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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천문학자- 장영실 ▒▒▒
П.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우리 역사에 있어 과학문화의 황금기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서슴지 않고 세종대왕의 재위기간(1418년 8월∼1450년 2월)이라 답할 것이다. 이 시기에는 실로 방대한 과학사업이 세종의 명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한 사업에 주류를 이루었던 분야는 물론 천문학 및 역학분야이다. 농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여 온 천문학, 역학은 4계절을 정하고, 1년간 할 일을 규정하는 사업으로써 제왕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 되어왔고, 그런 이유로 해서 정부, 즉 왕이 관할하는 과학분야가 되었던 것이다.
П. 노비의 신분에서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로 『안승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에게 의논하기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디 원(元)나라 소항주(蘇杭州)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하여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다. 장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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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의 관직 등용에 관한 <세종장헌대왕 실록> 권 61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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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 천문의기 제작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 세종 14년인 1432년네 대대적인 천문·기상의기 제작사업이 세종의 명에 의해 시작되었다. 장영실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였던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는 한편 여러 가지 천문의기 제작을 감독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된 세종 15년(1433)에 장영실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5품이던 상의원 별좌에서 4품인 호군(護軍: 조선시대 5위의 정 4품 무관)에 오르는 영예를 안기에 이르렀다. 이해에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434년에 완성하였는데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혼의(渾儀)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측각기로 적도좌표를 관측하고,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쓰였던 의기였다. 그러나 혼천의는 관측용과 실내용 혼천시계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장영실이 만들었던 것은 실내용 혼천시계로 보인다. 이 혼천의는 세종 14년(1432)에 시작된 여러 천문의기 제작사업 중에서 가장 먼저 완성을 본 의기(儀器)였으며 간의(簡儀: 기능이 많아지고, 구조가 복잡해 진 혼천의에서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의 세 고리만을 떼어 간략히 만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임) 등 다른 많은 의기들의 모태가 된 기구이다. 이 혼천의 제작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세종은 혼천의의 완성을 위하여 세종 3년(1421)에 장영실과 윤사웅을 명(明)에 파견하였고, 세종 13년(1431)에는 수학자를 명에 파견하여 그 기술을 습득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천문학적 지식이나 기술은 다른 어떤 분야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분야였던 까닭에 이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영실을 비롯한 일행은 기기들의 목적과 성능 그리고 구조만을 보고 온 후 자신들의 기술을 총 동원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혼천의는 중국의 기술적 영향과 우리 고유의 과학적 전통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기기라고 할 수 있다.
П. 자동시보장치 자격루 제작 세종시대에 중국은 송(宋)나라였는데 당시 송에서는 자동시보장치 물시계가 있어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조선에 이러한 기기가 없음을 세종은 항시 안타까워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시간을 아는 장치로서 물시계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백제에서는 6세기에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하고 누각박사(漏刻博士)를 두어 물시계로 시각을 관측했으며, 통일신라의 정치 조직을 살펴보면 '천문박사(天文博士)', '누각박사'라는 기술관을 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 천문박사는 '사천박사(司天博士)'라고도 하여 천상(天上)에 관한 일을 보았으며, 누각박사는 물시계 관측을 주요 임무로 하였다. 고려시대 역시 태사국(太史局)이라는 기관이 있어 역법과 누각의 일을 맡았다. 기록에 의하면 장영실은 모두 3종류의 물시계를 만든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첫 번째 것은 세종 6년인 1424년에 만든 것인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구리로서 경점(更占)의 기(氣)를 부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자동시계가 아닌 단순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양을 측정하여 시간에 따른 부피 증가고 시간을 알 수 있는 장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10년 후인 1434년에 만든 것이 두 번째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이다. 이것은 자동시보 장치가 붙어 스스로 움직이는 물시계이다. 즉, 경루(更漏)와 같이 눈금으로 시간을 알 수 있는 물시계에 시, 경, 점에 따라 종, 징, 북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 몇 시인지 알려주는 것으로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었던 시계이다. 그 구성은 4개의 파수호(播水壺), 2개의 수수호(受水壺), 12개의 살대, 동력전달장치 및 시보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파수호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들어올린다. 이것은 처음 만든 경루와 같은 원리이다. 살대가 떠오름에 따라 이 부력이 쇠구슬과 지렛대에 전달되어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각 알리는 장치를 움직이게 한다. 즉, 파수호보다 높은 곳에는 목인(木人) 3명이 있어서 하나는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종을 치는 일을 맡으며, 다른 하나는 경을 알리기 위하여 북을 치는 일을 맡고, 나머지 하나는 점을 알리기 위하여 징을 치는 일을 맡는다. 목인 보다 낮은 곳에 평륜(平輪)이 있어서 그 둘레에 12지신(十二支神)을 배치해 놓았다. 이들 신은 각각 한 시각씩 열두 시를 담당하였다. 만약 자(子)시가 되면 자시를 맡은 신이 자시의 시패를 들고 솟아올라왔다가 내려간다. 이처럼 자격루는 종·북·징의 소리와 12지신의 동작을 통해서 각각 시각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덕수궁에 보전되어 있는 자동물시계 자격루 |
첫댓글 장영실 편이구나 모두 글씨를 조금씩 더 크게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