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까지 바닷가 근처에 살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마음을 썼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제는 ‘바다찾기’의 ‘바다’에서 떠나라고 명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바다찾기’란 아이디의 역사보다(‘바다를 건너다’ 아이디의 역사는 아주 짧다.) 더 짧은 역사를 가진 ‘바다’란 가수는 기독교 라디오 방송에서 ‘피바다타령’하며 히히덕 대면서, 내 앞에서 ‘대한민국의 최고 망할 년’으로 당첨되었다.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며 ‘사랑노래’의 아픈 가사에 눈물 흘려본 이라면, ‘피바다’ 타령 하며 히히덕 대는 가수를 보면 저런 망할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에스엠 소속 가수에는 권보아양 빼고는 왠지 적개감이 있어서 찾은 바도 없었지만, 내 아이디의 대상임을 참칭한 ‘바다’는 가수로서 용서 할 수 없는 감성을 가진 좋은 성대만 가진 가수임이 드러났다. 어쨌거나,......
이제는 남해안이 잠재적인 재앙지역으로 공개적으로 드러난 마당에서, 남해안과 관련된 나의 기억은 이제는 덮어 둘 때가 된 듯 싶다.
2. 운동권들이 운동권이 되는 이유를 모르는, 우파들의 ‘진보적(?) 가치’도 있다는 타령에 나는 닭살이 돋는다.
나는 내 스스로 명확한 입장으로 이 말 저 말 인터넷 공간에 많이 적었다. 그럼으로써 나는 과거의 기억에서 많이 자유로워 졌다.
일부 우파들은 인기 관리를 위해서 좌파 이미지를 빌어서 쓴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운동권이 운동권이 되는 이유를 모르는 것 같다. 부시대통령이 성공지향적 인물을 주변에 많이 들여다 쓰며, 자신이 성공이 예견된 길을 갔으면서 성취지향성인줄 안다는 국내 언론의 힐난 어법을 그대로 빌어서 쓴다면, 30년전-40년전에 운동권이었음을 자랑하는 전향한 우파들의 박물관어법이 현재임을 알아달라는 엽기극이라고 보여진다. 나는 나의 브랜드로서 사고와 입장을 명확하게 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영원히 새로워지는 사고를 하고 싶었으며,한곳에 머물러 시들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송두율의 저작이 보여줬듯이, ‘진보적’이란 가치는 ‘친북좌파적’이란 단어와 동의어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면, ‘간첩’?일 것이다.) ‘진보적’이란 단어에 대해서 아는 척 하려면, 운동권들이 운동권이 되는 이유를 알아야 된다. 남들이 하는 정보 수준이 아니라, 몸에 박힌 상처 차원으로 그것을 몸으로 알게 되게 된다면, 그리고 그 입장을 변론하는 입장으로 장기간을 버텨낼 능력이 없다면, 반드시 ‘사절’해야 인간적인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문화 컨텐츠를 장악한 좌파들이 형식적으로 권력자이니 숙이면서 적응논리를 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모르는 사람’만의 일일 것이다.
3. 우연하게 채널 돌리다가 보았던 ‘미사’의 한 장면 생각.
임수정이 소지섭을 끌어안고 대사한다. “아저씨. 아저씨랑 나랑은 이생에서는 인연이 아닌가봐. 아저씨.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나 아저씨 택할게.”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와 러브스토리를 종합한 경쟁사 드라마를 잘 봐주려고 해도, 우연하게 보았던 지루했던 1회와 ‘미사’의 빨아들이는 한 장면은 깊이 있게 대조된다.
36세를 앞두고 27세 무렵의 사랑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한 단계가 접힐 때 들었던 나의 마음은, 임수정이 소지섭을 향해 했던 대사 자체였다. 27세 무렵에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며 굳세어라 ‘순결남’이었고, 36세를 앞두고 나는 그 때의 기억을 고이 간직하며 여전히 그러하다.
나는 어쩌면 그 때 내 앞에서 얼쩡 거렸던 모든 게 ‘일장춘몽’같은 속임수였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갖는다. 20대에 꿈에도 의심하지 않았던 조선일보가 떠받치던 조동일 교수와 김윤식교수가 구제불능의 친북좌파 지식인임이 명확하게 검증된 입장에서, 내가 운동권 출신의 어떤 여자에 사랑의 감정을 가졌다는 게, 오히려 운동권 쪽에서 나의 지적 착오를 유도해내기 위한 꼬임수였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자꾸 든다. 그러나, 어떠랴. 나는 진심으로 한 여자를 사랑했고, 나는 그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나는 월북 문인에 김일성 따까리로 있다가 숙청당한 한설야의 [황혼]에서의 마지막 장면도 생각했다. -이것을 왜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어떠한 전제조건 속에서 반성의 마음이 있다. 조선일보가 띄워준 김윤식교수와 코드를 같이하는 문학집단의 지식강요를 뚫고서 월북문인을 공부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중하위권 대학에서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조선조 고려조 쭉쭉 올라가서 고대 시대에 공후인에서 헤어져야만 하는 슬픈 연인의 문제가 떠올랐다.
최근에 몇 번 선을 보았다. 신비스럽게도 그때와 흡사한 조건을 가진 여성들만 줄줄이 이어졌다. 진정으로 무서웠다. 나의 공포감은 즉시 전달되었다. 나는 내 안에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바라보았기에, 그때의 사랑이 아름다웠다고 기억되는지 모르겠다. 27세 때는 사회적 약자들에서는 ‘인간성’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있어서 사회적 약자들에서 ‘인간성’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고, 같은 무리 속에서의 편안함이란 동물적 반응으로 교체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무서웠을 수 있다. 선을 보러 졸지에 나왔다가, 매우 ‘선’하게 삶을 산 운동권 경력의 여성에 진심으로 죄송스럽다. 이번에 세례 받으라고 교회에서 닦달하는 데, 중개사 시험 학원 문제로 뒤로 미뤘다. 교회 안에서도 내가 바라던 여성상이 얼마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짝은 ‘학생운동권’이 아니라 ‘독실한 기독교인’일 것이라 믿는다.
미안하다. 그때 당신을 사랑해서. 그리고, 10년간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어서.
4. 많은 수의 학생운동권들은 아버지의 역사를 이어받는다. 이들의 자의식이 ‘대물림’이란 단어를 좋아하게 한다.
정말, 20대 초반에 친북좌파 지식인에게 들은 말은 꼭 맞다. 뭔 아줌마들이 동생 뻘 대는 이들을 꼭꼭 우상화하는가? 나는 인물을 높이 띄우고 자기가 꼬붕되는 식으로 하는 일본식 사고관이 마음에 죽도록 안든다. 욘사마 신드롬 비슷하게 국내에 생긴 누나 부대를 쫓는 서울방송 프로를 보면서, 도대체 저게 뭐하는 ji-ral인가 싶었다. 텅 빈 공간으로 족했고 그 곳에 남편의 사랑과 자식의 시선으로 족했는데, 그 삶의 빈공간 조차 김*원 따위의 연지곤지 찍고 파우더 담쁙 바른 뽀샤시한 피부의 이미지를 物神으로 떠받들어야 되는 것이다. 나보다 어린 미남의 김*원 팬클럽 회장 남편은 거의 得道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본다.
많은 수의 사람들은 친북좌파 네티즌들이 내뱉는 단순한 이미지 창조 단어에 열광한다. 이 부분을 감성언어라고 욕해봤자, 욕하는 사람만 지치고 손해이다. 우파들이 먼저 정신 문화를 청산하자고 주장했으니, 우파가 초래한 응가응보인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친북좌파의 대물림 타령은 전적으로 그들의 자의식이 만든 환상임을 안다.
대학 4년간 제대로 된 지식과 아닌 지식을 변별할 능력을 배울 의사가 없이, 단지 졸업장만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생일수록 친북좌파들에 쉽게 유혹당하고, 대학내에서 우파지식인을 억압을 제일 즐긴다. 우파들은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군중심리 기반의 구세대 우파에서, 이러한 대학생 어리버리들을 기반한 정치논리로 수용층을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저렇게 세뇌당한 두뇌를 달고 다니나 하는 우파신문내에 운동권경력자가 있다면, 이들을 적극 활용하여 가장 거부감 없이 애국의식을 일으키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대학에 나와서 구체적 특화된 지식을 배운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대학을 졸업하여 어중간한 평균적 지식을 배우는 이들의 심리가 사회를 잡을 것으로 본다.
운동권 출신의 사람들은 가장 친밀해졌을 때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사람을 사랑하면 상대의 입장에서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다면 진심으로 한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작에 틈바구니를 스스로 나왔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파들이 여전히 반성 못해서 대중들 속에 왜 고립되는지를, 분명하게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배웠다.
나는 그 때 무슨 이야기했을까?
조선일보 김윤식교수 지배하에, 조선일보에 가끔 글을 썼던 강만길 교수 지배하에 대학가에서, 왜 이북실향민의 역사는 죄악의 역사로 기술되었을까? 도대체, 이게 역사 맞아? 공산주의에 반대한다고 그러했나?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로 당해야 하는 차원이 너무 아팠다.
나도 아버지의 역사를 그 운동권처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역사를 공격적으로 서술해야만 서울대학과 특정대학에서 지식인으로 출세하는 이상한 습관이 분명히 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에서 한국경제가 파국국면으로 치달아도 북한동포만 쳐다봐야 하는 논리 비슷하게, 심리적으로 극도로 상처받고 억압받아서 대학에 공포감을 갖고 있어도 민중들은 약자니까 잘 봐야 한다는 논리 속에서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그때 까지 대학가에서 좌파로 장악된 곳에서 우파 정당을 자발적으로 지지한다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훗날의 역사는 대학에 거점을 둔 학생운동권들의 인권 유린 문제를 반드시 거론해야 한다.
우파는 권력자의 역사만으로 모든 것이 고정되기를 바랬다. 그리고 좌파는 우파의 역사가 대학가에서 쫓겨나기를 바랬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합작품으로 대학가에서 아버지 세대의 일상을 연구하고 싶은 꿈은 밀리게 되었다.
학생운동권 시대에 정신적으로 극도로 상처를 입어서, 조기에 군대에 입대하고도 돌아오고 또다시 좌파 대학가에서 낙담했던 세대들이 ‘국가’를 옹호하게 된다면, 진정한 근대 자유주의 국가를 옹호하지 일본 국가를 의지하지 않는다.
좌파들은 아버지 세대 기억들을 성공적으로 젊은 세대에 이전했다. 우파들은 행여나 일반인의 역사를 쓰게 하면 권력을 놓게 할까 해서, 성공적으로 좌파의 세대단절 기획에 협력한 셈이 되었다. [실미도]에서 유명한 대사를 재활용하여 대를 이어가는 좌익 논리에 편승하여 욕할 시간이 있다면, 우파들은 얼마나 한국 현대사의 우파 아버지 세대들(정치운동 차원말고 단순히 일반인 차원)의 재현을 했는가 반드시 물어야 한다. 꼭 필요한 것을 해야될 시간에 어김없이 우파 권력자의 자의적 필요가 먼저 앞섰다.
2002년보다 2007년이 별 기대할 게 없다는 이해찬씨의 주장이 헛되게 하기 위해서는, 권력적이지 않은 평범한 보수적인 사람들의 역사를 철저히 파묻고 자의적인 몽고논리로 주장한 사람들의 잘못을 객관화해야만 한다.
5. 이인화교수님께 ‘나의 바다’를 선물하고 싶다.
신문을 보니 ‘칼’이 주제이다. 대한민국에서 극소수의 몽고주의가 키운 우파 지식인 중에 한명이 이인화교수이다. 그러나, 이인화교수는 가장 파급력 높은 행위를 하기보다는 몽고주의에 아부하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장자]에서 천자의 칼과 제후의 칼 이야기를 이인화교수님께 해주고 싶다. 칼은 무릇 많은 문인들의 힘 속에서만 천지를 두동강 내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몽고주의는 문약이념으로 문인들을 다 잘라냈다. 몽고주의의 칼은 대학입학을 졸업장을 목적으로 하는 친북좌익 꼴통들에 위협을 주지 못하고 있다. 지식인 기반의 토대가 약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극심한 정신적 외상을 주었으면서도, 나는 무엇 때문에 그들에 적개감을 최대한 가지지 않으며, 근대 국민 국가 대한민국에서 용서할 수 없고 용납해서 안되는 선과 인정할 수 있는 선의 경계를 찾기 위해서 수많은 사회과학서적 속에서 헤매어야 했던가? 운동권 들이 평범한 아버지 세대들의 이야기라고 하는 만큼의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었고, 몽고주의가 방해왔기에 그러했고 몽고주의의 방해는 특별한 각성의 계기가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다는 공포감이 든 이후로, 몽고주의에 대한 비판을 지속해왔다. 박대통령의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가난 속에서 나온 이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차원의 상호주관적 논리를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어쨌던 이러한 점에 불만을 가진 예전에 우호적인 말씀을 해주신 어떤 분께서 ‘바다와 싸우다’는 표현을 하셔서 안타까웠다. ‘해일사건’에서도 보듯이 바다와 어떻게 싸우는가?
바다는 물결에 타고 가며 탈 수 있는 한 타야 정상이다. 그러나, 부득이 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경우에서는 안타까운 것이다. 지지만 않으면 이기는 싸움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4.19 이후 한 살도 먹지 않았다는 표현을, 요즘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고 본다. 나의 바다는 그러한 자체를 지칭했는지 그러한 자체가 없는 지평을 지칭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새해 희망이 있다면, ‘산’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새로운 바다(아마도, 새로운 연애의 형성이겠다)를 찾는 것일 수도 있다. 바다찾기와 바다를 건너다의 ‘바다’에 관한 전설은 여기까지다.
첫댓글현실과.. 거리가 먼.. 속칭 말하는 "방구석에 앉아서.. 책만 쳐다본' 관점 이상의 무엇도 아니라 여겨집니다.. 사상과.. 정치.. 암튼 비슷한 범주의 무엇은 그 시대의 현실에 적응 못하면 사장되고 퇴보 됩니다.. 책이나 글에는 이상과 꿈(?)은 있을 지언정. 그게 현실이든가요? 박차고 세상으로 나오시지요..
첫댓글 현실과.. 거리가 먼.. 속칭 말하는 "방구석에 앉아서.. 책만 쳐다본' 관점 이상의 무엇도 아니라 여겨집니다.. 사상과.. 정치.. 암튼 비슷한 범주의 무엇은 그 시대의 현실에 적응 못하면 사장되고 퇴보 됩니다.. 책이나 글에는 이상과 꿈(?)은 있을 지언정. 그게 현실이든가요? 박차고 세상으로 나오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