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찾아 온 듯 하다. 이미 연초에 승부가 결정 나서 정권교체를 이룬 프랑스의 올랑드정권, 러시아의 푸틴 정권이 있는가 하면, 12월 말까지 정권이 바뀔 예정인 중국, 미국, 한국의 대선이 기다리고 있다.
사실 일반 국민들이야 누가 정권을 잡던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지만, 정치인, 고위 공직자 그리고 어느 쪽인가에 배팅한 사람들은 1년 농사의 추수를 기다리는 심정일 것이다. 그분들 관심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거창한 슬로건도 있겠지만 요체는 돈과 권력의 유지가 핵심일 것이며 정권이 바뀌더라도 자기 자리만 유지가 된다면 그렇게까지 정권교체에 대해서 앙앙불락(怏怏不樂)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조직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오뚝이처럼 영원이 자기 자리 유지하면서 떵떵거리며살고 싶은 것! 누구나 원하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부러움의 대상인 유명인사는 우리 주변에 몇 명씩은 찾아 볼 수 있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항시 최고 권력자와 시대의 정황에 맞게 유연하고 둥글둥글하게 처신하며 나름대로 능력과 소신을 갖춘인사들, 사실 인재들이다. 그렇지만 일부는 소신과 철학의 부재, 전형적인 아부위주의 소인배라고 악평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자, 그런 것들이야 할 말 많은 역사가들에게 평가를 맡기기로 하고 오늘은 중국 역사상 가장 복잡한 시기에 가장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며 오뚝이처럼 살아온 인사의 난세의 처세철학을 통해 우리를 되돌아 보도록 하자.
항상 즐거운 노인(長樂老人), 풍도(馮道)의 처세술
풍도는 중국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시대라고 지적 받고 있는 5代10國 ( 907 ~ 960년 )시절에 정권이 바뀌는 다섯 국가를 거치면서도 항상 재상자리를 유지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람이었다. 사실 5대 시절은 중국 역사상 5湖16國(304~439년) 시대와 더불어 가장 혼란한 시대였으며, 당시의 일부 왕조는 불과 2~ 3년도 유지 하지 못한 채 새로운 군벌에 의해정권이 바뀌고 기존의 권력자들은 하루 아침에 몰살당하는 야만의 시절이었다.
이러한 살벌한 시대에 풍도는 당나라 이후 신정권인 후당 명종 시절부터 재상을 시작하여, 석경당의 후진(後晉) 정권, 거란정권, 유지원의 후한(後漢) 정권, 곽위의 후주(後周)정권 5대 나라에 걸쳐 재상자리를 유지하였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영원한 오뚝이’ 부도옹(不倒翁)이라고 칭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그의 관운을 부러워하고 지조를 가진 선비열사들에게는 비열한 관리꾼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자, 그럼 풍도는 어떻게 처신하여서 적과 아군에 관계없이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까? 역사서에 기록된 사례를 통해 들어보도록 하자.
풍도는 소농의 일반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조상 역시 관리출신은 아니었다고 한다. 따라서 명문출신이 아닌 풍도가 관직생활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어려웠으며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는지를 알 수있는 대목이다.
풍도의 초기 관직생활은 비교적 정직하고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목민관(牧民官)의 자세를 유지하였다.
풍도는 신분의 열위를 극복하는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 특히 군주와 신하간의 갈등을 잘 해결해 주는 장점을 바탕으로 권력자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乘勝長驅) 하였다.
후당 명종시절에 처음으로 재상으로 임명 받은 후, 명종이 신하들에게 나라 살림을 묻자, 너나없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었지만 풍도는 달리 말 했다.
"제가 출장을 갔을 때 정경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매우 험난한 지역이라서 지나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매우 조심하여 그곳을 무사히 빠져 지나갔지만, 막 평지에 이르렀을 때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져 죽을 뻔 했습니다. 이 일을 겪은 후 저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폐하께서도 지금 풍년이 들었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신하들은 폐하께서 더욱 열심히 나라를 다스리고, 향락과 방탕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건의하여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당시의 명종은 혼란한 5대 시대에 비교적 명군이었기 때문에 풍도는 윗사람과의 관계를 건전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평가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난세에 접한 풍도의 현란한 처세술(處世術)을 보도록 하자.
명종이 갑자기 병으로 죽고, 동족인 이종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황급히 이모부인 석경당의 군중으로 피신하였다. 당연히 재상인 풍도는 군대를 수합하여 역적인 이종가에게 대적함이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풍도는 태연자약하게 조정의 백관을 거느리고 이종가를 맞이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물론 일부 백관은 "천자가 밖에 있는데 조정의 대신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을 황제로 모실 수 있단 말이오? 어쨌던 황제를 찾아가야 하지 않겠소? " 라고 하자, 풍도는 어린 황제와 반란군 이종가의 실력을 비교하며 백성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 사직을 보존하는 길을 강조하며 백관을 설득하였다. 결과적으로 풍도는 새 왕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지만, 신집권세력의 견제에 밀려 실권이 없는 사공이라는 직책에 만족하여만 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 훌륭하게 살아남은 결과다.
신 권력을 잡은 이종가는 석경당에 의해 불과 5년 만에 권력에서 쫓겨 났다. 석경당은 이종가와 전쟁하는 중, 힘에 부치게 되자 거란의 왕에게 '아들황제'가 되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하여 결국 황위를 차지하게 되는데, 석경당은 전 정권에서 한직에 있던 풍도를 다시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아들황제'로써 거란의 왕에게 조서를 올려야 하는 창피스러운 일이 남았다.
자, 누가 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조서를 쓸 것이며, 누가 이 조서를 가지고 거란 왕에게 사절로 갈 것인가? 물론 중량급의 인사여야 거란 왕이 양해 할것이다.
석경당은 외교사절로서 당시 재상이면서, 행동이 매우 정중하고 노련한 풍도를 염두에 두고 고민하였지만, 막상 풍도가 흔쾌히 승낙하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석경당은 풍조의 원모심려(遠謀深慮)를 미쳐 헤아리지 못한 듯 하다. 즉 풍도는 일시적인 치욕을 감수하고 '아버지 황제'을 잘 구슬린다면, '아들 황제'을 아무 어려움 없이 다룰 수 있으며 안정적인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다는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풍도는 외교사절의 사명을 원만하게 잘 처리하였다. 그는 거란에서 2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여러 차례 시험을 거쳤는데, 거란 왕으로부터 자기 사람이라는 신뢰를 받게 되어 자국으로 귀환명령이 떨어졌는데, 풍도는 오히려 거란을 떠나지 않겠다는 글을 올려 충성을 고백하는 연출을 한다.풍도는 귀국 후에 황제인 석경당마져도 그에게 아부를 할 정도로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권력을 향유하였다.
그러나 풍도는 석경당의 후진 3년에 거란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거란이 중원을 오래 통치할 것으로 생각하여 거란 왕을 찾아가 귀순을 요청하였다. 풍도는 거란 왕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으로 예상 하였지만, 거란 왕은 오히려 석경당을 잘 보좌하지 못한 풍도를 심하게 질책하였다. 다음이 대화 내용이다.
"너는 왜 나를 찾아왔느냐?" "저는 성곽도 병사도 없는 사람입니다. 어찌 귀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이 늙은이야, 너는 어떤 사람이냐?" "어리숙해서 덕도 재능도 없는 형편없는 영감이외다!" 비굴하게 아부하는 풍도의 모습을 본 거란 왕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다가 더 이상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다.
얼마 후 거란 왕은 풍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고생하는 백성을 구할 수 있는가?" 풍도는 물고기가 물을 만나듯 충성스런 모습으로 답변하길, "지금은 부처가 다시 살아 온다고 해도 어쩔 수 없으며, 오직 폐하만 이 백성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아첨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후 거란 왕은 점차 풍도를 좋아하게 되었고 중용하기 시작했다. 아부의 왕 풍도의 진가가 발휘된 것이다.
세세 연년(歲歲年年) 권력을 누릴 것으로 여겼던 거란이 쇠퇴의 징조를 보이자, 풍도는 변신을 시작했다. 이제 거란에 대항하는 후진의 유력 장군인 유지원의 편에 암암리 가담하여 내통하다가, 거란병력이 유지원 군대에 패퇴하자 재빠르게 탈출하여 신정권에 가담하였다.
이후 유지원은 후한을 건립하였으며,풍도를 재상으로 다시 영입하였다. 5대 시기의 정권교체는 마치 주마등(走馬燈)처럼 현란했다. 후한건립 4년 만에 곽위(郭威)가 반기를 들고 정권탈취에 나서자, 풍도는 다시 옛날처럼 백관들을 거느리고 곽위를 맞이했다. 그리고 곽위가 세운 나라가 후주(後周)인데, 풍도는 다시 재상이 되었다. 가히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말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이 아니다.
자, 이제 풍도의 마지막 결과를 보도록 하자.
후주에서도 승승장구하던 풍도에게 정치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몇 년 후 곽위가 죽고 나자, 그의 양아들 시영이 황위를 물려받게 되는데 세종이다. 세종은 34살의 젊은 나이로서 패기가 넘치는 황제인데, 당시 일부 반란군과 거란 군이 연합하여 후주를 침략하였다. 젊은 황제 세종의 직접 출전 주장에 유독 풍도 만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다음의 대화에서 풍도의 생각을 엿 볼 수 있다. 세종이 말하길, " 옛날 당 태종은 언제나 직접 출정하였는데, 나라고 그를 본받지 말란 법이 있소?" 풍도가 대답하길,"그대가 당 태종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종이 다시 말하길, "나의 병력이 강대하오. 적군을 무찌르는 것은 마치 산으로 계란을 치는 격인데, 어찌 승리 할 수 없겠소?"라고 하니 풍도는 "폐하가 산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세종은 풍도가 본인을 업신여긴다고 몹시 화가 났지만, 사실 풍도는 지금까지처럼 어느 왕조에서나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풍도를 놀라게 했다. 세종이 개선할 때 풍도는 기름이 다한 등잔불 신세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아무 영예도 없이 73살의 나이로 처량하게 세상을 떠났다.
풍도는 봉건시대 관직사회의 오뚝이였다. 후한의 재상으로 있을 때는 '장락노자서(長樂老子書)'라는 글을 지었는데, 이는 봉건시대 관직사회의 파렴치(破廉恥)한 선언이라고 일부는 혹평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이력을 자세히 적었는데, 심지어는 거란정권에서 받은 관직까지 나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기 900년도,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풍도는 실로 '항상 즐거운 노인'이었다. 중국사람들은 " 만족하는 자는 늘 즐겁다"는 말을 믿는다고 하는데, 풍도는 관리만 될 수 있으면 늘 즐겁게 지냈다. 풍도는 관직사회에서 패할 줄 모르는 장수였고 생생한 교제였다. 조직과 관직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오뚝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양심 + 투기에 능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후일의 역사가는 평가하였다.
실리와 명분의 차이
21세기의 현대사회에서 조직관리와 통치기술은 점점 복잡해지고 고도화 되어가고 있다. 사실 풍도와 같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은 비열함에 몸을 떨고 있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은 인간의 심리는 어느 조직에서나 어울리면서 성공하고, 오래 동안 유지할 것인가에 핵심이 녹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과 부모입장에서 넓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젊은 인재들에게 가르쳐야 할 진정한 덕목은 무엇일까? 명분과 실리는 어쩌면 종이 한장 차이 일 수도 있다. (jgkim1226@hanmail.net)
◆ 온고지신 (溫故知新) :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앎. ◆ 처세술(處世術) : 사람들과 사귀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나 수단. ◆ 앙앙불락(怏怏不樂) : 매우 마음에 차지 아니하거나 야속하게 여겨 즐거워하지 아니함. ◆ 유일무이(唯一無二) : 오직 하나뿐이고 둘도 없음. ◆ 부도옹(不倒翁) : 오뚝이 ◆ 목민관(牧民官) : 백성을 다스려 기르는 벼슬아치라는 뜻으로, 고을의 원(員)이나 수령 등의 외직 문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 [비슷한 말] 목민지관ㆍ친민관. ◆ 승승장구(乘勝長驅) : 싸움에 이긴 형세를 타고 계속 몰아침. ◆ 개국공신(開國功臣) : 나라를 새로 세울 때 큰 공로가 있는 신하. ◆ 전무후무(前無後無) :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음. ◆ 원모심려(遠謀深慮) : 먼 장래의 일까지 깊이 생각함. ◆ 부귀영화(富貴榮華) :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으며 귀하게 되어서 세상에 드러나 온갖 영광을 누림. ◆ 세세 연년(歲歲年年) : 여러 해를 거듭하여 계속 이어짐. ◆ 주마등(走馬燈) : 무엇이 언뜻언뜻 빨리 지나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명불허전(名不虛傳) : 명성이나 명예가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름날 만한 까닭이 있음을 이르는 말. ◆ 파렴치(破廉恥) : 염치를 모르고 뻔뻔스러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