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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흐 앗 딘 유수프 Saladin(1137~1193)】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한 십자군 전쟁의 영웅」
살라흐 앗 딘은 1138년,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에서[1] 쿠르드족 군인 집안 출신인 나짐 앗 딘 아이유브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짐 앗 딘 아이유브는 그 당시에 셀주크 투르크의 대신인 비흐루즈와 연줄이 닿아 그의 천거를 받아 티그리트 성의 영주로 재임 중이었다.
아이유브는 1132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패하고 도주하던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 이마드 앗 딘 장기에게 나룻배를 제공하여 그가 무사히 티그리스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를 계기로 아이유브와 그 가문은 장기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나, 아이유브의 후원자였던 비흐루즈는 평소에 장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의 탈출을 도와준 아이유브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 와중에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가 한 여인의 복수를 위해 건달을 살해하는 사고를 저질렀고, 비흐루즈는 이를 빌미 삼아 아이유브의 일족을 티그리트에서 내쫓았다. 얄궂게도 살라흐 앗 딘은 아버지와 가족들이 침통한 심정으로 이사를 준비하던 날 밤에 출생했다.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은 아이유브와 시르쿠 형제는 모술로 이사하여 장기에게 의탁했다. 장기는 1139년에 다마스쿠스의 부리 왕조를 공격하여 바알벡을 함락시킨 후 아이유브를 그 곳의 영주로 임명함으로써 과거의 은혜를 갚았다. 살라흐 앗 딘 또한 아버지를 따라 이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린 시절의 살라흐 앗 딘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1146년, 장기가 암살당한 후 그 세력이 분열되자 부리 왕조의 아타베그 무인 앗 딘 우누르가 과거에 자신의 땅이었던 바알벡을 수복하려 했다. 당시에 아이유브는 장기의 아들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다마스쿠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살라흐 앗 딘은 아버지인 아이유브와 함께 포로가 되어 다마스쿠스로 끌려갔지만, 숙부인 시르쿠는 여전히 장기 왕조에 남아 있었기에 그 가문은 얼마간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이유브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했던 덕분에 다마스쿠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적잖은 봉토를 얻을 수 있었고, 이후 다마스쿠스 내부에서도 신임을 얻어 몇 년 만에 고위직을 지내게 되었다는 점이다. 1154년 4월, 아이유브의 옛 주인인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해왔다. 이때에 다마스쿠스는 강력한 지도자였던 우누르가 죽은 후 리더십을 상실한 상태였는데, 아이유브는 그 틈을 노려서 누르 앗 딘의 휘하에 있던 동생 시르쿠에게 연락을 넣어 그에게 항복할 뜻을 내비쳤다. 덕분에 누르 앗 딘은 정복자로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 장기도 얻지 못했던 다마스쿠스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으며, 그 보답으로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까지 살라흐 앗 딘은 아버지와 함께 다마스쿠스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탓인지 기록에서는 당시 그의 행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살라흐 앗 딘이 자신의 청년기를 회고하면서 전쟁을 피해 은둔을 즐기고 현자들과의 토론에 심취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젊은 시절의 그는 학문에 전념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악한 수완가였던 아버지 아이유브와 과격한 용사였던 숙부 시르쿠와는 상당히 다른 점으로,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훗날에 중동 최대의 무슬림 군주가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3. 이집트 원정
살라흐 앗 딘이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 계기는 세 차례에 걸친 이집트 원정 시기였다. 1163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재상)였던 샤와르가 경쟁자인 디르감에게 축출당한 후 누르 앗 딘에게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자신의 와지르 지위를 회복시켜 준다면 막대한 세액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마침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 또한 이집트를 노리고 있었고, 용맹하고 과감한 성품의 심복이었던 시르쿠 또한 일전을 주장하자 누르 앗 딘은 이집트 원정을 결심했다.
1164년 4월, 누르 앗 딘과 시르쿠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시르쿠는 자신의 조카인 살라흐 앗 딘을 부관으로 삼아 자신과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는데, 이때부터 살라흐 앗 딘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이 팔레스타인 북부로 진군하여 아모리 1세의 시선을 돌리는 사이에 시르쿠와 살라흐 앗 딘은 그해 5월에 이집트의 카이로로 진격하여 디르감을 제거하고 샤와르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샤와르는 약속을 어기고 그해 7월에 아모리 1세와 연합하여 빌베이스에서 시르쿠를 3개월 동안이나 포위했다. 그러자 누르 앗 딘이 몸소 십자군의 후방인 하림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모리 1세가 그해 10월에 시르쿠와 휴전을 맺고 철군하면서 시르쿠와 살라흐 앗 딘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167년 초, 시르쿠와 살라흐 앗 딘은 샤와르와 아모리 1세의 밀착을 막기 위해 두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그해 3월 18일, 알 바베인 전투에서 시르쿠와 아모리 1세의 군대가 맞붙었다. 당시 살라흐 앗 딘은 숙부인 시르쿠의 명령에 의해 직접 중앙의 군사를 거느리고 궁지에 빠진 척 달아나며 십자군을 유인하는 미끼 역할을 수행했다. 다행히도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시르쿠는 우익의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아모리 1세와 샤와르의 연합군을 포위하여 이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르쿠의 피해도 적지 않았는지 곧장 카이로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시르쿠는 살라흐 앗 딘에게 군대의 절반을 나눠주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한 후 자신은 직접 남쪽으로 세금을 징수하러 떠났다. 그 사이에 살라흐 앗 딘은 아모리와 샤와르의 연합군에게 75일 간이나 포위 공격을 당했으나 이를 견뎌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살라흐 앗 딘이 단독 지휘관으로서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그 와중에 시르쿠가 조카를 구원하기 위해 카이로를 향해 진격하자 아모리 1세는 그해 8월 4일에 휴전을 맺었다. 그에 따라 아모리 1세는 이집트의 땅을 포기했고, 살라흐 앗 딘 또한 알렉산드리아를 샤와르에게 돌려주었으며 포로교환도 이루어졌다. 협상 당시에 살라흐 앗 딘은 얼마 전만 해도 박터지게 싸웠던 아모리 1세의 진영에 인질로 들어가 며칠 간 환대를 받는 진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1168년 12월, 시르쿠와 살라흐 앗 딘은 아모리 1세가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세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살라흐 앗 딘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당했을 당시에 겪은 고초를 잊지 못하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함께 이집트로 가자는 시르쿠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시르쿠는 누르 앗 딘에게 조카도 함께 종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누르 앗 딘의 명령에 따라 살라흐 앗 딘은 숙부를 따라 다시 이집트 원정길에 올라야 했다. 당시 카이로를 포위하고 샤와르로부터 금을 뜯어내기 위해 기다리던 아모리 1세는 시르쿠에게 밀려나 팔레스타인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 싸움의 승리로 이집트를 장악하게 된 시르쿠는 파티마 칼르프의 허락을 받아 그 동안 자신을 수차례 농락했던 샤와르를 살해하고 그 자신이 이집트의 와지르가 되었다.
4. 이집트의 지배자
이렇게 시르쿠는 이집트의 정복자가 되어 인생의 절정기를 누리게 되는가 싶었으나 그해 3월에 폭식을 하던 중 식중독으로 급사하는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바람에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집트의 대신들에 의해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새 와지르로 추대되었다. 이집트 대신들이 살라흐 앗 딘을 지지한 것은 그가 순전히 삼촌의 빽으로 성공한 우유부단한 젊은이라고 판단해서였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살라흐 앗 딘은 대단히 민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은 겉으로는 누르 앗 딘에게 복종하면서도 군대를 보내 수단과 요르단,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한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이를 경계한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쳐들어가려고 했지만 60세가 넘은 고령이었던 탓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사망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오히려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의 아들의 보호자로 자청하고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조금씩 지지기반을 다지다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날름 집어삼켜 버렸다. 그러는 한편으로 서쪽의 북아프리카에도 군대를 보내 그의 시대에 아이유브 왕조는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서쪽으로는 튀니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딘이 이집트를 차지했을 때부터 살라딘을 경계해 동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이집트로 해군을 통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별 재미를 못 보다가 폭풍우로 다 날려먹었다. 누르 앗 딘의 죽음 이후 시리아로 살라딘이 세력을 넓히자 십자군 계열 국가에서 기사를 파견해 견제하려다 살라딘이 생각보다 많은 군대를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도망쳤다.
5. 시리아 통일 전쟁
한편 자지라 원정 중 살라딘은 십자군이 다마스쿠스 일대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냅둬라. 그들이 마을들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는 도시들을 취할 것이고, 우리가 돌아갈 때쯤이면 그들과 대적할 더 큰 힘을 얻은 채일 것이다.' 그리고 3일간 알레포를 포위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살라딘은 더 북상하여 장기 왕조의 심장부인 모술을 포위하였다. (1182년 11월 10일) 살라딘은 킨다 문을, 동생은 타즈 알 물크 (왕들의 왕관) 이마디야 문을 맡았다. 봉신인 히신 카이파의 누르 앗 딘은 '다리들의 문'을 맡았다. 하지만 한달간의 포위에도 별 성과가 나지 않자 살라딘은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3일간 행군, 모술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신자르를 포위하였다. 도시는 15일간 저항했으나 12월 30일 함락되었고 살라딘이 말릴 틈도 없이 튀르크 병사들은 저항의 대가로 약탈을 자행하였다. 겨우 신자르 총독과 그 장교들을 구출한 살라딘은 그들을 명예롭게 대해주며 모술로 보냈다.
1183년 5월 6일, 살라딘은 티그리스 강변의 견고한 성벽도시인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하였다. 시내에는 많은 보화와 무기, 그리고 백만권의 책이 있다고 알려진 도서관이 있었다. 살라딘의 재상 카디 알 파질은 자신이 택한 책들을 낙타 70여 마리에 실었다고 한다. 한편 아직 모술, 알레포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한 영토 경영을 피한 살라딘은 디야르바크르를 자신의 충실한 봉신인 히신 카이파의 누르 앗 딘에게 주었다. 그리고 알레포의 장기 2세가 십자군과 동맹하고 아이유브령 시리아를 습격한다는 소식에 살라딘은 모술 대신 이번엔 알레포로 향하였다.
6.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회복
이후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었지만,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의 무력 도발로 인해 휴전은 깨졌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왕 기 드 뤼지냥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 여파로 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3차 십자군에 불행히도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의 승리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3차 십자군은 해안 여러 도시들을 다시 점령했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예루살렘 진격을 시도했을 때도 보급로 확보 문제와 내부 불화로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