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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파평윤씨태위공파(坡平尹氏太尉公派) 원문보기 글쓴이: 청파 윤도균
파평윤씨 5세 관(瓘) 문숙공(文肅公) 추향제
윤관장군 묘
위 치 :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 관 리 자 : 파평윤씨 대종회 (031-947-3330) 개 요 :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 윤관(尹瓘)의 묘로 묘역전체 규모가 상당 히 크고 웅장 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봉분 아래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護石)을 두 르고 봉 분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정면에 상석(床石)이 놓여있으며 왼쪽 에 묘비가 서 있다. 한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등이 일렬로 배치되 어 있다.묘역 아래에는 윤관 장군의 영정이 봉안돼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 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윤관(?∼1111)은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고손이며 검교 소부소감(檢校小府 少 監)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동현(同玄),시호는 문숙(文肅) 이다.
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 영병마도통 (東北面行 營兵馬都 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 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2년 (1107)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 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 비케하였다.
윤관은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6년(1111)에 돌아가자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廟廷) 에 배향(配享)되었다.
파평윤씨 5세 관(瓘) (문숙공(文肅公) 추향제 2011년 10월 31일 (음 10월 5일 월요일) 오전 10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번지 여충사 에서는 파평윤씨 先代 (공신공 : 2세, 휘, 先之 ) (복야공 : 3세, 휘, 金剛 ) (문정공 : 4세, 휘, 執衡 ) 위 3위분 망제와 5세 관(瓘) (문숙공(文肅公)에 대한 추향제가 전국 각처에서 모인 파평윤씨 후손 제관 5 ~ 600여 명이 참석하신 가운데 엄숙하게 봉양 되었다. 추향제가 끝나고 "파평윤씨 대종회 윤철병" 회장님께서 대종회 관련 종사 현안 문제에 대한 진행 과정 소개와 인사 말씀을 하시었고, 이어서 "문숙 공동 상 건립추진위원장 (文肅公銅像建立推進委員長)" 윤승혁 (尹昇赫) 회장님께서 육군보병학교장이신 "南原伯派의 尹光燮장군"께서 전남 장성군에 위치한 육군보병학교장으로 부임하시어, 상무대 경내에 타 성씨 우리나라 역대 장군들의 동상은 건림이 되어 있으나 어떤 이유인지 문숙 공 윤관 장군의 동상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시어 지역 종친들과 수차에 걸친 협의를 끝에 문숙공 동상을 건립하기로 결정한 후 전국의 종친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현재 문숙공 윤관장군의 동상 설립 추진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 하신 후 여충사 추향제를 모두 마쳤다. 이어서 온화한 가을 날씨 속에 아름다운 여충사 경내 잔디와 울긋불긋 단풍 숲 그늘 아래 전국에서 여충사 추향제에 참석하신 파평윤씨 후손 제관님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대종회에서 준비한 도시락과 막걸리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나누며 점심을 마치고 내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전국 각처에서 모이신 종친들이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날의 파평윤씨 5세 관(瓘) (문숙공(文肅公) 추향제 실황을 사진과 동영상에 담아 영상 자료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파평윤씨 5세 문숙공, 휘, 관 약사(五世文肅公 諱 瓘 略史) 고구려의 옛 강토인 북녘의 실지는 회복하여 민족 전성시대(民族全盛時代)를 구현하겠다는 웅국(雄國)아래 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 건너 7백 리까지 진격하시어 여진을 정벌 천 리 변경에 9성을 쌓으시고 사십만의 남방민을 그곳에 이주시킴으로써 민족 발전의 기틀을 이룩하신 문숙공(文肅公)이야말로 이 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척지회강(拓地恢疆)의 위업을 성취하신 위대한 영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려 예종 2년(1107년) 10월 20일 마침내 여진 대 정벌의 묘의(廟議)가 결정되니 문숙공(文肅公)은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임명받으시고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역사적인 북벌의 장도에 오를 만반의 태세를 갖추시었다. 문숙공(文肅公)은 왕명을 받자워 황공 감격하여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선왕의 밀지를 받들고 지금 또 엄명을 받자 오니 어찌 감히 삼군을 통솔하여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우리의 강토를 개척하여 나라가 받은 치욕을 씻지 않겠나이까』하고 왕께 맹세하시었으니 이 여진 정벌이야말로 국운을 걸고 결행하는 일대 장거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어 11월 25일 예종이 친히 서경의 위봉루(威鳳樓)에 거동하여 문숙공(文肅公)에게 생살권(生殺權)을 맡기는 부월(鈇銊)을 하사하고 바로 그날로 출시케 하니 공은 그동안 맹훈련을 거듭한 신기(神騎) 신보(神步) 강 마군(降魔軍) 등 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즉시 수륙양면에 걸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리하여 공 휘하의 고려 대군은 5군으로 나뉘어 노도와 같이 진격하여 천 리 변경(千里邊境)의 수많은 여진 촌락들을 석권하면서 연전연승 두만강 북방 칠백 리까지 여진 군을 무찌르니 적군은 충용무쌍(忠勇無雙)한 우리 군사의 기세에 놀라 모조리 도망하고 가축만이 빈 들판에 몰려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한 사가(史家)는 이때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천 여러 강토를 순식간에 점령하여 수백 년 동안 잃었던 땅을 하루아침에 회복하니 윤관장군(尹瓘將軍)의 기쁨은 한량없었고 모든 장수와 군사의 기뻐하는 모습은 말로 다 할 수 없더라. 윤 장군이 승전고를 울려 승리를 자축하니 장수들은 기뻐 뛰어 나라의 강성함을 축하하고 승전을 축하하는 군사들의 고함은 천지를 진동하더라』 문숙 공은 되찾은 북녘 땅에 재빨리 영주(북청)<英州(北靑)>, 복주(단천)<福州(端川)>, 웅주(길주)<雄州(吉州)>, 길주(경성)<吉州(鏡城)>, 함주(함흥)<咸州(咸興)> 및 공험진(연길)<公嶮鎭(延吉)>에 6성을 쌓고 두만강 북쪽 칠백 리의 선춘령(先春嶺) 아래 공험진(公嶮鎭)에 비(碑)를 세워 정계(政界)를 삼으시고 나서 종군 중인 아드님 시어사(侍御史) 언순(彦純)公을 보내어 국왕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성인의 덕은 진실로 천지에 합하고 인의의 군사는 이미 오랑캐를 평정하였습니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기뻐서 환호성을 올리고 있습니다. ……. 신이 절술(節銊)의 대명을 받자옵고 북을 울리면서 당당하게 진군하였습니다. 기세는 군중(軍中)에 움직이고 위엄은 적에게 가해졌나이다. 강하(江河)가 구령에 닥치는데 한치 아교로 능히 막지 못하고 하석(嘏石)이 산봉우리에서 구는데 빈알(허란<虛卵>)이 결단코 깨어지는 것입니다. 포로가 반만(半萬)이 넘고 적을 베인 것이 5천에 가까우며 쌓은 곡식은 마을마다 흩어지고 달아나는 사람은 길이 엇갈렸나이다. 산천이 험하매 성지(城池)가 인하여서 높고 깊으며 원야(原野)가 기름지어 전정(田井)을 또한 갈고 팔 수 있습니다. 옛적에는 사람이 구하여도 얻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이것을 하늘이 주심을 이미 취하였나이다. 위로는 족히 종묘(宗廟)의 재천 하신 영(靈)에 사례하고 아래로는 족히 조정의 적 년(積年) 수치를 씻었나이다.』 공은 또 병마영할(兵馬鈴轄) 임언(林彦)을 시켜 그 일을 영주청벽(英州廳壁)에 기록하게 하니 그 글에 말하기를 『수사도중서시랑평장사(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을 灼臼?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를 삼아 정병 삼십만을 거느리고 여진 정벌을 전담케 하였다. 양공(兩公)이 일찍이 이에 뜻이 있었으므로 명을 받고 분발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으로 내려가서 군사를 내는 날에는 몸소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기도 전에 감개한 눈물을 뿌리니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적 경에 들어감에는 삼군이 용맹을 떨치어 한 사람이 백을 당적 하니 마른 가지를 꺾고 대(竹)를 쪼개 인들 어찌 이보다 더 쉬울 수 있으리오. 60여 명을 참수하니 공시(弓矢)를 싣고 진전해 와서 항복하는 자가 5천을 넘었으며 전진(戰塵)을 바라보고 간담이 떨려서 도망쳐 달아나는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아아! 여진이 완고하고 어리석어 그 강약과 중과(衆寡)의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함을 취함이 이와 같도다. 그 지방의 산천이 수려함과 토지의 기름짐은 가히 우리 백성을 살게 할만 하며 본래 고구려의 소유이라 그 고비(古碑)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대저 고구려가 전에 잃었던 것을 지금 임금이 뒤에 이것을 얻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리요』라고 하였다. 공이 이어 40 만에 달하는 남방 국민을 되찾은 북녘 땅에 이주시켜 거기에 터전을 잡게 하는 한편 의주(宜州)(덕원<德源>), 통 태(通泰)(혼춘거양성<琿春拒陽城>) 및 평융(平戎)(경원 영험<慶源嶺嶮>)의 3성을 더 쌓음으로써 이미 쌓은 영주, 복주, 웅주, 길주, 함주 및 공험진을 합하니 모두 9성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예종은 공(公)을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임명하고 내시랑 중(內侍郞中) 한격여(韓激如)를 보내어 조서(詔書)와 고신(告身) 및 자수안구(紫繡鞍具)와 궁중의 말 2필을 가지고 웅주에 가서 하사케 하였다. 예종 3년 4월 공이 개성으로 개선(凱旋)하매 왕이 명하여 고취(鼓吹)와 군위(軍衛)를 갖추고 맞이하도록 하고 대방후보(帶方候俌)와 제안후서(齊安候壻) (왕제<王弟>)를 보내어 동교(東郊)에서 위로 향연 하였다. 공(公)이 경령전(景靈殿)에 나아가 복명하고 부술(鈇銊)을 다시 바치니 왕이 문덕전에 거동하여 인견하고 변방 일을 묻고 밤이 되어 파하였다. 같은 해 7월 공이 다시 웅주에 집결한 적을 토벌하시고 돌아오시자 왕은 공에게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食邑) 2천5백 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 호(戶)를 봉하였다. 또 이듬해 여진이 길주를 포위하자 왕은 다시 공을 보내어 이를 치게 하니 이로써 공은 결국 4차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시었던 것이다. 공께서는 여진을 토벌 작전 중 산악지대의 험로를 행군할 때 군마가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말에게 씌운 칡 짚신을 철(鐵)로 바꾸어 귀는 마철대갈(馬鐵代葛)을 창안하시어 오늘날까지 대갈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공(公)의 휘(諱)는 관(瓘)이요 자(字)는 현동(同玄)이시고 호(號)는 묵재(黙齋)이시며 시호(諡號)는 문숙공(文肅公)이신데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의 현손(玄孫)이시고 아버님은 문정공(文靖公) 휘(諱) 집형(執衡)이시오 어머님은 신라(新羅)의 최종왕(最終王)인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傳)의 손녀(孫女)이시다. 고려(高麗)의 파평현(坡平縣) (파주<坡州>)에서 탄강(誕降)하시었는데 함안파(咸安派) 언전(諺傳)의 문숙공(文肅公) 사주(四柱)에 따르면 정종 6년(서기 1040년) 경진(庚辰) 6월1일 사시(巳時)에 탄생하시었다고 전한다. 각 문의 혈통과 파평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태어나신 문숙 공은 자라나심에 따라 비범하고 총명하시었으며 특히 학문을 좋아하시어 서책을 놓지 않고 항상 휴대하시었다. 그러기에 문무를 겸비하신 공께서는 훗날 시문에서도 명인으로 꼽히시었고 더구나 공께서 7세 때 뽕나무를 글제로 해서 지으셨다는 다음 시는 당시의 세인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葉養天虫防雪寒(엽양천충방설한) 뽕잎은 누에를 길러 추위를 막게 하고 枝爲强弓射犬戎(지위강궁사견융) 가지는 굳센 활로 오랑캐를 쏠 수 있네! 名雖草木眞國寶(명수초목진국보) 이름은 비록 초목이나 참으로 국보일세 莫剪莫折誠兒童(막전막절성아동) 베거나 꺾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타일러야 하리 문종27년(서기1073년)에 공은 진사과에 급제하셨으며 다음 해 4월에 대과에 급제하시고 또 왕명 세자복시(世子覆試)에 문과 장원으로 뽑히시어 장사랑(將仕郞) 비서동정(秘書同正)이 되셨다. 의종 원년에 예빈사주부(禮賓寺主簿)가 되시어 과거의 시 관이 되셨다. 동2년에는 십유지제고(拾遺知制誥)가 되시고 그다음 해 3년에 은중내급사(殷中內給事)가 되셨으며 서경 유수판관이 되셨다. 동 4년 12월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광 충청주도(廣忠淸州道) 출추사(出推使)를 임명받으셨고 그 후에 보궐(補闕)로 옮기셨다. 동 8년에는 은중시어사(殷中侍御史)에 제수되시어 비금어대(緋金魚袋)를 받으셨다. 동 11년 5월에 시관(試官)으로서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에 임명되시고 12월에는 상서이부원외랑(尙書吏部員外郞)을 더 하셨다. 헌종원년(서기 1095년) 10월에는 좌사랑중시어사(左司郞中侍御史)로서 헌종의 종표(宗表)를 가지고 요(遼)나라에 특사로 파견되시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시었다. 그때 왕께서 병으로 정사를 볼 수 없어 신왕에게 양위한다는 뜻과 겸하여 곧 즉위한다는 뜻의 글을 지닌 것으로 임의(任㦤)를 부사로 삼으시었다. 12월에는 요나라 왕의 회조(回詔)를 가지시고 귀국하시어 어사에 제수되시고 곧 지수주사(知樹州事)에 제수되셨다. 숙종 원년에는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가 되셨고 숙종 2년(1097년) 12월에는 철로 만든 돈을 만들어 통용케 하는 주전법(鑄錢法)을 제정할 것을 건의하여 왕이 이를 윤허함으로써 역사상 국내 최초로 주전도 감이 시치(始置)되어 화폐 주조의 신기원을 마련하였다. 공은 또 숙종 3년 7월 왕의 친서를 가지고 송나라에 가시니 송조에서 크게 환영하고 환대하였는데 그곳에 체류 중 그 나라의 석학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의 두 학자는 공의 고매(高邁)한 박식에 놀랐다고 하며 서로 시를 창화(唱和)하시며 공이 그곳에서 지으신 다음 응제 시는 그 글귀를 지금까지도 중국인이 외우고 있다 한다. 誰道芳辰難再遇(수도방진난재우) 누가 좋은 때를 두 번 만나기 어렵다 이르느뇨 我今三遇帝都春(아금삼우제도춘) 내 이제 세 번 제도 봄을 만났노라. 이 시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문숙 공은 세 차례나 사신으로 가시어 외교 활동에도 진력하신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 4년 4월에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제수되시어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가 되셨다. 동 6년 9월 왕이 양주에 도읍지를 설치할 것을 명하심에 따라 공(公) 等이 삼각산 아래 오늘의 서울에 남경을 세울 것을 상주하시어 왕이 그대로 창설토록 하여 동 9년 5월에 공이 대창도감(開創都監)으로 지휘 감독하신 남경의 궁궐이 이룩되었다. 한편, 숙종 6년에는 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임명이 되셨으며 이듬해 7년 3월에는 지공거이굉(知貢擧李宏)과 더불어 진사를 시험 보아 뽑으셨다. 그해 11월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되셨다. 또 12월에는 어사대부가 되셨고 동 8년 2월에는 이부상서지추밀원사(吏部尙書知樞密院事)가 되셨고 6월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에 배명(拜命)되셨다. 동 9년에는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 대학사(大學士)가 되셨고 2월에는 참지정사(叅知政事)로서 동복면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발탁 임명되시어 제1차 여진 정벌의 장도에 오르시게 되셨다. 공은 적과 싸워 30여 명을 죽이는 등 분전을 하셨으나 적은 반유목민인 무리로서 기병(騎兵)인데 반(反)해 고려군은 보병이어서 당할 수가 없어 부득이 그들과 화맹(和盟)을 맺고 돌아오셨다. 동 10년에는 태자태보(太子太保) 판상서병부(判尙書兵部) 한림원사(翰林院事)에 배명되시고 11월에는 중서시랑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가 되셨다. 여진과의 처음 대전에서 돌아오신 공께서는 저쪽은 기병인데 우리 쪽은 보병이라 적수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시고 별무반을 창설할 것을 건의하시어 말 가진 자는 신기 군으로 편입시키고 말 없는 자는 신 보병으로 삼고 그밖에 도 탕(跳蕩), 경궁(梗弓), 정노(精弩), 발화(發火)들을 각군에 배치하고 문무산관이서(文武散官吏胥)와 모든 상인 그리고 비복들도 동원하여 편입시켰으며 승려로서는 강마군(降魔軍)을 편성하시었다. 강마군의 첫 편성은 승병의 호국의병으로 후일 임진왜란 때 문숙 공의 유업(遺業)으로 계승되기에 이르렀다. 여진 정벌의 숙원을 풀지 못하고 숙종이 승하한 후 예종(睿宗)이 즉위한 다음 해인 1106년 11월 문숙공(文肅公)은 오연총과 더불어 그동안 맹훈련을 거듭한 신기군, 신 보군을 숭인문 밖에서 사열하시어 그다음 해에 결행되는 북벌작전을 앞두고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돋구시었다. 그리하여 한해가 지난 예종 2년(1107년) 10월에 이르러 드디어 역사적인 여진 대 정벌의 용단이 내려진 것이다. 문숙 공의 4차에 걸친 여진 정벌로 심대한 타격을 받고 궁지에 몰린 여진은 예종 4년 6월 당황한 나머지 사신을 보내어 대방(大邦)(고려<高麗>)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배반치 않고 대대손손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9성을 여진에 돌려줄 것을 빌기에 이르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을 시기하는 나약한 문신들이 9성 환부를 극력 주장하였고 심지어는 공을 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까지 있었다. 이리하여 이해 7월에 이르러 드디어는 중신회의에서 9성 환부가 결정되어 공이 심혈을 기울여 1년7개월간 쌓아 올린 9성을 여진에 돌려주었으니 이는 고려사상 일대 통한 사라 아니할 수 없다. 공의 인품과 위 공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끝까지 공을 옹호하던 예종도 끝내는 문신들의 완강한 고집에 못 이겨 공의 공신호(功臣號)만 거두고 공에게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의 관직을 재배(再拜)하였으나 공은 이를 사퇴하셨다. 예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간곡히 말하기를 『옛날에 한나라의 이광리(李廣利)(이사장군<貳師將軍>)가 대완국(大宛國)(서역<西域>)을 정벌하였을 때 겨우 기마 30필을 얻어 왔으나 무제는 만 리 밖에 나가서 정벌하였다 하여 그 과실을 기록하지 않았고 진탕(陣湯)이 질지국(郅支國)(서역<西域>)을 토벌하였을 때에도 임금이 명을 받지 않고 함부로 군사를 일으켰는데도 선제는 나라의 위엄이 백만(百蠻)에 떨치었다 하여 열후(列候)에 봉하였던 것이다. 경이 여진을 정벌한 것은 선고의 유지를 받들고 과인의 계술(繼述)하는 일을 체(體)하여 몸소 칼날과 화살을 무릅쓰고 깊이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 죽이고 사로잡음이 이루 헤아리지 못하며 광대한 땅을 개척하고 9주의 성을 쌓아서 나라의 묵은 수치를 씻었으니 경의 공이 가히 크다고 이르겠다. 그러나 오랑캐는 본래 사람의 얼굴이나 짐승의 마음이라 배반하고 항복함이 무상하므로 그 남은 무리가 의지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에 추장이 강서를 바치고 화친을 청하매 여러 신하가 편하다 하고 과인도 또한 차마 하지 못하여 드디어 그 땅을 돌려주었거늘 유사들이 법을 지켜 자못 탄핵함이 있으므로 그 벼슬을 거두었으나 과인은 끝까지 경을 허물하지 않고 맹명(孟明)(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으로 진인에게 세 번 패하였으나 목공<穆公>이 그대로 등용하여 결국 진을 파하고 서융<西戎>에서 패권<覇權>을 잡음)이 다시 강을 건넘이 있기를 바라노라. 이제 과인이 경에게 주는 것은 곧 경의 본래의 벼슬이니 어찌 족히 사양하리오. 마땅히 돌보는 마음을 살펴서 속히 그대 벼슬에 나아갈지어다.』라고 하셨다. 참으로 그 신하에 그 임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종은 그 후 9성의 환부를 크게 후회하였고 서경에의 이도(移都)를 계획한 일이 있으며 원래가 여진족(女眞族)인 김태조(金太祖)가 중화(中華)의 양자강 이북을 병합하여 대금제국(大金帝國)을 건설한 후에도 김태조(金太祖)에게 『그대의 나라가 우리나라에서 나왔으니 그대는 우리의 속국 운운.』하는 국서를 보내어 그들의 노여움을 산 일이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일은 공의 아드님이신 문강공(文康公)(언이<彦頤>)이 금국(金國)에 굴종하는 것을 분개해 여겨 민족자주성을 천명하는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을 주창하였으니 이 또한 여진을 정벌하여 국위를 크게 선양하신 아버님 문숙 공의 구국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 하겠다. 예종 6년(1111년) 5월 8일 공께서는 강웅지(疆雄志)가 좌절되는 천추의 한을 품으시고 영서(永逝)하시니 파평현(坡平縣) 분 수원(焚修院) 북 양원(北良原)(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現坡州市 廣灘面 汾水里>)에 예장(禮葬)되시었다. 시호는 애초 문경(文敬)으로 내리시었으나 인종때 수능(綏陵)(예종비<睿宗妃>)의 휘호(徽號)를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치었다. 공의 배 위는 국대부인(國大夫人) 인천이씨(仁川李氏)로서 그 아버님은 상장군(上將軍) 성간(成幹)이고 조부는 대장군(大將軍) 눌(訥) 이며 증조부는 상서좌복야소성현개국백(尙書左僕射邵城縣開國伯) 허겸(許謙)이요 외조(外祖)는 고려왕(高麗王) 태조(太祖)이시다. 국대부인(國大夫人) 묘소는 연안 자달동 문정공 묘소 앞이라 하나 실전되었다. 공은 7남 2녀를 두시었는데 장자 언인(彦仁)은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그 아드님은 덕첨(德瞻)이고 덕첨공의 아드님은 위(威)로서 시랑(侍郞)이니 남원 백이 되시어 남원윤씨의 시조가 되시었고 그 아드님 극민(克敏)은 태학사(太學士)이며 국민 공의 아드님인 돈(敦)은 시중으로서 일찍이 함안백(咸安伯)이 되시어 함안 윤씨의 시조가 되시었다. 둘째는 언순(彦純)으로 남원부사(南原府使)로서 5남 1녀를 두셨고 셋째는 언암(彦巖)으로서 흥 왕사 주지였고 넷째는 휘(諱)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선사(禪師)이고 다섯째는 언식(彦植)으로서 좌복야(左僕射)이며 4남 3녀를 두셨고 여섯째는 언이(彦頤)로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이며 7남 4녀를 두셨고 일곱째 언민(彦旼)은 상의봉어(尙衣奉御)이셨다. 큰 따님은 尙書右丞 黃元道(상서우승 황원도)에 출가하셨고 둘째는 平章事 任元濬(평장사 임원준)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그 후 인종 8년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셨고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문종 2년에는 숭의전에 또한 배향되셨다. 세종 19년에는 9성 옛터 일부에 6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이 함경도경성(咸鏡道鏡城)에 공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 드렸는데 처음에 이를 노당(蘆堂)이라 불렀으며 선조 16년에 중수되어 시중묘(侍中廟)라 개칭되었고 경종 원년에 윤문숙공묘(尹文肅公廟)로 고치었다가 헌종 11년(1845년)에 이르러 정북사(靖北祠)로 개칭하였다. 영조께서는 갑신년(1764년)에 문숙공 묘소에 치제(致祭)하였고 광무황제도 융희3년(1909년)에 지방관을 보내어 공의 분묘에 치제(致祭)하였다. 고종35년(1898년)에는 북청에 만뢰사(萬賴祠)가 건립된데 뒤이어 분수영당(여충사)<汾水影堂(麗忠祠)>, 조양사(평북가산)<朝陽祠(平北嘉山)>, 수벽사(함평)<修闢祠(咸平)>, 화남재(예천)<花南齋(醴泉)>, 호남사문숙공영정각(청주)<湖南詞文肅公影幀閣(淸州)>, 서강사(광주)<瑞岡祠(光州)> 등 공(公)을 모시는 사우(祠宇)가 전국 각지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공의 묘소와 사당이 모셔있는 파주의 (汾水齋)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정화공사가 많이 되고 있다. 또한 공의 869주기일인 1980년 5월 8일에는 마침내 공의 우람한 동상이 통일로 곧바로 통하는 서울 의주로의 서소문 공원에 건립되어 2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후손뿐 아니라 모든 국민은 밤낮으로 공의 위용을 우러러 보며 거룩하신 척지진국(拓地鎭國)의 정신을 길이 되새기게 될 것이다. 또한 청사에 빛나는 문숙공의 위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역사소설 『천년한(千年恨)』이 중진작가 유현종(劉賢鍾)씨의 집필로 우리나라 최고의 신문인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가 상,중,하 3권으로 발간되었는데 이 역사소설의 연재된 발단은 전 대종회장 남희(前大宗會長 南儀)씨의 주선과 아울러 대종회 부회장 영갑(永甲)씨의 오랜 시일에 걸친 자료모집 및 유적답사 등 물심양면의 정성어린 집념과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파평윤씨 5세 관(瓘) (문숙공(文肅公) 1040년(고려 정종 6년) 6월1일 태어나셔서 1111년(辛卯 예종 6년) 5월 8일에 72세로 서거 하셨다. 자는 동현(同玄) 호는 묵재(默齎)이시다. 어려서 책을 좋아하여 손에서 떼어 놓지 않았으며, 1073년(문종 27년)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다음해 4월 대과에 급제하시었다. 또 왕명 세자복시에 문과 장원으로 뽑히시어 장사랑(將仕郞) 비서동정(秘書同正)이 되셨다. 서기 1088년(선종 5년 무진년) 합문지후(閤門祗候)로 경기도 광주 충주 충청도 등지에 출추사(出推使)로 파견되고 습유(拾遺), 보궐(補闕)을 거쳐 1095년(헌종 원년) 10월 좌사랑중으로 헌종의 종표 즉, 왕께서 병으로 정사를 볼수 없어 신왕(숙종)께 양위 한다는 뜻의 글을 가지고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숙종 3년 戊寅) 동궁 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가 되어 조규(趙珪)와 함께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왕의 즉위를 알리고(嗣位), 이듬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기증받고 귀국하였다. 1101년(숙종 6년 辛巳)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이어 추밀원부사,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지추밀원사겸 한림학사 승지 등을 거쳐 1104년(숙종 9년 甲申) 추밀원사로써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 정벌 길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한 다음 1107년(예종 2년 丁亥) 여진 정벌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끌고 동북계로 출정하였다. 동북면의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 통태, 진양) 등 9성을 쌓고 이듬해 봄에 개선하였다.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겸 문하시중(門下侍中) 겸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가 되어 영평현(鈴平縣-파평의 별호)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졌다. 그후 여진이 북변을 계속 침범하며 일변 9성의 반환을 요청하며 강화를 교섭해오고 조정에서도 화친과 반환의 의견이 비등해짐으로 결국 9성을 돌려주고 화친파의 모함을 받아 공은 관직과 공신호 마저 삭탈 되었다. 이후 1110년(예종 5년 庚寅) 수태보(守太保) 겸 문하시중(門下侍中) 겸 판병부사(判兵部事) 상주국(上柱國)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으나 우울한 마음을 이기지못하고 다음해 1111년(예종 6년) 5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1130년(인종 8년 庚戌)에 예종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시다. 부인은 인천 이씨로 그의 아버지는 대장군(大將軍) 이성간(成幹-인천이씨 족보에는 成幹은 上將軍 檢校太子小保로 되어있음)이고 조부는 대장군(大將軍) 이눌(訥)이며 증조부는 상주국소성현개국백(上柱國邵城縣開國伯) 이허겸(許謙)이다. 슬하에 7남 2녀를 두셨는데 장자 지후공(祗侯公) 언인(彦仁)은 합문지후(閤門祗候)이시며, 둘째 언순(彦純)은 남원부사, 셋째인 언암(彦巖)은 흥왕사 주지, 넷째는 諱가 전하여지지 않으나 선사(禪師)이시고, 다섯째인 복야공(僕射公) 언식(彦植)은 좌복야(左僕射)이시고, 여섯째인 문강공(文康公) 언이(彦頤)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이시며, 일곱째 언민(彦旼)은 상의봉어(尙衣奉御)로 서화의 명인이셨다. 또한 문숙공 이후부터 본관의 분파가 되기 시작했다. 장자이신 지후공 언인(彦仁)의 후손은 8세 남원백이 되시어 남원으로 분관하셨고 11세에 가서 함안(咸安)와 남원(南原)로 나뉘었으며, 다섯째 아드님이신 복야공 언식(彦植)의 후손은 덕산군파(德山君派)가 생겨 났으며, 여섯째 아드님이신 문강공 언이(彦頤)의 후손에서 13개 파(派)가 생겨 났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이곳 사당을 여충사(麗忠祠)라 한다.(국가 사적 33호) 1764년(영조 40년 甲午)에 깨어진 비석을 찾아 위치를 확인하고 21세손 공조판서(工判) 봉구(鳳九)가 글을 짓고(撰) 22세손 대사헌(大司憲) 동섬(東暹)이 글을 쓰고 22세손 대사간(大司諫) 방(坊)이 글을 새겼다. 그 뒤 1944년(甲申)에 31세손 치형(治衡)이 정성을 다해 재실을 건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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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파평윤씨태위공파(坡平尹氏太尉公派) 원문보기 글쓴이: 청파 윤도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