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지난 4월 1일 금강산에서는 제 9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50여년 만에 만난 가족들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이제 그런 만남 장면이 식상해지는 요즘, TV를 보며 남몰래 눈물을 흘린 이가 있었다. 자신 역시 이산가족 2세대이면서 2000년 6·15선언 이후 통일부 남북회담 상근대표로 지속적인 이산가족 상봉의 첫 단추를 꿴 무대 뒤의 숨은 주역, 김경웅(정외 76졸)동문이 그 주인공이다. 올 초 27년간의 공직생활에서 물러나 제 2의 인생을 민간남북경제교류협의회 대외협력위원장으로 다시 한번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뛰고 있는 김경웅(정외 76졸)동문을 만나봤다. ![]() "피로 맺힌 이산가족의 한 풀고 싶어" 그가 통일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민족을 위해 굵직한 일을 해보겠다는 자신의 의지도 있었지만 이산가족인 부모님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싶다는 개인적인 이유 또한 컸다. 그렇기에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활발히 전개된 남북이산가족 상봉의 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이산가족면회소 설치문제까지는 해결했지만 이산가족 1세대들의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하고 공직에서 물러나 아쉽다는 김 동문. 그는 그 못 다한 책임감에 오늘도 남북관계를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이산가족 1세대는 현재 69만 명입니다. 하지만 이 분들 중 매년 10퍼센트 정도가 돌아가시지요.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10년 후면 이산가족 1세대가 거의 없다고 봐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0년 안에 어떻게든 이산가족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번 금강산 이산가족상봉 행사에서는 길지 않은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발언으로 상봉행사가 일시 중단되는 해프닝을 겪었다. 처음 겪는 일에 호들갑스러웠던 언론들과 달리 그는 통일 연습의 과정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다양한 사안에 대한 갈등과 해결이 통일에 대한 연습이라는 것이다. 난항 끝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를 합의한 제4차 남북 적십자회담이 있었던 2002년 9월을 공직생활 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날로 꼽는 김 동문. 그는 수많았던 회담들을 이렇게 추억했다. "회담을 준비하는 기간에서부터 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시점까지 밤을 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분단으로 고통 받는 민족을 위해 무언가 해냈다는 보람이 그 피곤함을 말끔히 치유해주었습니다." ![]() 경제협력 통해 대동사회로 26년 9개월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이제는 민간차원에서 북한과 교섭하고 협의하는 일을 맡게 된 김 동문의 전화기는 인터뷰 도중 쉴 새 없이 울려댔다. 개성공단시범단지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 남과 북은 개성공단의 개발을 통해 올해 안으로 1단계 100만평 개발구역에 대한 내부기반시설 건설을 착수하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부지조성공사 진척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기업의 입주가 가능하게 할 계획을 갖고 있다. 개성공단 시범단지에 입주할 기업을 선정하는 일에서부터 여러 가지 사업선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하게 될 그의 마음은 봄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잔뜩 부풀어 있다. "남과 북의 경제협력은 한마디로 윈윈전략입니다. 남한은 자본과 기술을 북한은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서로의 경쟁력을 배가시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북한의 노동력과 1시간 이내면 갈 수 있는 지리적 여건 등은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향상시킬 것이고 독자적인 제품영역의 구축이 가능해짐에 따라 수출경쟁력까지 생길 수 있는 것이지요. 경제의 회생은 민족공동체를 대동사회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입주기업 선정사업은 현재 1600여 개의 업체가 개성공단 입주를 신청해 무려 5대 1의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이는 대북경제교류협력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보여 앞으로의 경제협력에 청신호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교류를 씨줄로, 사회문화교류를 날줄로 정치학자이기도 한 김 동문은 경제교류를 씨줄로 문화를 날줄로 해서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어가는 것이 통일의 척도가 된다는 이른바 거미줄이론을 제시한다. 남북관계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정치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며 더 많이 교류하고 더 많이 접촉하며 더 많이 변화하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일반 국민은 직접적으로 실감할 수 없겠지만 실무자 입장에서 보면 북은 정말 경천동지할 정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현재 우리는 매년 이삼십만 톤의 비료와 50만 톤 정도의 식량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북측이 이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감사하다는 공식서한까지 보냅니다. 북측 상층부에서도 남북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쟁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과 함께 남측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북한도 잘사는 것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것이죠." ![]() 통일의 의미란 남과 북의 차이를 인정해가면서 조금씩 서로의 체제를 일치시켜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기자의 의견에 김 동문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관용의 자세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외형적인 통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의 통일, 마음의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 오고 가야합니다. 접촉하면서 변화하고 변화하면서 접촉해야 하지요. 남측에서는 매월 만 명 정도가 북한을 다녀옵니다. 하지만 남한을 방문하는 북한사람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지요." "통일의 주역은 젊은 세대" "기성세대도 중요하지만 젊은 세대가 참 중요합니다. 독일어로 "통일은 신이 준 선물" 이라는 말이 있어요. 일제시대 때 독립 운동하는 날이 8월 15일이라고 오래전부터 정해지고 발생한 것이 아니듯이 통일은 불현듯 찾아올 겁니다. 통일의 주역인 젊은 세대들이 통일의 꿈과 미래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이 통일에 대한 염원과 꿈을 버리지 말고 키워나갔으면 좋겠어요. 성급한 마음을 버리고 북한 바로알기 단계에서부터 차근차근 북한 사회를 알아나가는 기회를 갖길 바랍니다." 김 동문은 좌우명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좌우명을 가지고 살지만, 수백 명 이산가족의 메신저가 된 "그"만큼 좌우명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젊은세대들에게 너무나 먼 이야기로만 들리는 "통일", 그 "통일"을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는 김 동문을 보며, 그가 주역이라고 말한 젊은세대로서 얼굴이 붉어짐을 느낀다. | |
김지민 학생기자 jimin@ihanyang.ac.kr 사진 : 권병창 학생기자 magnum@ihany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