탄잠식을 행하는 것을 주로 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다. 진실로 약소민족을 흥기하는 정신으로 그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체코인 모두 걱정하는 바는 헝가리의 발호도량이고, 병탄잠식이다. 따라서 스스로 그것을 막을 능력이 없는 곳들은 몽매고루하여 죈네 에포크의 문화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곳일 뿐이다. 그리고 죈네 에포크의 문화로써 이미 세계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곳은 체코의 접경국 중에서 우리 독일뿐이다.
따라서 중앙유럽의 선진인 우리나라는 도덕상 또한 필요상, 이 체코의 쇠운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구하는 길은 원래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 주권을 장악하여 정치를 개혁하고 민심을 일으키거나, 혹은 우리가 그 국사를 감호하고 문화의 진보를 꾀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그들과 우리와의 무역을 장려하고, 우리 문화적 국민으로 하여금 그들의 후진적 국민과 접촉하게 함으로써 그 감화를 촉진하는 것 등은 아마도 가장 효력이 빠른 것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해외 착수의 움직임이 이와 같이 결과적으로 체코의 쇠운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그 결과가 병탄잠식의 경우와 비슷하다고는 해도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옳겠는가.
1891년 5월 24일 자유신문 논설
독노의 전쟁은 문야(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다라트비아 리가 부근에서 독노 양국 사이에 해전이 시작되어 우리 군이 대승리를 거둔 것은 어제의 호외를 통해 독자에게 보도된 바이다. 무릇 이번의 갈등에 대해 독일 정부가 주의에 주의를 하면서 오로지 평화로운 종결을 바란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인데, 세상에서 스스로의 분수를 모르고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는 법이다. 루스키인들은 스스로 힘의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 무법으로 비리를 밀고 나가려 하면서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늘날의 상황에 이르러서 라트비아 해방 이래 제일 먼저 우리나라가 승리의 명예를 얻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 소식을 접하면서 지나치게 기뻐하여 이성을 잃지는 않고 있다. 개전하고 처음으로 아군이 승리한 것은 물론 독일국의 큰 명예로 축하해야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의 용맹함과 더불어 문명정예의 병기를 갖고 그 부패국의 부패군에 대적했으니, 승패의 운수는 명명백백하여 흡사 자블(Sabel)로 끈을 베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닿는 것 중에 끊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은 평범한 한 가지의 일로서 조금도 놀랄 만하지 않다. 단지 예상한 바와 다르지 않게 독일의 군인이 정말로 용맹하며 문명의 이기가 정말로 이로운 것을 기뻐할 뿐이다. 이제 독노 간의 전쟁이 원래부터 요행이 아니었음이 세계의 눈앞에 펼쳐졌다. 문명세계의 공중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전쟁의 사실은 독노 양국 간에 일어났다고 해도, 그 근원을 묻는다면 평화공존의 진보를 꾀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하고자 하는 자의 전쟁으로서, 결코 양국 간의 다툼이 아니다. 본래 독일인은 루스키인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적의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을 세계의 한 국민으로서 인간사회에서 보통의 교제를 원하는 바이지만, 어찌해서인지 그들은 완미하고 불령하여 보통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국제평화의 진보를 보고서도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진보를 훼방하려고 하면서 무법적으로 우리에게 반항의 뜻을 드러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이 여기에 이르렀을 뿐이다. 다시 말해 독일인의 안중에는 루스키인이 없고 루스키국도 없다. 단지 세계 문명의 진보를 목적으로 하여, 그 목적에 반대하고 그것을 훼방하는 자를 타도하는 것만큼의 일이므로,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의 일이 아니며, 일종의 종교분쟁으로 볼 수도 있다. 1906년 7월 29일 시사일보 논설
독노의 전쟁은 문야(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다
라트비아 리가 부근에서 독노 양국 사이에 해전이 시작되어 우리 군이 대승리를 거둔 것은 어제의 호외를 통해 독자에게 보도된 바이다. 무릇 이번의 갈등에 대해 독일 정부가 주의에 주의를 하면서 오로지 평화로운 종결을 바란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인데, 세상에서 스스로의 분수를 모르고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는 법이다. 루스키인들은 스스로 힘의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 무법으로 비리를 밀고 나가려 하면서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늘날의 상황에 이르러서 라트비아 해방 이래 제일 먼저 우리나라가 승리의 명예를 얻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 소식을 접하면서 지나치게 기뻐하여 이성을 잃지는 않고 있다. 개전하고 처음으로 아군이 승리한 것은 물론 독일국의 큰 명예로 축하해야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의 용맹함과 더불어 문명정예의 병기를 갖고 그 부패국의 부패군에 대적했으니, 승패의 운수는 명명백백하여 흡사 자블(Sabel)로 끈을 베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닿는 것 중에 끊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은 평범한 한 가지의 일로서 조금도 놀랄 만하지 않다. 단지 예상한 바와 다르지 않게 독일의 군인이 정말로 용맹하며 문명의 이기가 정말로 이로운 것을 기뻐할 뿐이다.
이제 독노 간의 전쟁이 원래부터 요행이 아니었음이 세계의 눈앞에 펼쳐졌다. 문명세계의 공중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전쟁의 사실은 독노 양국 간에 일어났다고 해도, 그 근원을 묻는다면 평화공존의 진보를 꾀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하고자 하는 자의 전쟁으로서, 결코 양국 간의 다툼이 아니다.
본래 독일인은 루스키인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적의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을 세계의 한 국민으로서 인간사회에서 보통의 교제를 원하는 바이지만, 어찌해서인지 그들은 완미하고 불령하여 보통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국제평화의 진보를 보고서도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진보를 훼방하려고 하면서 무법적으로 우리에게 반항의 뜻을 드러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이 여기에 이르렀을 뿐이다.
다시 말해 독일인의 안중에는 루스키인이 없고 루스키국도 없다. 단지 세계 문명의 진보를 목적으로 하여, 그 목적에 반대하고 그것을 훼방하는 자를 타도하는 것만큼의 일이므로,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의 일이 아니며, 일종의 종교분쟁으로 볼 수도 있다.
1906년 7월 29일 시사일보 논설
독일 해군이 템스 강 하구를 포위하고 육군을 성공적으로 상륙시켰습니다. 첼름스퍼드 외곽에서 영국 기병대가 경포를 이끌고 방어를 시도하지만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한편 독일의 참전으로 프랑스군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난 벨기에는 8월 18일 베르됭에서 독일 대표와 만나 군사동맹 조약에 흔쾌히 서명합니다.
그로부터 5일 뒤, 상당수의 프랑스군이 벨기에 국경 부근에서 벨기에군과의 혼잡한 소모전에 시달리며 꼼짝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 라옹을 점령한 독일 제5군단이 파리를 향해 진군합니다.
북해 연안 전선의 벨기에군, 중북부 전선의 독일군, 남부 전선의 이탈리아군으로부터 맹공을 당해 전선이 총체적으로 붕괴 중인 프랑스에게 이탈리아 정부가 론을 요구합니다. 다른 동맹들과의 사전 조율도 없이 일방적으로 선언된 이 요구사항에 의해 동맹군은 크게 동요합니다. 독일 정부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벌써부터 전리품을 공공연히 탐내고 다니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발표하지만, 오히려 이탈리아 정부는 터키 언론의 입을 빌려 "전쟁이 끝을 보이고 있다"면서 "독일 정부가 이탈리아의 팽창을 위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고 있으니 자력으로라도 얻어내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반박합니다.
이탈리아가 요구한 론 지방은 프랑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인 거대도시 리옹을 포함하는 핵심 공업지대입니다. 먼 옛날 중세시대부터 프랑스계 봉건 귀족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간신히 독립을 유지해온 사보이아 가문이 전혀 엉뚱한 시점에 알프스 산맥 서부 저지대로 진출하게 된 모양새입니다.
11일 뒤인 10월 20일, 스위스 제네바에 모인 협상국 대표단은 론을 이탈리아에게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금(금액은 차후 논의)을 지불하는 대가로 종전을 요청합니다. 미국은 미온적인 태도를 고수했고 독일은 시큰둥한 표정만 보이는 와중에 가장 당황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은 의외로 이탈리아였습니다.
사실 이탈리아가 론을 요구한 것은 전쟁을 주도하는 독일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남프랑스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여론은 오히려 삼면전선을 지탱하는 독일에 대한 찬사로 가득했고, 전쟁에 뒤늦게 뛰어든 정부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비판하며 "독일-벨기에군이 프랑스군을 북쪽으로 끌어올려놓고 나서야 빈집이나 공격하는 비겁한 군부"에 대한 조롱을 계속했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특히 나폴리와 로마에서 빈번했고, 빠르게 북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탈리아는 동맹국 내부에서의 발언권 확보를 위해 물밑에서 여러 노력을 해보았으나 번번이 실패, 결국 극약처방을 한 겁니다. 프랑스의 핵심 공업지대를 지배하겠다는 폭탄발언으로 판을 흔들고자 했으나, 예상치 못하게 프랑스가 너무 일찍 전의를 상실함으로써 론을 상실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이탈리아는 첩보를 통해 프랑스의 참전 요구사항이 '독불국경을 라인 강까지 밀어낸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프랑스가 이렇게 일찍 전쟁을 포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가 정말로 론을 정복한다면 국내외 전체의 불만을 한몸에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이미 이탈리아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며, 이탈리아가 고립될 경우 방조할 것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독일-이탈리아 동맹 성립 이전까지 계속적으로 추진하던 크로아티아 독립 및 친독 정부 수립을 다시 추진할 가능성도 높았습니다.
주독 이탈리아 대사는 모든 외교적 채널을 총동원하여 '독일 주도로 종전 요청을 거부할 것'을 유도했고, 다행히 독일 정부의 복안과 맞물려 종전 협상은 취소되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다른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종전 협상을 거부하는 동시에 리투아니아 해방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라트비아는 발트 해의 중심이었지만 육로로는 러시아에게 포위된 형국이었으므로 안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러시아 황제의 명령에 의해 라트비아가 즉각 완전 봉쇄된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리투아니아를 해방시키고 친독 정부를 수립하여 작게는 라트비아부터 크게는 발트 해 전체의 안보를 확보하겠다는 것이 독일 정부의 복안이었습니다.
한편 독일이 리투아니아 해방을 전략 목표로 선정하고 적극적인 선전선동에 나서자 다시 자신감을 회복한 이탈리아 정부는 각국의 눈치를 보며 루마니아 언론을 통해 프로방스 정복을 은근히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론을 요구할 경우 이탈리아의 국경선이 지나치게 돌출되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리옹에 이어 프랑스 최대의 항구 도시인 마르세이유까지 이탈리아가 정복하겠다는 것은 론 요구보다 훨씬 위험한 야망이었지만, 이번에는 독일 정부가 무시함에 따라 큰 논란 없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11월 4일, 독일 정부는 전시 프로파간다에서 '리투아니아'라는 단어들을 전부 '발트 소국'으로 교체하였습니다. 이 변화는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으나, 11월 14일 뉴욕 타임스는 이를 근거로 독일이 에스토니아의 해방까지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설을 실었습니다. 에스토니아의 해방은 미하일 대공 암살 사건과 직접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공론화하기가 어려운 문제였죠.
한편 서부전선에 집중하는 사이 동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총동원령에 응답한 러시아 병력들이 후방에서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었고, 적게나마 노르웨이군까지 기여하며 독일군의 발을 묶고 있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의 공세종말점은 과거 폴란드 국경부근에 불과했고, 라트비아 본토 사수조차 어려워지는 시점이었습니다.
마침내 독일 내각은 총동원령을 결의합니다.
12월 7일 에브뢰 남쪽에서 벌어진 이탈리아와 프랑스군 사이의 전투에서는 이탈리아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을 몰아세웠으며, 독일군이 접근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프랑스군의 전열이 붕괴하여 3만 명이 넘는 포로를 생포하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프랑스는 사실상 전열에서 탈락했으며, 브르타뉴의 렌으로 이전한 임시정부는 절망에 빠져 도버 해협을 건널 채비를 시작했습니다.
1907년의 첫째 날, 마리얌폴레 전투에서 독일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베를린으로 날아왔습니다. 독일군이 노르웨이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때맞춰 도착한 러시아군이 포위망을 다시 구성, 결국 전 병력의 9할을 상실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4개 군단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각 군단들의 재집결 장소로 선정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집계한 결과 각 군단의 생존자는 2군단 7111명, 4군단 429명, 하노버 군단 97명, 보헤미아 군단 406명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죽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이때 생포된 포로들은 약 4만 명 규모로 노브고로드 외곽에 급히 만들어진 '마리얌폴레 수용소'에 이송되었습니다. 국가 총력을 전선에 쏟아붓느라 생필품 배급조차 어려웠던 러시아의 현실 때문에 수용소 환경은 지극히 열악하였습니다.
전황 악화는 라트비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발미에라에서도 독일군 4개 군단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마리얌폴레의 패전이 알려진 1월 5일 외스터라이히 군단의 군단장 폰 호헨촐레른 장군은 리가로의 퇴각을 결정합니다. 리가로 무사히 퇴각한 독일군은 1군단 426명, 3군단 1000명, 작센 군단 412명, 외스터라이히 군단 2375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다행히 리가에 미리 입항해있던 독일 해군의 수송선을 타고 전원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발미에라에서 잡힌 독일군 포로는 약 2만 명 규모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핀란드 헬싱키 교외로 옮겨져 수용되었습니다. 핀란드는 중립국 스웨덴을 중계하여 무역을 지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러시아보다는 국력이 여유로웠으며, 헬싱키 가까이에 위치해있었던데다가 포로 처우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점도 있어 수용소 환경은 마리얌폴레 포로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습니다.
동부전선에서의 연이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총동원령에 따라 집결 중인 거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쟁 목표를 발표합니다. 독일과 네덜란드 언론은 독일 외무상의 발언을 통해 베트남 왕국의 안남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 중이며 베트남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영국의 행실을 비판하였으며, 전쟁을 통해 베트남 왕국은 영국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월 21일, 청제국은 마카오 수복전쟁을 다시 선포하고 독일에게 참전을 요청하였습니다. 독일은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으나, 그 대신 마카오가 청제국의 정당한 영토임이 분명하다는 논설을 통해 청제국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은 프랑스를 후견국으로 두고 있었으므로, 그 프랑스가 무력한 이상 마카오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7년 전 이화원까지 불타버리는 대참사로 끝난 바 있던 마카오 수복전쟁은 이렇게 6일만에 종결되었습니다.
1월 28일, 러시아 제국이 어김없이 종전을 요청하였으나 독일은 이번엔 영국령 하일을 네지드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새로운 요구를 들이밀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사회노동당 내각에 대한 지지율과는 별개로 국민들의 피로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에 따라 2월 1일, 내각은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 주요 정당들과 협의하여 개헌안을 통과시킵니다. 이전까지 작위 보유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던 상원은 완전히 개편되어 각 주마다 2명씩의 대표자들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체제를 참조하여 독일을 보다 수평적인 연방국가로 재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에 따라 중앙정치로부터 여전히 소외되어 있던 슐레스비히, 보헤미아, 모라비아, 외스터라이히 등에서 환영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혁명의 검은 셔츠들이여, 영국의 모든 남녀들이여, 전 세계의 모든 남녀들이여, 들으시오. 정부는 나약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당은 우리를 단결시키고, 강인한 국가정체성을 심어주고, 자본가와 공산분자들의 감언이설에 농락당하지 않는 그런 정당입니다. 대영제국! 연합왕국! 우리 모두의, 세계 만방의 파시스트! 발 밑에서부터 떠오르는 검은 셔츠의 영국이여, 여러분이 투지로 가득차 울부짖으면 하늘 높이 떠올라 비로소 모든 문명을 환하게 비출 것입니다! 외국민도 없이, 비국민도 없이, 그저 우리 모든 국민들만이!(Everything in the State, nothing outside the State, nothing against the State.) 오늘날, 영국의 우리들은 이 시대가 결코 피할 수도 끌 수도 없는 불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의 파시스트 형제들이여, 이 신성한 불길을 지켜나갑시다. 영국을 비추고 인류의 앞길을 다시 밝힐 때까지."
파시즘이라 불리는 제3의 길이 영국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패전을 직감한 모양이죠.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빠르지 않나...
프랑스 탈락에 집중하고자 잉글랜드 전선에서 잠시 물러났던 독일군이 다시 잉글랜드에 상륙합니다. 제해권을 잡으니 상륙 시기를 자기 마음대로 준비할 수 있는 겁니다. 런던을 수비하던 버틀러 장군이 독일군의 상륙 소식을 듣고 캔터베리로 내려와 2배에 가까운 숫자로 밀어내려 하지만 독일군의 조직력은 견고합니다. 더구나 4만에 가까운 후속 병력이 상륙을 준비 중에 있죠.
영국에서 시작된 파시즘 운동은 독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외스터라이히, 바이에른 등지에서 나름대로의 조직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외스터라이히의 빈은 독일제국에 의해 합스부르크 황가라는 구심점을 강제로 상실당한 후 독일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었습니다. 이전까지의 가장 탈민족적이고 국제적이었던 제국 수도가 민족적이고 폐쇄적이며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에 잠식당하게 되었던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해 가장 크게 반응한 것은 당연히 남부독일에서 가장 가까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였습니다. 빈의 시민들은 극소수의 광신적 파시스트들을 제외하면 수백 년 간의 이웃인 체코인들을 적대시하지 않았으나, 그 옆동네인 바이에른에서는 반체코 여론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사회노동당 프라크 지국은 이러한 불안여론을 빠르게 베를린으로 올려보냈으며, 오랜 노력 끝에 체코인들을 간신히 포용할 수 있었던 연방의회에서는 타민족들을 자극하는 파시즘을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습니다. 파시즘의 세력이 확대될수록 연방은 위험해질 것이기 때문이죠.
한편 독일 정부는 북부 뉴기니를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독일 상인들이 사모아와 뉴기니에 접근하여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883년 퀸즐랜드 총독부와 의회는 이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였고, 영국 본국에서도 껄끄러운 반응을 보인 바 있습니다. 남태평양 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프리드리히 헤르만 오토 핀시(Friedrich Hermann Otto Finsch)는 뉴기니 회사를 설립할 것을 건의하려 하였으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영국의 반발을 이유로 뉴기니 식민화 계획을 포기한 바 있었죠.
3월 13일, 결국 영국군은 캔터베리에서 엄청난 피해를 남기고 철수합니다. 브라이튼에 상륙한 독일군 일부가 북진하여 런던을 포위할 경우 퇴로가 막힐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4월 5일, 후방의 영국군이 집결하여 런던을 거쳐 캔터베리 방면으로 제파식 공격을 시도하자 브라이튼에 주둔 중이던 독일군이 런던으로 진군하여 중간을 잘라먹었습니다. 영국군의 주력은 이미 소멸되었고 이제부터는 동원령에 응하여 징집된, 훈련이 부족한 예비군들이 상당수였습니다. 제병협동을 통해 10만에 이르는 영국군을 섬멸하였으나, 그러는 동안 캔터베리에서는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고 있었습니다.
러시아가 유럽 방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틈타 청제국은 연해주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선언합니다. 세계대전의 진정한 승리자는 청국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마침내 캔터베리를 점령하여 런던까지의 보급로를 확보한 독일군이 런던 포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런던 전투는 치열한 시가전 단계로까지 넘어왔습니다. 파시스트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의용군들이 자원하여 참전하고 있지만, 잘 단련된 독일군에 비하면 계란과 바위와도 같습니다.
브리튼 섬 중북부에는 상당한 징집군이 모여있지만 훈련 수준과 사기가 낮아서 런던을 구원하러 떠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영국군은 전장에 투입할 수도 있겠으나, 미 해군이 해협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브리튼 섬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독일 정찰병들이 도시 안으로 진입하였고, 빅 벤의 종소리가 시민들이 떠난 런던의 황량한 거리에 울렸습니다. 종소리는 곧 산발적인 소형 무기들의 사격소리로 뒤덮여갔으며, 머지않아 그 종은 독일군 포병들에 의해서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기병들은 질풍처럼 버킹엄 궁전으로 쳐들어갔지만, 영국 왕실은 이미 사전에 공격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남겨진 유니온 잭은 끌어내려졌고 독일 국기가 버킹엄 궁전에 내걸렸습니다. 5월 25일, 73일 동안의 포위전 끝에 런던은 함락되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잡은 주도권은 다시 빼앗겼습니다. 물량으로 밀고 오는 러시아군을 그보다 더 압도적인 물량으로 밀어버리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때문입니다. 노브고로드가 점령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점령당하면 핀란드 국경 또한 위험해질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전선이 무한정 넓어지자 영국 방면의 독일군이 애를 먹고 있습니다. 런던은 점령하였으나 그 이상 전과를 확대하는 것은 어려워보입니다. 독일군은 일단 수세로 전환하여 도버-캔터베리-런던 축선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영국파견군은 한계에 달했습니다. 캔터베리가 다시 위험해진 이상 유럽에서 증원군을 보내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8월 20일,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점령되었습니다. 핀란드에 상륙하고 헬싱키를 점령하여 발미에라의 독일군 포로들을 해방시킨 미군이 동진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양국 군대가 만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협상국 대표단이 리가에 상륙하여 동맹국 대표단과 만났습니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를 해방시키고 영국은 안남과 북부 뉴기니를 포기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종전 협정이 체결됩니다. 네지드에게 하일을 반환하는 것은 무효화되었습니다. 1907년 9월 8일의 일입니다.
결국 전쟁 초반에 이탈리아가 예감했던대로, 배상금을 제외한 전쟁의 모든 이득은 독일이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국내 여론의 불만을 잠재우느라 외교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어느덧 남프랑스를 진심으로 노리기 시작했으며, 이는 향후 프랑스의 배상이 지연되었을 때 이탈리아군 3만여 명이 국경을 넘어 리옹을 점령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리옹을 점령하는 이탈리아군. 리옹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맞섰으며, 결국 이탈리아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리옹의 산업생산력은 30%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마침내 독일은 동원령을 해제하고 평화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승전으로 발트 독일인의 발언권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습니다. 종전 이전인 1907년 4월 12일, 35명의 발트 독일인과 13명의 에스토니아인과 11명의 라트비아인들이 발트 전역을 지배하는 군주국가를 건설하고 독일의 보호국으로 만들어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독일군의 점령 하에서 발트 각지의 독일인들은 3월 8일에 쿠를란트 공국을, 4월 12일에는 발트 공국을 각각 선언하며 자신들을 프로이센 왕국과의 동군연합 국가로 요구하였습니다. 이런 발트 독일인들의 행동을 독일 정부는 의도적으로 무시해왔습니다.
11월 5일에 이르러서야 아돌프 필라르 폰 필하우(Adolf Konstantin Jakob Pilar von Pilchau) 남작을 중심으로 4명의 발트 독일인, 3명의 에스토니아인, 3명의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임시 의회가 열렸습니다. 발트 지역 전역을 하나의 국가로 묶겠다는 구상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으며, 이 통일국가는 쿠를란트, 리가, 레트갈렌, 쥐트리블란트, 노르트리블란트, 외젤, 에스틀란트의 일곱 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연합 발트 공국의 초대 공작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아돌프 프리드리히가 추대되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발트 독일인들과 소수의 발트계(에스토니아 및 라트비아인) 동조자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라트비아 공화국 정부의 반발이 극심했습니다. 이에 따라 발트 국방군(Baltische Landeswehr)이 조직되어 발트 독일인들의 이익을 위해 불법적인 폭력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1908년 5월 22일, 발트 국방군을 포함한 각종 자유군단(Freikorps) 의용병들이 리가를 점령하였고, 라트비아 각지에서 3700여 명의 라트비아인들을 죽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트 국방군의 만행은 6월 20일경 라트비아-에스토니아 의용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종료되었습니다.
1908년 8월 22일, 해산하는 발트 국방군의 모습.
내전이 한 달 동안이나 이어지는 와중에도 옐가바 근교에 주둔하며 여러 핑계를 들면서 개입을 회피하고 있던 독일군은, 발트 국방군이 궤멸되기 직전인 6월 19일에야 리가에 진입하고 치안 회복을 명목으로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독일군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각지의 의용군들을 무장해제시키고 발트 국방군의 주요 인사들을 체포, 처형한 후 연합 발트 공국의 건국을 선포합니다. 연합 발트 공국에게는 독립적인 행정권이 있었으나 외교와 국방은 독일에게 있었습니다.
독일은 '영토의 대독일' 정책을 완수한 것에서 더 나아가, 한자 동맹시들의 영향권까지 사실상 전부 통합한 것과 같았습니다. 이를 두고 '바다의 대독일'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였으나 독일은 상당한 경제적 군사적 손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니제르 총독령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사하라 사막 중앙부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니제르 술탄국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도중의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독일 군부에서는 철조망과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팬저라는 신무기를 고안해냈습니다.
모든 열강들이 전쟁에 지쳐있어 개입의 여력이 없음을 확인한 헝가리 왕국은 바나트를 되돌려받기 위해 루마니아를 침공합니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인 라인란트에서 팬저를 실험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전선에 보급되고 배치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세계대전은 종결되었으나 벨기에는 여전히 프랑스를 유린하고 있었습니다. 파리가 다시 위험해지자 프랑스는 벨기에의 요구대로 브르타뉴를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렌을 수도로 하는 신생 브르타뉴 왕국은 공업 규모만도 이미 세계 9위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국력을 회복했을 경우에도 브르타뉴가 자주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1907년 11월 27일에는 독일령 골드코스트에서 자행되는 죄수들에 대한 학대가 조명받게 되었습니다.
신념있는 기자들의 취재 경쟁을 통해 많은 국민들이 죄수에 대한 처우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2월 1일, 청제국이 러시아에게 할양해주었던 연해주를 되돌려받게 되면서 기나긴 세계대전은 비로소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이제 청국은 단 하나의 항구, 홍콩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첫댓글 너무 재밌는데요.
다음 편도 빨리 보고 싶네요. 독일의 야욕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크킄
다음 편은 아마 석가탄신일 무렵...
Poland Cannot Into Europaㅠㅠ
다른 나라 약소민족은 해방시켜도 내 약소민족은 우리 문명의 혜택을 계속 받아야 하는 법 ㅇㅇ 이것이 베르사유 조약에서의 민족자결주의의 실체죠
민선의원설립 건백은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비롯한 자유민권운동가들이, 그 아래의 두 글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글을 제가 각색한 겁니다. 특히 마지막은 청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쓴 주옥같은 망언이죠(?)
오오 독일 오오 크고 아름다운데 강하기까지 ㅜㅜ
체코.. 안타까운 체코!!! ㅠㅠ 보헤미안이여 일어나라!! ㅠㅠ
첫댓글 너무 재밌는데요.
다음 편도 빨리 보고 싶네요. 독일의 야욕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크킄
다음 편은 아마 석가탄신일 무렵...
Poland Cannot Into Europaㅠㅠ
다른 나라 약소민족은 해방시켜도 내 약소민족은 우리 문명의 혜택을 계속 받아야 하는 법 ㅇㅇ 이것이 베르사유 조약에서의 민족자결주의의 실체죠
민선의원설립 건백은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비롯한 자유민권운동가들이, 그 아래의 두 글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글을 제가 각색한 겁니다. 특히 마지막은 청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쓴 주옥같은 망언이죠(?)
오오 독일 오오 크고 아름다운데 강하기까지 ㅜㅜ
체코.. 안타까운 체코!!! ㅠㅠ 보헤미안이여 일어나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