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듣건대, 요사이 많은 강적(强賊)들이 본부(本府)의 성저(城底)에 몰려들어 주민을 살해하는 일이 매우 많은데도, 사람들은 보복이 두려워 감히 고발하지 못하고, 관리들은 비록 보고 듣는 바가 있어도 매복을 시켜 포착(捕捉)할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합니다. 지난날 임꺽정(林巨叱正)을 【황해도 도적으로 본부 관할지에 살고 있었다.】 추적할 즈음에 패두(牌頭)의 말을 듣지 않고 군사 20여 명만을 주어 초라하고 서툴게 움직이다가 마침내 패두가 살해당하게 되었는가 하면, 【패두 이억근(李億根)은 일찍이 도적 수십 명을 잡은 적이 있었다. 이때 본부가 신계(新溪)의 첩정을 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포위하였는데, 이억근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새벽을 이용하여 적소(賊所)에 들어갔다가 일곱 대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바로 뒤를 이어 적을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다가 끝내 적들이 멋대로 날뛰게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경기도 양주백정 출신 임꺽정이라는 도적은 황해도 일대에서 약탈과 방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이 일이 중앙조정에까지 보고가 들어가 도적을 체포하는데 힘을썼던 포도관 이억근을 파견하였는데,
산을 포위하고 자신이 직접 적의 소굴로 군사 수십명을 끌고 갔는데
적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화살을 쏘아서
화살을 맞아 전사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황해도에서는 내수사에 갈대밭을 빼앗긴 천인들이나,
간척기술이 발전하여 지역의 토지는 늘어났으나 간척사업에 동원되고도 부의 분배에 제외 된 농민들도 있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이 당시는 조선초기보다는 장시와 상업 또한 발달하여 부를 축적한 지방 토호들이 있었기에, 이들이 도적들의 주 약탈 대상이 되었으며,
당시 백성들은 물론 아전들까지 임꺽정이 무섭기도 하였으나 조정을 미워하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어 임꺽정에게 많은 정보들을 제공하여, 중앙의 군대가 패하였던 것입니다.
조정의 초기 진압이 실패한 뒤 임꺽정의 활동범위는 황해도를 넘어 강원도 지방에 이르렀고,
궁궐의 코앞인 장통방에 자신의 처 3명을 두고 살다가 도망치는가 하면,
자기 패거리를 시켜 거짓으로 승정원에 상소를 보내어 왕이 임꺽정에게 조롱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황해도 일대의 수령들을 무반으로 보내려 시도하는 한편
임꺽정의 주 활동 무대였던 황해도 봉산의 군수들이 지역 백성들 틈에 숨어 살던 임꺽정 패거리에 의해 여러차례 살해 당할 뻔 하는 사태에 이르자,
명종15년(1560) 10월 23일에 을묘왜변 참전 경험이 있고, 신계현령 재임 중 황해도의 다른 도적인 오연석을 잡은 공이있던 이흠례를 임꺽정의 주 활동무대인 황해도 봉산군의 군수로 임명하였습니다.
그 다음달인 11월 23일에 포도대장 김순고는 장통방을 통해 물품구매를 담당한 것으로 추측되는 임꺽정의 모사 서림을 숭례문 바깥에서 잡아들였는데,
임꺽정 일당이 평산에서 봉산군수 이흠례를 죽이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고,
선전관 정수익과 금교역의 찰방이었던 강여를 보내어 황해도의 다른 고을의 군사를 모아 임꺽정을 치도록 하였습니다.
11월 28일에 군사 황해도 4~5고을의 군사 약 500여명이 모여 마산리에 모였는데,
도적 7명이 산위에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군사를 몰아 계곡을 따라 뒤쫓아 들어갔으나,
이는 임꺽정의 유인책으로 기마군 60여명이 산위에서 일제히 화살을 쏘니,
500명의 군대가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고
도적의 귀로(歸路)를 지키고 있던 부장 연천령은 도적의 손에 죽었고 역마 또한 빼앗겼습니다.
사태가 점점 커지자 12월23일에 함경도북병사로 여진 초관정벌에 경력이 있던 이사증을 황해도 순경사로 파견하고(복수와 복수가 이어지는 혈전2 참조), 강원도에도 중종년간부터 무관으로 활약한 김세한을 순경사로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명종16년(1561) 1월에 이사증이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를 임꺽정이라고 잘못잡아오는가 하면,
그해 9월에 의주목사 이수철이 임꺽정과 한온을 잡았다고 보고하여 서울로 올려보냈지만 이 또한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에 계속 망신만 당하는 상태였으며,
되려 해주에서 또다시 임꺽정일당이 약탈을 자행하였기에,
10월에 조정에서는 결국 경기 함경 평안 강원 4도의 군대를 동원하고, 이준경의 추천으로 잔혹하지만 능력은 검증된 남치근을 황해도 토포사로 임명하여, 임꺽정을 잡아 오도록 하였습니다.
남치근이 재령군으로 나아가 진을 설치하자,
임꺽정은 날쎄고 건장한 사람들을 추려서 구월산으로 올라갔으며,
나머지는 분담하여 험악한 곳을 지키게 하며 체포를 방지하고자 하였는데,
남치근은 이전의 장수들처럼 급하게 산을 오르지 않고 군마와 병력을 풀어 구월산을 포위하고서 천천히 수색하며 포위를 좁혀들어갔습니다.
때가 겨울이었고 포위가 물샐틈없이 완벽하였던데다가 항복하였던 서림에 의해 조정군이 허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 유격전을 벌일 수 없어 제대로 접전하지 못하고 오래 굶주린 도적들이 항복하거나 붙잡혔는데 다 죽였고,
끝까지 남아있던 임꺽정의 측근 5~6명도 서림의 유인책에 넘어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임꺽정은 그런 와중에도 골짜기를 넘어 도망갔는데,
남치근은 임꺽정 수색을 위하여 황주와 해주의 모든 장정을 동원하여 문화(文化)에서 재령에 이르기까지 온 집을 다 뒤졌습니다.
임꺽정이 한 노파의 집에 숨어들어갔는데 추격대가 이르자 노파로 하여금 소리지르도록 협박하고
노파가 소리지르며 나가는 틈에 자신 또한 군사의 복장으로 도적이 이미 달아났다고 소리쳐 그 틈에 빠져나왔습니다.
그러고서는 혼란한 와중에 말 한필을 빼앗아 타고서 말 탄 군인인척 하며 뒤로 빠지려 하니 의심하는 군사 5~6명이 뒤쫓아와 추격전을 벌이는데,
서림이 멀리서 "임꺽정이다"라 외치자 결국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 홍언성등에의해 잡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