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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모라스(Charles-Marie-Photius Maurras)
1900년 제2차 베를린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한 명의 프랑스인 청년이 쿠베르탱 남작을 저격하려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암살시도는 실패했고, 베를린 당국에 의해 공범까지 총 4명의 피의자가 체포되었다. 취조 및 재판 과정에서 그들은 고대 그리스 민주정의 개방성을 비판하고 근대 올림픽 사상을 공격한 샤를 모라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샤를 모라스는 프랑스의 보수주의 사상가로서 의회제 부정, 반혁명주의, 국가적 가톨릭주의, 국가통합 민족주의 등을 주장하고 있었다. 피의자들은 모라스가 주도하는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caise) 운동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모라스 본인과는 친분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은 즉시 독불 관계의 냉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사회당(SFIO) 정부[SFIO는 1905년에 창당되었지만 게임 시스템의 한계상 이 시기에도 존재합니다. 필자 주]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국론이 완전히 분열된 정국 하에서, 나폴레옹 5세와 사회당 내각은 각각 반드레퓌스파와 드레퓌스파로 갈려 신경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토록 위태로운 시기에도 사회당 정부가 가까스로 붕괴되지 않은 것은 반드레퓌스파가 보나파르트파(이하 황제파)와 오를레앙파(이하 왕당파)로 갈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당파의 필두와도 같았던 샤를 모라스가 쿠베르탱 남작 암살시도와 얽히자 정치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황제파, 왕당파, 드레퓌스파 세 개의 계파가 제각각 다시 한 번 분열되었다. 프랑스 사회당은 숙고 끝에 모라스를 보호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당론의 분열은 피할 수 없었다. 황제파의 일부는 왕당파 탄압을 위한 친위 쿠데타 계획을 세우고 나폴레옹 5세의 재가를 받기 직전에 퐁텐블로 궁전 입구에서 발각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질세라 왕당파는 모라스의 정치적 행동주의에 입각하여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이에 연루된 10여 명이 총살당하고 다수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샤를 모라스 본인은 마르세이유에 연금당해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가 1년만에 무혐의 처분으로 풀려났다.
세계대전 도중, 남프랑스가 이탈리아군에게 점령당하자 그는 니스를 거쳐 밀라노로 이주하여 반민주주의와 반유대주의, 국가적 가톨릭주의를 계속 주장함으로써 초기 이탈리아 파시즘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가톨릭 문화권에 폭넓게 흩어져 남유럽에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많은 군사독재자들에게 영감을 심어주게 된다. 하지만 정작 국제적 보수주의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교황청으로부터는 계속된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조르주 소렐(Georges Eugene Sorel)
세계대전 중이었던 1906년 8월, 독일 제5군단이 파리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파리 외곽 불로뉴에 거주하던 조르주 소렐은 피란길에 올라 렌으로 향하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이탈리아군이 노르망디에까지 이르자 소렐은 도버 해협을 건너 플리머스로 망명했다. 그는 프랑스 사회당 정부가 독일 사회노동당 정부에게 무너지는 과정을 보고 '민주주의의 필연적 부패성이 드러났다'고 주장했으며, 노동자들이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기존의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려 했다면, 소렐은 '신화'라는 방식을 통하여 보다 감정적이고 의식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려 했다. 그는 보수주의적 왕당파의 거두인 샤를 모라스와 악시옹 프랑세즈를 높게 평가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소렐이 1893년 정식으로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하기 이전까지는 군주정을 옹호하는 보수적 전통주의자였던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렐은 부르주아적 민주정이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부패성을 집요하게 비판하였으며, 일견 정반대 성향인 것처럼 보이는 모라스도 부르주아적 민주정에 대항하는 정치적 행동주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샤를 모라스 역시 "민주주의와 국제주의를 탈피한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찰떡궁합(a well made glove fits a beautiful hand)"이라며 소렐의 사상에 동조했다.
이러한 소렐의 주장은 급격한 패전으로 인해 무기력에 빠져있던 영국과 프랑스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의 이론은 반개인주의, 반자유주의, 반유물론, 반실증주의, 반합리주의로 요약되어 유심론적 생디칼리즘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악시옹 프랑세즈에 아예 직접 가입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각종 반유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과거 드레퓌스 사건 당시 드레퓌스파로 활동하다가 드레퓌스파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크게 분노했던 경험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부르주아적 민주정은 모라스와 소렐에게 있어 '유대자본 침략세력에 의한 프랑스 잠식'으로 받아들여졌고, 유대인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게 된 프랑스 민족주의와 혁명적 생디칼리즘은 서로 깊은 유착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소렐의 사상은 초기 영불 파시즘의 출발점이 되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동군연합 때문에 바이에른 지방과의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해온 팔츠에서 최초의 파시즘 정당이 탄생했습니다. 어느 사회주의 정당에서 젊고 카리스마적인 리더가 탄생, 정부의 사회주의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과는 다르게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탄광 노동조합에서 출발한 영국 파시스트들을 모방하여 검은 깃발을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검은 깃발은 산업화 이전부터 조직화되어있는 유일한 노동자 집단이었던 광부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가 적색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상징으로 정착함에 따라 아나키즘의 상징으로 자리잡습니다. 반란군이 들고 돌아다니는 적색과 흑색 조합 깃발은 소렐리아니즘(Sorelianism)을 포함하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다만 소렐리아니즘은 소렐의 혁명사상(소수의 정예화된 엘리트 전문 혁명집단에 의한 조직적 혁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극단적인 정치적 행동주의는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나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과 같이 아나키즘과는 전혀 무관한 영역에서 애용되었습니다.
빅토리아2에서 파시즘의 상징색이 흑색인 것은, 아나키즘과는 전혀 무관하게,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흑색을 상징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준군사조직인 검은셔츠단은 아르디티(Arditi)라는 이탈리아 정예병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었는데, 아르디티는 1차 대전을 계기로 창설된 군대였으며 검은색을 상징으로 썼습니다. 이것이 이탈리아 파시즘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다만 이번 연대기의 설정상 파시즘은 영국에서 처음 탄생했고, 20세기 초반 초기 파시즘의 정신적 아버지(?)들 중 영국에서 활동할만한 인물로 소렐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아르디티와는 무관하게 파시즘이 아나키즘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은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실제로는 소렐리아니즘이 무솔리니에 의해 한 번 더 재해석됨으로써 초기 파시즘이 후기 파시즘(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파시즘이라 부르는 그 사상)으로 완성됩니다.
외국인 혐오 풍조가 외스터라이히, 바이에른에 이어 팔츠로까지 전염되는 것을 확인한 당국은 파시즘 운동을 경계합니다. 특히 프랑스계 주민들이 많이 사는 엘자스-로트링겐에 근접한 지역이므로 배타적 민족주의의 확산은 반드시 막아야 했습니다. 그 결과 파시스트 정당의 성장세는 억제할 수 있었으나,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반민주적이고 권위적인 반동주의 운동에 참가하는 역효과도 생겼습니다.
프랑스는 결국 러시아와의 군사동맹을 다시 재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8년 상원에도 파시스트들이 침투해왔습니다.
상원의 2.8%가 파시스트입니다. 이들은 사회적 개혁에는 찬성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반동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어쨌든 파시즘 정당이 집권하고 있지 않으면 무슨 개혁에도 찬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대전 종전으로 인해 전역군인들이 대거 양산되면서 파시즘에 찬동하는 준군사조직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결성한 자유군단들이 이미 각 지역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을 불법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포메라니아 당국은 군인들의 이러한 준군사조직 결성을 금지하여 병사들의 상당한 불만을 사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다시 영국에게 군사동맹을 요청했습니다. 삼국협상이 부활했으나 독일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상황입니다.
남극점 도달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안타까움을 삭이고 다른 탐험대를 후원하도록 합니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거대한 소천체가 낙하했습니다. 저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충돌했다면 루시퍼-5 세계로 이전하여 독일 과학자들이 신소재를 발견, 1938년에 대공황 극복을 위해 태양계의 암석형 행성들을 탐험하고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입니다. 물론 러시아와 연합 발트 공국은 대재앙을 피할 수 없었겠습니다만.
무선통신기술의 진보에 따라 라디오라는 통신매체가 새롭게 생겨납니다. 이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유의미한 발전입니다.
패전으로 인해 경제가 총체적으로 붕괴한 러시아 제국은 열강 자리를 스위스에게 내주고 끝내 이류국가로 전락하고 맙니다. 여지껏 혁명으로 정부가 무너지지 않은 게 용할 따름입니다.
독일령 카메룬에서 네덜란드령 나이지리아 소속 군인들이 국경을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내각의 일부 매파 장관들은 네덜란드에 대한 보복성 전쟁을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잘 무마되었으나 많은 독일인들은 여전히 분노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1908년 총선에서는 사회노동당이 49.08%를 득표하며 안정적인 연임에 성공합니다. 기독교사회민주당과의 연정을 지속하면 55.96%가 됩니다.
1909년, 상원이 재편되면서 극단적 이데올로기들이 성장했습니다. 특히 파시스트들이 2.22% 더 성장하여 상원의 5%를 점유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반동주의에 버금가는 반란분자로까지 팽창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이 질서(order) 지향 국가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말이죠.
아르헨티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독일의 스피어에서 벗어났습니다.
독일 정부는 이번에도 불간섭을 고수하여 아르헨티나 신정부의 지지를 얻습니다. 스피어에는 차근차근 다시 집어넣으면 될 일입니다.
반동주의 반란이 일어나 대통령 독재정이 들어섰군요.
한편 중앙아프리카의 거대제국으로 급부상한 니제르 술탄국은 독일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약 3개 사단에 달하는 근대화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슐레스비히에서 세계 최초로 라디오를 보급하기 시작할 예정입니다. 덴마크어로도 방송이 이루어질 것인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상당수의 주민들이 독일어도 병용할 수 있으므로 덴마크어 방송의 사업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됩니다만, 다문화 포용을 중시하는 사회노동당 정부라면 또 모를 일입니다.
독일 정부는 다시 영국과의 동맹을 시도합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영국이 아니라 인도와 동맹을 맺은 것과 다름없는 일입니다만 말이죠.
영국이 군사동맹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참담한 국내 사정을 알려옵니다. 러시아도 저 정도로 몰락하지는 않았는데...
팔츠에서도 팬저 생산을 시작합니다.
1909년 12월 3일, 독일 정부는 식민지 유지비용 지출을 절감하기 위해 니아살랜드를 독립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오랜만에 날아오는 신문입니다. 3년만이군요. 니제르 주식시장이 붕괴했다는 기사가 먼저 눈에 띕니다. 또한 라디오가 사회와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음, 역시 그렇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출처: 오늘은 자체 휴강)
티미문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되었습니다.
알제리 코어가 박힌 서부 사하라 지역입니다. 근데 노동자가 한 명도 없어보이는데 그럼 대체 저걸 누가 생산하고 있는 거죠?
이탈리아에서도 블랙셔츠라는 이름의 파시즘 준군사조직이 등장했습니다.
1910년, 브라질에서 채찍의 반란 사건이 발생합니다. 흑인 해군 선원들이 군대에 만연해있던 인종차별 및 폭력에 불만을 품고 선장과 일부 장교들을 살해, 다른 장교들을 하선시킨 후 영국인 기술자를 인질로 잡고 리우데자네이루를 향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반란은 주변에 있던 네 척의 배에도 확산되었으며, 이들은 리우데자네이루에 포격을 가하지 않는 대신 반란군은 채찍질 폐지, 생활환경 개선, 자신들에 대한 사면 등을 요구했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사면을 약속하였으나 정작 사건이 해결되자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드레드노트 사기 사건이 발생합니다. 블룸스버리 그룹의 6명이 색조화장으로 피부색을 바꾸고 변장하여 아비시니아의 왕족 행세를 하면서 HMS 드레드노트 함에 승선했습니다. 모든 관계자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가짜 훈장까지 전달한 끝에 영국 해군은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베를린에서 독일 식민지 박람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식민지 경영을 통해 창출되는 경제적 이득을 과시함으로써 많은 국민들과 외국인들의 지지를 얻어낼 것입니다.
이건 우연히 발견한 건데, 프랑크푸르트 시민(성인경제활동인구)의 41.6%가 공무원을 직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99300명 중에서 41349명이 공무원인 겁니다. 세종시?
독일 식민지 박람회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이런 엑스포나 올림픽 같은 이벤트들은 크킹2의 축제, 사냥, 연회, 토너먼트처럼 중간중간 여러 가지 선택지들이 나와주면 정말 꿀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국 대사 암살시도, 반란분자의 파괴공작, 화재 사고, 맹수 탈출 사고, 기차 탈선 사고, 전시품 조작 발각, 사업비 횡령...
여성참정권이 허용된 것이 대체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논설이 실려있습니다. 정부 관료들은 벌써부터 팝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발명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찰스 스트라이트라는 미국인 발명가가 팝업 토스터를 발명해냈다고 합니다. 이로써 수천만 명에 이르는 문명인들이 아침식사 준비 시간을 압도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히 인류문명의 큰 도약을 이루어낸 위업이라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이 업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쌀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권에서 전기밥솥과 같은 위상을 자랑한다고 비유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식빵을 한 번에 딱 한 장밖에 넣지 못하기 때문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려면 두 번에 걸쳐 구워야 한다는 불편함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만물의 영장인 인류는 언젠가 이 한계를 어떻게든 반드시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대략 13~18세에 해당하는 젊은 여성(낮은 확률로 남성)들이 "지각이다"를 외치며 입에 토스트를 물고 골목길을 달리는 뿌리깊은 전통이 유래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니, 이 역시 인류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입니다.
셜록 홈즈가 죽었습니다. ▶◀
스위스도 다시 네덜란드에게 열강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1910년 12월 6일 정오 무렵, 베를린 외무성에 한 장의 전보가 날아옵니다. 런던 외무성에서 발신한 전보의 내용은 대청제국에 대한 방위전쟁 수행에 동참, 또는 최소한 협조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12월 6일, 청국은 일출 1시간만에 선전포고와 동시에 군사력을 투입하여 일방적으로 홍콩을 무혈점령하였습니다. 만약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갈 경우 칭다오까지 함께 요구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영국에게는 인도 아대륙의 막대한 군사력과 각 열강들과의 군사동맹이 있습니다.
독일은 영국과 청국 모두와 동맹을 맺고 있습니다. 독일이 영국을 선택한다면 독일과 일본 외에 다른 동맹국이 없는 청국의 몰락은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독일이 청국을 선택한다면 리가에 이어 홍콩에서 두 번째 세계대전이 폭발할 것입니다.
첫댓글 청나라의 국력은 어느정도인가요?
군사력은 4위이고 산업력은 14위이지만 아직 기술력이 워낙 모자라서 크게 위협적이진 않습니다. 게다가 영국의 인도군이 머릿수로나 뭐로나 전혀 밀리지 않기 때문에 동원령 선포하면 혼자서도 밟을 겁니다. 러시아도 영국 동맹국으로 끌려들어간 상황인데 시베리아를 몸빵으로 내주는 동안에 남중국에서 영국군이 밀고 올라가면 손쉽게 이길 것 같습니다. 물론 독일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하하하하
발트삼국쪽에 있는 나라 무슨나라인가요?
연합 발트 공국입니다. 이전 편을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정말 간만에 빅토 연대기를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국 제국주의에 고통받는 인도인들을 갸륵하게 여기셔서 이참에 인도를 독립시키는 것도?!
인도 독립이 은근히 어렵더군요. 워스코어가 너무 많이 필요한 듯. 영국 몰락에 따른 인도 독립 관련 디시전이나 이벤트가 있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